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paulusnam
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2010. 11. 16. 19:40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다섯번째  03/01/2010

 

우리안의 샤머니즘

                                                                                                          남상곤

 

세계제일의 영적인 민족

 

우리나라는 영적인 민족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우리나라를 거쳐가면 세계최고가 되는 것을 보면 잘알수 있습니다.  이른바 토속신앙인 샤머니즘도 그렇고, 불교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로는 대승불교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유교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로는 유교의 본산인 중국을 넘어 유교를 전승할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남아있으며, 가장 늦게 들어온 기독교도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부흥과 발전을 이룩해내어 현재는 가장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중에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즐비합니다.  어떤 종교든지 우리나라를 거치면 가장 발전하는 것을 보면 우리민족은 참으로 영적인 민족이 아닐수 없을것 같습니다.

 

 

대학입시때만 되면

 

우리나라의 영성이 확인되는 순간은 주로 겨울철입니다.  해마다 대학입시때만 되면 교회나 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벌어집니다.  입시 100일 기도회같은 것이지요.   이때만큼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던지 거의 동일한 기도를 합니다.  집사님은 십자가 앞에서, 보살님은 불상앞에서, 이도 저도 아닌 분들은 당산나무나 보름달을 바라보며 우리 아들, 우리 딸, 대학 합격시켜주십시오.”  이 기도외에 다른 기도가 있겠습니까?  대학입시 정원은 정해져 있기에 합격자의 수도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하나님보다 세면, 불상앞에서 기도했던 부모들이 자녀들이 대학합격을 더 많이 할까요?  서울에 A 교회보다 부산의 B교회가 더 새벽기도를 많이 하면, 부산의 B 교회 자녀들이 더 많이 합격할까요?  서울의 대형교회인 C 교회에서는 서울대를 지원한 학생만 수백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 학생들의 부모들이 각각 기도하면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더 오래 기도하고 더 많이 헌금하면 들어주실까요?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많이 맞고 적게 틀린 학생이 합격하고, 적게 맞고 많이 틀린 학생이 떨어집니다.  기도가 모자르거나 헌금이 부족해서 떨어지고, 새벽기도를 많이하고 헌금을 많이해서 합격하는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명문대 합격한 것과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은 우리는 이미 잘 알고있지 않습니까?

 

 

 

비빔밥과 샤머니즘

 

우리나라의 문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종교적 문화가 혼합이 되어있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이훈구 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의비빔밥이라고 비유했습니다.  한국 사상의 밑바닥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토속신앙(土俗信仰) 곧 무속신앙(巫俗信仰)이 있다. 그 위에 천 여 년에 걸친 불교사상이 얹혀 있고 또 그 위에는 오백 년의 유교 사상이 얹혀 있다. 그리고 지금은 기독교와 서구의 사상들이 표면을 덮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동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마저 곁들어 있어 한국은 동서고금의 모든 지혜가 갈무리된 곳간과도 같다. 즉 비빔밥이다."(「한국 전통 종교와 한국 교회」이훈구 저, 글로리아).

 

그런데 많은 종교학자들은 외래종교가 우리나라로 들어올때마다 늘 이 토속신앙인 샤머니즘이 새로들어오는 종교에 의해 밀려났다기 보다는 샤머니즘과 혼합되어 융화되는 성격을 가진다고 지적합니다.  즉 불교도 한국에 들어와서 무속신앙과 섞여 한국만의 고유의 불교가 되었고, 유교와 기독교 역시 각각 전승되었지만 무속신앙을 개혁했다기 보다는 무속신앙안에서 자연스레 융화가 되어 독특한 한국의 유교, 한국의 기독교를 만들어 냈다고 보고있습니다.

 

 

샤머니즘이란?

 

샤머니즘(무속신앙) 이란 쉽게 이야기해서 오직 샤먼(무당)만이 선과 악에 주관하며 영적 의식을 수행함을 믿는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체계입니다.  샤먼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로 신과 사람들 사이의 대리자의 역할을 합니다.  샤먼은 이상심리나 공포의 상태로 분위기를 몰입시켜 초자연적 신령계와 접신하여 그 정보를 전달하고, 길흉을 점치고, 악령을 제거하고 귀신을 불러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의 초자연적 신령계는 인격체가 아닙니다.  샤먼을 통해 나타나는 그 초자연적 신령계는 주로 협박과 공포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샤먼은 그 신령계를 달래고 빌어서 신령계로부터 복을 받고 병을 치료받습니다. 거기에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샤머니즘은 현세의 물질적인 복을 강조합니다.  샤먼을 통해 물질을 바침으로써 초자연적인 신령계를 달래고 어르는 것이지요.  인격체가 아니기에  필요할때만 샤먼을 불러 물질을 바칩니다.   쉽게 말하면 알라딘의 램프의 지니라고 볼수도 있을 겁니다.  뭐가 아쉽고 필요한 것이 있을때 지니를 불러 금 나와라 뚝딱!”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와 결정적인 차이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는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아울러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시고 우리를 벌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래의 내용은 저의 생각이나 견해라기 보다는 박노찬씨의샤머니즘과 한국 기독교의 내용을 제가 요약한 내용입니다.   뒤새겨 볼만한 내용이라 생각해서 나누어봅니다.

