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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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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함께 잘 다니는 교회 (3) “막장의 사람들”

                                                                                              March 3, 2011 남상곤

 

 

들어가며

교회안의 88만원 세대의 두번째 꼭지의 부교역자에 대한 글은 좀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직 첫꼭지의 평신도 사역자에대한 피드백에 대한 제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글을 쉽게 잘 쓰지 못하는 저로써는 아직 부교역자에 대한 사례가 아직 충분히 조사되지 않았기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준비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졸업한 모교에서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터져서 2월, 한달동안 여러가지를 고민하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래서 오랜시간동안 고민하고 기도해왔던 “막장의 사람들”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저는 남의 사람들의 뒷담화를 잘 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를 불편해하고, 또 그런 이야기가 나와도 쉬이 잘 믿는 편도 아닙니다.  그런 제가 몇몇의 교회안의 막장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공개적으로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에 대한 저의 솔직한 고민이자 기도입니다.  이것을 이번에 나누고 싶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 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보통 ‘원수’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기에 어쩌면 이 말씀은 그리 큰 깊이를 가지고 다가오지 않을 수 있지만, 세상의 비정함을 겪어 본 사람들은 (원수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이 말씀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말씀인지 알고있습니다.  상대방으로 인해서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리거나, 인격적인 살인을 당하거나, 그들에게 가족이 협박을 당하게 되는 일을 당해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관되게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하시고, 주기도문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면, 그 어떤 죄를 우리에게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지만, 그것이 과연그렇게 쉽게 할수 있는 일일까요?  정말 막장인 사람들을 만나보고 당해보면, 그말씀은 예수님이시기에 하실 수 있는 말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만 들게 됩니다.  

 

 

 

그들을 만나다

저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한국에서다녔던 교회들은 하나같이 다 좋은 곳이었고, 좋은 분들을 만났고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왔었던 것 같습니다.  제 안해와 친구들은 저보고 좋은 교회만 다녀와서 너무 교회와 세상을 모른다고 이야기 하곤 했었습니다.  그것은 참 내 자신이 신앙의 여정을 걸어오는 데 큰 자산이었고 좋은 기억이지만, 세상의 실상을 아는 것에 있어서 제한적인 이해만 가지게 되었었습니다.  즉 ‘모든 교회와 모든 교회 사람들은 선하고 착하다’ 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생각지도 아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막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막장의 사람인 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피하나,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도 그들이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 이말에 이해하는 분들의 마음을 제가 압니다 ^^;;)

 

 

 

돈과 섹스

지금은 거의 소설가라기 보다는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이문열의 초기작 중에 하나이자 표절문제로 얼룩진 ‘사람의 아들’의 초반부에  보면, 살인사건을 두고 수사를 시작하는 남경사가 보통 범죄는 돈과 여자 때문에 일어난다고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잘 안나지만, 만약 어떤 범죄가 이 두 가지의 중의 하나로 벌어지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거의 수사가 미제로 남게된다고 하면서  이 살인사건 수사의 어려움을 이야기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소설에서의 살인사건은 돈과 여자와 관련된 문제라기 보다는 신과 신을 찾는 사람들인 민용섭과 조동팔, 아하스 페르츠에 대한 이야기였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제가 만났던 교회에서의 막장의 사람들도 이 남경사의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만났던 교회에서의 막장의 사람들은 나이가 어린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도 있고, 평신도도 있고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관통하는 한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돈과 여자’ 였습니다.   막장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두가지의 문제에 최소 한가지는 반드시 걸렸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에서 양심을 팔거나, 성적인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고 어둠속의 일들을 저지리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아니면 두 가지 모두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이 두가지의 문제에 걸리지 않은 것 같이 보여도, 실상 속을 들여다 보면 이 두가지의 문제가 늘 이 막장의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 두가지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씁쓸한 것은 그 막장의 사람들을 교회에서 나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 두가지의 문제가 아니라면 막장까지는 아니었을텐데… 신앙과 영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으면 막장까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세가지의 질문과 고민

저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세가지의 질문입니다.  첫번째로, 과연 내가 그들을 막장이라고 부를 만한 떳떳한 사람인가?  두번째로,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할수 있는가?  세번째로 그렇게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저의 고민이 이 꼭지의 핵심입니다. 

