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paulusnam
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휴스턴의 한인 장로교회를 다닐때의 일이다.  담임 목사님이 강단에서 당시 휴스턴 시장인 민주당 출신의 애니스 파커 (Annise Parker) 동성연애자인 것을 두고 휴스턴이 사단의 도시가 되었다고 한탄을 하며, 어떻게 이런 동성연애자가 시장이 있냐고 역정을 내며, 파커시장의 재선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교를 하였다하지만 목사님의 기도가 부족하였는지,  당시 파커 시장은 뛰어난 시정운영과 휴스턴 시민들의 고른 지지로 재선에 무난하게 성공했고, 작년에는 3선까지 성공했다.  2003년까지 동성애 처벌이 합법적이었던 (Lawrence v. Texas - 539 U.S. 558 (2003)) 보수적인 텍사스 임에도 불구하고 , 공화당의 전통적인 텃밭인 텍사스,  심장인 휴스턴에서 민주당 출신의 여성시장이  3선에 성공한 것은 그녀가 얼마나 탁월한 시정운영을  왔음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했다.



Source: http://newdealleaders.org/newdeal-leaders/annise-parker/

   


나는 여기서 동성애가 혹은 동성간 결혼이 종교적으로 죄이다 아니다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굳이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라면, 나는 모르겠으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최근 미국내의 여론의 50프로 이상이 동성결혼을 찬성하고 있고, 2014 현재 50개주 , 17주가 동성간 결혼을 허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성연애 혹은 동성간 결혼이 죄라고 혹은 사단이라고 있는지는 모르겠다작년에 미국의 연방대법원에서는 동성 결혼 차별법은 위헌이라고 판결했고, 동성간 결혼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오마바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어느날 딸이 우리 부부에게 물었다.  “아빠, 엄마, 친구 제이슨(가명)집에 놀러갔더니 아빠는 없고엄마만 두명있었어여자끼리 결혼할 수도 있는거야?”  그런 동성 결혼 커플의 아이들이랑 어떻게 같이 놀게 있냐고 정색을 하고 말하던 한인 교회분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딸에게 여자와 여자, 혹은 남자와 남자간에 서로 사랑해서 결혼 수도 있고, 그러한 가정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고 이야기 주었다.   휴스턴의 목사님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파커시장의 면전에서도 당신이 동성연애자이기 때문에 죄인이고 사단의 앞잡이이다 라고 말할 있겠느냐고웬지 그 목사님은 믿음이 부족하실 같다


“When you judge another, you do not define them, you define yourself.”  ― Wayne W. Dyer

'다시함께 잘다니는 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뒤바뀐 구교와 신교  (0) 2014.03.25
(5) 교회의 88만원 세대 -2-  (3) 2013.09.10
(2) 교회의 88만원 세대 (1)  (0) 2013.09.03
(4) 강남 복음주의자  (1) 2011.05.01
(3) “막장의 사람들”  (0) 2011.03.08
posted by paulusnam

"신학 공부를 사역자 없이 하는 성경 공부는 참가자들을 잘못된 성경 해석이나 이해로 인도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최근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분이 내게 하신 말씀이다웬지, 낯설지가 않은 어디서인가 많이 들은 내용이다. 학업과 취업으로 다녔었던 몇군데의 한인교회에서 신기할 정도로 똑같이 들었던 말이다.  그러면서 신학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만 성경공부를 하게되면 신천지같은 이단에 빠질 수도 있다면서 교회 밖에서 하는 성경공부 모임은 목회자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보고를 해야하며, 허락하지 않으면 없다라고 말한다. 목회자가 지정하는 교재로 목회자의 인도하에서만 성경공부를   있다라는 말을 하는 분들은 반드시 목회자만이 아니다.  많은 신도들 조차 이렇게 생각하며 당연시한다.  

돌이켜보면 중세 로마카톨릭 교회 (구교) 부패하게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지 않았었나? 특정 계층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가르칠 있다는 , 그리고 특정 계층이 아닌 사람들은 성경을 함부로 읽고 공부하고 해석할 없다는 결국 이로 인해 성직자 계급은 타락하고 중세교회는 몰락하고, 프로테스탄트(신교) 발흥했다벌써 500 전의 일이지만, 미국내 한인교회에서는 신학공부를 사람 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있었던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시대에 갇혀 사는 같다.


3
년의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지식만으로 이제는전문가행색을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성도들은 스스로 히브리어, 헬라어를 공부하고, 저명한 신학저작들을 읽고 토론한다.   3년만 학위를 위해 공부하고 졸업후 이상 연구하지 않는 사역자와 평생에 걸쳐 꾸준히 성경을 공부하는 평신도 성경에 대한 해석의 권위는 누구에게 있을까하나님과 사이, 성경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종교개혁 시대의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새롭게 들린다성경 자체를 마주하고, 읽고, 공부하고, 고민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닌가? 성경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 중간을 가로막고 전문가행세를 하는 그들은 누구인가억압받는 서민들을 위로하는 프란체스코 교황을 바라보며, 미주의 한인교회가 500년전의 구교, 로마카톨릭교회일 수도 있겠다는 불안한 생각이 든다.  



*이글은 미주 중앙일보, LA기윤실 '광야의 소리'에 실렸습니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2455437 




양을 둘러 맨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 AP 뉴시스

http://well.hani.co.kr/457329?_fr=mb2r 

'다시함께 잘다니는 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동성애, 동성간 결혼  (2) 2014.04.07
(5) 교회의 88만원 세대 -2-  (3) 2013.09.10
(2) 교회의 88만원 세대 (1)  (0) 2013.09.03
(4) 강남 복음주의자  (1) 2011.05.01
(3) “막장의 사람들”  (0) 2011.03.08
posted by paulusnam

다시 함께 잘 다니는 교회 (5)  “교회의 88만원 세대  (2)”                Sep 10, 2013



들어가며


교회의 88만원 세대 (1)을 쓴 지가 2년 반 전이다.  2년 반 동안 (2)편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간혹하기는 했지만, 예전같은 간절함이 엷어져갔고 내 안에 기대감이 사라져갔다.  아예 '다시함께 잘 다니는 교회" 시리즈 자체를 2년 넘게 글 쓰지 못했다.  그렇다고 글을 일부러 안쓰려고 했던 것도 아닌다.  그동안 또 많은 일이 있었었다.  그러다가 한달전 즈음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이 블로그에 교회의 88만원 세대 (1)  글이 "명예훼손"을 했다고 하면서 게시물을 삭제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신고자는 분당중앙교회의 대리단체 (한국인터넷선교네트워크)라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명예훼손을 할만한 글을 쓴적이 없는 것 같아 다음의 권리침해센터에 가서 문의를 하려고 갔더니 휴대폰인증 혹은 아이핀 인증을 하라는데... 저야 뭐 미쿡에 살고있으니 한국휴대폰이 없고, 아이핀인증이라는 것은 처음 보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이의를 제기할 방법이 없었다.  한국은 참 이렇게 불편하구나 하는 생각과 티스토리를 떠나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백업한 자료가 있어 다시 (1)편을 올리고 나서 더 미루기전에 최소 (2)편만은 써보도록 하자 라고 생각하고 우선 자리에 앉았다.  


