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paulusnam
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나누고픈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

  1. 2010.07.22 어느 기독 법률가의 삶과 죽음
2010. 7. 22. 16:27 나누고픈 이야기

어느 기독 법률가의 삶과 죽음
(내수동 교회 증인들 1200호 특집호)

 

 

김두식 저


(가상 이야기)
S고등학교에서 1, 2등을 다투는 K군은 어려서부터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자란 학생입니다. 교회 장로님인 아버지와, 권사님인 어머니는 늘 그에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일찍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K는 우연히 교회에서 한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뇌성마비를 앓아 걷기와 말하기에 장애가 있는 그의 이름은 L이었습니다. 어려운 집안 환경과 신체적 장애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L은 혼자 힘으로 고입 검정고시를 마치고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K군은 L군을 처음 보는 순간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 L군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 주게 되었습니다. 비록 고 3 신분으로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L군을 도와주기 시작한지 두 달쯤 지난 후 치러진 모의고사에서 K군은 난생 처음 심각한 좌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모의고사가 끝난 후 학교 현관 입구에 나붙은 우등생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평소 아들의 학교 성적에 애써 초연한 척 하던 K장로도 이번에는 좀 충격을 받았는지, 조용히 K군을 불렀습니다. "얘야.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한 번 생각을 해 보았니? 내 생각에는 역시 네가 그 L이란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구나. 물론 네가 좋은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한 것은 잘 알고 있다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거다. 지금은 네 공부에 주력해야 할 때고,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만약 지금 공부에 주력하지 않아서 대학입시에 실패한다면, 나중에 네가 진짜로 누군가를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게 되고 만다. 우선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다." 물론, K군은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자기 방문을 잠그고 들어간 그는 곧 아버지 말씀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고, 조용히 L군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의외로 L군은 선선히 "잘한 결정이다. 학력고사 잘 보라"고 격려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해 겨울, K군은 그럭저럭 좋은 성적으로 원하던 법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L군이 지방에 있는 어느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그 이후 K군은 L군을 다시 만나지 못했고, 이 경험은 훗날 장애인 문제를 이야기하게 될 때마다 "나도 한때는 말이야 뇌성마비 장애인을 도와 준 적이 있어"라고 무용담을 늘어놓는 소재로만 활용되게 되었습니다.

K군이 법과대학을 다니던 때는 군사독재정권의 횡포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주요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고, 자고 일어나면 친구 중 누군가가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던 암울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잃지 않고 있던 K군은 "고시 공부를 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친구들처럼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 것이냐"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독교인은 잘못된 권위라도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는 말씀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계시던 때라, 기독학생으로서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기본적인 갈등도 있었습니다. 1987 6 10, 그는 마침내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했고, 아버지의 눈을 피해 조용히 집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 앞길에서 마주친 어머니는 곧 아들이 어디로 가려 하는지를 알아차리셨고, 그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들아. 나도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는 거다. 지금 네가 고시공부를 그만 두고, 학생운동에 뛰어든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고시에 한두 번 떨어지더니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다고 하지 않겠니?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다. 우선 고시부터 붙고 나서 남을 돕는 일에 나서도 늦지 않다. 지금 네가 아무리 자유와 평등을 떠들어 봐야 누가 네 말에 귀 기울여 주겠니? 변호사 타이틀이라도 가진 후 뭔가를 말하는 것과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 뭔가를 말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먼저 너 자신부터 남들이 귀 기울여줄만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 이번에도 그는 어머니의 설득에 못이기는 척 발길을 돌렸고, 다음 해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K의 머리 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제야 비로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그러나, 사법연수원은 수험생활의 연장이었을 뿐, 도대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법연수생들을 교육하는 교수들(모두 다 부장판사 또는 부장검사들입니다)의 한결같은 가르침은 "요즘은 사법시험 합격생 숫자가 많아져서 그냥 변호사를 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무조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선 판검사로 임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르침 때문인지, 사법연수원에 처음 들어간 3월부터 이미 대부분의 연수생들은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고,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하나같이 다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일하는 법률가가 되겠다"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제 그들의 목표는 오직 판검사 임용으로 통일되었습니다. 누구도 이제 더 이상 그런 순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긴 워낙 끝없는 경쟁에 익숙해져 있는 사법연수생들인지라, "최고"가 되기 위한 이 새로운 경쟁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친구들도 많아보였습니다. K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판검사 하자고 이 시험을 친 게 아닌데.... 하나님께서 나를 이 시험에 붙여주신데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었을텐데....'

