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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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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함께 잘 다니는 교회 (5)  “교회의 88만원 세대  (2)”                Sep 10, 2013



들어가며


교회의 88만원 세대 (1)을 쓴 지가 2년 반 전이다.  2년 반 동안 (2)편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간혹하기는 했지만, 예전같은 간절함이 엷어져갔고 내 안에 기대감이 사라져갔다.  아예 '다시함께 잘 다니는 교회" 시리즈 자체를 2년 넘게 글 쓰지 못했다.  그렇다고 글을 일부러 안쓰려고 했던 것도 아닌다.  그동안 또 많은 일이 있었었다.  그러다가 한달전 즈음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이 블로그에 교회의 88만원 세대 (1)  글이 "명예훼손"을 했다고 하면서 게시물을 삭제요청한다는 것이었다. 신고자는 분당중앙교회의 대리단체 (한국인터넷선교네트워크)라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명예훼손을 할만한 글을 쓴적이 없는 것 같아 다음의 권리침해센터에 가서 문의를 하려고 갔더니 휴대폰인증 혹은 아이핀 인증을 하라는데... 저야 뭐 미쿡에 살고있으니 한국휴대폰이 없고, 아이핀인증이라는 것은 처음 보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이의를 제기할 방법이 없었다.  한국은 참 이렇게 불편하구나 하는 생각과 티스토리를 떠나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백업한 자료가 있어 다시 (1)편을 올리고 나서 더 미루기전에 최소 (2)편만은 써보도록 하자 라고 생각하고 우선 자리에 앉았다.  


(1)편에서는 88만원(혹은 그보다 좀 적은 액수)을 받는 평신도 사역자에 대한 글이고, 이번 글에서는 교회내의 88만원 세대의 핵심인 부교역자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전도사나 레지던트 과정을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법학대학원, 의학대학원, 신학대학원... 이 세곳의 공통점은 전문대학원이라는 점 외에도 학비가 무척 비싸고 장학금의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나서 졸업하고 나서는 공통적으로 라이센스를 따거나 딸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의대에서 공부하면서 미국의 인턴과 레지던트의 삶이 한국에서 보던 예비의사들의 삶과 아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다.  물론 한국만큼 인턴이나 레지던트들이 비인권적이고 비정상적인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노동의 강도는 미국의 다른 어떤 직업보다 심하면서 최하의 임금을 받고 수직적인 체계에서 쫓겨나지 않기위해 매진하는 모습은 한국과 그리 다른 것 같이 않아 보였다.  왜 그럴까?  미국이나 한국에서나 아니 세계 어디에서나 의사는 가장 존경받고 고수입과 명예가 보장되는 직업인데...  왜 이들은 진짜 의사로 데뷔하기 전에 이렇게 '학대'받고 '고통' 당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비정상적인 모습을 그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물론 나는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추측하기로는 이 비정상적이고 고통스러운 '정해진' 시기가 지나면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게 되고, 그리고 나서 그들이 받게되는 명예와 금전적인 보상을 생각하면 단 2-3년의 (혹은 3-5년)의 인턴, 레지던트의 시간을 참고 견딜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몇 년간의 과정동안 노동조합을 규합해서 단체운동을 벌이기 보다는 비인격적인 대우와 최하의 임금을 받고 견디기만 하면 이전과는 비할 수 없는 '보장된 영광' 을 기다리는 것이 더 이익이지 않을까?  확실하게 보장되는 미래가 오기만 한다면야...  지금의 그통은 참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군대를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2년 2개월만 견디면 확실히 제대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전도사님들도  이와 상황이 비슷하다.  신대원 3년을 졸업하면 교단마다 다르지만 몇년간의 전도사 (강도사)의 시절을 보내고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하거나 어느정도 규모의 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받기 전까지는 너무나도 비인간적, 비인격적인 대우와 쥐꼬리만한 보수에 만족하며 온갖 노동력을 교회에,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담임 목사에게 제공하면서 무조건 충성을 해야 한다.  왜 그럴까?  그들도 담임목사가 되면 확실하게 보장된 미래가 오기 때문일까?  하지만... 전문의와 달리 목사는 목사라고 다 존경받고 고소득을 보장받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이름을 들어본 목사들, 연소득 1억의 너끈히 벌어들이면서, 자신이 소싯적에 똥구르마 끌었다고 자기 간증에 취해 사소한 곳에 목숨을 수시로 거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다.  대부분의 예비담임 목사님은 그렇게 되지 못한다.  그렇게 대우를 해주는 중대형 교회가 많지도 않을 뿐더러 요즘에는 그 수도 줄어들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주변에서 가끔 나이가 30대 후반, 아니 40대와 50대,,,  심지어 60대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목사의 길을 걷는 분들을 볼 수 있다. 김두식 교수의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잘 나가던 어떤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고 갑자기 하나님의 위해 살겠다고 신학교로 들어가는 스토리가 기독교방송이나 극동방송 라디오에 늘 나온다는 이야기...  근데 왜 불교나 천주교 혹은 다른 종교에서는 나이들어 사역자의 길을 걷는 분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뒤늦게 사역자의 길을 걷는 분들이 유달리 개신교에서는 많은 것일까?   위에서 언급한,  뒤늦게 나이들어 법조인, 의사의 길을 걷겠다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데, 이 왜 나이들어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겠다는 사람은 그렇게 많을까?  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이들어 뒤늦게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사람은 없을까?


역시 잘은 모르지만, 쉽게 생각해보면 진입장벽이 높기 때문이 아닐까?  의대 (혹은 의학전문대학원)이나 로스쿨에 입학하는 것은 쉽지않다.  경쟁률도 높고 이른바 문과와 이과의 가장 점수가 높은 사람들이 주로 가는 곳인데...  나이들어 머리도 굳어졌는데 그들과 경쟁해서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들어간다고 해도 나이가 어느정도 있으면 가정이 있어 가족을 부양을 해야하는데...  공부하면서 가족들을 부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학비는 일반대학원의 몇배가 된다.  한마디로 나이들어 인생의 전환점에서 다시 '의사가 되겠어' 혹은 '변호사가 되겠어.' 라고 잘 결심하지는 않는다.  현실이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다.  천주교의 경우, 아무나 신부나 수녀님이 될 수 없다.  소수중에 소수가 엄격한 심사로 뽑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그 과정은 처음부터 수련의 과정이 된다.  30대가 넘어 신부와 수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없지는 않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불교의 스님이나 비구니는 아예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하는 것이니 (삶 자체를 벗어나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더 이상 말할 바가 아니다.  물론 나이들어 얼마든지 머리밀고 스님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 사역자와는 달리 속세를 떠나야 한다. 


신학대학원은 다르다.  물론 몇몇 신학대학원의 M.Div. 과정은 경쟁도 치열하다고는 하지만 의대와 법대에 비할 바는 아니며... 무엇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수많은 신학대학원이 즐비해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렵지는 않다.  마음만 먹으면 거의 누구나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신학대학원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  어쨌든 들어가기가 어렵지 않다.   게다가 들어가기만 하면, 아니 신대원 합격소식을 듣자마자 그 날로 바로 '전도사님'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교회에서 사역을 할 수 있다.   주로 주말과 주일에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부교역자로의 수입이 생기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충분한 액수는 아니지만...  어쨌든 길은 있다.   풀타임으로 공부해도 살아남기 힘든 법대, 의대 대학원과는 달리 신대원 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사역을 한다.  


그렇다고 신학이 의학이나 법학보다 공부하기가 쉬운가?  글쌔... 내가 보고 듣기로는 가장 어려운 학문으로 늘 손가락으로 꼽히는 학문은 신학이다.  가장 오래된 학문이기도 하고, 그래서 가장 방대하고 깊이가 측량할 수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혹자는 학문의 제왕이라고 한다.)   물론 신대원은 학문으로 신학을 한다라기 보다는 전문사역자를 키워내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방대하고 심오한 신학이 결코 쉬워지지는 않는다.   미쿡에서도 가장 공부가 어렵고 그 기간이 길기로 유명한 분야가 신학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학박사라고 하면 우선 고개 숙인다.  정말 대단한 분들이시다.  (한국의 많은 유명한 목사님들이 가지고 있는 수업을 듣고 시간만 때우며 받는 목회학 박사들은 예외다.  - 물론 정말 어렵고 힘든 제대로 된 목회학 박사도 있지만...  찾아보기가 쉽지않다.   --;; )   기본적으로 헬라어 히브리어에 각종 외국어는 기본으로 깔고 공부해야 하는 신학에 대해서는, 독일에서 신학박사를 하기위해 시간이 너무 걸려 학위 중간에 의사 자격증,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오는 신학박사과정 학생들도 있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대신한다. 



나가면서


글이 길어질 것을 예상했지만 이렇게 길어질 줄 알았다.  --;;  일단 길이 길어져서 여기서 자르고 (3)편에서는 부교역자들의 실상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너무 글이 길어지면 쓰기도 읽기도 힘든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도 글이 너무 거칠어 무척이나 힘들었다.  하지만 나도 그 앞에 있는 (3)편의 즐거움을 위하여 (2)편의 과정을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할란다.  ㅎㅎ


*어떤 태클이나 문제제기를 환영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쓴 글이기에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고있다.  


**사법시험이나 사법연수원, 로스쿨쪽도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쪽은 너무 몰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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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함께 잘 다니는 교회 (2)  “교회의 88만원 세대  (1)”                        Jan 26. 2011

                                                                                                                                              

 

 

 

들어가며

 

최근 한국에서는 ‘88만원 세대’ 라는 책을 통해 20대의 비정규직 문제가 큰 화제였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전체 비정규직의 평균임금 119만원에 20대의 임금 비율인 74%를 곱한 액수가88만원이고, 앞으로 20대의 95프로가 이 88만원을 받으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비극적인 상황을 그렸다고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지 못하여 아무래도 책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이 ‘88만원 세대’는 20대의 젊은 비정규직을 지칭하면서 앞으로의 암울한 자본주의하에서의 한국의 경제적인 전망을 그리고 있는 새로운 용어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88만원 세대가 존재합니다.  이 새로운 용어는 기존의 88만원 세대와는 달리 세대를 지칭하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의 88만원 세대는 그 액수인 88만원에 근거하여, 주로 교회내의 비정규직이라 할수 있는 부목사, 전도사,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 찬양팀의 리더와 악기연주자, 한글학교 교사  등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기서 부교역자(부목사와 전도사)와 평신도사역자 (성가대, 찬양팀, 한글학교 등)은 성격을 약간 달리합니다.  전자가 비정규직을 상징한다면, 후자는 88만원정도의 액수에 근거한 분류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과 다음글은 이 두 분류를 나누어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이 글은 88만원(혹은 그보다 좀 적은 액수)을 받는 평신도 사역자에 대한 글이고, 다음 주에 교회내의 88만원 세대의 핵심인 부교역자에 대해 논해보고자 합니다.  

 

 

 

 

오래전 스카우트의 기억

 

10년정도 교회에서 찬양팀으로 활동해 왔던 저는 대학교 졸업반 즈음에 제가 다니지 않는 다른 교회로 부터 귀가 솔깃한 제안을 몇번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교회의 찬양을 인도해 달라라는 일종의 스카우트 제안이었고, 거기에 상응하는 물질(장학금형식의 돈)을 제공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다니고 있는 교회를 옮기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고 돈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닌것 같은 생각에, 길게 생각하지 않고 거절한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돈을 받고 한다는 것도 꺼림직했고, 제가 무슨 돈을 받을 만한 전문성(?) 또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기억하는 것은  무언가 이것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사례? 사례!

 

결혼과 함께 교회 청년부를 졸업하고 장년부와 제직에 진입(?)하게된 저는 이전과는 많이 다르게 교회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볼수 있었습니다.  그것중에 하나가 교회에서 돈을 받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경험이 아주 제한적이겠지만 한번 제가 관찰한 사항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1. 대학에서 음대에 입학한 A는 입학과 동시에 출석하고 있는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가 됩니다.  그리고 지휘를 하는 댓가로 한달에 30만원 정도를 받기로 했습니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전공과 관련하여 장학금 형식을 받는 것같아 좋았고, 이전에도 성가대 지휘를 하면 사례비를 받는 것으로 알고있기에  A는 별 생각없이 감사하게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았습니다.  

 

2. 중형교회에서 성가대지휘자와 반주자를 모집한다고 공고를 합니다.  공고의 내용은 아주 추상적이지만,  지원서 형식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그 지원서 형식에서는 자세한 가족사항과 전공과 음악사역의 경험, 목사님의 추천서 까지 내야합니다.  몇 주 뒤, 치열한 경쟁 끝에 현 대학교 음대교수인 B가 성가대의 지휘를, 교회일에 헌신적인  C권사님의 따님이 반주를 하게 됩니다.  B교수와 C권사님의 따님은 각각 교회에서 120만원, 50만원 정도의 사례를 매달 받게 되었습니다.   당회는 지휘자의 학력이 마음에 들었고, C권사님의 봉사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B교수님은 교회에서 2시간 거리에 살았지만, 지휘를 위해 교회 근처의 집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3.  한 교회에서 찬양팀을 인도하는 대학원 유학생D는 어느 날 목사님으로부터 교회에서 사례를 조금 하기로 했다며 월 200불 정도의 금액을 장학금 형식으로 D에게 건네 주었습니다.  평범한 학생이었던 D는 생각지도 않은 사례에 여러번 거절했지만, 교회에서 결정된 사항이라며 받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D는 사례를 안받을 수 밖에 없게 되자, 받은 사례를 그대로 감사헌금으로 매달 교회에 헌금하기로 했습니다.  

 

4. 교회에서 예배부장을 맡고있는 직장인E는 교회로 부터 매달 일정 액수의 사례를 받습니다. E가 다니고 있는 교회는 사역을 하고 있는 전신도가 교회로 부터 어느정도의 사례를 받습니다.  E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부장집사나 심지어 성가대 파트장들도 다 받기때문에 그냥 당연한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합니다.  

 

5. 비정규 연구직인F는 경제적인 어려움 당하고 있는 와중에 출석하고 있는 한인교회에 한글학교 교장을 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전공과도 관련이 없고 관심도 없지만 한달에 몇백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교장을 하고싶어 했습니다.   거기에 비록 전공자는 아니지만 자신의 아내를 한글학교 교사로, 성가대 반주자로, 그리고 각종 예산을 약간 전용하여  한달에 1000불이 훨씬 수입으로 3년만에 빚을 청산하고, 집도 사고 차도 사게 되었습니다.  F는 자신이 비정규직으로 불안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일을 놓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6.  한 미국의 대학의 지휘과로 유학을 오게된 예비 유학생 G는 입학도 하기전에 그 주립대의 한인학생 홈페이지에의 구인구직 란에 파트타임으로 지휘를 하겠다며 공고를 냅니다.