(1)편에서는 88만원(혹은 그보다 좀 적은 액수)을 받는 평신도 사역자에 대한 글이고, 이번 글에서는 교회내의 88만원 세대의 핵심인 부교역자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전도사나 레지던트 과정을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법학대학원, 의학대학원, 신학대학원... 이 세곳의 공통점은 전문대학원이라는 점 외에도 학비가 무척 비싸고 장학금의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나서 졸업하고 나서는 공통적으로 라이센스를 따거나 딸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의대에서 공부하면서 미국의 인턴과 레지던트의 삶이 한국에서 보던 예비의사들의 삶과 아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다.  물론 한국만큼 인턴이나 레지던트들이 비인권적이고 비정상적인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노동의 강도는 미국의 다른 어떤 직업보다 심하면서 최하의 임금을 받고 수직적인 체계에서 쫓겨나지 않기위해 매진하는 모습은 한국과 그리 다른 것 같이 않아 보였다.  왜 그럴까?  미국이나 한국에서나 아니 세계 어디에서나 의사는 가장 존경받고 고수입과 명예가 보장되는 직업인데...  왜 이들은 진짜 의사로 데뷔하기 전에 이렇게 '학대'받고 '고통' 당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비정상적인 모습을 그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물론 나는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추측하기로는 이 비정상적이고 고통스러운 '정해진' 시기가 지나면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게 되고, 그리고 나서 그들이 받게되는 명예와 금전적인 보상을 생각하면 단 2-3년의 (혹은 3-5년)의 인턴, 레지던트의 시간을 참고 견딜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몇 년간의 과정동안 노동조합을 규합해서 단체운동을 벌이기 보다는 비인격적인 대우와 최하의 임금을 받고 견디기만 하면 이전과는 비할 수 없는 '보장된 영광' 을 기다리는 것이 더 이익이지 않을까?  확실하게 보장되는 미래가 오기만 한다면야...  지금의 그통은 참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군대를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2년 2개월만 견디면 확실히 제대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전도사님들도  이와 상황이 비슷하다.  신대원 3년을 졸업하면 교단마다 다르지만 몇년간의 전도사 (강도사)의 시절을 보내고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하거나 어느정도 규모의 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받기 전까지는 너무나도 비인간적, 비인격적인 대우와 쥐꼬리만한 보수에 만족하며 온갖 노동력을 교회에,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담임 목사에게 제공하면서 무조건 충성을 해야 한다.  왜 그럴까?  그들도 담임목사가 되면 확실하게 보장된 미래가 오기 때문일까?  하지만... 전문의와 달리 목사는 목사라고 다 존경받고 고소득을 보장받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이름을 들어본 목사들, 연소득 1억의 너끈히 벌어들이면서, 자신이 소싯적에 똥구르마 끌었다고 자기 간증에 취해 사소한 곳에 목숨을 수시로 거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다.  대부분의 예비담임 목사님은 그렇게 되지 못한다.  그렇게 대우를 해주는 중대형 교회가 많지도 않을 뿐더러 요즘에는 그 수도 줄어들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주변에서 가끔 나이가 30대 후반, 아니 40대와 50대,,,  심지어 60대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목사의 길을 걷는 분들을 볼 수 있다. 김두식 교수의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잘 나가던 어떤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고 갑자기 하나님의 위해 살겠다고 신학교로 들어가는 스토리가 기독교방송이나 극동방송 라디오에 늘 나온다는 이야기...  근데 왜 불교나 천주교 혹은 다른 종교에서는 나이들어 사역자의 길을 걷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뒤늦게 사역자의 길을 걷는 분들이 유달리 개신교에서는 많은 것일까?   위에서 언급한,  뒤늦게 나이들어 법조인, 의사의 길을 걷겠다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데, 이 왜 나이들어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은 그렇게 많을까?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이들어 뒤늦게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사람은 없을까?


역시 잘은 모르지만, 쉽게 생각해보면 진입장벽이 높기 때문이 아닐까?  의대 (혹은 의학전문대학원)이나 로스쿨에 입학하는 것은 쉽지않다.  경쟁률도 높고 이른바 문과와 이과의 가장 점수가 높은 사람들이 주로 가는 곳인데...  나이들어 머리도 굳어졌는데 그들과 경쟁해서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들어간다고 해도 나이가 어느정도 있으면 가정이 있어 가족을 부양을 해야하는데...  공부하면서 가족들을 부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학비는 일반대학원의 몇배가 된다.  한마디로 나이들어 인생의 전환점에서 다시 '의사가 되겠어' 혹은 '변호사가 되겠어.' 라고 잘 결심하지는 않는다.  현실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다.  천주교의 경우, 아무나 신부나 수녀님이 될 수 없다.  소수중에 소수가 엄격한 심사로 뽑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그 과정은 처음부터 수련의 과정이 된다.  30대가 넘어 신부와 수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없지는 않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불교의 스님이나 비구니는 아예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는 것이니 (삶 자체를 벗어나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더 이상 말할 바가 아니다.  물론 나이들어 얼마든지 머리밀고 스님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 사역자와는 달리 속세를 떠나야 한다. 


신학대학원은 다르다.  물론 몇몇 신학대학원의 M.Div. 과정은 경쟁도 치열하다고는 하지만 의대와 법대에 비할 바는 아니며... 무엇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수많은 신학대학원이 즐비해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마음만 먹으면 거의 누구나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신학대학원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  어쨌든 들어가기가 어렵지 않다.   게다가 들어가기만 하면, 아니 신대원 합격소식을 듣자마자 그 날로 바로 '전도사님'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교회에서 사역을 할 수 있다.   주로 주말과 주일에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부교역자로의 수입이 생기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충분한 액수는 아니지만...  어쨌든 길은 있다.   풀타임으로 공부해도 살아남기 힘든 법대, 의대 대학원과는 달리 신대원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사역을 한다.  


그렇다고 신학이 의학이나 법학보다 공부하기가 쉬운가?  글쌔... 내가 보고 듣기로는 가장 어려운 학문으로 늘 손가락으로 꼽히는 학문은 신학이다.  가장 오래된 학문이기도 하고, 그래서 가장 방대하고 깊이가 측량할 수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혹자는 학문의 제왕이라고 한다.)   물론 신대원은 학문으로 신학을 한다라기 보다는 전문사역자를 키워내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방대하고 심오한 신학이 결코 쉬워지지는 않는다.   미쿡에서도 가장 공부가 어렵고 그 기간이 길기로 유명한 분야가 신학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학박사라고 하면 우선 고개 숙인다.  정말 대단한 분들이시다.  (한국의 많은 유명한 목사님들이 가지고 있는 수업을 듣고 시간만 때우며 받는 목회학 박사들은 예외다.  - 물론 정말 어렵고 힘든 제대로 된 목회학 박사도 있지만...  찾아보기가 쉽지않다.   --;; )   기본적으로 헬라어 히브리어에 각종 외국어는 기본으로 깔고 공부해야 하는 신학에 대해서는, 독일에서 신학박사를 하기위해 시간이 너무 걸려 학위 중간에 의사 자격증,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오는 신학박사과정 학생들도 있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대신한다. 



나가면서


글이 길어질 것을 예상했지만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  --;;  일단 길이 길어져서 여기서 자르고 (3)편에서는 부교역자들의 실상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너무 글이 길어지면 쓰기도 읽기도 힘든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도 글이 너무 거칠어 무척이나 힘들었다.  하지만 나도 그 앞에 있는 (3)편의 즐거움을 위하여 (2)편의 과정을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할란다.  ㅎㅎ


*어떤 태클이나 문제제기를 환영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쓴 글이기에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고있다.  


**사법시험이나 사법연수원, 로스쿨쪽도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쪽은 너무 몰라서...  ^^;;  








'다시함께 잘다니는 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동성애, 동성간 결혼  (2) 2014.04.07
(6) 뒤바뀐 구교와 신교  (0) 2014.03.25
(2) 교회의 88만원 세대 (1)  (0) 2013.09.03
(4) 강남 복음주의자  (1) 2011.05.01
(3) “막장의 사람들”  (0) 2011.03.08
posted by paulusnam

다시 함께 잘 다니는 교회 (2)  “교회의 88만원 세대  (1)”                        Jan 26. 2011

                                                                                                                                              

 

 

 

들어가며

 

최근 한국에서는 ‘88만원 세대’ 라는 책을 통해 20대의 비정규직 문제가 큰 화제였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전체 비정규직의 평균임금 119만원에 20대의 임금 비율인 74%를 곱한 액수가88만원이고, 앞으로 20대의 95프로가 이 88만원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비극적인 상황을 그렸다고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지 못하여 아무래도 책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이 ‘88만원 세대’는 20대의 젊은 비정규직을 지칭하면서 앞으로의 암울한 자본주의하에서의 한국의 경제적인 전망을 그리고 있는 새로운 용어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88만원 세대가 존재합니다.  이 새로운 용어는 기존의 88만원 세대와는 달리 세대를 지칭하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의 88만원 세대는 그 액수인 88만원에 근거하여, 주로 교회내의 비정규직이라 할수 있는 부목사, 전도사,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 찬양팀의 리더와 악기연주자, 한글학교 교사  등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교역자(부목사와 전도사)와 평신도사역자 (성가대, 찬양팀, 한글학교 등)은 성격을 약간 달리합니다.  전자가 비정규직을 상징한다면, 후자는 88만원정도의 액수에 근거한 분류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과 다음글은 이 두 분류를 나누어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이 글은 88만원(혹은 그보다 좀 적은 액수)을 받는 평신도 사역자에 대한 글이고, 다음 주에 교회내의 88만원 세대의 핵심인 부교역자에 대해 논해보고자 합니다.  