우선 첫번째의 물음에 대해서는 제 스스로 그렇게 떳떳하고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은 충분히 막장이라고 부를만 하다 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에 대해 저에게 ‘교만하다’ 혹은 ‘아직 인격적인 성숙이 덜 되었다’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제가 그냥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뒷부분에 조금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그 분들은 막장이라고 충분히 불릴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제가 지는 것이겠지요.  제가 아직 부족한 탓일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과 내가 하나님앞에서는 ‘오십보 백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들과 내가 오십보의 차이가 있더라도 절대적인 선과 정의의 하나님앞에서면 그 차이는 거의 제로에 가깝게 됩니다.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하라고 하시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저를 용서해 주신 것 처럼, 그들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이것이 제가 아직 고민하고 있는 접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들과 저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그러나 부족하고 모자란 저로서는 아직 그 오십보 때문에 무척이나 괴롭습니다.

두번째에 질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또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돌아볼때, 나도 그들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하고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때는 일시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때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의식적으로 품으려는 결단을 매일 매일 해야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상대를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기본적인 예의와 상식이 없는 것을 넘어서, 파렴치하고 무례한 그들을 보면서 매일매일 저는 시험에 듭니다.  제가 아직 부족한 탓이겠지요?  하지만 역시 풀리지 않은 문제입니다.  저는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없습니다.  솔직한 제 고백입니다.

세번째 질문에 대한 고민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고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저의 잠정적인 결론은 그냥 피하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무섭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합니다.  거의 모든 말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서 삼자대면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삼자가 대면해도 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모든 것이 거짓이니 기본적인 공통된 가정 자체가 없어집니다.  대화 자제가 진행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 분들은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하를 보게되는’ 분들입니다.  예를 들어 그분과 제가 말싸움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가 내 생각은 이렇고 논거는 이렇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보통 상대방은 거기에 대한 반론과 그 근거를 대겠지요.  그러나 그 분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저의 집에 와서 방화를 하고 가는 식입니다.  이런 분들은 정말 예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상궃어서 별로 어디가서 겁을 느껴보지 못한 저로서는, 이분들 앞에서는 정말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을 합니다.  상대할 만한 가치가 없기에 피하기도 하지만, 무서워서 피하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 다름의 문제이겠지만

톰 라이트라는 신학자가 그의 책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에서 "선과 악의 경계선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 있지 않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관통한다" 라는 솔제니친의 말을 인용했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막장의 사람들은 악하고 저는 선한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러한 사정없이 무책임하게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해라 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인간적인 연약함을 느끼며 하루하루 십자가앞에 나가야 함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여전히 무섭습니다.  나는 그들이 무섭습니다.  정말 인간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가슴이 콩딱콩딱 뜁니다.  그들에게 한마디를 하면 그들은 저의 이야기를 백마디 왜곡되어 퍼트립니다.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가 없는 상황에서 파렴치함과 무례함 그리고 거짓말과 왜곡으로 당당하게 서있는 그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정치인이 된다면, 무엇보다 유치원을 의무교육으로 시킬 것입니다.   -

 

 

 


-별책 부록편-

이부분을 쓰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우선 그 분에게 해가 가지않고 또 그분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기에 구체적으로 사례를 나누것이 글의 이해를 돕기에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이 부족했다면 이 부분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언 주십시오.

두세분의 막장의 최고봉이 생각나지만 그분 중에서도 최고를 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상식과 예의가 없는 파렴치한 파렴치한…너무도 파렴치한…

이 막장의 사람들은 보통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치원에서 다 배웠어야 할 ‘상식’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식이 없으니 자신이 왜 욕을 먹는지 모릅니다.   그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이 괜찮으면 그것으로 다 괜찮은 것입니다.  이 분들 중에 최고봉에 이른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분의 이야기를 조금 나누어 보겠습니다.  편의상 이분을 A라고 하겠습니다.

처음 만났을때, A 부부는 눈치가 좀 심하게 없다라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의 모임을 할때, 자신에게 할당 된 일들을 너무나 무책임 하게 하지않고 경우에 맞지않은 예의가 없는 말을 많이 하기에 뭐 그런가 보다 싶었습니다. 