 

공고의 내용은

__________________

안녕하세요, 이번에 OO으로 유학을 떠나는OOO 입니다. OO대학에 오케스트라 지휘 석사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요. OO에 가서 지휘로 봉사할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한국에서도OOO에서 5년간 열심히 모교회 섬기듯 섬겼습니다.이곳에서 좋은 교회를 만나 미국에서 계속 열심히 신앙 생활 하며 교회를 섬기길 원합니다. 많은 연락 기다릴게요 

간략한 이력을 남기겠으니 참고해 주세요.

2010년OO 입학 예정

2009년OOO지휘 콩쿨 1등

2009년OO지휘콩쿨 우승 및 연주 (OO아트홀)

2009년OOO 합창 지휘 전공 졸업(수석)

2009년 제 4회 신인연주회 지휘부분 연주.

2008년 제 1회OOO주관 합창 지휘콩쿨 동상.

_____________

 

G는 몇몇 교회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한 교회의 담임목사와의 면담후에 채용이 결정되어 미국에 오자마자 감사하게도 바로 사역을 하게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사례를 받으려고 하지는 않았는데…

 

위의 6가지의 사례는 제가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교회에서 사례를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넓게 공통점을 찾아보면,

 

1) 교회에서 받는 사례가 자신의 주수입원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례가 없어도 생활 자체에 지장은 없다.  하지만 차차 이 사례에 기대게 되어, 이 사례가 없으면 생활이 점점 어렵게 된다.

 

2) 처음부터 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전공이나 형편에 따라 사례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3) 처음에는 교회에서 사례를 받는 것이 불편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했을 지라도, 다른 교회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사례를 받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4) 교회에서는 특정 사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례를 함으로써 나름의 전문성을 높이고 매주 예배에 반드시 출석하여 사역을 이어가게 할수 있게 되었다.  사례를 받는 사람들은 가급적 예배에 반드시 참석하여 그 역할을 기대할수 있다.

 

5) 교회에서는 사례비를 통해 경쟁력있는 인재를 구함으로써 여러 다른 교회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수 있다.  또한 그 사례를 받는 사람이 교수나 고위관리라면 보기에 더 좋기에 교회의 이미지도 좋아진다.

 

 

 

 

안받으면 어떻게 될까?

 

흔히들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의 여부를 프로와 아마추어에 비교하곤 합니다.  돈을 받는 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구분이 교회에서도 유효할지는 의문입니다. 

 

만약 위의 예시중에서 사례를 안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좀 더 전문성이 떨어지는 사람이 사역을 하게 될까요?  아니면 그 사역을 맡기로 한 사람이 자주 예배에 빠지게 되어 예배에 곤란을 겪게 될까요?  그 사역을 하는 사람이 생활고에 빠지게 될까요? 

 

개척교회나 소교회의 경우, 전문적인 사역 (주로 음악)을 할 충분한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사례여부와 상관없이 사역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나 중형교회 이상은 아무래도 교회안의 성도 중에 그러한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교회에서 사례가 없다고 하면 전문적인 사역들을 어떻게 될까요?  사역을 중단하거나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될까요?  아니면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만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교회내의 사역은 누가 하는 것이며, 왜 하는 것일까요?  돈을 받고 안받고의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하며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올까요?

 

확실한 것은 교회내에 이러한 사례를 하지 않는다고 그 이유로 교회 역사에서 예배가 중단된적은 없었습니다.   

 

 

 

돈을 안받으면 어떨까요?

 

신학적으로 레위인들은 일을 하지 않았기에 사례를 받는 근거가 있다느니, 혹은 성전에서의 봉사는 신도로서의 자발적이어야만 하는 것이여만 한다느니 하는 것을 여기서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보다 훨씬 탁월한 분들의 견해와 주장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저의 제안은 단순히 돈을 받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돈을 받지 않으면 자신의 헌신정도가 떨어지거나 혹은 생활이 힘들어지지 않는다면, 안받으면 어떨까요?  받고 도로 헌금하는 것 말고, 그냥 아예 안받으면 안될까요? 

 

마태복음 6장 1-6절에 보면 사람앞에서 보이게 의를 행하거나 기도하면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나옵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 시리라

 

앞선 5장에서도 보이게 금식하는 것은 역시 이미 상을 받았다고 나옵니다.   금식과 기도, 구제와 의를 행함이 그러하다면,  이 구절을 사례를 받는 사역자에게 적용하면 너무 무리한 적용이 될까요? 

 

수많은 자발적 봉사단체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례없이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들여 봉사하고 이웃을 섬김니다.  교회는 자발적 봉사단체도 아니고, 파트타임직을 만들어내는 직장도 아닙니다.  그 돈으로 더 많은 이웃섬김과 선교, 그리고 구제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느 교회나 성가대 지휘자는 사례를 받아왔기에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에서 그것을 이상하고 낯선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비단 저뿐일까요?  교회안의 88만원을 받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성도들이 그 88만원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교회 밖의 이웃들에게 나누고 함께하면 약간의 전문성은 포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배에서 성가대의 화음이 좀 삑사리가 나고, 찬양인도자가 음이탈을 하고, 반주자가 반주를 좀 틀리면 은혜가 떨어질까요?  그것보다는 예배를 사랑하고, 하나님 찬양하기를 사모하고, 열정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사역하는 사람이 전문성있고 전공하는 사람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 기쁘시지 않을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가면서

 

다음 번에는 이 논의의 핵심인 부교역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비정규직 중에 비정규직, 88만원보다 어쩌면 더 적은 돈을 받으면서 사역하는 부교역자들.  힘도 없고, 목소리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그들에 대해서 고민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paulusnam

다시함께 잘 다니는 교회 (3) “막장의 사람들”

                                                                                              March 3, 2011 남상곤

 

 

들어가며

교회안의 88만원 세대의 두번째 꼭지의 부교역자에 대한 글은 좀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직 첫꼭지의 평신도 사역자에대한 피드백에 대한 제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글을 쉽게 잘 쓰지 못하는 저로써는 아직 부교역자에 대한 사례가 아직 충분히 조사되지 않았기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준비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졸업한 모교에서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터져서 2월, 한달동안 여러가지를 고민하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래서 오랜시간동안 고민하고 기도해왔던 “막장의 사람들”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저는 남의 사람들의 뒷담화를 잘 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를 불편해하고, 또 그런 이야기가 나와도 쉬이 잘 믿는 편도 아닙니다.  그런 제가 몇몇의 교회안의 막장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공개적으로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에 대한 저의 솔직한 고민이자 기도입니다.  이것을 이번에 나누고 싶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 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보통 ‘원수’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기에 어쩌면 이 말씀은 그리 큰 깊이를 가지고 다가오지 않을 수 있지만, 세상의 비정함을 겪어 본 사람들은 (원수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이 말씀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말씀인지 알고있습니다.  상대방으로 인해서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리거나, 인격적인 살인을 당하거나, 그들에게 가족이 협박을 당하게 되는 일을 당해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관되게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하시고, 주기도문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면, 그 어떤 죄를 우리에게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지만, 그것이 과연그렇게 쉽게 할수 있는 일일까요?  정말 막장인 사람들을 만나보고 당해보면, 그말씀은 예수님이시기에 하실 수 있는 말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만 들게 됩니다.  

 

 

 

그들을 만나다

저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한국에서다녔던 교회들은 하나같이 다 좋은 곳이었고, 좋은 분들을 만났고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왔었던 것 같습니다.  제 안해와 친구들은 저보고 좋은 교회만 다녀와서 너무 교회와 세상을 모른다고 이야기 하곤 했었습니다.  그것은 참 내 자신이 신앙의 여정을 걸어오는 데 큰 자산이었고 좋은 기억이지만, 세상의 실상을 아는 것에 있어서 제한적인 이해만 가지게 되었었습니다.  즉 ‘모든 교회와 모든 교회 사람들은 선하고 착하다’ 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생각지도 아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막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막장의 사람인 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피하나,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도 그들이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 이말에 이해하는 분들의 마음을 제가 압니다 ^^;;)

 

 

 

돈과 섹스

지금은 거의 소설가라기 보다는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이문열의 초기작 중에 하나이자 표절문제로 얼룩진 ‘사람의 아들’의 초반부에  보면, 살인사건을 두고 수사를 시작하는 남경사가 보통 범죄는 돈과 여자 때문에 일어난다고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잘 안나지만, 만약 어떤 범죄가 이 두 가지의 중의 하나로 벌어지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거의 수사가 미제로 남게된다고 하면서  이 살인사건 수사의 어려움을 이야기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소설에서의 살인사건은 돈과 여자와 관련된 문제라기 보다는 신과 신을 찾는 사람들인 민용섭과 조동팔, 아하스 페르츠에 대한 이야기였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제가 만났던 교회에서의 막장의 사람들도 이 남경사의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만났던 교회에서의 막장의 사람들은 나이가 어린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도 있고, 평신도도 있고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관통하는 한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돈과 여자’ 였습니다.   막장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두가지의 문제에 최소 한가지는 반드시 걸렸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에서 양심을 팔거나, 성적인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고 어둠속의 일들을 저지리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아니면 두 가지 모두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이 두가지의 문제에 걸리지 않은 것 같이 보여도, 실상 속을 들여다 보면 이 두가지의 문제가 늘 이 막장의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 두가지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씁쓸한 것은 그 막장의 사람들을 교회에서 나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 두가지의 문제가 아니라면 막장까지는 아니었을텐데… 신앙과 영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으면 막장까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세가지의 질문과 고민

저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세가지의 질문입니다.  첫번째로, 과연 내가 그들을 막장이라고 부를 만한 떳떳한 사람인가?  두번째로,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할수 있는가?  세번째로 그렇게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저의 고민이 이 꼭지의 핵심입니다. 

우선 첫번째의 물음에 대해서는 제 스스로 그렇게 떳떳하고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은 충분히 막장이라고 부를만 하다 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에 대해 저에게 ‘교만하다’ 혹은 ‘아직 인격적인 성숙이 덜 되었다’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제가 그냥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뒷부분에 조금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그 분들은 막장이라고 충분히 불릴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제가 지는 것이겠지요.  제가 아직 부족한 탓일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과 내가 하나님앞에서는 ‘오십보 백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들과 내가 오십보의 차이가 있더라도 절대적인 선과 정의의 하나님앞에서면 그 차이는 거의 제로에 가깝게 됩니다.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하라고 하시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저를 용서해 주신 것 처럼, 그들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이것이 제가 아직 고민하고 있는 접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들과 저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그러나 부족하고 모자란 저로서는 아직 그 오십보 때문에 무척이나 괴롭습니다.

두번째에 질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또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돌아볼때, 나도 그들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하고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때는 일시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때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의식적으로 품으려는 결단을 매일 매일 해야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상대를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기본적인 예의와 상식이 없는 것을 넘어서, 파렴치하고 무례한 그들을 보면서 매일매일 저는 시험에 듭니다.  제가 아직 부족한 탓이겠지요?  하지만 역시 풀리지 않은 문제입니다.  저는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없습니다.  솔직한 제 고백입니다.

세번째 질문에 대한 고민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고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저의 잠정적인 결론은 그냥 피하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무섭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합니다.  거의 모든 말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서 삼자대면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삼자가 대면해도 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모든 것이 거짓이니 기본적인 공통된 가정 자체가 없어집니다.  대화 자제가 진행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 분들은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하를 보게되는’ 분들입니다.  예를 들어 그분과 제가 말싸움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가 내 생각은 이렇고 논거는 이렇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보통 상대방은 거기에 대한 반론과 그 근거를 대겠지요.  그러나 그 분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저의 집에 와서 방화를 하고 가는 식입니다.  이런 분들은 정말 예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상궃어서 별로 어디가서 겁을 느껴보지 못한 저로서는, 이분들 앞에서는 정말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을 합니다.  상대할 만한 가치가 없기에 피하기도 하지만, 무서워서 피하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 다름의 문제이겠지만

톰 라이트라는 신학자가 그의 책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에서 "선과 악의 경계선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 있지 않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관통한다" 라는 솔제니친의 말을 인용했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막장의 사람들은 악하고 저는 선한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러한 사정없이 무책임하게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해라 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인간적인 연약함을 느끼며 하루하루 십자가앞에 나가야 함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여전히 무섭습니다.  나는 그들이 무섭습니다.  정말 인간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가슴이 콩딱콩딱 뜁니다.  그들에게 한마디를 하면 그들은 저의 이야기를 백마디 왜곡되어 퍼트립니다.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가 없는 상황에서 파렴치함과 무례함 그리고 거짓말과 왜곡으로 당당하게 서있는 그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정치인이 된다면, 무엇보다 유치원을 의무교육으로 시킬 것입니다.   -

 

 

 


-별책 부록편-

이부분을 쓰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우선 그 분에게 해가 가지않고 또 그분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기에 구체적으로 사례를 나누것이 글의 이해를 돕기에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이 부족했다면 이 부분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언 주십시오.

두세분의 막장의 최고봉이 생각나지만 그분 중에서도 최고를 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상식과 예의가 없는 파렴치한 파렴치한…너무도 파렴치한…

이 막장의 사람들은 보통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치원에서 다 배웠어야 할 ‘상식’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식이 없으니 자신이 왜 욕을 먹는지 모릅니다.   그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이 괜찮으면 그것으로 다 괜찮은 것입니다.  이 분들 중에 최고봉에 이른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분의 이야기를 조금 나누어 보겠습니다.  편의상 이분을 A라고 하겠습니다.

처음 만났을때, A 부부는 눈치가 좀 심하게 없다라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의 모임을 할때, 자신에게 할당 된 일들을 너무나 무책임 하게 하지않고 경우에 맞지않은 예의가 없는 말을 많이 하기에 뭐 그런가 보다 싶었습니다. 