 

 

 

 

오래전 스카우트의 기억

 

10년정도 교회에서 찬양팀으로 활동해 왔던 저는 대학교 졸업반 즈음에 제가 다니지 않는 다른 교회로 부터 귀가 솔깃한 제안을 몇번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교회의 찬양을 인도해 달라라는 일종의 스카우트 제안이었고, 거기에 상응하는 물질(장학금형식의 돈)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다니고 있는 교회를 옮기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고 돈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닌것 같은 생각에, 길게 생각하지 않고 거절한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돈을 받고 한다는 것도 꺼림직했고, 제가 무슨 돈을 받을 만한 전문성(?) 또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무언가 이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사례? 사례!

 

결혼과 함께 교회 청년부를 졸업하고 장년부와 제직에 진입(?)하게된 저는 이전과는 많이 다르게 교회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볼수 있었습니다.  그것중에 하나가 교회에서 돈을 받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경험이 아주 제한적이겠지만 한번 제가 관찰한 사항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1. 대학에서 음대에 입학한 A는 입학과 동시에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가 됩니다.  그리고 지휘를 하는 댓가로 한달에 30만원 정도를 받기로 했습니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전공과 관련하여 장학금 형식을 받는 것같아 좋았고, 이전에도 성가대 지휘를 하면 사례비를 받는 것으로 알고있기에  A는 별 생각없이 감사하게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았습니다.  

 

2. 중형교회에서 성가대지휘자와 반주자를 모집한다고 공고를 합니다.  공고의 내용은 아주 추상적이지만,  지원서 형식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그 지원서 형식에서는 자세한 가족사항과 전공과 음악사역의 경험, 목사님의 추천서 까지 내야합니다.  몇 주 뒤, 치열한 경쟁 끝에 현 대학교 음대교수인 B가 성가대의 지휘를, 교회일에 헌신적인  C권사님의 따님이 반주를 하게 됩니다.  B교수와 C권사님의 따님은 각각 교회에서 120만원, 50만원 정도의 사례를 매달 받게 되었습니다.   당회는 지휘자의 학력이 마음에 들었고, C권사님의 봉사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B교수님은 교회에서 2시간 거리에 살았지만, 지휘를 위해 교회 근처의 집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3.  한 교회에서 찬양팀을 인도하는 대학원 유학생D는 어느 날 목사님으로부터 교회에서 사례를 조금 하기로 했다며 월 200불 정도의 금액을 장학금 형식으로 D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D는 생각지도 않은 사례에 여러번 거절했지만, 교회에서 결정된 사항이라며 받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D는 사례를 안받을 수 밖에 없게 되자, 받은 사례를 그대로 감사헌금으로 매달 교회에 헌금하기로 했습니다.  

 

4. 교회에서 예배부장을 맡고있는 직장인E는 교회로 부터 매달 일정 액수의 사례를 받습니다. E가 다니고 있는 교회는 사역을 하고 있는 전신도가 교회로 부터 어느정도의 사례를 받습니다.  E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부장집사나 심지어 성가대 파트장들도 다 받기때문에 그냥 당연한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합니다.  

 

5. 비정규 연구직인F는 경제적인 어려움 당하고 있는 와중에 출석하고 있는 한인교회에 한글학교 교장을 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전공과도 관련이 없고 관심도 없지만 한달에 몇백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교장을 하고싶어 했습니다.   거기에 비록 전공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아내를 한글학교 교사로, 성가대 반주자로, 그리고 각종 예산을 약간 전용하여  한달에 1000불이 훨씬 수입으로 3년만에 빚을 청산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게 되었습니다.  F는 자신이 비정규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일을 놓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6.  한 미국의 대학의 지휘과로 유학을 오게된 예비 유학생 G는 입학도 하기전에 그 주립대의 한인학생 홈페이지에의 구인구직 란에 파트타임으로 지휘를 하겠다며 공고를 냅니다.

 

공고의 내용은

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이번에 OO으로 유학을 떠나는OOO 입니다. OO대학에 오케스트라 지휘 석사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요. OO에 가서 지휘로 봉사할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한국에서도OOO에서 5년간 열심히 모교회 섬기듯 섬겼습니다.이곳에서 좋은 교회를 만나 미국에서 계속 열심히 신앙 생활 하며 교회를 섬기길 원합니다. 많은 연락 기다릴게요 

간략한 이력을 남기겠으니 참고해 주세요.

2010년OO 입학 예정

2009년OOO지휘 콩쿨 1등

2009년OO지휘콩쿨 우승 및 연주 (OO아트홀)

2009년OOO 합창 지휘 전공 졸업(수석)

2009년 제 4회 신인연주회 지휘부분 연주.

2008년 제 1회OOO주관 합창 지휘콩쿨 동상.

_____________

 

G는 몇몇 교회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한 교회의 담임목사와의 면담후에 채용이 결정되어 미국에 오자마자 감사하게도 바로 사역을 하게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사례를 받으려고 하지는 않았는데…

 

위의 6가지의 사례는 제가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교회에서 사례를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넓게 공통점을 찾아보면,

 

1) 교회에서 받는 사례가 자신의 주수입원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례가 없어도 생활 자체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 차차 이 사례에 기대게 되어, 이 사례가 없으면 생활이 점점 어렵게 된다.

 

2) 처음부터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전공이나 형편에 따라 사례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3) 처음에는 교회에서 사례를 받는 것이 불편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했을 지라도, 다른 교회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사례를 받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4) 교회에서는 특정 사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례를 함으로써 나름의 전문성을 높이고 매주 예배에 반드시 출석하여 사역을 이어가게 할수 있게 되었다.  사례를 받는 사람들은 가급적 예배에 반드시 참석하여 그 역할을 기대할수 있다.

 

5) 교회에서는 사례비를 통해 경쟁력있는 인재를 구함으로써 여러 다른 교회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수 있다.  또한 그 사례를 받는 사람이 교수나 고위관리라면 보기에 더 좋기에 교회의 이미지도 좋아진다.

 

 

 

 

안받으면 어떻게 될까?

 

흔히들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의 여부를 프로와 아마추어에 비교하곤 합니다.  돈을 받는 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구분이 교회에서도 유효할지는 의문입니다. 

 

만약 위의 예시중에서 사례를 안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좀 더 전문성이 떨어지는 사람이 사역을 하게 될까요?  아니면 그 사역을 맡기로 한 사람이 자주 예배에 빠지게 되어 예배에 곤란을 겪게 될까요?  그 사역을 하는 사람이 생활고에 빠지게 될까요? 

 

개척교회나 소교회의 경우, 전문적인 사역 (주로 음악)을 할 충분한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사례여부와 상관없이 사역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나 중형교회 이상은 아무래도 교회안의 성도 중에 그러한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교회에서 사례가 없다고 하면 전문적인 사역들을 어떻게 될까요?  사역을 중단하거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될까요?  아니면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만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교회내의 사역은 누가 하는 것이며, 왜 하는 것일까요?  돈을 받고 안받고의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하며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올까요?

 

확실한 것은 교회내에 이러한 사례를 하지 않는다고 그 이유로 교회 역사에서 예배가 중단된적은 없었습니다.   

 

 

 

돈을 안받으면 어떨까요?

 

신학적으로 레위인들은 일을 하지 않았기에 사례를 받는 근거가 있다느니, 혹은 성전에서의 봉사는 신도로서의 자발적이어야만 하는 것이여만 한다느니 하는 것을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보다 훨씬 탁월한 분들의 견해와 주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저의 제안은 단순히 돈을 받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돈을 받지 않으면 자신의 헌신정도가 떨어지거나 혹은 생활이 힘들어지지 않는다면, 안받으면 어떨까요?  받고 도로 헌금하는 것 말고, 그냥 아예 안받으면 안될까요? 

 

마태복음 6장 1-6절에 보면 사람앞에서 보이게 의를 행하거나 기도하면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나옵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 시리라

 

앞선 5장에서도 보이게 금식하는 것은 역시 이미 상을 받았다고 나옵니다.   금식과 기도, 구제와 의를 행함이 그러하다면,  이 구절을 사례를 받는 사역자에게 적용하면 너무 무리한 적용이 될까요? 