머리가 이가 난 자신의 아이를 구역모임에 버젓이 데리고 나와서 사람들을 경악시켰고, 아이들은 씻기지 않아 냄새가 났지만 전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은 모임에서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괴롭히는데도, 자신의 아이들도 그렇게 하면서 자랐다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기에 다른 아이에게 피해를 줄때 엄하게 혼을 내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츰 이 분이 단순히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습니다.  우선 어디에선가 출처가 모호한 신앙에 대한 간증과 글들을 마치 자신의 경험담인 것 처럼 자랑스럽게 나누는 것을 보고 고개가 갸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S교회의 J목사였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A는 교회에서 직분을 통해 돈을 버는 것에 혈안이 되었지만 그 직분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워했습니다.  게다가 직분을 이용해서 자신이 교회의 예산을 전용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나갔고, 그래서 건성으로 대충대충 그 직분을 하면서도 이미 거기서 부터 들어오는 A의 수입은 이제 그 직분을 멈추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수입을 통해서 쇼핑을 한 것을 자랑거리 처럼 내놓는 것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A에게 그것을 말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직분을 이용해서 예산의 전용하여 이익을 챙겼지만 그 일에 대한 능력이 없고 책임감이 없으니 차츰 많은 교회 사람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고,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목사와 장로에게 거짓증거 들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목사에 눈에 드는 것이 신앙생활에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A는 다행히 자신과 비슷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목사에게 충성을 다짐합니다.  목사는 A를 잘 파악하고 적절히 조종을 하기도 하면서 A를 충분히 활용합니다.  그러면서 암묵적인 보상을 약속합니다.  1-2년 뒤에는 안수집사를 파격적으로 제시하겠다고.  그래서 A는 더욱 목을 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존경받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인 A는 안수집사가 되면 그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날이었습니다.  나보다 연배가 약간 위인 A는 자신이 나이를 먹었으니 자신이 더 많이 안다면서 나에게 충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동생같아서 그렇다를 수십번 반복하면서 자기가 관심과 애정이 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 닥치고 가만이 있어라 의 이야기 였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엄하고 감정표현이 없는 부모님 밑에서 심한 상처를 받고 자라난 A는 자신의 동생에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해서 동생과의 사이가 좋지 못할 뿐더러, 그 상처를 그대로 자신의 아이에게 쏟아붇고 있어서 옆에서 지켜보는 몇몇 교회분들이 심한 걱정을 많은 상태였었습니다. 

A는 어느날 교회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저의 뒷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목사의사주로 시작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스스로 충성된 모습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미니홈피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저를 조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가 가입한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제 글들이나 행적들을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제 글들과 제 글들에 대한 다른 분들의 댓글등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그것을 교회에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저를 이단으로 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글들을 자신이 교묘히 편집을 해 놓고 자신이 이메일을 보냈으면서 자신도 이러한 이메일을 받았으니 나누겠다고 하는 이중인격의 최고봉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 메일을 우연히 받은 한 분은 이런 사람이 교회에 있다는 것에 정말 충격을 받아서 자신이 직접 교회에 공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겠다고 했지만 제가 말렸던 기억이 납니다.

A는 그렇게 제 뒷조사를 하다가 제 개인(가족)클럽을 존재여부를 알게됩니다. 참 신촐귀몰한 분입니다.  그러더니 어느날 저에게 와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그 클럽에 자신의 가입시켜 달라고 요구합니다.  제 안해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만든 그 클럽은 아주 극소수의 저희 부부를 잘 아는 분들이 회원으로 되어있고, 거기에 저희의 연애시절의 추억부터 지금까지의 사진과 글을 보관해 온 개인클럽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밀클럽으로 되어있어 검색을 해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개인클럽에 자신이 생각하는 무슨 월척(?)이 있을지도 모르는 A는 그의 부인을 대동하여 자신이 같은 교회에서의 지체이니 당연히 자신도 가입을 시켜달라고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간은 최근 4-5년은 새로 멤버를 받은 적도 없고, 저희 가정의 비밀적인 내용을 나누어도 기도를 해주실 분만 멤버로 되어있는 곳인데… 그곳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가입시켜 달라고 우기면서, 무엇인가 켕기는(?) 것이 있으니 오픈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너무 어이가 없는 저는 개인의 사적인 공간의 오픈여부를 강요받는 것에 대해서 어디서 이야기를 해야할지 말 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자신들도 교회의 가족이 아니냐고 가입을 시켜서 투명하게 공개하라라고 너무다도 담대하게(?) 외치는 A부부의 모습에서 저는 그 부부가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것을 확신한채 어디서부터 상식강의를 해야할지 정말이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A는 저를 불러내어 자신이 저에 대한 안좋은 이메일을 받았는데 (자신이 보내놓고 자신이 받았다고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정말 아연실색했습니다), 교회를 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어떻게 교회를 다니겠냐고? 은근히 협박을 하시더군요.