그러나, 그의 진로는 엉뚱한 곳에서 결정되고 말았습니다. 사법연수원 1년차를 마칠 때쯤, K는 대학 은사님을 통해 이름 있는 어느 국회의원의 딸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사법연수원에서 마담 뚜의 손에 놀아나는 동료들을 보면서 '절대로 돈이나 권력에 팔려 가지는 않으리라' 수없이 다짐했던 K였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국회의원의 딸인 J양은 명문가의 딸이면서도 너무나 순수했을 뿐 아니라 명문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이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교회 성가대로 봉사하고 있을 정도로 신앙심도 좋았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자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J양과 사랑에 빠진 K J양 집안의 성화에 따라 강남의 어느 호텔에서 처음으로 장래의 장인어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K를 처음 만난 J의원은 대뜸 "자네는 연수원을 수료한 후 뭘 할건가?"하는 질문부터 던졌습니다. K는 늘 생각했던 대로 ", 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J의원의 얼굴이 당장 일그러졌습니다. "어허. K. 변호사는 원래 연수원에서 판검사 임용될 성적이 안되는 사람들만 하는 거라면서? 자네, 그렇게 성적이 좋지 않은가?." K는 일순간 당황했지만, "제 성적이 1, 2등은 아닙니다만, 임용이 안될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J의원은 다시 얼굴을 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다는 건 참 좋은 뜻이야. 하지만, K.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를 않네. 자네 무슨 돈으로 개업을 할건가? 그리고, 자네가 아무리 '나는 성적이 되지만 그래도 변호사를 택했다'고 말한다 한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줄 것 같은가? 아무리 자네 뜻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선은 판검사 임용을 받은 후 나중에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게 순서일세. 그래야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어. 단 하루를 해도 좋으니 일단 판검사 임용을 받도록 하게. 그 이후에는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뭐라 하지 않겠네. 그리고, 남을 돕는다는 것은 원래 자기가 충분히 먹고 살 기반을 가진 다음에 가능한 일일세. 돈도 없이 어떻게 남을 돕나? 그러니, 우선 자네부터 남을 도울만한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네."

J의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K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몇 년 전 어머니께서 하신 이야기와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 우선 최소한 000이 된 후에, 남을 돕도록 하라는 말은 어른들에게 있어서 거의 성경말씀과 같군.' 이런 생각들이 계속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K J의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같이 간판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처음부터 변호사로 나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서 K도 이제 알만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그래, 2-3년만 검사 노릇을 하고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하자. 그 때쯤이면 누구도 더 이상 나에게 "우선 000이 된 후에야 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 그 해 겨울 K J양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고, 다음 해 00지방검찰청의 검사로 임용되었습니다.

검찰청에 새로 출근한 K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래시계"에서 본 것과 같은 권력과의 투쟁도 아니었고, "보고 또 보고"에서 본 것과 같은 여유롭고 멋있는 검사 생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물밀 듯이 밀려드는 사건들과, 그 사이 사이에 끼어드는 각종 부탁전화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판을 막기 위해서 마련되었다는 끝없는 결재제도도 그를 피곤하게 했습니다. 뭐 한가지도 K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K는 다시 갈등에 빠졌습니다. 내가 이걸 하면서 평생을 보내야 하나... 날로 어두워져 가는 K의 얼굴을 보다못한 S부장검사는 어느 날 퇴근길에 K를 붙잡고 교외에 위치한 조용한 고급 경양식 집을 찾았습니다. 워낙 사람 좋기로 소문난 S부장은 검찰 내에서 K가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아서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K의 폭탄선언에 S부장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내 그럴 줄 알았네. K검사 같은 정의파는 검사생활 초기에 꼭 그런 회의에 부딪히게 되지. 하하하." 하면서 긴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검사 초년시절 경험을 한참 이야기한 S부장의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일단 부장이 될 때까지만 참아봐. 그 다음에는 정말 자네 마음대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온다네. 부장도 못 되어보고 그만둔 사람을 누가 검사로 쳐주기나 한다던가? 이미 이 길에 들어선 이상, 지금 와서 길을 바꾸기도 쉽지 않네. 나중에 부장만 딱 달고 나서 개업하면 초기에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자네하고 싶던 좋은 일을 하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사실 검사 일만큼 보람있는 일이 어디 있나? 변호사만 남을 도울 수 있나? 검사야 말로 약자들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자리지."