머리가 이가 난 자신의 아이를 구역모임에 버젓이 데리고 나와서 사람들을 경악시켰고, 아이들은 씻기지 않아 냄새가 났지만 전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은 모임에서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괴롭히는데도, 자신의 아이들도 그렇게 하면서 자랐다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기에 다른 아이에게 피해를 줄때 엄하게 혼을 내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츰 이 분이 단순히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습니다.  우선 어디에선가 출처가 모호한 신앙에 대한 간증과 글들을 마치 자신의 경험담인 것 처럼 자랑스럽게 나누는 것을 보고 고개가 갸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S교회의 J목사였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A는 교회에서 직분을 통해 돈을 버는 것에 혈안이 되었지만 그 직분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워했습니다.  게다가 직분을 이용해서 자신이 교회의 예산을 전용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나갔고, 그래서 건성으로 대충대충 그 직분을 하면서도 이미 거기서 부터 들어오는 A의 수입은 이제 그 직분을 멈추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수입을 통해서 쇼핑을 한 것을 자랑거리 처럼 내놓는 것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A에게 그것을 말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직분을 이용해서 예산의 전용하여 이익을 챙겼지만 그 일에 대한 능력이 없고 책임감이 없으니 차츰 많은 교회 사람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고,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목사와 장로에게 거짓증거 들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목사에 눈에 드는 것이 신앙생활에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A는 다행히 자신과 비슷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목사에게 충성을 다짐합니다.  목사는 A를 잘 파악하고 적절히 조종을 하기도 하면서 A를 충분히 활용합니다.  그러면서 암묵적인 보상을 약속합니다.  1-2년 뒤에는 안수집사를 파격적으로 제시하겠다고.  그래서 A는 더욱 목을 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존경받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인 A는 안수집사가 되면 그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날이었습니다.  나보다 연배가 약간 위인 A는 자신이 나이를 먹었으니 자신이 더 많이 안다면서 나에게 충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동생같아서 그렇다를 수십번 반복하면서 자기가 관심과 애정이 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 닥치고 가만이 있어라 의 이야기 였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엄하고 감정표현이 없는 부모님 밑에서 심한 상처를 받고 자라난 A는 자신의 동생에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해서 동생과의 사이가 좋지 못할 뿐더러, 그 상처를 그대로 자신의 아이에게 쏟아붇고 있어서 옆에서 지켜보는 몇몇 교회분들이 심한 걱정을 많은 상태였었습니다. 

A는 어느날 교회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저의 뒷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목사의사주로 시작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스스로 충성된 모습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미니홈피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저를 조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가 가입한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제 글들이나 행적들을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제 글들과 제 글들에 대한 다른 분들의 댓글등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그것을 교회에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저를 이단으로 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글들을 자신이 교묘히 편집을 해 놓고 자신이 이메일을 보냈으면서 자신도 이러한 이메일을 받았으니 나누겠다고 하는 이중인격의 최고봉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 메일을 우연히 받은 한 분은 이런 사람이 교회에 있다는 것에 정말 충격을 받아서 자신이 직접 교회에 공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겠다고 했지만 제가 말렸던 기억이 납니다.

A는 그렇게 제 뒷조사를 하다가 제 개인(가족)클럽을 존재여부를 알게됩니다. 참 신촐귀몰한 분입니다.  그러더니 어느날 저에게 와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그 클럽에 자신의 가입시켜 달라고 요구합니다.  제 안해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만든 그 클럽은 아주 극소수의 저희 부부를 잘 아는 분들이 회원으로 되어있고, 거기에 저희의 연애시절의 추억부터 지금까지의 사진과 글을 보관해 온 개인클럽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밀클럽으로 되어있어 검색을 해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개인클럽에 자신이 생각하는 무슨 월척(?)이 있을지도 모르는 A는 그의 부인을 대동하여 자신이 같은 교회에서의 지체이니 당연히 자신도 가입을 시켜달라고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간은 최근 4-5년은 새로 멤버를 받은 적도 없고, 저희 가정의 비밀적인 내용을 나누어도 기도를 해주실 분만 멤버로 되어있는 곳인데… 그곳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가입시켜 달라고 우기면서, 무엇인가 켕기는(?) 것이 있으니 오픈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너무 어이가 없는 저는 개인의 사적인 공간의 오픈여부를 강요받는 것에 대해서 어디서 이야기를 해야할지 말 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자신들도 교회의 가족이 아니냐고 가입을 시켜서 투명하게 공개하라라고 너무다도 담대하게(?) 외치는 A부부의 모습에서 저는 그 부부가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것을 확신한채 어디서부터 상식강의를 해야할지 정말이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A는 저를 불러내어 자신이 저에 대한 안좋은 이메일을 받았는데 (자신이 보내놓고 자신이 받았다고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정말 아연실색했습니다), 교회를 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어떻게 교회를 다니겠냐고? 은근히 협박을 하시더군요.

그분의 메일에서 몇몇 내용을 직접 인용을 해보겠습니다.

“여기 오기전 메일을 안보신 것 같습니다. 카페를 처음 입구에서 막았네요. 아마도 10분 이상 글쎄 이글들을 읽고 이메일로 더 많은 분들이 돌리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겁니다.  원래 글 내용에서 예기하신 대로 좋은 교회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모른체 하고 다른 사람들과 보고 생활하기가? 제 동생과 나이가 같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서 더 기도해야 겠네요.”

자신이 저에대한 악의적 편집을 한 글들을 첨부해서 사람들에게 보내놓고 저에게도 한부 슬쩍 보내면서 자신이 이런 메일을 받았으니 조심하라(?)라고 친절히 조언을 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제 가족클럽을 오픈하던지 아니면 구역모임에서 나가라는 양자택일을 하라고 은은한 협박을 해주십니다.

“그 제가 말씀 그대로 비밀클럽을 오픈하던가 (자신이 있으시면 오픈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 중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입니다. 교회에 문제제기를 해서 교회를 완전히 바꾸는게 목적인지 아니면 교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 끌어 내려는 목적인지 명확하지가 않군요. 아마도 비밀클럽으로 차단하면 더 비밀스러워져서 더 의심만 생길겁니다. 구역은 허울뿐인 가족이구요 카페공동체는 진심을 나누는 곳으로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런 구역원은 원치 않습니다. 같이 나누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가족같은 구역이 되길 원합니다. 저두 남상곤 형제님 가정을 잘 모릅니다. 너무나 많은 비밀이 있어서 왠지 어떨때는 남같이 느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다음에는 저희 구역으나 저희 교회에 관련된 분의 필터링이 있은 후  글을 올리시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  선택은 본인이 한다고 하셨으니까 구역을 원하시던 카페를 원하시던 신중히 결정하시고 메일로 알려 주세요.”

A와 관련된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고 황당하고 파렴치한 일들이 계속 생각이 납니다.  제 주변의 많은 분들도 저와 동일한 생각으로 A를 불쌍하게 보기도 하지만 가까이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A는 늘 외롭지만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기에 받는 고난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을 냅니다.  오늘도 그는 사람들에게 배설물을 뿌리고 상처를 줍니다.  무섭지만 불쌍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정말 제가 감당할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셔서 제 근처에 두게 하셨는지 정말 진지하게 궁금합니다.  A부부는 오늘도 제 주변을 돌면서 제 뒷조사를 하고, 제가 이단이라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다니느데 열심이십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몇몇 분들이 저희에게 와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자신들도 A부부를 멀리하게 된다고...  A부부만 여전히 모르십니다.

 

A께서 저지른 일들이 이외에도 많지만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 같아 여기서 우선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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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22. 16:23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세번째 05/07/2010

                                           남상곤

 

“헌금리스트와 헌금채”

 

 

들어가며

ㅇㅇ교회에 와서 이전과 다녔던 교회와 색다르게 보았던 몇가지 중에 하나는 헌금입니다.  우선 주보에 헌금별로 한 성도분들의 이름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주 인상깊었고 두번째로는 헌금시간에 헌금통이 돌아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이전에 다녔던 한국이나 미국의 다른 교회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교회와 같이 주보에 헌금을 한 성도들의 이름을 나열하거나 헌금채를 쓰는 많은 교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제가 이것에 대해 접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은 처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이 두가지의 낯선 광경을 거의 2년동안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조심스러운 것은 제가우리교회의 이런 부분을 비판을 해서 바꾸자!’ 라는 것이 아닌이것이 어떠한 의미와 의도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한번 좀 다르게 생각해 보자입니다.  부디 오해가 없으시기를 두손모아 기도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가상의 예화

 

목사님의 설교가 지루하고 졸릴때, 설교시간동안 유달리 오래동안 주보의 이곳저곳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교회주보의 헌금하신 분들의 명단을 보며 이름을 하나하나 보며, 머리속으로 주보에 나와있는 이름과 머리속에 저장되어 있는 이미지를 하나하나 맞춰보기도 합니다.  A집사님은 이번주에 주일헌금, 십일조헌금, 감사헌금에 선교헌금까지 하셨음을 보면서 웬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듭니다.  역시 요즘 사업이 잘되시는가 부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 얄밉게 여겨져서 웬지 싫었던 B집사님의 이름을 찾아봅니다.  역시 없습니다. 웬지 뿌듯하며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각 헌금별 헌금액수를 봅니다.  우리교회에서 십일조헌금이 어느정도 퍼센트가 되는지도 보고, 머리속으로 일년 혹은 한달 헌금 총액도 재빠르게 계산해 봅니다.  이만하면 불경기에도 불구하고교회재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겠다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직도 설교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창을 주보를 뒤척이다가 이제 성경을 여기저기 들추어봅니다.  성경사이에 끼어져 있던 옛날 교회행사 간지가 있습니다.  그것도 꺼내 여기저기 봅니다.  ! 다행히 설교가 끝났습니다.  마음을 모두어 눈을 감고 기도를 합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헌금시간입니다.  헌금위원분들이 나오셔서 기도하시고 헌금채를 돌립니다.  헌금채를 돌리는 것을 보면서 헌금을 빨리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갑을 꺼내 보니 아차!  5불짜리와 50불짜리 지페만 있습니다.  5불짜리만 넣기에는 뭔가 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50불짜리 넣기도 좀 그렇습니다.  헌금채는 다가옵니다.  무엇을 넣어야 하는 것인가?  한창 고민하다가 오늘은 50불 짜리를 넣습니다.  재빠르게 돈을 넣고 헌금봉투에 이름을 쓰고 침을 발라 붙였습니다.  찬송을 은혜롭게 부르다가 헌금채가 올 시점에 긴장하고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합니다.  왔습니다. 헌금채를 받고 헌금을 하고 옆분에게 헌금채를 돌리고 비로소 안심하며 찬송에 집중합니다.  좀 아깝고 아쉬운 생각이 들긴 하지만 뭐 나중에 택스면제혜택을 받는 부분도 있는데다가 하나님께 헌금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은거지 라고 생각하며 나의 믿음을 스스로 대견히 여깁니다.  이제 축도 마치면 빨리 가서 식사줄에 너무 늦지 않게 설 준비해야 겠습니다.

 

 

 

주보에 나오는 헌금한 성도 리스트

 

주보에는 일주일간의 교회소식이나 예배안내와 순서등이 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중요한 사적인 문서가 아닌 교회의 공적문서입니다.  거기에 매주 헌금하신 분들의 명단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올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 리스트를 올리는 것이 중요할지 정말 진지하게 그리고 오래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게 생각한 것은헌금 하신 분들이 헌금을 했는데, 혹시나 교회가 누락할까봐 확인을 시켜준다였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거 같은 것이, 저도 헌금을 할때 이름을 쓰기도 하고 안쓰기도 하는데, 이름 쓸때는 다음주의 헌금에 제 이름을 찾아봅니다.  그런데 없을때도 몇번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이름을 고의로 누락시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리과정에서 제 이름이 다다음주에 올라갈수도 있는 것이고 무슨 실수가 있을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정부에 가서지난주 헌금했는데 왜 내이름이 없냐라고 따지지는 않습니다.  그런것을 보면 꼭 확인차 올리는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두번째로 생각해본 것은 교육적인 효과입니다.  주보에 헌금하신 분들의 이름을 보면서 신앙교육적으로 이렇게 헌금을 정기적으로 꼭 해야한다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육적 효과라면 왜 교회 주보에는 리스트를 올리는데 홈페이지에는 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번째로는 헌금하는 것을 장려하고 경쟁관계를 유발시켜서 많은 헌금을 하게하려는 것일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한 실명이 나오기에 내 이름이 안나오면 상대방이 나를 교회에서 믿음없는 사람, 혹은 헌금않는 사람으로 오해당할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 이름이 나와야 하는 것을 의무처럼 여길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같이 헌금할때 이름을 쓰기도 하고 안쓰기도 하는 사람과, 혹은 아예 늘 무명으로 헌금을 드리시는 분들은 저 리스트로 무슨 피해를 보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밖에도 다른 중요한 이유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부족한 머리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리스트를 올리는 것인지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럴수는 없겠지만 주보에 헌금한 분들 리스트를 안올려본 주와 올려본 주의 헌금액수를 비교해보면 좀 의미있는 차이가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만 해보게 됩니다.

 

또한 헌금할 때 저는 꼭 제 이름과 안해 이름을 같이 적습니다.  그런데 헌금리스트에는 꼭 제 이름만 올라갑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 안해 이름을 먼저적고 제 이름을 나중에 적어보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제 이름만 나왔습니다.  괜히 안해에게 미안해 졌었습니다.  헌금리스트를 주보에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면 안해 (혹은 자매)의 이름도 같이 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혹시교회에서 부부도 헌금을 각각 따로하라라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헌금의 항목에 대해서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교회주보를 보면 주일헌금과 십일조, 선교헌금이 큰 카테고리로 나옵니다.  중요헌금이라고 여겨지기에 그렇겠지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헌금보다 구제헌금을 주로 합니다.  저는 따로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고 (자세한 것은 아래 더 읽어볼 거리를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제 십분의 일을 교회에 보고하는 것도 좀 거북스럽습니다.  그래서 몇몇 헌금으로 헌금을 나누어 내는데 이름을 쓰기도 하고 익명으로 하기도 합니다.  주로 구제헌금을 하는데, 구제헌금을 하고 다음주 주보를 살펴보면 제 이름은 선교헌금 항목에 있거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선교헌금을 한 것이 아닌데 거기 들어간 이름을 보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삼대헌금이 아닌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마이너헌금이 되는 것도 어떠한 근거와 의도인지 좀 궁금한 생각입니다.  물론 주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큰 액수를 차지하는 의미라면 그러한 규모의 기준보다 차라리 이번주 헌금하신 분들을 통칭적으로 (감사, 주일, 십일조 헌금의 구분없이) 그냥 올리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헌금항목별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번주 헌금하신 분들 하고 그 리스트를 헌금구별없이 그냥 이름만 주르륵 올리는 거지요.  그러면 감사, 주일,  십일조 헌금 세번 다 한 분은 이름에 꽃표를 해드려야 하는지 고민도 여전히 생기네요.  ^^

 

 

 

헌금함과 헌금채

 

헌금시간이 되면 헌금채가 돕니다.  제가 헌금채에 좀 불편한 이유는 세가지입니다.  첫번째는 저는 부부가 한몸이기에 (돈주머니가 하나이기에) 저의 안해와 제가 통상 헌금을 따로 하지 않고 같이 하는데헌금채에는 한사람만 헌금봉투를 넣을수 밖에 없습니다.  주로 안해는저보고 하라라고 하고 자신은 헌금채에 헌금봉투를 넣는 권리를 저를 줍니다.  하지만 저는 그 권리(?)를 안해에게 주기도 하는데 그럴때  참 난감할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채가 제 차례에 왔는데 저는 헌금봉투가 없기에 그것을 받아 옆에 분에게 전달할때 헌금봉투 안넣고 옆으로 돌리면 뻘쭘(?)합니다.  제가 다른 분들을 유심히 보면 전혀 당황하거나 뻘쭘하지 않으시고 옆으로 잘 돌리시는 내공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저는 그런 내공이 아직 안되어서 헌금채가 왔는데 헌금봉투를 못넣고 돌릴때마다 얼굴이 화끈화끈 해집니다.  매주 노력합니다.  뻘쭘하지 않고 최대한 나이스하고 아무렇지 않게 해보려고 하는데  그래도 어색하기는 여전합니다. 