 

수많은 자발적 봉사단체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례없이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들여 봉사하고 이웃을 섬김니다.  교회는 자발적 봉사단체도 아니고, 파트타임직을 만들어내는 직장도 아닙니다.  그 돈으로 더 많은 이웃섬김과 선교, 그리고 구제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느 교회나 성가대 지휘자는 사례를 받아왔기에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에서 그것을 이상하고 낯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비단 저뿐일까요?  교회안의 88만원을 받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성도들이 그 88만원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교회 밖의 이웃들에게 나누고 함께하면 약간의 전문성은 포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배에서 성가대의 화음이 좀 삑사리가 나고, 찬양인도자가 음이탈을 하고, 반주자가 반주를 좀 틀리면 은혜가 떨어질까요?  그것보다는 예배를 사랑하고, 하나님 찬양하기를 사모하고, 열정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사역하는 사람이 전문성있고 전공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 기쁘시지 않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가면서

 

다음 번에는 이 논의의 핵심인 부교역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비정규직 중에 비정규직, 88만원보다 어쩌면 더 적은 돈을 받으면서 사역하는 부교역자들.  힘도 없고, 목소리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그들에 대해서 고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paulusnam

다시함께 잘 다니는 교회 (4) 강남 복음주의자


                                                                                                                                                                                                                                                  April 30, 2011 남상곤

 

 

 

 

 

들어가며

 

지난번 꼭지인 막장의 사람들에 대한 호응이 예상외로 뜨거워서 놀랐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염려와 걱정을 해주셨고,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라는 질문도 많이 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본문보다 별책부록이 더 주목을 받았나 봅니다.  결론적으로 그 글의 주제는 특정 막장의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막장의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어야 할까? 하는 저의 개인적인 고민을 나누었었습니다.  나중에 특정 막장의 사람에 대한 일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눌 기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중이고, 제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최선의 해답이 아닐 수도 있기에 많은 주변의 분들의 생각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많은 위로와 격려해주신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강남 좌파


최근 강남 좌파라는 말이 세간에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하게 언급하기에 아직 무엇이다 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제가 이해한 바로는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남에 살고있는 (현재에 어느정도 경제적인 기반을 가지고 성공한) 지식인들을 일컫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 ‘강남좌파라는 단어가 전통적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데, 이 단어가 명칭되는 사회적 실체가 분명한 상황이기에 더욱 주목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이 조어는 세분화 되어, ‘분당 우파등으로 파생되기도 하고 아직 완성된 조어는 아닙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두 단어가 전통적으로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데, 요즘 같이 붙어서 쓰이는 새로운 용어 라고는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남 복음주의자

 

이 신조어가 만들어져서 유통되기 전부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강남의 대형교회들을 다니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강남 복음주의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서투른 조어같지만, 과연 강남의 성공한몇몇 대형교회에 다니는 복음주의자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하여, 강남 복음주의자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 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으로 조금씩 확장되었었습니다.   물론 복음주의자에 대한 정의도 쉽지 않은 데, ‘강남 복음주의자라는 말은 강남 좌파의 조어와 마찬가지로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인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반드시지역적으로 강남을 호칭하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이른바 중산층 이상 교양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대형교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러한 대형교회들이 주로 강남에 많이 있기는 합니다.  

 

 

 

 

요즘 우리 강남에서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처음 사람을 만나게 되면, 조금씩 서로를 소개하는 대화로, “한국서 어디에서 사셨어요?”  혹은 한국에서 어느 교회에 다니다가 오셨어요?” 하는 질문을 흔히 들었습니다.  저는 저의 아버님이 개척목회를 하시는 조그마한 교회를 다니다 왔다고 말하고, 제가 결혼하고 신혼생활을 하던 진짜 강남(? 금천구) 혹은 용인(본가)에서 왔다고 답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그 질문을 했던 분들이 저에게 경계감을 쉽게 푸시곤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지방에 있는 대학을 나온 것 까지 아시면, 갑자기 말투까지 놓으시는 경우까지 있어 좀 당황스러웠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에피소드는 2년전 즈음에 있었습니다.  미주의 한 한인교회에서 만났던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그 목사님께서 자신이 강남에서 부목회를 하다가 왔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셨던 것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강남의 한 건실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재직을 했지만 그것을 내려놓고 지금 이곳에서 목회하시는 것을 내려놓음처럼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은근히 다시 강남에 가서 목회하시는 비전을 비추시기도 하셨습니다.  대화가 조금 진행되다가 그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우리 강남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에 눈치가 없던 저는 ! 강남이라는 곳에서 살고, 교회를 다니고, 목회를 하는 것이 이 정도로 자랑 할 만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모님께서는 강남에서는 지금 무엇이 유행이고, 어떠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세한 나눔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 목사님과 사모님이 강남에서 사시면서 부목회를 하셨던 기간이 2-3년정도라고 들었습니다.  도대체 강남이 무엇이기에 2-3년의 거주기간이 우리 강남이 되는지 참 신기했습니다.    

 

 

강남 대형교회에서는?

 

강남의 대형교회들의 특징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쉽지않는 일일 것입니다 어리석지만 거칠게 묶어보면,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보통 교회의 설교나 행사 등이 강남의 중산층 들에게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강남에서 산다는 것은, 어느정도 경제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하기에, 교회에서는 삶을 살아가면서의 성공적인 처세술 등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주로 제시하고, 현재의 삶을 어떻게 잘 유지하면서 균형된 크리스챤으로의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설교를 통해서 강조한다고 합니다.   

 

교회내의 구성원들에게 설교나 교회의 관심이 당연히 집중될 수 밖에 없기에,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그 강남 중산층의 현재의 삶을 대변해주고, 또 유지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중산층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좁은 길을, 나눔의 길을, 그리고 낮아지는 길과는 반대의 길을 가야한다는 복음과는 양립하기 쉽지 않은 것 처럼 보입니다. 강남의 대형교회에서 가난한 사람, 장애우, 소외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어느정도 비슷한 평수에, 비슷한 규모의 연봉과 자가용이 맞추어져야  구역모임에서도 말이 통할 수 있고, 증권과 파생상품등의 관심사도 어느정도 비슷해야, 비슷한 모양의 신앙생활을 유지할수 있다고 합니다.  강남에 살지만, 주변과 비슷하지 않은 배경의 친구가 강남의 대형교회생활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도 생활수준과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만이 다닐 수 있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게 되었었습니다. 

 

교회안은 흡사 잘 꾸며진 대기업 건물을 들어온 것 같습니다.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깔끔하고 잘 생기셨으며 다들 박사에 교수들 이십니다.  설교는 세련된 어조와 적절한 비유,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감동까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카페와 서점, 카페테리아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고, 점심은 쿠폰을 사서 먹습니다.  화장실 남자 소변기 바닥에는 얼음덩어리들이 있습니다.  (이거 왜 두는 건가요?  --;; ) 들리는 말로는 이 화장실을 꾸미는 비용이면 시골의 개척교회 10곳을 후원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모든 공간은 사전 일주일전에 예약을 해야하고, 자신이 봉사하는 영역을 제외하고는 같은 교회의 사람들이지만 서로 모릅니다.  예배를 마치면 빨리 차를 빼러 나가야 합니다.  조금 지체했다가는 주차난 때문에 나가는 데만 한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모두들 깔끔한 옷차림에 웃는 얼굴에 다들 세련되고 멌있습니다.  매주 새로운 사람이 몇십명도 넘지만 매주 안나오는 사람도 그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강남 중산층이면 문제가 있나요?

 

아니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강남에서 살고, 강남에 있는 대형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복음주의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강남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문제가 있습니까?  세련되고 갈끔한 신앙생활, 교회생활 하는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강남에 살면 안되나요?  일부로 이사라도 가야하는 건가요?  아니면 교회를 일부러 강북으로 다녀야 하나요?  대형교회를 다니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겁니까?”

 

제 대답은 아닙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입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합니다.  교회다니는 사람이 돈 많이 버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되면 신앙생활 하는데 문제가 생깁니까?  내가 내 능력껏 열심히 일해서 받는 월급의 액수가 많다고 문제가 되나요?  일부러 회사에 이야기해서 월급을 적게 달라고 해야 합니까?  어떤 목사님도 이야기 합니다. “내가 설교를 잘하고 책을 잘 써서 교회로부터 많은 월급과 인세를 받습니다.  그만큼 노력하고 기도하고 준비해서 설교하고 목회하는데, 성도가 3천명, 3만명인데그 정도 액수 받는 것이 문제라도 됩니까?”

 

제 대답은 아닙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입니다.