 

 

한국에서의 샤머니즘의 영향을 살펴보면 쉽게 단군신화를 떠올리면 쉽게 알수있습니다.  신화를 통해 우리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단군은 재정일치 즉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통합적인 샤먼 즉 무당이었음을 알게됩니다.  단군뿐만이 아니라 주몽신화, 박혁거세 신화등, 초기 부족국가들의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제정일치의 사회의 지도자인 샤먼(무당)이 다스렸던 사회였습니다.  거기에 쉽게 들어본적이 있는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다는 어머님들의 이야기들은 모든 물체에 정령이 존재한다고 믿는 자연숭배 또는 정령숭배의 원시종교로 애니미즘을 포함합니다.

 

어쨌든 우리나라는 이렇게 무속신앙을 토대로 발전되어온 나라이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과 문화 심지어 우리가 믿는 기독교안에도 이러한 샤먼니즘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목사를 샤먼으로, 예배를 굿판으로 빗대어 쉽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바른 말씀을 전하거나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목사보다는 어떤 영적이고 신적인 권위를 통해 복과 화를 주관하는 샤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목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지나치게 영적권위를 내세우며 성경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가감없이 선포하고 그에 따르지 않을 경우 화가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다른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의 기독교에서는 목사를 지나치게 신격화하여 대우하고 그것을 목사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예배가 굿판과도 비슷하게 신학이나 회개가 없는 기복신앙만을 강조합니다.  굿판에서 무당이 작두를 타고 초자연적인 영과 접신하는 것과 비슷하게 기독교에서는 예배를 통해 성도들은 참관자가 되어 샤먼인 목사가 집례하는 공연으로 생각하게 되고 이러한 교회일수록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됩니다.  샤먼은 자신의 말을 따르면 복을 받고 자신을 뜻에 위배되면 화를 받게 될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예배출석의 이유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마치 지난주에 우리집에 불이 난것이 지난주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헌금도 좀 더 많은 축복을 받기위해 내게됩니다.  심방의 경우도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가 심방이라는 것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만 유달리 발달된 것이나 자동차를 새로 샀다고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는 등의 행동은 다른 기독교에서는 볼수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기독교문화의 형태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예들이 기독교안에 남아있는 샤머니즘의 한 형태로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샤머니즘으로 인한 피해는 신앙이 개인주의화 되고 삶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예배의 형식을 잘 갖추어 어떤 웅장함이 깃들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예배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목사의 축복기도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 하나 예수믿고 이땅에서 축복받고 죽은후 천국가면 그만이다라는 개인주의가 발달하게 되며, 결정적으로 복음을 듣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전혀 변화되지 않게됩니다.  예배가 끝나면 내면의 변화없이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굿판에서 굿이 끝나고 돌아가는 구경꾼의 모습과 흡사한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안의 샤머니즘

 

헌금이 부족하고, 봉사가 부족하고, 새벽기도에 나오지않고, 기도가 부족하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망하시거나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 신령계도 램프안의 지니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이 나의 생각과 뜻을 너무나 잘 이해하시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잘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몰아가시거나 협박하지 않으십니다.  탕자에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좀 못나고 괜찮습니다.  재주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양아들을 삼아주셨고, 후사로 삼아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못박히시게 하면서까지 우리를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해주시고 사랑합니다.  거기에 어떠한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안에 뿌리깊이 남아있는 샤머니즘의 전통은 이것을 위협합니다.  복을 받기위해 자꾸 무엇을 더 해야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헌금을 더 많이 해야하고, 새벽기도에 나와 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몸이 부서지도록 봉사를 해야하고 한다고 요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그리스도가 내안에 계시는 것, 바로 이것이 복입니다.  복을 달라는 기도는 우리 기독교에서는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푸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 4-9: 표준새번역)

 

 

복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될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성숙한 신앙으로 이어지고, 비로소 우리는 내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 이웃과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는 나만 잘먹고 잘살면 되는게 아닙니다.  같이 잘다니는 교회, 더불어 잘 사는 세상에 대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님을 따라 지고가야할 십자가  고난을 받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쫓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가복음 9 12: 표준새번역)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 20: 표준새번역)

.