 

두번째로는 저에게 다가오는 헌금채 때문에 기도나 찬송에 집중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헌금채가 오면 빨리 헌금봉투를 넣고 (혹은 넣지않고) 다른 분에게 넘겨야 하기에, 지금 헌금채가 어디까지 와야 집중해서 봐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헌금시간에 하는 찬송의 가사에 집중해서 찬양하기가 쉽지않고 헌금채 돌리는 시간을 때운다는 생각이 듭니다.  헌금채가 아직 다 돌지않으면 목사님은 다시 3! 혹은 4!을 외치시면서 후렴을 한번 더 부르자고 하십니다. 헌금채는 다 돌지 않았는데 찬송이 끝나면 무시무시한(?) 정적감이 찾아올 수 있기에, 한번 더 그 집중하지 못하고 불렀던 찬송을 한번 더 불러야 합니다. 

 

세번째로는 동전을 넣거나 봉투없이 넣을때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우선 헌금채가 돌때 봉투가 아닌 그냥 돈이나 동전을 그냥 넣기가 힘듭니다. 웬지 반드시 헌금은 액수에 상관없이 봉투에 넣어서 해야할것 같은 의무감이 듭니다.  봉투에 넣어서 하면 더 성의있고 준비된 느낌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겁니다.  봉투에 넣어서 하면 더 준비했다라는 뜻도 있을수 있겠지만 그 액수가 숨겨져 있다는 것으로 부담없이(?) 헌금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폐를 넣을때는 웬지 옆사람이 내 헌금액수를 알게 되는 것 같아 좀 꺼려집니다.  그리고 헌금을 동전으로 하시는 분은 최근에는 거의 못 본것 같습니다만, 헌금을 동전으로 할수도 있습니다.  형편이 그럴수도 있고, 액수가 적다고 헌금 못내는 것은 아닐겁니다.  그런데 동전으로 헌금을 내면 웬지 분위기상 쪽팔리는 것 같고, 헌금채에 넣었는데 혹시나 헌금채안에 동전이 있을 경우에 내가 넣는 동전과 부딪혀 그 금속성의딸랑이 울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정말 뻘쭘할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거부감과 압박감

 

제가 이전에 다녔던 교회들은 헌금리스트가 주보에 올라가지 않았고, 헌금채가 돌지 않았습니다.  헌금리스트가 안올라오니 굳이 누가 헌금을 내고, 누가 헌금을 안내고 등의 전혀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 지금같은 생각을 아예 안해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헌금채 대신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전에 헌금함에 헌금을 했었고, 그때는 봉투가 있던 없던, 동전을 넣던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헌금함이 있다고 예배시간에 헌금순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시간이 되면 헌금위원분들이 교회헌금함을 열어서 그 헌금을 모아 앞으로 가지고 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올립니다.  헌금시간에 찬송을 방해받거나 다시한번 4절을 해야하는 경우가 적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헌금리스트가 주보에 올라는 것과 헌금채가 도는 것에 대한 성경적 혹은 역사적 의미나 맥락이 있는지 조금 찾아보았습니다.  몇몇 소수의 의견이나 자료가 있었지만 어느것도 확실한 성경적 혹은 역사적 의미를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 개교회 별로 하고있는 방식은 다 달랐던 것 같습니다.

 

혹자는 헌금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헌금리스트나 헌금채에 대한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신경쓸 필요는 없다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 같이 믿음이 부족하고 재정이 튼튼하지 않는 사람이나 새신자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새신자나 저같이 믿음이 부족한 신자들의 경우, 주보에 올라간 헌금하신 분들의 리스트나 헌금시간에 돌아다니는 헌금채를 보면서 웬지 모를 거부감(?)을 느낍니다.  게다가 헌금을 하기가 힘들정도의 재정상태를 맞은 성도들의 경우 (이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분들도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그 리스트와 헌금채로 인하여 받게되는 압박감은 참으로 큽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헌금은 하나님과 나와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헌금(봉헌)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체면때문에 헌금을 하는 것과 그 액수가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보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내 재산이 100만불인데 1불 헌금했다고 그 사람을 나무랄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재산이 100만불이지만 부채가 200만불 일수도 있고 (그사람의 사정을 모를수 있고), 그 사람의 믿음이 1불짜리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이지 제 3자가 왈가불가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헌금액수에 따라서 믿음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에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액수를 보시지 않고 그 헌금하는 사람의 자세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제가 부족하기에 헌금리스트를 주보에 올리거나 헌금채를 돌리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요소에 대한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노파심에 강조하는 것은, ‘이것들이 문제가 있으니 바꾸는 것이 좋겠다가 아니라왜 이렇게 하는 것인지를 한편 되집어보자의 시도일뿐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헌금을 내는 것에 대한 세금보고 혜택에 대해서는 지면상 더 다루어 보지는 않았지만 한번즈음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간 기회가 있겠지요.

 

 

하나님과 나 사이의 헌금
함께잘다니는 교회(13) 헌금 리스트와 헌금채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532

 

 



더 읽어볼거리

 

 

십일조와 직분 없는 새들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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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재정의 십일조로 아이들 밥 먹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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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삼겹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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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수호자들의 불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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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변절과 십일조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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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전하고 돈을 받는 목사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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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권사 되고 싶어? 돈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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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채, 세상보다도 더 세속적인 악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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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21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번째  04/12/2010

 

 

                                                                남상곤

                                                                                                                                                                                                                                                                                                                                     

 

 

아직도 숨기워진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

 

 

 

들어가며

 

벌써 열번째 글입니다.  처음에 생각하고 기도한 바와는 달리 제가 고민했던 주제들을 거의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열번의 글을 통해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됩니다.  좀 더 가볍고, 좀 더 부담없이 다양한 소재를 다뤄보고자 하는 저의 인간적인 의도와는 달리 좀 더 진지하고 좀 더 고민해야하는 것들을 좀 더 쉽게 써야하는 변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은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하게 됩니다. 

 

"Quo Vadis Domine"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혹시 의도적으로?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 라는 말은 신약성경에만 100번이상 나오는 말입니다.  중요한 말이 자주 반복되어 나온다는 상식에 비추어보더라도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 개념이고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하나님 나라라는 구체적 표현이 거의 없지만 신약에 특별히 복음서에 집중적으로 반복, 그리고 강조되어 나오는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 의미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라 보다는, 예수님이 등장하시면서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에 더 가시적으로 신약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등장하시면서 하셨던 말씀도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5) 이였습니다.  어떤 분들은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복음서를 이해할수 없다고도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주 언급되고 강조되어진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잘 모르고 있거나, 배우지 못하거나,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일부로 그런 것 같이  왜 우리는 교회에서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배우고 가르치고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유들

 

하나님 나라는 참 정의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무엇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늘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한번 실제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좀 잡히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보아라.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누가 17:20-2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누가 18:1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복음 3:3-5)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내가 그것을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마치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올랐다." (누가복음 13:18-2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마태복음 19:23-24)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마가복음 10: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마가복음 4:1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은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의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수 있게 된다." (마가복음 4:26-32)

 

 

어떠십니까?  좀 감이 오십니까? 위의 예화나 비유외에도, 수많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들과 말씀들이 있습니다.  열거한 성경 말씀들만 보면, 감은 오는데 여전히 잘 잡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하나님 나라에 논의중에서 위의 예시를 토대로 몇가지의 특성만 좀 주목해서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하나님 나라

1. 예수님 그 분 자체라는 것,

2.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

3. 하나님나라는 숨기워져 있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도대체 뭔가요?

 

하나님나라는 우선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될거라고 생각하는 천국이 아닙니다.  위에 예수님이 드신 예화들을 잘 살펴보면 죽어서 가게 된다고 흔히 알려진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공간이나 영역적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첫째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 곧 하나님의 왕권 (주되심) 과 통치를 의미한다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과 공간은 예수님이 오셔서 시작되었고, 예수님 그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분이셨기에, 예수님이 바로하나님 나라그 자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하나하나씩 실현해가시는 삶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따르는 그 예수님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내가 만약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에 뜻을 순종하게 되면 거기에서 또 작은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하나님 나라의 D-Day (예수님의 초림)이라고 하고, 독일의 전쟁항복선언을 하나님 나라의 V-Day (예수님의 재림)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미래성 각각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속성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현재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Already (이미), but not yet (그러나 아직 완전히는 아닌) 으로 이해합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시작되었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로 약속하신 그 날에서야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고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도래한 것은 아닌 그 중간단계에 살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비밀스럽고 숨기워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초반부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왜 비유로 설명하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11),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1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그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라고 하셨는데그것은 바로 나, 나아가서 우리,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인 교회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제가 처음에 궁금해했던 것,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데 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잘 배우지못하고 들어보지 못하고 나누어본적이 없는가? 에 대한 답변을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수많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과 속성중에서 위의 세가지에 비추어서 살펴본다면,

 

첫째,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그 자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말씀은 예수님의 생과 삶에 대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삶과 말씀, 그 자체가 우리에게 불편하고 어렵고 찔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들은 참으로 행하기 어렵고, 불가능하기까지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빰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대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어라, 일곱번씩 일흔번도 용서해라, 이제는 아예 용서를 넘어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시지요.  이러한 말씀들을 들으면 아득해 집니다.  상식적으로 절대 이해가 안될 뿐더러 그럴게 할수도 없을 것 같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이 바로 하나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완전히 임하는 그날에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불가능하게 보이는 말씀을 회피할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already)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행하는 사람에게 바로 하나님나라가 시작되고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빨간색으로 나와있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를 가르치고 선포하는 교회는 요즘에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듣기에 귀에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귀에 거슬린다는 것이 그렇게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선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 쓰라렵기 때문입니다. 이 쓰라림의 경험이 없으시다면 한번 가슴에 손을 얻고 냉정히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믿는 것은 잘먹고 잘사는 축복된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십자가에 매일 매일 못박는 삶입니다.  예수믿고 축복받는다는 것이 돈 잘벌고 사회에서 성공하고 호위호식한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오늘날의 교회는 거리낌 없이 가르칩니다.  바로 하나님나라가 없는 가르침입니다. 

 

둘째로 하나님나라가 이미 우리가운데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인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도래할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현세에는 하나님 나라를 외면합니다.  ,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나라는 어차피 미래의 일이니, 지금에는 그저 좀 대강대강 살고, 또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어차피 미래에 일이니 지금 현재는 대강 내 사리사욕 챙기며 권력욕과 돈을 추구하며 평수를 늘리고 자녀보험을 하나 더 들어두는 것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역사하시는 것이고, 그러기에 내가 현재 뭐 특별히 할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좀 한눈팔고 살아도 괜찮다고 은근슬쩍 타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틀리지는 않은 말 같습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맞기는 합니다.  그러나 유명한 신학자인 톰 라이트의 비유로 설명하면, 우리는 설계자에게로 부터 각자에게 맡긴 설계도면을 받았고, 그 도면에 따라 각자 자기의 맡은 부분에 따라 돌을 깎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돌이 어느 자리에 가서 어떻게 놓여 건물 일부가 될지는 현재 지금 이 돌을 깍으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설계자가 오시면, 그 건물 전체의 윤곽이 드러나고 결국에는 설계된 건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그때를 기다리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위한건설인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숨기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유로 말씀하시고 설명하셔도 결국 귀있는자가 듣는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닫는 마음은 하나님도 여실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들었던 모두가 그 뜻을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당시 유대신앙의 리더격인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아예 그 비유를 듣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을 쫓았던 제자와 그 무리들만이 그 비유를 듣고, 또 그 비유의 의미를 예수님이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지만 희한하게도 다 알수가 없습니다.  숨겨져있고 가려워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 많은 교회들에게도 이 하나님의 나라가 숨겨져있고 가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교회안에서도 잘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마가복음 4:11)  한마디로 많은 교회가 저 바깥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없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함이 없으면 비록 교회의 형태를 띄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저 바깥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숨기워진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중심주제이면서 기독교신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교회에서는 잘 들을수 없고 배울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교회가 교회다운 기능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잘 드려서 돈을 많이 벌어 성공했다는 록펠러나 카네기를 예를 들면서도, 자기 부모와 친족을 버리면서까지 십자가를 쫓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없는 교회에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물질주의와 상향성에 대한 욕구가 교회에 만연한 체로 세상의 기득권과 권력체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교회에서는, 끊임없는 자신을 돌아봄과 회개가 요청되는 하나님 나라는 선포될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무엇인가로 고립된 섬같은 고독을 느껴보지도 못한 체, 끊임없는 큰 집과 더 높은 지위만을 바라보고 쫓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들을 수 없고 배울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바깥 사람들에게 숨기워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거룩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주되심을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인정할때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한 두 영역이 아닌 전영역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주되심 (Lordship)이 세워져야 합니다돈과 재물에 대해서는, 자녀에 관해서는, 출세에 대해서는 눈감아 지는 것이 아닌...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이 인정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회개와 기도, 용서와 사랑, 그리고 그 의를 구하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질때...  우리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고 운동성을 가지고 미래에 완성되어질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주되심을 인정한다는 것은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라는 엄청난 주제를 짧게 쓰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을 글 쓰기 전부터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실행을 해본 무지막지한 저의 용기에 저도 놀라곤 합니다.  ^^  무식하지 않으면 용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부디 성령하나님의 도움으로 제 부족한 글쓰기가 많은 성도분들에게 잘 이해되기를 계속 기도하게 됩니다그리고, 계속해서, 모든 영역에서 주되심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부를 쫓는 교회가 숨겨둔 하나님나라 
함께잘다니는교회'(8) '아직도 숨겨진 하나님나라 (Kingdom of God)'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93

 

 

더 읽어볼만한 책들

 

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짐 월리스, “회심

양용의,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18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여덟번째  03/22/2010
 


ㅇㅇㅇ 집사님께


                                                                                                      남상곤

 

 

이 글은 제가 전에 다녔던 미주의 한 한인교회의 게시판을 통해 제가 연재했던 ‘함께 잘 다니는 교회’의 글들을 보고 A집사님께서 저에게 쓰신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A집사님께서는 당시 저의 첫글인 ‘예배가 너무 졸려요’ 에서 댓글로 기도를 좀 더 하고 글을 써라 라고 조언을 해주시고, 자장면이냐 탕수육이냐 라는 글 다음에는 저에게 직접 게시판을 통해 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좀 많이 길어서 걱정입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여지는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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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잘다니는 교회 – A 집사님께

  

들어가며

우선 A 집사님이 용기있고 진지하게 제 글에 대해 의견을 개진해주셔서 참 감사를 드립니다. 문제를 은폐하고 회피하는 것보다 이렇게 열어서 논의하고 또 이를 계기로 더 기도할 수 있는 계기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계속적으로 교회 안에서 진지하고 고민하면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계시는지 논의하고 기도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남상곤 형제님 

연초에 출장떠나 있을때 저를 포함해서 형제님도 교회서 집사임명이 되었다는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먼저글에는 형제님으로 호칭했으나 "형제님"은 여전히 좋은 단어이고 부를수록 친숙하게 느껴지기에 그대로 쓰겠습니다.  