 

 

나는 강남에 살고, 강남의 대형교회에 다닙니다.  아이패드도 있고, 아이폰도 씁니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교외에 나들이도 가기도 하고, 차도 두대나 굴리고 있습니다.  교양있는 지식을 가지려고 최근에는 샌델의 정의도 읽고 보았고,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꾸준히 시사와 경제지식을 챙깁니다.  하고싶은 것, 갖고 싶은것을 마음대로 할수는 없지만 저축하면서 가끔은 지르기도 합니다.  노후를 위한 재테크에도 관심이 많고 워렌버핏 처럼 가치주에 장기투자하는 것에 관심도 있습니다.  현재 제일 잘 나가는 신앙서적도 놓치지않고 읽고 있으며, 컴패션과 월드비전 후원도 매달 하고 있고, 석달에 한번씩 고아원과 양로원에 봉사도 갑니다.  제가 문제가 있나요?

 

 

제 대답은 아닙니다.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입니다.

 

 

 


저도 한때

 

저는 강남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강남 재건축의 상징인 은마아파트에서 유치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 20년 가까이 살았었고, 그곳에서 초중고를 졸업했습니다.  강남에서 계속 교회생활을 했으며, 아버님이 뒤늦게 목회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지역적으로는 강남이 아니지만 심정적으로는 강남의 대형교회에 나름 열심히 다니기도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때의 대치동은 지금의 대치동과는 많이 다릅니다.  저는 양재천으로 친구들과 올챙이와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있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은마아파트 놀이터에서 형들을 쫓아다니며 박쥐를 보고 도망쳤던 기억, 야구하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님이 조기정년을 하시고 강남을 떠나 용인 양지로 이사가게 된 뒤로, 강남은 더 이상 제 삶의 터전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우연히 가보게 된 대치동은 학원간판이 즐비하고, 초고층 아파트들이 새로 들어선 조금은 낯선 동네가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유난히 ‘8학군이라 하여 교육열이 높은 동네이기는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삼수와 사수 생활을 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강남을 벗어나 노량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노량진은 한강 이남에 있는 지역이지만 당시 강남구를 제외하고는 강남이라고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강남구를 제외하고는 다 강북이라고 여겨지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새로 접하게 된 노량진에서의 생활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저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는 동네이기도 했고, 그곳은 언제나 흥미진진했습니다.  물론 각종 고시와 입시로 인한 수험생들의 어두음이 짙게 내리깔린 동네이기도 했지만 저는 그 수많은 노점상들과 만화방과 오락실, 활기찬 육교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한때 속상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노량진에 와서 수많은 입시생, 고시생들을 바라보면서 힘을 얻어가기도 했었습니다. ^^

 

하지만 그 이후, 저는 직감적으로 제 평생 다시는 강남에 들어와 살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이유는 별것 없습니다.  강남에서 살수있는 아파트 전세값을 마련할 경제적 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

 

 

 

 

아닙니다 그런데 미안합니다

 

 

서론만 길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강남 좌파의 아이콘으로 많이 언급되는 서울대학교 법대의 조국교수의 페이스북의 한 글귀가 기억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강남 좌파라는 딱지를 굳이 피하지 않겠다라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강남 좌파가 그리 뭐 자랑스럽거나 부끄러운 것도 아닌 것이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저도 조국 교수의 말에 동의합니다.  강남 좌파라고 해서 좌파가 아닌 것도 아니고, 좌파면서 강남에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때 강남에 살았기에 강남 복음주의자였던 저는 제가 강남에서 살면서 복음주의자로 자처했던 것이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그래서 요새는 제가 강남에 살았다고 하거나 고등학교를 어디 나왔다고 잘 말하지 않는 편입니다.   "누구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것이냐?" 라고 물으신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냥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저도 이성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제 과거를 부끄러워 하거나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처럼 감추고 싶습니다.  (경제적으로 다시 강남에 살수도 없겠지만,) 경제적으로 강남에 살 수 있게 되더라도 강남에는 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가지 드는 분명한 생각은

저를 통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아직 정리되지 못한 일개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 때문에 혹시라도 강남에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것이 있다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 개인의 적용과 고민이었습니다.

 

 

 

 

 

읽어볼만한 강남 좌파에 대한 글

 

강남 좌파, 그들은 누구인가? (김호기)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10414144447

 

다가오는 자유주의의 시대  (안병진)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1896.html

 

강남 좌파가 밀려온다 (신기주)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9447

 

강남 좌파 감별법 (최희진 모음)

http://media.khan.kr/789

 

강남 좌파세상 밖으로 걸어나오다 (김은남·고재)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951

 

 

posted by paulusnam

다시함께 잘 다니는 교회 (3) “막장의 사람들”

                                                                                              March 3, 2011 남상곤

 

 

들어가며

교회안의 88만원 세대의 두번째 꼭지의 부교역자에 대한 글은 좀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직 첫꼭지의 평신도 사역자에대한 피드백에 대한 제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글을 쉽게 잘 쓰지 못하는 저로써는 아직 부교역자에 대한 사례가 아직 충분히 조사되지 않았기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준비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졸업한 모교에서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터져서 2월, 한달동안 여러가지를 고민하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래서 오랜시간동안 고민하고 기도해왔던 “막장의 사람들”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저는 남의 사람들의 뒷담화를 잘 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를 불편해하고, 또 그런 이야기가 나와도 쉬이 잘 믿는 편도 아닙니다.  그런 제가 몇몇의 교회안의 막장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공개적으로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에 대한 저의 솔직한 고민이자 기도입니다.  이것을 이번에 나누고 싶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 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보통 ‘원수’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기에 어쩌면 이 말씀은 그리 큰 깊이를 가지고 다가오지 않을 수 있지만, 세상의 비정함을 겪어 본 사람들은 (원수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이 말씀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말씀인지 알고있습니다.  상대방으로 인해서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리거나, 인격적인 살인을 당하거나, 그들에게 가족이 협박을 당하게 되는 일을 당해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관되게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하시고, 주기도문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면, 그 어떤 죄를 우리에게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지만, 그것이 과연그렇게 쉽게 할수 있는 일일까요?  정말 막장인 사람들을 만나보고 당해보면, 그말씀은 예수님이시기에 하실 수 있는 말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만 들게 됩니다.  

 

 

 

그들을 만나다

저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한국에서다녔던 교회들은 하나같이 다 좋은 곳이었고, 좋은 분들을 만났고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왔었던 것 같습니다.  제 안해와 친구들은 저보고 좋은 교회만 다녀와서 너무 교회와 세상을 모른다고 이야기 하곤 했었습니다.  그것은 참 내 자신이 신앙의 여정을 걸어오는 데 큰 자산이었고 좋은 기억이지만, 세상의 실상을 아는 것에 있어서 제한적인 이해만 가지게 되었었습니다.  즉 ‘모든 교회와 모든 교회 사람들은 선하고 착하다’ 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생각지도 아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막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막장의 사람인 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피하나,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도 그들이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 이말에 이해하는 분들의 마음을 제가 압니다 ^^;;)

 

 

 

돈과 섹스

지금은 거의 소설가라기 보다는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이문열의 초기작 중에 하나이자 표절문제로 얼룩진 ‘사람의 아들’의 초반부에  보면, 살인사건을 두고 수사를 시작하는 남경사가 보통 범죄는 돈과 여자 때문에 일어난다고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잘 안나지만, 만약 어떤 범죄가 이 두 가지의 중의 하나로 벌어지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거의 수사가 미제로 남게된다고 하면서  이 살인사건 수사의 어려움을 이야기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소설에서의 살인사건은 돈과 여자와 관련된 문제라기 보다는 신과 신을 찾는 사람들인 민용섭과 조동팔, 아하스 페르츠에 대한 이야기였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제가 만났던 교회에서의 막장의 사람들도 이 남경사의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만났던 교회에서의 막장의 사람들은 나이가 어린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도 있고, 평신도도 있고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관통하는 한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돈과 여자’ 였습니다.   막장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두가지의 문제에 최소 한가지는 반드시 걸렸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에서 양심을 팔거나, 성적인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고 어둠속의 일들을 저지리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아니면 두 가지 모두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이 두가지의 문제에 걸리지 않은 것 같이 보여도, 실상 속을 들여다 보면 이 두가지의 문제가 늘 이 막장의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 두가지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씁쓸한 것은 그 막장의 사람들을 교회에서 나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 두가지의 문제가 아니라면 막장까지는 아니었을텐데… 신앙과 영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으면 막장까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세가지의 질문과 고민

저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세가지의 질문입니다.  첫번째로, 과연 내가 그들을 막장이라고 부를 만한 떳떳한 사람인가?  두번째로,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할수 있는가?  세번째로 그렇게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저의 고민이 이 꼭지의 핵심입니다. 