 

 

 

 

그러면 어떻게?

 

한국교회안에 뿌리깊은 샤머니즘은 누구를 탓할필요가 없는우리들의문제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한국교회의 문제입니다.  물론 샤머니즘의 영향이 2백년의 한국 기독교역사에 흘러온것을 두고 어떻게 칼로 물을 베어내듯 그것을 잘라내어 척결할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것을 쉽게 분리할수도, 또 분리해서 쉽게 없앨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안에 샤머니즘으로 인한 문제는 결국 우리가 말씀위에 올바로 섰을때 하나씩 자연스럽게 껍질이 벗겨지게 될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공부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덮어놓고 믿지말고, 열어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생각하고 묵상해서 하나님은 누구시며,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시며, 우리는 어떤존재이고 또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소그룹으로 모여 말씀을 보고 나누고 말씀앞에 자신의 삶이 드러나는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겪어야 합니다.  말씀이 검이 되어 우리가 그 말씀앞에 꿰뜷어지고 갈라질때, 우리는 복음이 아닌 것은 분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 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 냅니다. (히브리서 4 12: 표준새번역)

 

 

 

또 한편으로는 비록 그 전통이 샤머니즘이라고 할지라도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으로 남아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샤머니즘의 내용을 잘 분별해서 수용하는 것도 필요할것입니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와 심방과 같은 전통은 이제 한국기독교문화의 커다란 줄기와도 같은 부분입니다.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내려왔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의 새로운면을 한국식으로 수용해서 그 내용을 더 풍성히 했다라고 볼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새벽에 정한수를 떠놓고 자손들의 복을 비는 것은 비록 가장 대표적인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의 전형이지만,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때 이러한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샤머니즘을 기독교적으로 바꾸어보고자 예수님이 새벽미명에 기도하셨던 것을 고려하여 한국교회만의 특징인 새벽기도가 탄생되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한국적인 기독교의 문화를 만들어낸 예라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는 문제가 생기면 무당을 부르는 것이 한국의 전통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기독교적으로 바꾸어 보고자 교회에서는 대심방 등의 이름으로 목사가 성도들의 집을 찾아가 목사가 목자와 아비의 마음으로 성도들의 삶을 먼저 찾아가 기도하고 위로하게 되는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늘 이것의 뿌리가 샤머니즘으로 부터 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지나친 새벽기도나 심방으로 인한 폐해 역시 늘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새벽기도에 출석하여 복을 달라고만 기도하고 새벽기도에 참석했으니 나의 믿음을 보였다고 생각하거나, 성도들의 집을 골고루 심방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하러 오신 목사님에게 축복의 기도만 바라는 것은 새벽기도와 심방의 폐해가 될수도 있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나 교회의 리더인 목사가 성도의 가정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다만 이것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않도록 유의하는 자세가 필요할것입니다.

 

 

 

 

나오면서

 

1.     우리안의 샤머니즘의 주제로 글을 쓰다가 발견하게 된 박노찬씨의샤머니즘과 한국기독교의 글이 저의 생각보다 더 정교하고 잘 정리했음을 알게되어 제 글보다는 그 정리한 글을 잘 요약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2.     글이 진행될수록 갈수록 양이 길어지고 재미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잘 모르니 횡설수설 한다는 것이지요.  그저 제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 안의 샤머니즘
'함께잘다니는교회'(4) 예배와 굿판의 차이는?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33




 

참고문헌

 

샤머니즘과 한국 기독교, 박노찬 (http://1tim612.net/others/shamanism.htm )

「한국 전통 종교와 한국 교회」이훈구 저, 글로리아

 

 

더 읽어볼거리

 

양복입은 무당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624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120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59

 

한국 교회, 기복주의에 푹 빠지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774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27 나누고픈 이야기

어느 기독 법률가의 삶과 죽음
(내수동 교회 증인들 1200호 특집호)

 

 