 

--->A 집사님,

제가 서리집사가 된지 이제 8년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유학을 나오기전에 집사임직을 받았고, 작년에 제가 서리집사가 아니었던 것은, 휴스턴으로 새로 이사와서 A교회에 새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것보다는 제 스스로 집사로서의 안식년을 개인적으로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직분보다는 차라리 교회안의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A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혹시나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A 집사님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불편해 하실 분도 계실 것 같아, 저는 계속 집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글을 쓸 때는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리 신경 써도 읽는 사람이 글을 선택적으로 읽거나 또는 선택적으로 인용되면 곡해가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글을 쓸때에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기 위해 쓴 글이 종종 잘못 오해 혹은 오독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우선 A 집사님께서 제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거나, 선택적인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지 않으신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쓴 '짜장면이냐, 탕수육이냐?'의 글의 요지를 뭐라고 보시는지요?  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것은 마지막 부분의 첫째, 둘째, 셋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집사님의 이해를 돕고자 간단히 요약하면, 첫째, 목회자에게 과도의존하여 신도들이 스스로 성경을 펴서 읽고 고민하는 데에 게을리 하는 것을 우려했고, 둘째, 대제사장이라면 대제사장의 직무를 소홀히 하거나 목회자에게 맡기지말고 스스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현재의 목회자 수준의 헌신과 섬김이 신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 세번째로 전 신자 제사장 교리가 단순히 우리가 제사장이라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일상의 삶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배가 되야한다 라는 세가지 입니다.

그런데 집사님의 글에 요지는 (제가 읽건데) 1. 하나님안에서 하나되는 것은 잠잠하고 침묵해야 한다, 2. 하나님은 권위와 질서의 하나님이기에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3. 그리고 기도하는 것은 어렵고 글을 쓰는 것은 쉽다. 4. 아울러 순종과 기도로 교회를 위해 문제제기를 하지말라 라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만약 제가 잘못 읽었다면 확인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제가 왜 집사님이 제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고 생각했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제 글의 요지는 '전 신자 제사장 (Priesthood of All Believers) 교리' 가 아닙니다. 제가 위에 언급한 세가지를 논하고자, '전 신자 제사장 교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만약 집사님이 제 글의 요지를 이해하셨다면, 먼저 이 세가지에 대한 의견을 먼저 주시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집사님께서 '전 신자 대제사장 교리'에 대해서 이해나 동의가 어려우시다면, 제 글에 대한 반박보다 루터나 칼빈의 글을 읽으시고 그 글에 반박을 하시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2. 권위와 질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제 글에서 권위와 질서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언급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한 '전 신자 제사장 교리'에서 목회자가 더 이상 구약시대에 제사장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하나님이 질서와 권위의 하나님이기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더 더욱 이해가 어렵습니다. 

3. 그리고 목회자의 권위와 설교권을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근거로 말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은 아니라고 알고있습니다.  그러면, 집사님의 개인적인 견해이신가요?  제가 부족하지만 성경을 읽고 공부한 바로는, 목회자의 권위와 설교권은 더 이상 목회자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고 배웠고 알고 있습니다. 

4. 기도가 어렵고, 글을 쓰는것은 쉽다는 것은 어떤 생각과 근거에서 말씀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왜 기도는 어렵고 글은 쉽지요?  기도와 글이 반대의 개념인가요?  기도도 글로 나타납니다.  성경의 시가서들은 글로 된 기도입니다.  왜 기도와 글이 반대의 개념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시편의 기자들의 많은 기도들이 쉽게 쓰여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5. 왜 교회에 문제제기를 하면 순종과 기도에 위배가 되는지 역시 잘 이해가 어렵습니다.  문제제기가 순종과 기도에 위배되는 것인가요?  저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셨던 사역의 대부분은 '문제 제기'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시고, 성전에 가셔서는 불같이 화를 내시고 판을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늘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고 논쟁과 토론(질문과 답변)이 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맞으니 잠잠하고 순종해라’ 라고 아니하시고 어처구니가 없는 뻔한 질문에도 더 좋은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6. 만에 하나라도 집사님이 말씀하신 순종과 기도라는 것이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그냥 눈감고 좋은 게 좋은 것이고 그저 은혜 (?)로 덮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정상이고,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기도로 함께 해야겠지요.  역사적으로도 문제가 없었던 교회가 없었고, 지금도 문제가 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형제님이 몇 번에 걸쳐 쓴 글을 관심과 또한 우려를 가지고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부분이 젊었을 때 저의 고민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공감도 합니다. 저도 한때 기성교회에 대해 많은 반발도 있었고 많은 상처도 있었습니다. 다음주 출장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분주한 가운데도 형제님의 마지막 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형제님께 글을 써야 하겠다는 마음을 주시네요. 형제님이 저를 위해서 기도한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몇 주 전부터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 집사님께서 제 첫글에 첫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하구요.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저도 집사님이 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집사님께 글을 써야 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집사님을 위해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글의 내용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 갈 수 있는 만인 제사장인 것은 맞습니다. 사역은 목회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평신도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신도"라는 호칭도 어떤 의미로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사명 받은 "사역자"로 선 것이니까요. 전임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가 아니면 생업을 가진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가로 나눌뿐이지요. 어찌 보면 평신도라는 소극적 단어로 인해 생업을 가진 사역자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수동적인 교회안의 종교인으로 끝나는 우를 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제가 만인 제사장이 아닌 ‘전 신자 제사장’ 이라고 표현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이 아닌 믿는 신자가 모두 제사장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평신도에 대한 표현도 맞지 않는 것에 동의합니다.  저 역시 평신도라는 용어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대처할 만한 용어를 만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그냥 성도라고 써도 좋을 것 같구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를 허락하였는가도 알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 만인 제사장을 허락하고 그것으로 끝난다면 각자 집에서 성경보고 기도하며 직접 하나님과 관계 맺고 신앙생활 하면 되지 왜 교회에 모여야 하나요?  그것은 우리가 공동체로 모여서 해야 하는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새로운 약속)은 교회를 통하여만 이루어 가십니다.  모여서 하나되어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는 하나가 됨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건강치 못한 교회들이 많기에 꿈과 같은 일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신 일이고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되는 일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매주 정확하고 탁월한 지적이십니다.  교회의 핵심 중에 하나는 공동체성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적예배가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부르심은 개인적이면서 또한 공동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에서의 예배와 공적 예배가 공존해야 우리의 부르심이 완전해 진다고 믿습니다.  제가 '전 신자 제사장' 을 강조하고 일상에서의 예배를 강조한 것이 공적예배에 대해서 소홀히 해야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공적예배가 일상의 예배에 비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고, 일상에서의 예배는 덜 인식되거나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님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한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여러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분열’이나 ‘하나됨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전체주의적 사고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하나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연합됨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집사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다양하고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나가 될수 있을까요? 형제님처럼 꾸준히 자기생각을 교회사이트에 올려서 하나가 될수 있을까요? 그러면 몇백명의 사람들이 다 같이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함락할때 하나님께서 왜 7일동안이나 침묵케 하셨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잠히 하나님이 앞서 하시는 일을 보라 하시는 명령을 많이 보게됩니다. 우리가 말을 많이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없습니다.

 

------->집사님의 궁금점이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배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한가지의 통일된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저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이트에 올린 글들은 그 배경과 생각이 다른 한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는 제 글을 모두가 다 동의할거라고 당연히 생각치 않으며, 동의할 수도 없다고 당연히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을 꾸준히 교회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왜 하나가 될수 없을거라 생각하시는지요?  오히려 생각이 다른 데, 아무 말 없이 있는 것이 더 하나되고 연합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안드시는지요?

중요한 것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서로의 인정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생각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집사님께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되었다고 생각하시는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핵심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다른 신앙의 색깔과 노선을 같이 안고 갈 수 있는가?  그리고 내가 믿는 신앙만큼이나 상대방의 신앙도 존중해 줄수 있는가?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저는 집사님이 말씀하신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우선 다른 생각을 우리 교회안에서 표현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우리 교회 상황에서는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전체주의적으로 사고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하나의 시각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A 집사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됨은 무엇인지요?  의견과 생각은 다르지만 잠잠하고 조용하는 것인가요?  생각은 다른데 그래도 잠잠하고 조용히 있어서, 다른 생각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됨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함락할때 7일간 침묵한 일이 집사님께서 이 맥락에서 드신 합당한 예가 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듭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위해 7일간 침묵한 것이, 과연 침묵하고 잠잠하라라는 문자적 의미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 상황에서 7일간 침묵하고 잠잠해야 했을까요?  저는 전적으로 여리고 성의 함락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 읽었고 묵상했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다르게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성경에 잠잠하고 침묵했다고 나오면, 모든 상황에서 침묵하고 잠잠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집사님께서 여러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생각만을 해야하니 잠잠하고 말을 하지말아라 하는 뜻으로 이 예를 드셨다면 저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깊은 영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에 저는 절대 동의합니다.  침묵을 통해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교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극복하려는 논의와 토론을 혼란으로 여기시는 것은, 집사님께서 교회사적인 전통에 대해서 잘 모르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문제에 대한 논의와 토론의 역사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등은 기독교의 공의회에서 토론으로 형성된 교리이며 (우리가 진리로 믿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의 경우,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사항이 아니라 니케아 신조에서 여러 사람들의 논의와 토론으로 정립된 사항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당시의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회의, 하이델베르크 논쟁을 통해,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신학자들과 격렬히 토론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러한 논의와 토론(말과 글) 으로 지금의 개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시면, 사도들은 토론을 통해서 교의를 형성해갔음을 알수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오라 우리가 와서 서로 변론하자’ 라고 말씀하시는 변론과 토론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

 

하나님의 교회를 허락하시고 교회에 질서를 원하셨습니다.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질서는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신앙적으로 검증받은 사람들을 세워서 장로로 교회를 취리하게 하셨고 신학교에서 훈련받은 목사로 말씀선포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권한과 권위는 어찌하다보니 우연히 그리 된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아무나 나서서 가르치면 질서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집니다. 완벽한 교회는 이땅에는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안드는 부분들이 많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훈련을 위해서 이용하시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고치자는 목적이 질서보다 우선하지는 않습니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습니다.

 

--------> 교회에 질서를 원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질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제가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집사님은 권위와 질서를 혼용해서 쓰시는 것 같은데 제가 볼 때는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일하시기에 편하라고 질서를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바라보는 하나님은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비효율적이고 일을 어렵게 하십니다.  4일이면 갈 수 있는 애굽에서 가나안의 여정을 40년으로 돌리십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비효율적인 일에 대한 비용을 하나님께서 감당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일하기 편하다’ 혹은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라는 것은 우리의 시각입니다.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시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입장에서 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질서가 있어야 일하시기 편하신 분이 아니고, 우리가 보기에 질서가 없어 불편해 보여도, 하나님께는 전혀 불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질서가 없더라도 그분의 일을 행하시는데 전혀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  집사님이 말씀하신 질서는 사람들이 일하기 편하기 위해 질서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집사님께서는 교회의 질서를 강조하시고,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교회안의 자유함이 필요하고, 주의 영이 계신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을 읽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 자유의 하나님 모두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어느 한가지의 속성이 우월하다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여러가지 하나님의 성품 중에 집사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을 더 많이 만나시고 느끼셨듯이, 저는 자유의 하나님을 더 많이 체험합니다.  질서가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이라면, 자유 역시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입니다. 

목사만이 말씀선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점이 듭니다.  그것이 만약 목사만이 말씀을 선포할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이라면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으로 말씀을 선포할수 있습니다.  다만 말씀을 더욱 깊이있게 보기위해 그 역할을 전문적인 신학훈련을 받은 목사가 주로 하는 것이지 그것이 목사나 장로만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게 ‘전 신자 제사장 교리’ 이지 않습니까?

집사님께서 말하시는 '아무나 나서서 가르치면 질서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진다' 는 말씀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 서로의 선생이요 제자입니다.  '아무나' 를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교회 평신도를 말씀하신 것이라면 역시 위험한 생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사님의 ‘아무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직분인지요?  직분이 되면 나서서 가르칠수 있고, 직분이 안되면 가르칠수 없나요?  과연 어디에 누가 직분이 되면 서서 가르칠수 있고, 안되면 서서 가르칠수 없는지 나와있는지요?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아무나' 일어나 가르친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 지금과 같은 권위를 당시에는 존중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고백을 보면 그 ‘아무나’ 인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는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해 일어나 설교할때는 예수님을 3번이나 배반하고 나서 아마도 2달 정도의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당시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배반하고 부인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 입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와의 차이는 한사람은 자살했고, 한사람은 살아서 회개했던 차이입니다.   둘 다 예수님을 배신한 배반자였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베드로는 당시 '아무나' 보다도 못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자가 무슨 설교냐?' 라고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한술 더 뜹니다.  바울은 스테판집사를 돌로 때려 죽인 사람입니다.  스테판 집사를 돌로 죽인 살인자가 다시와서 그 스테판 집사가 설교하던 예수를 전했습니다.  당시의 바울은 ‘아무나’ 보다도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구약시대와 달리 한명의 선지자나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이루어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야고보가, 안디옥에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또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이가, 바로 집사님이 말씀하셨던 '아무나' 가 성령을 받고 일어나서 가르치고 설교합니다.  구약에서는 '아무나' 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아무나'가 있습니까?  그 '아무나'는 이제 왕같은 대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대제사장을 집사님은 여전히 '아무나' 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집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아무나’를 통해서 지금도 역사하시고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초대교회에서도 언제나 문제투성이었습니다.  과연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가한가?  바울이 과연 사도권이 있는 사람인가?  이스라엘을 두고 이방인의 땅에 가서 전도하는 것이 과연 먼저인가?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주의하고 대할 것인가?