그 즈음 한창, 각종 사기사건들을 처리하면서 '검사가 무슨 채권자 대신 돈 받아 주는 기계인가' 하는 회의에 빠져 있던 K로서는 마음 속에 반발이 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로를 수정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직서를 찢어 한강에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0. 검사로서 그는 많은 사건들을 처리했고, 10차례에 가까운 인사이동을 겪으면서 이사도 참 많이 했습니다. 가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던 자신의 꿈을 떠올릴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그저 "허허. 더 나이가 들면 그럴 수 있겠지"하고 넘어갔을 뿐, 이미 편안해진 자신의 위상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기들보다 승진에 뒤쳐진(보통 인사에서 물을 먹었다고 하지요) 그는, 결국 20년의 검사생활을 접고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정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두 딸은 대학에 재학 중이었고, 아들 하나는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교육비로 엄청난 돈이 지출되어야만 했고, 두 딸의 혼수준비도 미리 해 두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습니다. 부장검사 출신이라는 이력 때문에 사건도 엄청나게 밀려들었습니다. 사건을 가져오는 사무장에게는 일정액의 돈을 떼어주었고, 그 돈 중 일부는 경찰이나 검찰로 들어가는 모양이었지만, 돈 버는 재미에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도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은 이번에도 여전히 뒷전으로 밀려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K는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돈을 벌다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문구가 남겨졌습니다. "평생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겠다고 생각만 하던 K, 여기 잠들다."

다음은 여러분을 향한 K의 조언입니다.

"최소한 000이 된 다음에야, 남을 도울 수 있다. 우선은 나부터 안정된 직위를 갖고 난 후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해 생각하라"는 교훈을 잊지 맙시다. 여기서 000은 사법시험일 수도 있고, 판검사, 변호사의 지위일 수도 있고, 로펌의 파트너일 수도 있고, 국회의원일 수도 있고, 부잣집 사위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중요한 것은 당신이 뭔가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이 엄청난 진리의 쇠사슬을 끊고 나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우리 사회는 결코 그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틀 안에 있는 사람", "남이 하는 대로 하는 사람", "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0대에 공익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꿈을 꿔보지 않은 법률가가 있는 줄 아십니까? 20대에는 누구나 그렇게 하는 거고, 대신 30대에는 그저 모두 다 각자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겁니다. 법원에는 법원 나름의 상향성의 논리가, 검찰은 검찰 나름의 상향성의 논리가, 로펌은 로펌 나름대로의 상향성의 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논리에 따라 열심히 살면 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운운하는 것은 경쟁에서 탈락한 변호사들이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말입니다. 거기에 속지 맙시다.

우리는 모두 오직 위만 보고 달려가면 됩니다. 그것만이 이 상향성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입니다. 2000년 전 중동지방의 어느 나라에, 더 낮고 더 낮은 곳을 향해 계속 내려가기만 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말로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사람의 뒤를 따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 옆의 누군가가 "이제는 상향성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진로를 생각해야 할 때"라고 속삭일지 모릅니다. 그럴 때면, "아직은 너무 일러" 또는 "이제는 너무 늦었어"라는 한 마디로 그 속삭임을 물리치십시오. 그게 당신의 행복을 지키는 길입니다. 당신이 혹시라도 "하나님 나라", "정의가 강물처럼"이니 하는 허황된 구호를 믿는 사람이 아닌 이상 말입니다. 넓은 길을 택하십시오. 좁은 길은 실패자의 길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를 향해 달려가십시오.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posted by paulusnam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