김두식 저


(가상 이야기)
S고등학교에서 1, 2등을 다투는 K군은 어려서부터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자란 학생입니다. 교회 장로님인 아버지와, 권사님인 어머니는 늘 그에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일찍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K는 우연히 교회에서 한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뇌성마비를 앓아 걷기와 말하기에 장애가 있는 그의 이름은 L이었습니다. 어려운 집안 환경과 신체적 장애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L은 혼자 힘으로 고입 검정고시를 마치고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K군은 L군을 처음 보는 순간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 L군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 주게 되었습니다. 비록 고 3 신분으로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L군을 도와주기 시작한지 두 달쯤 지난 후 치러진 모의고사에서 K군은 난생 처음 심각한 좌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모의고사가 끝난 후 학교 현관 입구에 나붙은 우등생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평소 아들의 학교 성적에 애써 초연한 척 하던 K장로도 이번에는 좀 충격을 받았는지, 조용히 K군을 불렀습니다. "얘야.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한 번 생각을 해 보았니? 내 생각에는 역시 네가 그 L이란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구나. 물론 네가 좋은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한 것은 잘 알고 있다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거다. 지금은 네 공부에 주력해야 할 때고,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만약 지금 공부에 주력하지 않아서 대학입시에 실패한다면, 나중에 네가 진짜로 누군가를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게 되고 만다. 우선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다." 물론, K군은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자기 방문을 잠그고 들어간 그는 곧 아버지 말씀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고, 조용히 L군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의외로 L군은 선선히 "잘한 결정이다. 학력고사 잘 보라"고 격려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해 겨울, K군은 그럭저럭 좋은 성적으로 원하던 법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L군이 지방에 있는 어느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그 이후 K군은 L군을 다시 만나지 못했고, 이 경험은 훗날 장애인 문제를 이야기하게 될 때마다 "나도 한때는 말이야 뇌성마비 장애인을 도와 준 적이 있어"라고 무용담을 늘어놓는 소재로만 활용되게 되었습니다.

K군이 법과대학을 다니던 때는 군사독재정권의 횡포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주요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고, 자고 일어나면 친구 중 누군가가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던 암울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잃지 않고 있던 K군은 "고시 공부를 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친구들처럼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 것이냐"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독교인은 잘못된 권위라도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는 말씀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계시던 때라, 기독학생으로서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기본적인 갈등도 있었습니다. 1987 6 10, 그는 마침내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했고, 아버지의 눈을 피해 조용히 집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 앞길에서 마주친 어머니는 곧 아들이 어디로 가려 하는지를 알아차리셨고, 그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들아. 나도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는 거다. 지금 네가 고시공부를 그만 두고, 학생운동에 뛰어든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고시에 한두 번 떨어지더니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다고 하지 않겠니?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다. 우선 고시부터 붙고 나서 남을 돕는 일에 나서도 늦지 않다. 지금 네가 아무리 자유와 평등을 떠들어 봐야 누가 네 말에 귀 기울여 주겠니? 변호사 타이틀이라도 가진 후 뭔가를 말하는 것과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 뭔가를 말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먼저 너 자신부터 남들이 귀 기울여줄만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 이번에도 그는 어머니의 설득에 못이기는 척 발길을 돌렸고, 다음 해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K의 머리 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제야 비로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그러나, 사법연수원은 수험생활의 연장이었을 뿐, 도대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법연수생들을 교육하는 교수들(모두 다 부장판사 또는 부장검사들입니다)의 한결같은 가르침은 "요즘은 사법시험 합격생 숫자가 많아져서 그냥 변호사를 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무조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선 판검사로 임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르침 때문인지, 사법연수원에 처음 들어간 3월부터 이미 대부분의 연수생들은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고,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하나같이 다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일하는 법률가가 되겠다"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제 그들의 목표는 오직 판검사 임용으로 통일되었습니다. 누구도 이제 더 이상 그런 순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긴 워낙 끝없는 경쟁에 익숙해져 있는 사법연수생들인지라, "최고"가 되기 위한 이 새로운 경쟁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친구들도 많아보였습니다. K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판검사 하자고 이 시험을 친 게 아닌데.... 하나님께서 나를 이 시험에 붙여주신데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었을텐데....'