당연히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제가 없는 척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죄인들인 사람들이 모였기에 당연히 문제가 있고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문제에 대해서 오픈하고 논의하는게 빈대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일까요 아니면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없는 척 질서만을 강조해서 회칠한 무덤이 되는 것일까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오히려 문제가 없는 것처럼 덮는 곳에서 후에 폭발성을 가지고 문제가 크게 발생해서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문제가 있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용기있고 정직한 태도라고 믿습니다.  

교회의 문제를 고치는 목적이 질서보다 우선하지 않는 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은 아닌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제가 읽었던 성경중에 그러한 내용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성경읽기가 짧아 미처 못 읽었던 것이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은 교회의 질서에 관한 집사님의 개인적인 견해인 것 같습니다.  비록 그 견해에 저는 전혀 동의하지는 않지만, 집사님이 그러한 견해를 가지신다는 것 자체는 존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든지 견해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신앙생활은 권위의 싸움입니다. 평생 삶속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내속에서 속사람의 권위에 순종하느냐는 권위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국가나 교회의 권위도 하나님이 허락치 않으면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권위를 인정치 않으면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의 권위는 더더욱 인정하기 힘듭니다. 교회도 질서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가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위에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권위가 있듯이 교회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가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바울선생님이 말한 내 속에서의 또다른 사람에 대한 갈등을 권위의 관점에서 보시는 것은 참 참신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서로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집사님은 국가나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셨지요?  그럼 하나 여쭈어 보겠습니다.  극단적인 예가 될 수도 있겠지만, 2차 세계대전에 히틀러의 독일도 국가이고, 국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니 무조건 순종해야 되는 것인가요?  당시의 일본제국주의 역시 국가였으니 집사님의 말씀대로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니 무조건 따라야 하는것인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에 천주교회도 어찌되었던 분명히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가 면죄부를 돈을 받고 팔았는데 그 교회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이고 그런 권위에서 나온 하나님의 명령이니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인가요?  집사님의 말씀, '국가나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 과연 언제나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게다가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는 교회에서는 섬김입니다.  남에게 명령하고 ‘내 말에 잠잠히 순종하라’ 하는 것이 권위가 아니고, 예수님처럼 낮아지셔서 죄인들을 만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권위는 세상에서 말하는 권위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상에서의 권위는 ‘무조건 잠잠하고 순종하라’ 가 통하는 사회겠지요.   그런데 세상에서도 실제로 권위가 있는 사람은 ‘내가 권위가 있으니 잠잠하라’ 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 권위가 있으면 알아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그러한데,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권위라면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요? 더 잘 알고 더 잘 고개 숙일 것입니다.  보통은 권위가 없는 사람이 억지로 권위를 주장할때 하는 말이 ‘내가 권위가 있으니 잠잠하라’ 입니다.  ‘내가 권위가 있으니 내게 순종하라’ 라는 것은 최소한 기독교의 진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권위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가장 낮아지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가장 높은 권위를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집사님이 예로 드신 바로 그 로마서 13장이 과연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해서 무조건 적으로 순종하라라는 말씀일까요?  문자적으로만 보면 그렇게 쉽게 볼수 있습니다.    저도 그 구절을 주로 이용해서 무조건적으로 귄위에 순종해야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되었습니다.  말씀을 볼때는 그 말씀의 콘텍스트를 같이 보는 것을 교회에서 훈련받아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곡해되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i] 

질서와 권위를 강조하시는 분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시는 로마서 13장을 강조하시는 분들 중에 그 배경이 되는 로마서 12장을 언급하시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간단하게만 언급하면, 로마서는 당시 로마제국에 의해 핍박받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쓴 바울의 편지입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은 이유는 로마의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을 흔드는 정치적인 반역행위였고 그래서 반역죄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마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기독인들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반역자들었습니다.  정치적인 반역의 의도가 전혀없는 순수한 신앙인들이 정치인으로 처벌받는 아이러니속에서 사도바울은 귄위에 대한 복종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복종은 무조건 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공동체는 국가에 대해서 언제나 '조건적' 으로 복종할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우상숭배나 살인(당시 로마군에 입대하는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할때, 기독인들은 그 요구에 복종할수 없습니다.  로마에 대한 반역의도가 없는 초대교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을 받을때 사도바울은 그 교회공동체들에게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나서 로마서 13장이 등장합니다.   바울사도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교회를 지속적으로 박해하던 거대한 악 (로마제국)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방법으로 '복종'의 윤리가 제시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배경을 깡그리 무시하고 로마서 13장을 대하면 그저 모든 권세와 권위는 다 하나님께로 온 것이니 무조건 순종해야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서가 쓰여진 콘텍스트를 고려한다면 과연 시대를 초월에 모든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라라는 의미가 아님을 명확하게 알게됩니다. 

그리고 집사님께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권위가 있다고 하셨는데 (물론 당연한 말이고 저도 동의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보통 부모에게 권위가 있다고 강조하시는 분들 중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라’ 라는 성경 말씀을 더불어 강조하시는 분은 거의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따르라’ 는 아닐 것입니다.

 

형제님이 지적하는 문제의식들은 현대교회들에 분명 존재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은 ㅇㅇ교회사이트 보다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기독교 사이트에 더 알맞는 내용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사이트에 올려지면 마치 우리 교회에 문제가 있는것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무는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걸고 누구나 볼수 있는 열린 공간에 올리는 글은 좀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쓰는 글들이 구체적인 실례를 들지는 않았지만,  A교회에 현재 다니고 있는 제가 느끼는 (그리고 적지 않은 우리 교인들이) 안타까움들을 나눈 것입니다.  제가 불특정 다수인 한국교회 성도 전체를 다룰 역량과 실력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그럴 위치도 아니구요.  다만 제가 이 글들을 우리 교회 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제가 다니고 있는 우리교회에 문제는 교회외부의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볼 수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를 우리교회 안에서 우리가 다루어야지 그것을 우리 교회 밖에서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집사님께서는 '교회 사이트에 올려지면 우리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요? 없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있는데 없는 척 하자라는 것인가요?

그리고 우리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이 모인 곳에 문제가 없겠습니까?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같이 열어서 논의하고 기도를 해야지, 문제가 있는데 없는 것처럼 덮는 게 과연 진정으로 교회에 덕이 되는 일일까요?  비단 저희 교회만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다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당연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모였는데 문제가 없다 라는 교회를 저는 한번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도 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는데 은혜(?)로 덮는 것이 과연 교회를 허무는 빌미가 될까요  아니면 문제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같이 고민하고 기도하는 것이 교회를 허무는 빌미가 될까요? 

 

형제님, 우리의 신앙의 진짜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변화하지 못하는 진짜문제는 몰라서 못하는것이 아닙니다. 교육이 모자라서 못하는것도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좋지않아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토론회가 없어서 못하는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고 싶어도 할수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사탄의 세력을 이길수 없습니다. 교회는 말이나 구호로서 일을 하는곳이 아닙니다. 성경은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고 하나님의 신으로만 된다고 합니다. 이런유는 기도로만 이길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문제에 대해서 말만 많이하지 정작 엎드려 기도하지 안는다는 것입니다. 

 

------>집사님, 저는 우리 신앙의 문제가 제대로 온전한 복음을 교회를 통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온전히 배우고 알면 그 이후에 고민되는 행함과 섬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고민과 함께 잘 다니는 교회는 무엇이고 어떻게 사람들과 평화롭게 같이 잘 살아갈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주의화 되어있고 기복 신앙만을 강조하는 반쪽 복음만으로 저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바꿀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하나님께 이것을 놓고 엎드려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기도는 많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앙과 믿음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은 잘 안한다고 생각합니다.  근거없는 유언비어나 수군거림은 혹시 많을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우리교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태도로 나누는 것은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말하기는 쉽습니다. 글쓰기도 쉽습니다. 남의 허물은 잘 보입니다. 인터넷 뒤져보면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현대교회의 문제점들을 쓴소리로 고발하는 좋은 글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쓴소리로 변화를 가져올까요? 친절합시다! 외친다고 친절해 질까요? 겸손합시다! 외친다고 겸손해 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교회를 위하여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명령하십니다. 구호를 외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말의 성찬에 있지 아니합니다. 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기도가 어렵고 글쓰는 것은 쉽다고 집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집사님은 글쓰기가 쉬우신가요?  저는 글쓰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쩔 때는 기도보다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면에서 글쓰기는 쉽고 기도가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집사님은 글을 쉽게 쓰시고 기도를 어렵게 하시는지 몰라도 저는 글쓰기도 어렵고 기도도 어렵습니다.  글을 쉽게 쓰시는 집사님이 솔직히 부럽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시면 글을 보고 글쓴이가 기도를 많이 하고 썼는지 적게 하고 썼는지 알 수 있는 것인지요?

그리고 남의 허물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이요, 우리의 문제입니다.  제가 문제 제기를 했다고  남의 허물을 쉽게 보아 남의 허물을 지적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저의 허물, 나아가 우리의 문제를 논한 것입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 제기는 작게는 저의 허물이요 넓혀서는 우리교회의 우리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논해야 하는 것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쓴소리가 변화를 가지오지는 않지만 변화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목회자가 세습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뜻있고 용기있는 분들의 문제제기로 이제 그 문제가 심각한 문제이고 기도해야할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세습은 일어나지만 (변화는 없지만), 이것을 문제있다 라고 인식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변화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 집사님이 저보고 ‘친절하자’, ‘겸손하자’ 구호를 외친다고 하셨는데, 집사님의 논리대로라면 지금 동일하게 집사님도 ‘기도하자’, ‘잠잠하자’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친절하고 겸손하자가 구호라면, 집사님의 기도해야한다 순종해야 한다 역시 구호겠지요?  맞습니다!  집사님 말씀대로 이렇게 구호만 외쳐서야 당연히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요? 

친절하고 겸손하자고 해서 집사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될거라고 의도도 기대도 하지 않았구요.  그런데 집사님의 말씀대로라만 기도하고 순종하라고 해서 변화가 이루어 지던가요?   설사 그렇다고 순종만을, 기도만을 강조한다고 변화가 이루어질까요?  기도를 할때 내가 하는 기도가 바른 기도인가?  바른 기도제목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한번 쯤은 진지하게 기도와 같이 같이 병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대로 보시는 것은 참 위험하신 생각이라고 봅니다.  집사님은 지금 제가 ‘기도는 안하면서 글은 쉽게 쓴다’ 라고 가정을 넘어 아주 위험한 단정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 첫글의 댓글에서도 ‘기도를 하고 글을 써라’ 라고 권유해주셨는데요, 거기에서도 동일하게 제가 ‘기도를 하지않고 글을 쓴다’ 는 아주 위험한 단정을 너무나 쉽게 하시더군요.  제가 여기에 대놓고 유치하게 ‘저 기도하고 글 썼습니다’ 라고 답변을 달아야만 집사님의 위험한 단정이 사라질 수 있을거라는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더욱 글쓰기가 저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는 힘듭니다. 왜냐 기도는 능력이기에 사탄이 우리에게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대여섯시간 앉아서 글쓰기와 한시간 엎드려서 기도하기와 어느것이 더 어려울까요? 저의 경우를 보면 기도하기가 더 힘듭니다. 사탄이 글쓰는것은 방해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러 엎드리면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왜냐? 기도에는 실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  맞습니다.  기도는 힘듭니다.  기도는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기도를 강조하고 기도를 많이한 우리 한국교회는 이렇게도 영향력이 없고 개독교라 불릴까요?  한시간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으로 부족한 것일까요?  두시간, 세시간 엎드려서 기도하면 영향력이 생기고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되는 것일까요?  혹시 잘못된 내용을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나와 내 가족만 잘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번 우리의 기도를 뒤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집사님은 글은 쉽고 기도하시가 힘들다고 하셨지요?  저는 글쓰기와 기도가 다 힘듭니다.  그리고 대여섯시간 앉아서 하는 글쓰기 자체가 기도가 될수있는다는 것을 저는 배웠습니다.  집사님은 보시기에 ‘젊고 아무것도 모르는 집사가 편하게 앉아 쓰는 글은 쉽게 쓰면서 한시간 엎드려서 하는 기도를 왜 안하나?’ 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말이고 또한 글입니다.  비록 엎드려 한시간 기도하는 것만큼의 육체적 노동은 아니지만, 저는 ‘글을 쓰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구나’ 사실을 요즘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글을 쓴다고 해서, 한시간 엎드려 기도하시는 분들을 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한시간 기도하는 분들은 그만큼 더 겸손하고 더 상대방을 존중하시는 분들 이실거라고 믿습니다.  한시간 엎드려 기도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쉽게 남을 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탄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처럼, 글 쓰는 것을 명백히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글은 역사와 시대를 바꾸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글쓰는 것이 쉽게 느껴지시는 집사님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저는 칼보다 펜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의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서는 글로 남아진 성경이면서 글입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쓰러져가는 천주교회를 향해 종교개혁의 시초를 알린 역사를 바꾼 글이었습니다.   저는 루터가 그렇게 쉽게 글을 썼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단은 글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지우려고 방해할 것입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모습은 교회를 위하여 문제제기를 하는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모습을 집사님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고, 기도해야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저는 저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모습은 우리의 문제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우리안에 많은 다른 믿음의 생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집사님의 말씀대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저도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얼마나 어떻게 기도했냐에 관심이 있지, 다른 사람이 기도를 많이 했는지 적게 했는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주로 보이게 기도하고, 기도를 오래하는) 바리새인에게 왜 '독사의 자식들!' 이라는 표현을 쓰셨을까요?   ‘기도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하셨을까요?  ‘기도만 통해서만’ 은 무엇가 부족한 것이 있을거라는 생각은 안해보셨는지요?  단순히 ‘기도해야 한다’ 라는 구호보다는 ‘무엇을’ ‘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같이 고민하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단순히 ‘기도많이 해라’ 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기도제목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집사님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합니다.  집사님의 생각이 다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다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울러 제 생각 역시 다 틀리거나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온 모습과 배경이 다르고 만난 하나님의 속성이 조금씩 다르니, 당연히 생각과 믿음의 색깔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되는 것, 그것이 저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이고 그리스도안의 공동체의 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과 의견이 다른 데 어떻게 연합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교회가 하나되고 연합되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입니다.  본질적인 복음에 동의한다면, 비본질적인 요소에 자유함을 구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속할 수도 없구요. 