그분의 메일에서 몇몇 내용을 직접 인용을 해보겠습니다.

“여기 오기전 메일을 안보신 것 같습니다. 카페를 처음 입구에서 막았네요. 아마도 10분 이상 글쎄 이글들을 읽고 이메일로 더 많은 분들이 돌리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겁니다.  원래 글 내용에서 예기하신 대로 좋은 교회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모른체 하고 다른 사람들과 보고 생활하기가? 제 동생과 나이가 같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서 더 기도해야 겠네요.”

자신이 저에대한 악의적 편집을 한 글들을 첨부해서 사람들에게 보내놓고 저에게도 한부 슬쩍 보내면서 자신이 이런 메일을 받았으니 조심하라(?)라고 친절히 조언을 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제 가족클럽을 오픈하던지 아니면 구역모임에서 나가라는 양자택일을 하라고 은은한 협박을 해주십니다.

“그 제가 말씀 그대로 비밀클럽을 오픈하던가 (자신이 있으시면 오픈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 중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입니다. 교회에 문제제기를 해서 교회를 완전히 바꾸는게 목적인지 아니면 교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 끌어 내려는 목적인지 명확하지가 않군요. 아마도 비밀클럽으로 차단하면 더 비밀스러워져서 더 의심만 생길겁니다. 구역은 허울뿐인 가족이구요 카페공동체는 진심을 나누는 곳으로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런 구역원은 원치 않습니다. 같이 나누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가족같은 구역이 되길 원합니다. 저두 남상곤 형제님 가정을 잘 모릅니다. 너무나 많은 비밀이 있어서 왠지 어떨때는 남같이 느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다음에는 저희 구역으나 저희 교회에 관련된 분의 필터링이 있은 후  글을 올리시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  선택은 본인이 한다고 하셨으니까 구역을 원하시던 카페를 원하시던 신중히 결정하시고 메일로 알려 주세요.”

A와 관련된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고 황당하고 파렴치한 일들이 계속 생각이 납니다.  제 주변의 많은 분들도 저와 동일한 생각으로 A를 불쌍하게 보기도 하지만 가까이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A는 늘 외롭지만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기에 받는 고난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을 냅니다.  오늘도 그는 사람들에게 배설물을 뿌리고 상처를 줍니다.  무섭지만 불쌍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정말 제가 감당할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셔서 제 근처에 두게 하셨는지 정말 진지하게 궁금합니다.  A부부는 오늘도 제 주변을 돌면서 제 뒷조사를 하고, 제가 이단이라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다니느데 열심이십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몇몇 분들이 저희에게 와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자신들도 A부부를 멀리하게 된다고...  A부부만 여전히 모르십니다.

 

A께서 저지른 일들이 이외에도 많지만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 같아 여기서 우선 줄입니다. 