우선 첫번째의 물음에 대해서는 제 스스로 그렇게 떳떳하고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은 충분히 막장이라고 부를만 하다 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에 대해 저에게 ‘교만하다’ 혹은 ‘아직 인격적인 성숙이 덜 되었다’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제가 그냥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뒷부분에 조금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그 분들은 막장이라고 충분히 불릴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제가 지는 것이겠지요.  제가 아직 부족한 탓일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과 내가 하나님앞에서는 ‘오십보 백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들과 내가 오십보의 차이가 있더라도 절대적인 선과 정의의 하나님앞에서면 그 차이는 거의 제로에 가깝게 됩니다.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하라고 하시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저를 용서해 주신 것 처럼, 그들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이것이 제가 아직 고민하고 있는 접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들과 저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그러나 부족하고 모자란 저로서는 아직 그 오십보 때문에 무척이나 괴롭습니다.

두번째에 질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또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돌아볼때, 나도 그들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하고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때는 일시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때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의식적으로 품으려는 결단을 매일 매일 해야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상대를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기본적인 예의와 상식이 없는 것을 넘어서, 파렴치하고 무례한 그들을 보면서 매일매일 저는 시험에 듭니다.  제가 아직 부족한 탓이겠지요?  하지만 역시 풀리지 않은 문제입니다.  저는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없습니다.  솔직한 제 고백입니다.

세번째 질문에 대한 고민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고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저의 잠정적인 결론은 그냥 피하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무섭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합니다.  거의 모든 말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서 삼자대면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삼자가 대면해도 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모든 것이 거짓이니 기본적인 공통된 가정 자체가 없어집니다.  대화 자제가 진행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 분들은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하를 보게되는’ 분들입니다.  예를 들어 그분과 제가 말싸움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가 내 생각은 이렇고 논거는 이렇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보통 상대방은 거기에 대한 반론과 그 근거를 대겠지요.  그러나 그 분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저의 집에 와서 방화를 하고 가는 식입니다.  이런 분들은 정말 예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상궃어서 별로 어디가서 겁을 느껴보지 못한 저로서는, 이분들 앞에서는 정말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을 합니다.  상대할 만한 가치가 없기에 피하기도 하지만, 무서워서 피하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 다름의 문제이겠지만

톰 라이트라는 신학자가 그의 책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에서 "선과 악의 경계선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 있지 않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관통한다" 라는 솔제니친의 말을 인용했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막장의 사람들은 악하고 저는 선한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러한 사정없이 무책임하게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해라 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인간적인 연약함을 느끼며 하루하루 십자가앞에 나가야 함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여전히 무섭습니다.  나는 그들이 무섭습니다.  정말 인간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가슴이 콩딱콩딱 뜁니다.  그들에게 한마디를 하면 그들은 저의 이야기를 백마디 왜곡되어 퍼트립니다.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가 없는 상황에서 파렴치함과 무례함 그리고 거짓말과 왜곡으로 당당하게 서있는 그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정치인이 된다면, 무엇보다 유치원을 의무교육으로 시킬 것입니다.   -

 

 

 


-별책 부록편-

이부분을 쓰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우선 그 분에게 해가 가지않고 또 그분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기에 구체적으로 사례를 나누것이 글의 이해를 돕기에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이 부족했다면 이 부분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언 주십시오.

두세분의 막장의 최고봉이 생각나지만 그분 중에서도 최고를 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상식과 예의가 없는 파렴치한 파렴치한…너무도 파렴치한…

이 막장의 사람들은 보통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치원에서 다 배웠어야 할 ‘상식’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식이 없으니 자신이 왜 욕을 먹는지 모릅니다.   그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이 괜찮으면 그것으로 다 괜찮은 것입니다.  이 분들 중에 최고봉에 이른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분의 이야기를 조금 나누어 보겠습니다.  편의상 이분을 A라고 하겠습니다.

처음 만났을때, A 부부는 눈치가 좀 심하게 없다라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의 모임을 할때, 자신에게 할당 된 일들을 너무나 무책임 하게 하지않고 경우에 맞지않은 예의가 없는 말을 많이 하기에 뭐 그런가 보다 싶었습니다. 

머리가 이가 난 자신의 아이를 구역모임에 버젓이 데리고 나와서 사람들을 경악시켰고, 아이들은 씻기지 않아 냄새가 났지만 전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은 모임에서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괴롭히는데도, 자신의 아이들도 그렇게 하면서 자랐다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기에 다른 아이에게 피해를 줄때 엄하게 혼을 내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츰 이 분이 단순히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습니다.  우선 어디에선가 출처가 모호한 신앙에 대한 간증과 글들을 마치 자신의 경험담인 것 처럼 자랑스럽게 나누는 것을 보고 고개가 갸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S교회의 J목사였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A는 교회에서 직분을 통해 돈을 버는 것에 혈안이 되었지만 그 직분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워했습니다.  게다가 직분을 이용해서 자신이 교회의 예산을 전용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나갔고, 그래서 건성으로 대충대충 그 직분을 하면서도 이미 거기서 부터 들어오는 A의 수입은 이제 그 직분을 멈추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수입을 통해서 쇼핑을 한 것을 자랑거리 처럼 내놓는 것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A에게 그것을 말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직분을 이용해서 예산의 전용하여 이익을 챙겼지만 그 일에 대한 능력이 없고 책임감이 없으니 차츰 많은 교회 사람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고,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목사와 장로에게 거짓증거 들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목사에 눈에 드는 것이 신앙생활에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A는 다행히 자신과 비슷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목사에게 충성을 다짐합니다.  목사는 A를 잘 파악하고 적절히 조종을 하기도 하면서 A를 충분히 활용합니다.  그러면서 암묵적인 보상을 약속합니다.  1-2년 뒤에는 안수집사를 파격적으로 제시하겠다고.  그래서 A는 더욱 목을 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존경받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인 A는 안수집사가 되면 그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날이었습니다.  나보다 연배가 약간 위인 A는 자신이 나이를 먹었으니 자신이 더 많이 안다면서 나에게 충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동생같아서 그렇다를 수십번 반복하면서 자기가 관심과 애정이 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 닥치고 가만이 있어라 의 이야기 였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엄하고 감정표현이 없는 부모님 밑에서 심한 상처를 받고 자라난 A는 자신의 동생에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해서 동생과의 사이가 좋지 못할 뿐더러, 그 상처를 그대로 자신의 아이에게 쏟아붇고 있어서 옆에서 지켜보는 몇몇 교회분들이 심한 걱정을 많은 상태였었습니다. 

A는 어느날 교회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저의 뒷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목사의사주로 시작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스스로 충성된 모습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미니홈피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저를 조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가 가입한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제 글들이나 행적들을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제 글들과 제 글들에 대한 다른 분들의 댓글등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그것을 교회에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저를 이단으로 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글들을 자신이 교묘히 편집을 해 놓고 자신이 이메일을 보냈으면서 자신도 이러한 이메일을 받았으니 나누겠다고 하는 이중인격의 최고봉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 메일을 우연히 받은 한 분은 이런 사람이 교회에 있다는 것에 정말 충격을 받아서 자신이 직접 교회에 공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겠다고 했지만 제가 말렸던 기억이 납니다.

A는 그렇게 제 뒷조사를 하다가 제 개인(가족)클럽을 존재여부를 알게됩니다. 참 신촐귀몰한 분입니다.  그러더니 어느날 저에게 와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그 클럽에 자신의 가입시켜 달라고 요구합니다.  제 안해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만든 그 클럽은 아주 극소수의 저희 부부를 잘 아는 분들이 회원으로 되어있고, 거기에 저희의 연애시절의 추억부터 지금까지의 사진과 글을 보관해 온 개인클럽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밀클럽으로 되어있어 검색을 해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개인클럽에 자신이 생각하는 무슨 월척(?)이 있을지도 모르는 A는 그의 부인을 대동하여 자신이 같은 교회에서의 지체이니 당연히 자신도 가입을 시켜달라고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간은 최근 4-5년은 새로 멤버를 받은 적도 없고, 저희 가정의 비밀적인 내용을 나누어도 기도를 해주실 분만 멤버로 되어있는 곳인데… 그곳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가입시켜 달라고 우기면서, 무엇인가 켕기는(?) 것이 있으니 오픈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너무 어이가 없는 저는 개인의 사적인 공간의 오픈여부를 강요받는 것에 대해서 어디서 이야기를 해야할지 말 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자신들도 교회의 가족이 아니냐고 가입을 시켜서 투명하게 공개하라라고 너무다도 담대하게(?) 외치는 A부부의 모습에서 저는 그 부부가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것을 확신한채 어디서부터 상식강의를 해야할지 정말이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A는 저를 불러내어 자신이 저에 대한 안좋은 이메일을 받았는데 (자신이 보내놓고 자신이 받았다고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정말 아연실색했습니다), 교회를 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어떻게 교회를 다니겠냐고? 은근히 협박을 하시더군요.