손을 들어 기도하고, 때를 정해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절기를 지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왜 예수님은 불같이 화를 내시며 '뱀과 독사의 새끼들!' 이라고 하시고,  당시 민족의 반역자였던 세리가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나는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한 세리가 더 의롭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훨씬 더 기도를 많이 했을 텐데요...   미루어 보건대, 엎드려 한시간 이상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됨'과 마찬가지로 진리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치열한 고민과 사색과 생각에서의 영적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이 또한 저희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이야기하고 논하는 것이 언제나 틀린 것일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아래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였을 때...  모두 겸손히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 하나되고 연합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로 연합된다는 것이 하나의 목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이 글을 통해 몇몇 부분에서는 집사님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거나 이해가 안간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생각을 집사님께 강요하지 않습니다.  집사님의 살아오신 배경과 신앙에 따른 신념과 믿음을, 비록 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그 자체로 존중합니다.  중요한 것은 집사님과 제가 생각이 다르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각과 신앙색깔의 다름을 하나로 묶어주실 수 있으신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면 될 것입니다. 서로의 다른 색깔을 인정하고 그 자체로 정직하게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함께 잘 다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더, 제가 좋아하는 리처드 벡스터의 개혁된 목사의 글을 인용해 볼까 합니다.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in necessariis unitas,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in non-necessariis libertas,

모든 것에는 사랑을. in utrisque caritas.

-리처드 벡스터의 개혁된 목사(The Reformed Pastor, 1656)-

 

제 글에 용기있게 응답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런 계기로 우리가 서로 또 배우게 되고 더 겸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은폐하고 회피하는 것보다 열어 논하고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집사님께서 진지하게 의견을 말씀해주시고 이에 같이 열린공간에서 오픈해서 논의하는 것이, 보다 진리로 한걸음 나아가기 위한 우리 A 교회의 작은 노력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제 답글에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늘 제가 인격과 믿음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A집사님같은 분들의 좋은 말씀을 듣기 원하고 또 같이 논의하고 기도하면 더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된 남상곤드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i]로마서 13장에 대한 설명은 김두식 교수의 글을 부연설명한 부분입니다.  김두식 변호사의 이 부분에 대한 원글은 “한국교회, 진보와 보수 어디까지 왔나 (상)”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02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10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여섯번째  03/13/2010
 

하나님앞에서 모두가 겸손해야 합니다.


                                                                                                     남상곤

 

누가 문제였나요?

 

교회가 역사앞에 범죄를 저지른 일이 수없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것만 대표적으로 살펴봐도,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십자군 전쟁을 감행하여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노략질한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성의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던 것,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노예가 합법한 것이며 열등한 종족이 있다고 하여 노예제도를 실시했던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땅을 개척하교 교회를 세운다고 아메리카에 인디언들을 수천만명 학살한 일 등등  가장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은 것도 당시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저지른 것입니다.

 

교회가 혹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저지른 어처구니가 없는 수많은 범죄들이 있습니다.  당시에 이러한 일들이 자행되었을때는 정말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혹은하나님을 위해서이런 일들을 거리낌없이 저지렀던 것 같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을 한 사람들은 이것이 왜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하나님께서 실수가 없으시고 온전히 선하신 분이심을 믿는다면 이러한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 인간에 있음이 명확해 집니다.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래전에는 카리스마나 전통에 따라 지배가 이루어지고 정당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모든 사회는 법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 어느 국가이던 헌법이나 기본규칙을 통해서 지배는 합법화됩니다.  국가는 상위법인 헌법에 의하여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헌법에 명시된 권력만을 대통령이 수행합니다.  이러한 통치자인 대통령조차 임기제를 바탕으로 할뿐더러, 대통령이라도 헌법과 위배되면 처벌받거나 탄핵될수 있는 것이 오늘날 입니다.  이전까지의 오락가락하고 일관성이 없던 카리스마적 통치나 전통에 의한 통치는 사라졌습니다.  이는 비단 국가에 국한된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단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각각 규칙에 따라 그 법규대로 운영이 이루어집니다.  회사나 학교도 정관이나 교칙에 의해 운영이 되고, 심지어 교회도 교회정관으로 운영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신뢰할수 없지만 글로 쓰여진 법은 신뢰할수 있다라는 가정이 깔려있습니다.  인간은 신뢰할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제가 스스로 신뢰할수 없는 사람인것을 늘 느끼고 살아갑니다.  스스로 어떤 것을 하겠다 또는 안하겠다 계획을 세워 수십번 다짐하지만, 참으로 스스로에게 끝없이 관대하고 늘 용서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신뢰할수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함부로 생각하거나 무시해서 의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한계가 분명한 존재입니다. 이익 앞에서는 흔들리고, 강자앞에서는 약해지고, 약자앞에서는 강해지는  모든 사람은 다 연약하고 다 쓰러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사람을 믿을수 없기에 늘 권력이나 권위에 대해서는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굳이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와 같은 경구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권력이나 권위는 늘 견제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힘이기 때문입니다.  힘은 지니차게 견제를 받아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한번 잘못 발휘되면 사람이 죽거나 다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최소한으로 실행되어야 하고, 최대한으로 견제받아야 합니다.

 

 

사람을 신뢰할수 없으면 우리는 누구를 믿나요?

 

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신뢰할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제와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익에 치우치시지 아니하시고 공평하고 완전하신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출애굽기 3:14)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잠언 16:11)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

 

 

2.     그리고 씌여져 있는 성경을 믿습니다.  씌여져 있는 성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통치자가 바뀌어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성경 외에 있는 수많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의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한 10:3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

 

 

3.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성경외에 모든 것이 틀릴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다 겸손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A가 맞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B가 맞을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념이 있더라도, 상대방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념도 마찬가지로 존중을 해주어야 합니다.  내가 믿고 신뢰하는 믿음만큼이나 남들도 각자의 경험과 사고를 통해 믿고 있는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가 맞다고 해서 (설사 맞다고 하더라도) 누구를 쉽게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는 참으로 위험합니다.

 

누구를 변화시키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몸으로 행함과 사랑입니다.  본질적인 복음을 인정하고 동의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다양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한가지의 생각과 사상으로만 표현되고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in necessariis unitas,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in non-necessariis libertas,

모든 것에는 사랑을. in utrisque caritas.

 

-리처드 벡스터의 개혁된 목사(The Reformed Pastor, 1656)-

 

 

 

교회에 일곱빛깔 무지개를

 

 

글의 서두에서 예를 들었던 교회가 역사에 행했던 범죄들도 그 이면에는 어쨌든하나님을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신념이 너무나 강했던 것 같습니다.  신념이 강할수는 있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지나치게 강요하다가 돌이킬수 없는 역사적인 범죄가 된것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 자신과 다르다고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실수할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이니까요.  그러나 그왜곡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일방적인 강요로 이르게될때 진정 우려할 사태가 일어날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각 성경을 펴고 각각 자신의 해석과 적용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부는 맞을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옳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이야기하기에 당연히 문제가 생깁니다.  누구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자신이 틀릴수도 있다는 겸손함과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부분, 부분일수도 있습니다.  무지개의 한 색깔만을 보고 무지개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때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일곱가지의 색깔이 모여서 아름다운 무지개로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조금씩 표현될수 있을것 입니다.  한 부분을 가지고 전체인양 호도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한 해석을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적용하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될수 있습니다. 보통 말씀을 통한 적용은, 해석을 하는 그 자신에게 해당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중요한 우리의 문제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기보다는 본인이 깨닫도록 말씀과 상황을 통해서 이끌어 가심을 우리는 많이 경험적으로 목도한바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희미하게 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명하게 보게 될 때가 옵니다.  지금은 비록 불완전하고 충분하게 알수 없지만 그때에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알게될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서로에게 겸손하고 늘 열린마음과 열린자세를 가져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안에 아름다운 일곱빛깔의 무지개가 펼쳐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교회에 일곱빛깔 무지개를...
'함께잘다니는교회'(5)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41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07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네번째  02/24/2010

 

친절하신가요?

                                                                                                   남상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많은 분들이 격려해주시고 응원해주시고 위로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글 잘 읽었다고 손잡아 주시던 장로님, 기도하겠다고 힘내라고 해주신 권사님, 말없이 등 두드려주시던 집사님등  그래서 더욱 깨어있고 기도하고 고민하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다시하게 됩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기도해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들어가며

 

미국에 와서 처음에 낯설었던 두 단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awesome” 이고 다른 하나는 “cool” 입니다.  미국친구들이 가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아썸!’ ‘아썸!’ 그러길래 저는 무슨 유명스타이름 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툭하면아썸!” 이라고 해서 더 이상 모르고 살다가는 언젠가 큰일나겠다는 생각에 미국친구에게 창피하지만 물어봤습니다.  도대체 아썸, 아썸하는데그 아썸 스펠링이 뭐냐?”  스펠링을 받으면 사전을 찾아볼 요령이었죠.   친구가 알려준 아썸은 awesome, 우리말로 하자면끝내준다정도 될려나요?  참 이걸가지고 그렇게 고민한 제가 민망했었습니다.  또 하나는 ‘cool’ 인데, 차갑다는 뜻으로 알고있는데, 대화중에 갑자기 쿨! ! 하니도대체 이건 또 뭔가 싶었습니다.  역시 나중에 알았지만 쿨이라는 것은 차가운게 아니라멋있다’, ‘좋다’, 뭐 이런 뜻이었습니다.  눈치로 대강 짐작은 했지만, 왜 쿨이 멋있는 건지 좀 이해가 잘 되지않기는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cool’ 보다 ‘warm’ 같은 것이 낫지 않나요?  *^^*

 

 

인자 (kindness)’?

 

작년 여름에 잠언을 11주간에 걸쳐 묵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보았던 부분이 새롭게 다르게 보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잠언 3 3절에 나오는인자 (kindness)’ 라는 단어입니다.  이전에는 그인자라는 단어를 그냥 인자하다 정도로 뜻을 새기고 지나갔었습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다른 버전의 성경을 보게되면서인자라는 단어가 단순히 인자하다 라는 뜻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두란노성경사전에 보면, “인자한 이라는 형용사는크레스토스 (krestos)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친절하고 관대하다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자비한 마음이나 동정심, 연민의 정과 같은 단순한 느낌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라고 나와있습니다.  (http://www.holybible.or.kr/B_DICT/cgi/bdictftxt.php?DN=538 )

 

잠언 3 3-4절 말씀에, “인자와 진리를 저버리지 말고 ,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며, 너의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라.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네가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에서 나오는 인자는 영어성경 NASB로 보면 kindness 로 나옵니다.  한마디로친절인거지요. 

 

부끄럽지만 제가 잠언의 3 3-4절 말씀을 읽으며 적었던 묵상노트를 잠깐 공개해봅니다.

 

 

인자와 진리 (Kindness and Truth).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이다.

인자와 진리로 나의 마음판이 채워져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마음을 품었을때

그 하나님의 성품이 내 마음판을 채우는 것이다.  

 

인자함, 친절함 - 나는 인자한 사람이고 친절한 사람인가나는 꽤나 무뚝뚝하고 퉁명한 사람이다그러나, 모든 사람을 최선을 다해서 맞이하고 신경을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다그것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며, (cool) 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물론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다언제나 누구에게나 인자롭고 친절할수 있겠는가하지만 내 안에 하나님으로 충만할때...  그 하나님의 성품이 내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진리 - 진정한 이치, 옳고 진실함.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판에 채워져 있는가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생각할때...  그때 그 말씀에서부터 나오는 진실함과 옳음이 내 마음판에서 채움을 뚫고 나올것이다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생각하고 즐겨하는가요즘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것, 그리고 간절함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모하고 있다

 

그렇게 이 인자와 진리가 나의 마음판에 채워져 있을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내가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친절한가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계명이 내 안에 충만한가?

나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고있는가?

 

 

 

 

 

Cool Kind

 

이제 제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눈치빠른 분이라면 알아채셨을것입니다.  바로 ‘cool’ ‘kind’ 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요즘엔 쿨한것은 친절하다는 것과 반대의 뜻으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쿨하다는 것은 세련되고 멋있고 뒤끝없고 깔끔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말이 좀 적어야 하고, 괜한 부탁하면 안되고, 누군가 부탁하면그래 그러지 뭐하는 것입니다. 구차하게 먼저 다가가면 안됩니다.  하지만 남이 와서 부탁하고 물어보면 쿨하게 답해주거나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친절이라는 것은 먼저 말을 걸고, 안부와 필요를 묻고, 기분을 맞춰주고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는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괜히 호의를 가지고 친절을 베풀었다가 상대방이 쿨하게됐거든요라고 하면 상처를 받을수도 있고, 괜히 초라하게 느껴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마음을 써야하고 상냥하게 웃어야 합니다.  괜히 신경써야하는데다가, 웬지 먼저 손내밀기도 좀 어색합니다.  그냥 깔끔하게 쿨한게 좋은 거지요.

 

먼저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은 쿨 한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 먼저 잘 말을 걸지 않습니다.  남에게 쿨하게 보여야 하니 먼저 다가가기는 좀 그렇고, 만약에 친절을 베풀었다가 쿨한 반응이 오면 싫습니다.  그래서 남이 말을 걸어오거나 다가올때까지 기다립니다  쿨하게 보여야 하니까요.  우리는 미리 짐작합니다. ‘괜히 먼저 말을 걸어 민망해지지 말아야지?’  저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다를거야.’ ‘ 저 사람은 내가 호의를 베풀어도 차갑게 나올수도 있어.’ 하지만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오고 안부를 물어보고 도움을 요청하면 그건하게 돕거나 대답할수 있습니다.  나는하니까요.

 

 

 

친절을 목에 걸고 다니며, 마음속에 새겨두어라

 

다시 잠언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인자와 진리를 저버리지 말고 ,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며, 너의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라.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네가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잠언 3 3-4: 표준새번역).

 

인자를 저버리지말고, 목에 걸고다니고 마음속깊이 새겨두라고 하십니다.  목에 걸고다닌다는 것은 언제라도 그것을 목에서 뺄 준비를 하고있으라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새겨 늘 유념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며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 쿨하게 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쿨하게 대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쿨하게 대하면, 그 다른 사람도 우리를 쿨하게 대할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쿨한거 보다 친절한게 좋습니다.  비록 어떨때는 귀찮고, 괜히 좋은 호의가 다칠까 염려스럽고, 먼저 다가가면 웬지 어색하고 손해보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은혜를 주시고 귀중하게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친절은 옵션이 아닙니다.

 

 

저는 기질이 본래 말이없고 무뚝뚝해요.  숫기가 없어서 친절할수가 없어요.”   당연합니다.  왜냐하면인자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본래부터 친절할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쿨하지말고 친절한 연습을 해야합니다.  주변이웃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그렇게 연습하고 노력하고 기도하면, 그 친절한 하나님의 성품이 나를 친절하게 만들고, 나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게 될것을 믿습니다.  점찮고 숫기가 없어 말이없는 것이 동양문화권에서는 미덕으로 여기지는 경우도 있어 핑계가 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에서는 인자(친절)을 목에 두르고 마음속에 새겨두라고 하십니다.  기질과 성격탓으로 친절을 멀리할수가 없습니다.  어색하고 힘들지만 지금이라도 연습을 해야합니다.