 

posted by paulusnam

 

다시함께 다니는 교회 (번외편)

침묵의 동조이론

2011-02-01

 

 

침묵의 나선이론

학부전공이 언론정보이면서도 무엇을 배웠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찬양을 원없이 했다라고 이야기할 밖에 없는 나에게, 남은 안되는 전공지식으로 기억나는 중에 하나가침묵의 나선이론이다.  침묵의 나선이론은 독일의 노엘레-노이만이 1966년에 발표한 이론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다수이면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만, 소수라고 판단되면 입을 다문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현상이 회오리나선 모양으로 진행되면서 목소리만 소수의견이 대세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하였다.  노엘레-노이만은 매스미디어가 어떻게 권력을 갖게 되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이론을 내놓았지만, 나는 보다도 사람들이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다수라고생각할때표현하고, 소수일때라고생각할때침묵한다는 설명이 무척 인상 깊었던 같다.  이렇듯, 사회에서 소수의 생각이나 사상에 마음속으로는 동조하거나 동의해도, 생각이 소수인 처럼 보이기 때문에, 동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동의하고 인정하는 침묵의 나선이론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너무나 무서울정도로 정확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최근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침묵의 동조이론

나는 여기서 보다 나의 모교에서의 벌어지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나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침묵의 동조이론이다.  이론에 배경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생각과 의견이 다른 것에 대하여 그것을분쟁혹은하나되지 못함으로 규정하고 관용하지 못한다.  생각과 사상이 다른 대상이 힘이 없거나 소수이면, 쉽게 그들을 잔인하게 밟아버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거룩한 전쟁을 치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반하는 자들은 그저 하나님앞에서 제거해야할 이방인들일 뿐이고, 그러한 어려움과 시련을 통해서 연단되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구현된다고 그들은 믿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기에 포기와 타협은 없다.  따르던지 죽던지  그들은 자신들 만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들에게 힘이 있기에 절대 다수는 앞에서 침묵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다수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사실관계를 따져보자고’, ‘지금은 기도를 해야할 때다,’ ‘양쪽 잘못했고 문제가 있다고’, ‘이렇게 시끄럽고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그리고 공동체에 덕이 되지 못한다고,’ ‘이러한 일이 어떠한 여파를 가지고 올지 아느냐고?’  그리고는 침묵한다.  그것은 암묵의 동의다.  이것이 침묵의 동조이론이다.

 

 

 

필드스터디

아직 나의 최신 이론인침묵의 동조이론은 아직까지 연구가 거의 되지 않은 분야이다.  나도 분야를 연구하면서 선행연구가 없어 애를 많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결국 이론을 경험하기 위해, 필드스터디를 나갔다가 비이성적인 폭력과 협박, 심지어 가족에게까지 들어오는 위협에 고개를 돌려야만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론의 선행연구자들의 연구는 많이 있지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아주 오래된 고문서에서는좁은길이라고도 하고, 선행연구의 첫번째 필드스터디를 하신 선배님은 십자가인지 십자대 인지 라는 곳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는 전설도 얼핏 들었던 같다.

 

 

 

탓할 없다

나는 다수의 침묵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몰랐다.  무서웠다.  있는자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고, 자칫하면 밥그릇이, 가족이 위험해 질지도 모르기에 그러했다.  어떤 보다도 개인의 평안과 가정의 행복은 내가 지켜야만 하는 최고의 가치였다.  그래서침묵의 동조이론으로 보이게 유지되는 평화만 주장하는 힘있는 자들에게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을 비난 없다.  그것도 자신들의 선택이다.  게다가 개인의 행복과 가정의 안전은 여전히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할 없고 양보할수 없는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침묵을 비난할수 없고, 침묵의 동조자들을 탓할 없다심지어 초대 필드스터디를 나섰던 선배님도 사람들의 침묵을 탓하지 않으셨다.

 

 

 

후회

다만침묵의 동조이론을 실제로 경험한 필드스터디로 다녀온 이후, 옛날 이론에 매여 침묵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후회가 많이 되었다.  그때 누가 나를 탓하고, 비난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필드트립을 나갈것이다.  내가 필드트립을 나간다고 해서, 무시무시한 이론은 절대로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침묵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 예전처럼 나는 이상 침묵할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개인의 행복과 가정의 안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지만, 그것은 침묵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필드스터디를 다녀왔다고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기에 실수도 있고, 실패도 있고, 사고도 친다.  그런데 그것이 두려워서 침묵을 하기보다는 다녀와서 실수를 반성하는 편이 낫다. 