그분의 메일에서 몇몇 내용을 직접 인용을 해보겠습니다.

“여기 오기전 메일을 안보신 것 같습니다. 카페를 처음 입구에서 막았네요. 아마도 10분 이상 글쎄 이글들을 읽고 이메일로 더 많은 분들이 돌리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겁니다.  원래 글 내용에서 예기하신 대로 좋은 교회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모른체 하고 다른 사람들과 보고 생활하기가? 제 동생과 나이가 같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서 더 기도해야 겠네요.”

자신이 저에대한 악의적 편집을 한 글들을 첨부해서 사람들에게 보내놓고 저에게도 한부 슬쩍 보내면서 자신이 이런 메일을 받았으니 조심하라(?)라고 친절히 조언을 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제 가족클럽을 오픈하던지 아니면 구역모임에서 나가라는 양자택일을 하라고 은은한 협박을 해주십니다.

“그 제가 말씀 그대로 비밀클럽을 오픈하던가 (자신이 있으시면 오픈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 중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입니다. 교회에 문제제기를 해서 교회를 완전히 바꾸는게 목적인지 아니면 교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 끌어 내려는 목적인지 명확하지가 않군요. 아마도 비밀클럽으로 차단하면 더 비밀스러워져서 더 의심만 생길겁니다. 구역은 허울뿐인 가족이구요 카페공동체는 진심을 나누는 곳으로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런 구역원은 원치 않습니다. 같이 나누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가족같은 구역이 되길 원합니다. 저두 남상곤 형제님 가정을 잘 모릅니다. 너무나 많은 비밀이 있어서 왠지 어떨때는 남같이 느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다음에는 저희 구역으나 저희 교회에 관련된 분의 필터링이 있은 후  글을 올리시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  선택은 본인이 한다고 하셨으니까 구역을 원하시던 카페를 원하시던 신중히 결정하시고 메일로 알려 주세요.”

A와 관련된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고 황당하고 파렴치한 일들이 계속 생각이 납니다.  제 주변의 많은 분들도 저와 동일한 생각으로 A를 불쌍하게 보기도 하지만 가까이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A는 늘 외롭지만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기에 받는 고난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을 냅니다.  오늘도 그는 사람들에게 배설물을 뿌리고 상처를 줍니다.  무섭지만 불쌍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정말 제가 감당할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셔서 제 근처에 두게 하셨는지 정말 진지하게 궁금합니다.  A부부는 오늘도 제 주변을 돌면서 제 뒷조사를 하고, 제가 이단이라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다니느데 열심이십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몇몇 분들이 저희에게 와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자신들도 A부부를 멀리하게 된다고...  A부부만 여전히 모르십니다.

 

A께서 저지른 일들이 이외에도 많지만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 같아 여기서 우선 줄입니다. 

 

posted by paulusnam

 

다시함께 다니는 교회 (번외편)

침묵의 동조이론

2011-02-01

 

 

침묵의 나선이론

학부전공이 언론정보이면서도 무엇을 배웠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찬양을 원없이 했다라고 이야기할 밖에 없는 나에게, 남은 안되는 전공지식으로 기억나는 중에 하나가침묵의 나선이론이다.  침묵의 나선이론은 독일의 노엘레-노이만이 1966년에 발표한 이론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다수이면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만, 소수라고 판단되면 입을 다문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현상이 회오리나선 모양으로 진행되면서 목소리만 소수의견이 대세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하였다.  노엘레-노이만은 매스미디어가 어떻게 권력을 갖게 되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이론을 내놓았지만, 나는 보다도 사람들이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다수라고생각할때표현하고, 소수일때라고생각할때침묵한다는 설명이 무척 인상 깊었던 같다.  이렇듯, 사회에서 소수의 생각이나 사상에 마음속으로는 동조하거나 동의해도, 생각이 소수인 처럼 보이기 때문에, 동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동의하고 인정하는 침묵의 나선이론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너무나 무서울정도로 정확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최근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침묵의 동조이론

나는 여기서 보다 나의 모교에서의 벌어지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나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침묵의 동조이론이다.  이론에 배경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생각과 의견이 다른 것에 대하여 그것을분쟁혹은하나되지 못함으로 규정하고 관용하지 못한다.  생각과 사상이 다른 대상이 힘이 없거나 소수이면, 쉽게 그들을 잔인하게 밟아버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거룩한 전쟁을 치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반하는 자들은 그저 하나님앞에서 제거해야할 이방인들일 뿐이고, 그러한 어려움과 시련을 통해서 연단되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구현된다고 그들은 믿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기에 포기와 타협은 없다.  따르던지 죽던지  그들은 자신들 만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들에게 힘이 있기에 절대 다수는 앞에서 침묵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다수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사실관계를 따져보자고’, ‘지금은 기도를 해야할 때다,’ ‘양쪽 잘못했고 문제가 있다고’, ‘이렇게 시끄럽고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그리고 공동체에 덕이 되지 못한다고,’ ‘이러한 일이 어떠한 여파를 가지고 올지 아느냐고?’  그리고는 침묵한다.  그것은 암묵의 동의다.  이것이 침묵의 동조이론이다.

 

 

 

필드스터디

아직 나의 최신 이론인침묵의 동조이론은 아직까지 연구가 거의 되지 않은 분야이다.  나도 분야를 연구하면서 선행연구가 없어 애를 많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결국 이론을 경험하기 위해, 필드스터디를 나갔다가 비이성적인 폭력과 협박, 심지어 가족에게까지 들어오는 위협에 고개를 돌려야만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론의 선행연구자들의 연구는 많이 있지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아주 오래된 고문서에서는좁은길이라고도 하고, 선행연구의 첫번째 필드스터디를 하신 선배님은 십자가인지 십자대 인지 라는 곳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는 전설도 얼핏 들었던 같다.

 

 

 

탓할 없다

나는 다수의 침묵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몰랐다.  무서웠다.  있는자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고, 자칫하면 밥그릇이, 가족이 위험해 질지도 모르기에 그러했다.  어떤 보다도 개인의 평안과 가정의 행복은 내가 지켜야만 하는 최고의 가치였다.  그래서침묵의 동조이론으로 보이게 유지되는 평화만 주장하는 힘있는 자들에게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을 비난 없다.  그것도 자신들의 선택이다.  게다가 개인의 행복과 가정의 안전은 여전히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할 없고 양보할수 없는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침묵을 비난할수 없고, 침묵의 동조자들을 탓할 없다심지어 초대 필드스터디를 나섰던 선배님도 사람들의 침묵을 탓하지 않으셨다.

 

 

 

후회

다만침묵의 동조이론을 실제로 경험한 필드스터디로 다녀온 이후, 옛날 이론에 매여 침묵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후회가 많이 되었다.  그때 누가 나를 탓하고, 비난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필드트립을 나갈것이다.  내가 필드트립을 나간다고 해서, 무시무시한 이론은 절대로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침묵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 예전처럼 나는 이상 침묵할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개인의 행복과 가정의 안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지만, 그것은 침묵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필드스터디를 다녀왔다고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기에 실수도 있고, 실패도 있고, 사고도 친다.  그런데 그것이 두려워서 침묵을 하기보다는 다녀와서 실수를 반성하는 편이 낫다. 

 

 

 

여전히 이론은 강력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나는 그러면 좁은 필드스터디의 길을 고민없이 두려움없이 같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소시민일 뿐이다.  필드스터디를 다녀왔지만 지금도 자주 침묵하곤 한다.  지금도 두렵고 무섭다.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뛰어서 가슴이 터질것만 같다.  다음번에는 침묵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고문서에 따르면, 초기 선행 연구자들이 당시 필드스터디에서 당한 협박에도 불구하고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없다라고 나와있다.  나는 선행연구자들의 고백과 첫번째 필드스터디를 선배를 믿는다. 