그러나, 그의 진로는 엉뚱한 곳에서 결정되고 말았습니다. 사법연수원 1년차를 마칠 때쯤, K는 대학 은사님을 통해 이름 있는 어느 국회의원의 딸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사법연수원에서 마담 뚜의 손에 놀아나는 동료들을 보면서 '절대로 돈이나 권력에 팔려 가지는 않으리라' 수없이 다짐했던 K였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국회의원의 딸인 J양은 명문가의 딸이면서도 너무나 순수했을 뿐 아니라 명문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이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교회 성가대로 봉사하고 있을 정도로 신앙심도 좋았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자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J양과 사랑에 빠진 K J양 집안의 성화에 따라 강남의 어느 호텔에서 처음으로 장래의 장인어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K를 처음 만난 J의원은 대뜸 "자네는 연수원을 수료한 후 뭘 할건가?"하는 질문부터 던졌습니다. K는 늘 생각했던 대로 ", 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J의원의 얼굴이 당장 일그러졌습니다. "어허. K. 변호사는 원래 연수원에서 판검사 임용될 성적이 안되는 사람들만 하는 거라면서? 자네, 그렇게 성적이 좋지 않은가?." K는 일순간 당황했지만, "제 성적이 1, 2등은 아닙니다만, 임용이 안될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J의원은 다시 얼굴을 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다는 건 참 좋은 뜻이야. 하지만, K.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를 않네. 자네 무슨 돈으로 개업을 할건가? 그리고, 자네가 아무리 '나는 성적이 되지만 그래도 변호사를 택했다'고 말한다 한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줄 것 같은가? 아무리 자네 뜻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선은 판검사 임용을 받은 후 나중에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게 순서일세. 그래야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어. 단 하루를 해도 좋으니 일단 판검사 임용을 받도록 하게. 그 이후에는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뭐라 하지 않겠네. 그리고, 남을 돕는다는 것은 원래 자기가 충분히 먹고 살 기반을 가진 다음에 가능한 일일세. 돈도 없이 어떻게 남을 돕나? 그러니, 우선 자네부터 남을 도울만한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네."

J의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K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몇 년 전 어머니께서 하신 이야기와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 우선 최소한 000이 된 후에, 남을 돕도록 하라는 말은 어른들에게 있어서 거의 성경말씀과 같군.' 이런 생각들이 계속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K J의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같이 간판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처음부터 변호사로 나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서 K도 이제 알만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그래, 2-3년만 검사 노릇을 하고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하자. 그 때쯤이면 누구도 더 이상 나에게 "우선 000이 된 후에야 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 그 해 겨울 K J양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고, 다음 해 00지방검찰청의 검사로 임용되었습니다.

검찰청에 새로 출근한 K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래시계"에서 본 것과 같은 권력과의 투쟁도 아니었고, "보고 또 보고"에서 본 것과 같은 여유롭고 멋있는 검사 생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물밀 듯이 밀려드는 사건들과, 그 사이 사이에 끼어드는 각종 부탁전화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판을 막기 위해서 마련되었다는 끝없는 결재제도도 그를 피곤하게 했습니다. 뭐 한가지도 K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K는 다시 갈등에 빠졌습니다. 내가 이걸 하면서 평생을 보내야 하나... 날로 어두워져 가는 K의 얼굴을 보다못한 S부장검사는 어느 날 퇴근길에 K를 붙잡고 교외에 위치한 조용한 고급 경양식 집을 찾았습니다. 워낙 사람 좋기로 소문난 S부장은 검찰 내에서 K가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아서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K의 폭탄선언에 S부장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내 그럴 줄 알았네. K검사 같은 정의파는 검사생활 초기에 꼭 그런 회의에 부딪히게 되지. 하하하." 하면서 긴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검사 초년시절 경험을 한참 이야기한 S부장의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일단 부장이 될 때까지만 참아봐. 그 다음에는 정말 자네 마음대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온다네. 부장도 못 되어보고 그만둔 사람을 누가 검사로 쳐주기나 한다던가? 이미 이 길에 들어선 이상, 지금 와서 길을 바꾸기도 쉽지 않네. 나중에 부장만 딱 달고 나서 개업하면 초기에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자네하고 싶던 좋은 일을 하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사실 검사 일만큼 보람있는 일이 어디 있나? 변호사만 남을 도울 수 있나? 검사야 말로 약자들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자리지."