 

 

 

여전히 이론은 강력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나는 그러면 좁은 필드스터디의 길을 고민없이 두려움없이 같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소시민일 뿐이다.  필드스터디를 다녀왔지만 지금도 자주 침묵하곤 한다.  지금도 두렵고 무섭다.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뛰어서 가슴이 터질것만 같다.  다음번에는 침묵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고문서에 따르면, 초기 선행 연구자들이 당시 필드스터디에서 당한 협박에도 불구하고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없다라고 나와있다.  나는 선행연구자들의 고백과 첫번째 필드스터디를 선배를 믿는다. 

 

 

 

지금 침묵을 깨고, 필드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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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usnam
2010. 12. 17. 00:11 다시함께 잘다니는 교회

다시 함께 다니는 교회 (1)  탓입니다                                                          Dec 15. 2010

 

들어가며

함께  다니는 교회시리즈 글을 마지막으로 것이 확인해 보니 올해 5월이었습니다.  어느덧 7개월이 흘렀네요.  그동안  하고싶은 말이 참으로 많았지만, 안으로 나름 삭히고, 고민하고 기도하는 좋은 시간을 보냈던 같습니다.  예전에는 멋모르고 글을 썼지만 지금은 약간의 사명감(?) 가지고 다시 펜을 잡았습니다.  저와 저희 가정에게 가해졌던 비정상적, 비이성적 폭력에 대한  사항도 약간은 보고해야 필요도 느끼구요 (미주 한인교회의 실상을 조금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씩 하지만 깊이 고민하고 기도하고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이제 쫓겨날 교회도 없으니 마음은 많이 편하네요.   교회는 저를 파문하고 자유게시판을 닫았다고 합니다.  자유는 불온한 것이니까요.  ^^

 

 

내탓이오

아주 오래 전에 지금은 소천하신 김수경 추기경께서 천주교안에서 내탓이오운동을 펼쳐오셨음을 기억합니다.  어릴 적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내탓이오운동은 비단 천주교계를 넘어 한국 사회에 전체에 영향을 미쳤던 같습니다.  마치 유행어 처럼, 무슨 일이 일어나고 발생하면, ‘내탓이다라고 고백하시는 많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무슨 비판이나 쓴소리를 하려는 분들이 뻘쭘해지시고는 입을 다물곤 했던 같습니다.   그래서 보통 내탓이오 논쟁이나 사고의 원인을 저적하고 파헤져 , 그것을 잠재우는 만능의 주문이었던 같습니다.  물론 내탓이오운동의 순기능 혹은 긍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보통 내탓입니다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탓이다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간혹 있었던 같습니다. 

 

 

나는야, 성골 기독교인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교단책에 나올 만한  촉망(?)받는 신앙인으로 교회안 에서 자라온 저는 학부를 졸업하기 전에 불온한(?) 분의 선생님과 여러 책들을 통해, 사회와 상황속에 신앙에 대해 깊이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름  고민(?)끝에 당시에   스스로, 사회과학의 신학(?)이라고 생각하는 사회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서울의 사립대에 대학원과정을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사회과학을 공부해 보신 분들이시라면  아시겠지만, 대학원에서 사회학이라는 수업은 세미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날 읽어야 책이나 페이퍼를 읽어 온후, 그것에 대한 (?) 푸는 것으로 3시간을 보냅니다.  성격이 급하신 선생님은 치열한(?) 침묵을 참지 못하시고 그날 수업분량을 요약정리 해주시기도 하시고, 가끔 현실정치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셨지만, 보통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말하기 까지 참고 기다리십니다.  학생들이 알아서 어떻게 썰을 푸는지 지켜보시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보니, 누가 의견을 내면, 의견에 대한 찬성과 반대, 비판과 비판에 대한 살벌한(?) 토론이 시작되고  어쩔때는 3시간을 넘어 거의 쌈판이 벌어지는 같기도 했습니다.   온건하고 모범적으로 교회안에서 자라 저는 은혜로 덮는다,’ 혹은 내탓이다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기에 한동안 세미나수업에 적응을 했었습니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인간을 비판하고 지적하나요?  내눈에 들보를 먼저 봐야지요.

 

 

변했어!