 

 

 

지금 침묵을 깨고, 필드로 나간다.

 

 

'다시함께 잘다니는 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5) 교회의 88만원 세대 -2-  (3) 2013.09.10
(2) 교회의 88만원 세대 (1)  (0) 2013.09.03
(4) 강남 복음주의자  (1) 2011.05.01
(3) “막장의 사람들”  (0) 2011.03.08
(1) “너 탓입니다”  (0) 2010.12.17
posted by paulusnam
2010. 12. 17. 00:11 다시함께 잘다니는 교회

다시 함께 다니는 교회 (1)  탓입니다                                                          Dec 15. 2010

 

들어가며

함께  다니는 교회시리즈 글을 마지막으로 것이 확인해 보니 올해 5월이었습니다.  어느덧 7개월이 흘렀네요.  그동안  하고싶은 말이 참으로 많았지만, 안으로 나름 삭히고, 고민하고 기도하는 좋은 시간을 보냈던 같습니다.  예전에는 멋모르고 글을 썼지만 지금은 약간의 사명감(?) 가지고 다시 펜을 잡았습니다.  저와 저희 가정에게 가해졌던 비정상적, 비이성적 폭력에 대한  사항도 약간은 보고해야 필요도 느끼구요 (미주 한인교회의 실상을 조금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씩 하지만 깊이 고민하고 기도하고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이제 쫓겨날 교회도 없으니 마음은 많이 편하네요.   교회는 저를 파문하고 자유게시판을 닫았다고 합니다.  자유는 불온한 것이니까요.  ^^

 

 

내탓이오

아주 오래 전에 지금은 소천하신 김수경 추기경께서 천주교안에서 내탓이오운동을 펼쳐오셨음을 기억합니다.  어릴 적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내탓이오운동은 비단 천주교계를 넘어 한국 사회에 전체에 영향을 미쳤던 같습니다.  마치 유행어 처럼, 무슨 일이 일어나고 발생하면, ‘내탓이다라고 고백하시는 많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무슨 비판이나 쓴소리를 하려는 분들이 뻘쭘해지시고는 입을 다물곤 했던 같습니다.   그래서 보통 내탓이오 논쟁이나 사고의 원인을 저적하고 파헤져 , 그것을 잠재우는 만능의 주문이었던 같습니다.  물론 내탓이오운동의 순기능 혹은 긍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보통 내탓입니다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탓이다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간혹 있었던 같습니다. 

 

 

나는야, 성골 기독교인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교단책에 나올 만한  촉망(?)받는 신앙인으로 교회안 에서 자라온 저는 학부를 졸업하기 전에 불온한(?) 분의 선생님과 여러 책들을 통해, 사회와 상황속에 신앙에 대해 깊이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름  고민(?)끝에 당시에   스스로, 사회과학의 신학(?)이라고 생각하는 사회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서울의 사립대에 대학원과정을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사회과학을 공부해 보신 분들이시라면  아시겠지만, 대학원에서 사회학이라는 수업은 세미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날 읽어야 책이나 페이퍼를 읽어 온후, 그것에 대한 (?) 푸는 것으로 3시간을 보냅니다.  성격이 급하신 선생님은 치열한(?) 침묵을 참지 못하시고 그날 수업분량을 요약정리 해주시기도 하시고, 가끔 현실정치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셨지만, 보통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말하기 까지 참고 기다리십니다.  학생들이 알아서 어떻게 썰을 푸는지 지켜보시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보니, 누가 의견을 내면, 의견에 대한 찬성과 반대, 비판과 비판에 대한 살벌한(?) 토론이 시작되고  어쩔때는 3시간을 넘어 거의 쌈판이 벌어지는 같기도 했습니다.   온건하고 모범적으로 교회안에서 자라 저는 은혜로 덮는다,’ 혹은 내탓이다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기에 한동안 세미나수업에 적응을 했었습니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인간을 비판하고 지적하나요?  내눈에 들보를 먼저 봐야지요.

 

 

변했어!

즈음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저와 절친했던 지체들이 저에게 , 변했어,”  오빠, 이리 사람이 까칠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 라고 하곤 했습니다.  난감했습니다.  학교수업에서는 가장 말도 못하고 비판도 못하는 사람이, 교회에서는 가장 비판적이고 쓴소리 하는 사람이 되버린 것입니다.   교회와 학교, 어디에도 적응을 하지 못하던 저는 결국 훗날에 전공을 바꾸게 됩니다 (농담입니다.  이것 때문에 전공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

 

 

이단에서 삼단을 훌쩍 넘어 사단도 되어 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흘러, 저에게 교회에서 반동분자(?), 이단(?), 교회를 가르는 사단(?)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함께 다니는 교회http://paulusnam.tistory.com 보시면 나와있습니다).   그분들은 앞에서는 한번도 반대의견을 개진하지 못하시면서, 제가 없는 자리에서 저를 감당할 없는 사람으로 만들곤 하셨지요.  그러면서 몇몇 분들이 없는 곳에서 내탓이오.’ 라는 말씀을 하셨더랬습니다.  그분들은 평상시에도 무슨 문제가 교회안에 불거질 때마다 내탓이다라는 말로 상대방의 입을 막으시는 분들 이셨습니다.  저는 곱게(?) 그리고 모범적으로 교회에서 자랐기에 그러한 말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생각이 사단적이거나 이단 같니?’  확인을 많이 해보았던 같고, 실제로 내가 문제가 있나? ‘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문제가 없기는 없겠지요.   부분이 내탓이오라는 말이 강력한 창이 되어 모든 사람의 입을 막는 병기가 되어 들어오는 부분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어느정도는 부족하고 잘못이 있으니, 만능의 무기인 내탓이오앞에 나가 떨어지게 됩니다.  여러 신앙의 선후배들과 성경, 그리고 여러 좋은 책들을 통해 생각이 유별나지 않다는 (그저 상식이라는 ) 확인한 후에, 분들이 저에 입을 닫는 무기로 내탓이오라는 말씀을 남들에게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차라리 앞에서 대놓고나 하시지.  

 

 

내탓이다라고 말하지만, 니탓이다!

 

내탓이오 생각에 모든 사물의 잘못을 자신의 허물이나 탓에 돌리기 보다는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무한한 창조주앞에 겸손이 머리숙여 나아가는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스스로 내탓이다라고 많이 자책도 회개도 하기도 했던 같습니다.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탓인거 같기는 한데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만능의 무기가 되어, 의견이 다른 상대방의 입을 막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은 부적절한 사용입니다.   그것은 마치 권세앞에 순종하라 비슷한 맥락이겠지요.    물론 모든 피조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므로 탓이므로, 그냥 조용히 기도만 하고 까불지 마라 문자적으로만 적용하려는 분들의 말씀은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닐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능칼이 되어 교회가 스스로 자정하고 개혁하지 못하고, 지금껏 오히려 교회를 내적으로 썩어가게 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설사 내탓이라도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자신에게 내탓이오라고 말할때 적용이 되는 것이지, 의견이 다르다고 내탓이오(실은 니탓이니까 조용히 잠자코 있어라!) 상대방에게 말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 것일까요?  자기가 스스로 혼잣말로 내탓이다라고 되뇌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원이는 딸입니다

사회학을 계속 공부할 수록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 ‘ 그리 강력하게 비호하고 변호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내가 하원이의 아빠인데, 다른 사람이 하원이 아빠 아니다 라고 해서 제가 사람에게 굳이 하원이 아빠야라고 출생증명서, 어릴   함께 찍은 사진, 이런거 보여주고 목소리 높일 필요가 없을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딸인데요.    거기다 대고 그냥 딸이오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입니다.   (실은 안해도 알고 있습니다.  딸은 아빠를 닮습니다 ^^)

 

 

탓이오!

오늘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내탓이오(실은 니탓이니까 조용히 잠자코 있어라!)’  전가의 보도로, 교회 안에서 생각이 다르다고 무조건 은혜로 덮으려는 분들에게 입막게 하려는 들에게 마디 랍니다. 

 

너나 잘하세요!”

 

 

 

 

나가면서

글들줄에 몇몇 편이 손질(?) 되어서 미주 뉴스앤조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이 그렇게 윤이 나게 만들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편집자분 탓입니다.  ^^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228

 

posted by paulusnam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