 

 

친절은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 아닙니다.  배우고 연습하고 익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늘 유난히 친절하신 장로님과 권사님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랜 기도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삶에 배여 먼저 손을 내밀고, 기도제목을 물어보고,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해주십니다.  먼저 살피고 다가가고 필요를 물어보고 안부를 전하고 손을 내미는 친절은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하나님 나라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연습하고 노력하고 시도하고 다가가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우리에게 인자를 베푸십니다. 

 

친절은 옵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노력하고 기도하여 닮아가야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휴스턴이 너무 더워한것이 좋아 보일수는 있지만, 성경은 분명히 인자를 목에 걸어두고 마음판에 새기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더욱 서로 친절하고, 하나님께도 친절하기를 소원합니다.   

 


친절하신가요? 쿨하신가요? 
'함께잘다니는교회' (2) 친절은 성품이 아니라 연습하는 것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228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5:53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세번째  02/18/2010

 

"댁에 아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세요?"

                                                                                                   남상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본래 제가 생각했던 글의 순서를 조금 바꾸어보았습니다.  예배시 회중기도에 대해서는 좀더 기도하고 생각해봐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첫글이었던 예배에 대해서도 더 깊이 기도하고 생각해봐야 될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느끼는 교회안에서의 우리 아이들의 안전문제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들어가며

 

제가 ㅇㅇㅇ  ㅇㅇ교회에 처음와서 가장 놀랬던 것중에 하나가 예배후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서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고 신나게 놀고있는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한편으로는그런데 저렇게 아이들을 놓아두어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아이들이 부모의 지도없이 마음껏 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는 뛰지도 못했습니다.  교회가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 안전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주일날, 부모들은 예배후에 식당이에서 선생님들에게 아이들을 인수인계를 받았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를 데리고가서 점심을 같이먹었습니다.  그 이후의 교회에서의 시간은 부모들이 각각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던 저희 부부는 항상 아이들을 끼고 점심을 먹고, 또 오후에 있는 교회행사에는 아이들을 끼고 참여하였습니다.  그랬던 저희 부부에게, ㅇㅇ교회에서 느꼈던 아이에게서의 해방감은 달콤하면서도 무언가 허전했습니다.

 

 

 

! 자유다!

 

그런데 ㅇㅇ교회에 와서 너무 편해졌습니다.  아이들은 점심을 선생님들의 인솔하에 먹습니다.  아이들이 식사 이후로 교회안의 여러군데로 퍼져 놀게되면서, 저희 부부는 잠시 아이가 없는 자유함(?)을 누리며 그 행복감에 젖었습니다.  비록 아직 둘째가 어려, 둘째는 끼고 있어야 했지만 예전에 둘을 다 끼고 있던 것에 비할바가 아니었습니다.  너무편하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회에서 점심을 먹고,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제 집에 돌아갈 참이었습니다.큰딸, 하원이를 데리러 하원이가 주로 노는 방으로 갔습니다.  하원이가 없길래 하원이가 잘 노는  또 다른 방으로 갔습니다.  하원이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원이를 찾아 교회의 이곳저곳을 다녔습니다.  하원이 또래가 있으면하원이 보았니?’ 라고 물어보았지만, 하원이를 쉽사리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2층부터 여러방들을 뒤지고, 체육관의 2층을 돌아보고   한참후에야 하원이를 어느 방에서 간신히 찾았을때….  저는 잠깐 불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래도 되나?’

 

 

 

그런데 만약에

 

우리 교회는 교회안에 방들과 사무실, 여러 공간들이 많아서 한눈에 아이들이 어느공간에 무엇을 하고있는지 단숨에 파악할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공간들은 교회 2층과 체육관 2층을 포함하여 상대히 넓고 많으며 폐쇄적입니다.  그래서 그 방이나 공간에 직접 들어가 보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누가 무엇을 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아침에 아이들과 각자의 예배를 드리기위해 헤어지고 나서 집에가기 위해 만나기전까지, 아이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누구와 함께 놀고있는지  부모들이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못된짓을 하거나 생각할수도 없는 범죄가 일어난다면 과연 이것을 누가 막을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제 대답은없다.” 였습니다.

 

외부인의 침입으로 일어나는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아이들끼리 모여 노는 장소에는 늘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이들이니 당연합니다.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놀수도 있고 위험한 놀이를 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후 짧게는 한두시간, 길게는 두세시간에 걸쳐 우리들은 아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친구들과 어울려 잘 놀고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뿐입니다. 

 

 

 

안전만큼은 지나친 가정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두세시간동안 우리의 아이들은 안전문제에 노출이 되어있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큰 사고나 문제가 없었습니다만저는 하원이를 교회안에서 찾는데 시간이 걸렸던 그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사고나 문제가 생기면 엄청나게 큰 여파가 있을수도 있겠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이라는 것은 대부분 불필요한 경우가 많지만, 안전의 문제에 관하여는 지나친 가정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수도 있으니까요. 

 

하원이를 교회안에서 찾아다니던 경험을 한 이후  이제 하원이가 교회안에서 늘 어디에서 누구와 노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최소 30분 간격으로 어느공간에서 누구와 무슨 놀이를 하고 노는지 수시로 확인을 합니다.  어떨때는 하원이가 노는 공간에서 저 스스로 안전요원이 되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다 소중하니까요. 

 

주일 오후, 교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어떠한 사람의 간섭과 시선도 없이 각각 패쇄된 공간에서 놀고있습니다.  위험할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주일오후에는 안전 문제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행히 우리교회 안에서는 아직 이러한 안전사고문제가 크게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방과 대비를 해야합니다.  제가 생각해본 몇가지는 이렇습니다.  첫째, 교회안에서 주일 오후 어른들이 순번을 정해 교회안 이곳저곳을 시간마다 순찰을 합니다.  싸우는 아이들이 있으면 말리기도 하고,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놀고있으면 빼앗기도 하고, 위험한 놀이를 하고있으면 하지말라고 야단도 쳐야합니다.  둘째, 교회안에 더 많은 폐쇄회로 카메라를 설치해서 최대한 더 많은 공간을 커버해야 합니다. 주로 아이들이 자주 모여 노는 곳들을 중심으로 좀 더 많은 카메라가 필요합니다.  셋째, 아이들이 있는 부모들은 최소 30분마다는 자신의 아이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있는지 확인을 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서약서를 제공해서 아이들에게 혹시나 벌어질지도 모르는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은, 바로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 교회안에서 아이들이 노는 공간을 지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방만 오픈을 해서 그곳에서만 놀수있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더 좋은 방법들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아이는 자신이 돌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하나님도 지키시지만 부모인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저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만약을 기반으로 한것입니다.  아마 안전사고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한 건이라도 안전사고가 발생한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다 늦어버릴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몇시간 동안 부모들이 아이에게서 해방되어 잠시동안의 자유함을 누리는 공간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자녀들의 안전은 여전히 그 부모의 몫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교회안에서 아이들을 지켜주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발생할수 있기에, 우리는 아이들이 주일 오후에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모인 우리에게 자녀를 돌보라고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교회서, 자녀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세요?" 
'함께잘다니는교회' (3) 교회에서 자녀 안전 문제에 대해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25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5:48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두번째  02/13/2010

"너는 누구며 무엇을 하고있느냐?"

                                                                                                   남상곤

 

 

들어가며

 

우선 짧은 시간동안 생각보다 많은 분들의 말씀을 이경로 저경로를 통해서 (주로 간접적인 방식으로) 듣게되었습니다대다수는 우려의 목소리였고, 소수의 격려의 말씀도 있었습니다제가 의도했던 바가 글로 잘 전달되지 않았는지, 많은 분들은 마음아파하셨다는 분들도 계셨다고 들었습니다저로서는 오래 기도하고 생각하고, 또한 누구를 비난하거나 정죄하려는 의도가 전혀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보였다면, 그것은 제 글쓰기가 모자랐고, 제 진심의 마음이 잘 전달되지 못한 저희 부덕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2번째 글을 생각보다 일찍 올리게 되었습니다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제가 이러한 글을 올리게 된 저의 본심을 더 잘 설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우선 그것을 먼저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도대체 무슨생각으로 올린것이냐?

 

제 의도는 크게 두가지입니다첫번째로 교회안의 소수의 목소리, 다른 목소리를 내보고자 함입니다그것은 현재의 사안들을 약간 다른 각도로 보는 것입니다.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입니다모든 사람이 동일한 시각을 가질수 없는데도, 우리는 동일한 시각을 가지도록 강요받거나 교육을 받은 경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익숙하게 그냥 그대로를 본래 그런것이겠거늘 하고 받아들입니다하지만 기존의 것들을 낯설게 보는 연습을 게을리하고 포기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안일함과 나태에 빠지게되도록 만듭니다다양성은 힘이고 건강함입니다다양성을 존중할줄 알고, 그 다양성 자체를 수용하는 것은 그 조직이나 사회의 힘이 됩니다하지만 흔히 한국사회에서는 그 다양성 자체를 두는 것을 합의되지 못함, 분열, 혹은 일치되지 못함으로 흔히 분류하곤 합니다그러기에 다른 시각 (특별히 그것이 힘이없고 소수인 시각일 경우 특히)을 두는 것을 매우 불편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하지만 그것은 결코 분열이나 일치되지 못함이 아니라 그 자체로의 다양함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제가 첫글에서도 분명하게 밝혔듯이 제가 어떤 변화의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또한 누구도 100프로 옳은 사람이 없고 옳은 주장이 없다라는 말은 결국 그 글을 쓰는 저에게 먼저 적용되는 말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옳거나 맞다라는 것이 아닌 “이렇게 볼수도 있다”를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교회의 제반사안에 대해 투명하게 오픈해서 토의하고 논의하고자 하는 바램입니다교회에 사안이 있습니다그리고 결정이 되었습니다그런데 그 과정은 모릅니다과정을 모르니 그 의중과 뜻이 궁금합니다하지만 알려지지 않습니다그냥 은혜로 모든 것을 덮자라고 말합니다은혜는 조금 불편하거나 덕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그냥 말하지말자라는 뜻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은혜는 죽을수 밖에 없는 죄인이 아무런 조건없이 그저얻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으로 알고있습니다가장 깨끗하고 뒷말이 없어야할 교회에 불투명함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건강하지않는 것입니다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기에 부족하거나 잘못한 것들이 조금 드러난다고 쉽게 망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오히려 그렇게 연약한 부분들을 통해 역사하시고 진정한 은혜로 감싸주시는 것이 우리의 기도할 바라고 믿습니다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은혜로 덮는 것이 아닌 투명하게 논의하고 설명하고 의견을 교환하고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일년정도를 기도하며 고민했습니다내가 공동체를 위해, 공동체에 덕을 끼칠수 있는 것은 어떤방법이 있을까?

 

 

2.    그런데 너는 누구냐?

 

저는 남상곤이라고 하고 OOOOO교회에 다닌지는 일년 반정도가 된것 같습니다저희 아버님은 서울에서 목회를 하십니다그러기에 누구보다도 목회자의 고뇌와 노고를 잘알고 있습니다저는 한국에서 기독교대학을 나왔고, 한때 목회자가 되려고 준비를 한적도 있습니다지금은 학생으로 학문연구에 뜻을 두었지만, 그래도 그러한 학문연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할까를 하루하루 고민합니다제가 이렇게 제 이이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제가 교회의 바깥사람이 아닌 안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입니다저는 유치원때부터 교회에서 자라고 커왔습니다교회는 저희 놀이터였고, 저의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들은 교회의 친구들이며, 교회안에서 세상을 보았고, 구원도 받았고, 믿음도 자랐습니다친구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그렇지않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도 있었고, 무엇이 예수님의 뜻을 쫓는 것일까 하는 마음에 몇달며칠을 고민하고 기도했던 적도 있었습니다저는 교회만이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바꾸는 희망임을 늘 믿습니다아무리 교회가 개독교라고 불려도 그리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만도 못한 일들을 해도 결코 교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포기한적이 없습니다왜냐하면 교회야 말로 예수님의 피값주고 사신 몸이며, 세상에 전할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저는 부족하지만 교회공동체를 살리고 또 세우는 일이 가장 복되고 중요한 일임을 믿습니다그래서 저는 그러한 일을 하고싶습니다. 제가 이러한 글을 쓴 동기는 바로 공동체를 세우고,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고, 공동체 굳건하게 하는 이것입니다결론적으로 저는 교회를 음해하거나 분열시키거나 누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자 부족한 글쓰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3.    그렇다고 해도 결론적으로 특정인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냐?

 

제가 첫글을 쓰면서 그리고 쓰고나서 스스로 기도하고 제 마음을 점검해 보았습니다제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그리고 제 마음이 누구를 비방하려는 마음이 없음을 하나님앞에서 확인하고 글을 올렸습니다만약 제가 누구를 비방하거나 교회를 분열한 계획이 있었다면 굳이 실명으로 만천하에 제이름을 걸고 내가 지금 누구를 비난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다라고 하지 않겠지요저는 제가 생각하거나 글로 쓰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그렇기에 그것을 강요하거나 설득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다만 저같이 사안을 다르게 볼수도 있고, 또 그렇게 다르게 볼수도 있는 눈으로 교회의 제반사안에 대해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기도해보자 라고 한것입니다하지만 교회라는 구조의 특징상,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되면 그 정점에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거론되기가 쉬울수 밖에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하지만 교회에 애정을 가지고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시각으로 논한다면 그것이 처음에는 누구를 비방하고 비판하는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시간을 통해서 나타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왜냐하면 진심은 결국에는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요그래서 우리는 동기나 진심, 혹은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저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십시오시간을 두고도 제가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하고 특정인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드신다면 저도 붓을 꺾겠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을 쓰기전에도 기도하고, 쓰면서도 기도하고, 쓰고나서도 기도를 했습니다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개혁가도 아니고, 의협심과 혈기에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특별히 믿음이 깊은 사람도 아닙니다왜 제가 굳이 저도 바라지않는 방향으로 교회에서 유명해(?)지는 길을 택하겠습니까그것은 제가 이 공동체에 대한 포기할수 없는 믿음과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렇지 않다면 제가 굳이 안좋은 소리를 들어가며 잘쓰지도 못하는 글을 쓰려고 하겠습니까제 마음의 진심이 조금이라도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혹시라도 저로인해서 마음이 아프셨다는 분이 계셨다면 다시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posted by paulus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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