즈음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저와 절친했던 지체들이 저에게 , 변했어,”  오빠, 이리 사람이 까칠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 라고 하곤 했습니다.  난감했습니다.  학교수업에서는 가장 말도 못하고 비판도 못하는 사람이, 교회에서는 가장 비판적이고 쓴소리 하는 사람이 되버린 것입니다.   교회와 학교, 어디에도 적응을 하지 못하던 저는 결국 훗날에 전공을 바꾸게 됩니다 (농담입니다.  이것 때문에 전공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

 

 

이단에서 삼단을 훌쩍 넘어 사단도 되어 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흘러, 저에게 교회에서 반동분자(?), 이단(?), 교회를 가르는 사단(?)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함께 다니는 교회http://paulusnam.tistory.com 보시면 나와있습니다).   그분들은 앞에서는 한번도 반대의견을 개진하지 못하시면서, 제가 없는 자리에서 저를 감당할 없는 사람으로 만들곤 하셨지요.  그러면서 몇몇 분들이 없는 곳에서 내탓이오.’ 라는 말씀을 하셨더랬습니다.  그분들은 평상시에도 무슨 문제가 교회안에 불거질 때마다 내탓이다라는 말로 상대방의 입을 막으시는 분들 이셨습니다.  저는 곱게(?) 그리고 모범적으로 교회에서 자랐기에 그러한 말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생각이 사단적이거나 이단 같니?’  확인을 많이 해보았던 같고, 실제로 내가 문제가 있나? ‘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문제가 없기는 없겠지요.   부분이 내탓이오라는 말이 강력한 창이 되어 모든 사람의 입을 막는 병기가 되어 들어오는 부분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어느정도는 부족하고 잘못이 있으니, 만능의 무기인 내탓이오앞에 나가 떨어지게 됩니다.  여러 신앙의 선후배들과 성경, 그리고 여러 좋은 책들을 통해 생각이 유별나지 않다는 (그저 상식이라는 ) 확인한 후에, 분들이 저에 입을 닫는 무기로 내탓이오라는 말씀을 남들에게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차라리 앞에서 대놓고나 하시지.  

 

 

내탓이다라고 말하지만, 니탓이다!

 

내탓이오 생각에 모든 사물의 잘못을 자신의 허물이나 탓에 돌리기 보다는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무한한 창조주앞에 겸손이 머리숙여 나아가는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스스로 내탓이다라고 많이 자책도 회개도 하기도 했던 같습니다.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탓인거 같기는 한데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만능의 무기가 되어, 의견이 다른 상대방의 입을 막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은 부적절한 사용입니다.   그것은 마치 권세앞에 순종하라 비슷한 맥락이겠지요.    물론 모든 피조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므로 탓이므로, 그냥 조용히 기도만 하고 까불지 마라 문자적으로만 적용하려는 분들의 말씀은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닐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능칼이 되어 교회가 스스로 자정하고 개혁하지 못하고, 지금껏 오히려 교회를 내적으로 썩어가게 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설사 내탓이라도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자신에게 내탓이오라고 말할때 적용이 되는 것이지, 의견이 다르다고 내탓이오(실은 니탓이니까 조용히 잠자코 있어라!) 상대방에게 말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 것일까요?  자기가 스스로 혼잣말로 내탓이다라고 되뇌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원이는 딸입니다

사회학을 계속 공부할 수록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 ‘ 그리 강력하게 비호하고 변호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내가 하원이의 아빠인데, 다른 사람이 하원이 아빠 아니다 라고 해서 제가 사람에게 굳이 하원이 아빠야라고 출생증명서, 어릴   함께 찍은 사진, 이런거 보여주고 목소리 높일 필요가 없을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딸인데요.    거기다 대고 그냥 딸이오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입니다.   (실은 안해도 알고 있습니다.  딸은 아빠를 닮습니다 ^^)

 

 

탓이오!

오늘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내탓이오(실은 니탓이니까 조용히 잠자코 있어라!)’  전가의 보도로, 교회 안에서 생각이 다르다고 무조건 은혜로 덮으려는 분들에게 입막게 하려는 들에게 마디 랍니다. 

 

너나 잘하세요!”

 

 

 

 

나가면서

글들줄에 몇몇 편이 손질(?) 되어서 미주 뉴스앤조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이 그렇게 윤이 나게 만들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편집자분 탓입니다.  ^^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228

 

posted by paulusn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