그 즈음 한창, 각종 사기사건들을 처리하면서 '검사가 무슨 채권자 대신 돈 받아 주는 기계인가' 하는 회의에 빠져 있던 K로서는 마음 속에 반발이 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로를 수정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직서를 찢어 한강에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0. 검사로서 그는 많은 사건들을 처리했고, 10차례에 가까운 인사이동을 겪으면서 이사도 참 많이 했습니다. 가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던 자신의 꿈을 떠올릴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그저 "허허. 더 나이가 들면 그럴 수 있겠지"하고 넘어갔을 뿐, 이미 편안해진 자신의 위상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기들보다 승진에 뒤쳐진(보통 인사에서 물을 먹었다고 하지요) 그는, 결국 20년의 검사생활을 접고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정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두 딸은 대학에 재학 중이었고, 아들 하나는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교육비로 엄청난 돈이 지출되어야만 했고, 두 딸의 혼수준비도 미리 해 두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습니다. 부장검사 출신이라는 이력 때문에 사건도 엄청나게 밀려들었습니다. 사건을 가져오는 사무장에게는 일정액의 돈을 떼어주었고, 그 돈 중 일부는 경찰이나 검찰로 들어가는 모양이었지만, 돈 버는 재미에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도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은 이번에도 여전히 뒷전으로 밀려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K는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돈을 벌다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문구가 남겨졌습니다. "평생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겠다고 생각만 하던 K, 여기 잠들다."

다음은 여러분을 향한 K의 조언입니다.

"최소한 000이 된 다음에야, 남을 도울 수 있다. 우선은 나부터 안정된 직위를 갖고 난 후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해 생각하라"는 교훈을 잊지 맙시다. 여기서 000은 사법시험일 수도 있고, 판검사, 변호사의 지위일 수도 있고, 로펌의 파트너일 수도 있고, 국회의원일 수도 있고, 부잣집 사위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중요한 것은 당신이 뭔가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이 엄청난 진리의 쇠사슬을 끊고 나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우리 사회는 결코 그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틀 안에 있는 사람", "남이 하는 대로 하는 사람", "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0대에 공익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꿈을 꿔보지 않은 법률가가 있는 줄 아십니까? 20대에는 누구나 그렇게 하는 거고, 대신 30대에는 그저 모두 다 각자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겁니다. 법원에는 법원 나름의 상향성의 논리가, 검찰은 검찰 나름의 상향성의 논리가, 로펌은 로펌 나름대로의 상향성의 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논리에 따라 열심히 살면 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운운하는 것은 경쟁에서 탈락한 변호사들이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말입니다. 거기에 속지 맙시다.

우리는 모두 오직 위만 보고 달려가면 됩니다. 그것만이 이 상향성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입니다. 2000년 전 중동지방의 어느 나라에, 더 낮고 더 낮은 곳을 향해 계속 내려가기만 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말로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사람의 뒤를 따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 옆의 누군가가 "이제는 상향성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진로를 생각해야 할 때"라고 속삭일지 모릅니다. 그럴 때면, "아직은 너무 일러" 또는 "이제는 너무 늦었어"라는 한 마디로 그 속삭임을 물리치십시오. 그게 당신의 행복을 지키는 길입니다. 당신이 혹시라도 "하나님 나라", "정의가 강물처럼"이니 하는 허황된 구호를 믿는 사람이 아닌 이상 말입니다. 넓은 길을 택하십시오. 좁은 길은 실패자의 길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를 향해 달려가십시오.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24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교회 (14) "ㅇㅇ교회를 떠나며..."

 

05/12/2010

 

                                                                                  남상곤

 

지난주 주일오후 교회에서 제 글로 인해서 또 당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 당회에서 제 글들을 강제로 지우기로 결정을 했고, 주일저녁에 한 장로님이 전화로 통보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저보고 직접 글을 내리는게 어떠냐고 하시더군요저는 거절했구요.

 

제가 그 장로님께 당회에서 왜 그렇게 결정이 되었냐고 묻자

제 글이 말씀에 어긋나고, 성경적이지 않으며, 예수님의 욕을 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주시더군요. 여러경로를 통해서 저희 가정이 교회를 나갈수 밖에 없이 되어버렸구요, 그래서 결국 안해와 기도하고 고민하고 교회를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래의 인사글을 올렸고...  두 시간이 되기도 전에 아래의 인사글도 순식간에 지워지더군요.

 

 

지난주 금요일부터 제가 당한 참으로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일들로 인해 교회의 성도들께 잠간 나누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떠나는 저를 어떻게 몰아갈지가 억울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냥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다 아실 일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제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생각이 드네요.

 

 

 

 

 

이제 저의 조그마한 실험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을 시작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한 10년여전 쯤, 김두식변호사의 글인어느 기독법률가의 삶과 죽음을 읽고나서 계속 고민하고 기도했던 제 마음속의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위치에 올라서야만, 어떤 외침을 할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도 제가 학위를 받고 직장을 잡거나 교수가 되야 어떤 말을 할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최근까지도 이러한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현재 제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지금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을 실험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한 로칼교회를 바라보면서 느끼고 배우고 알게된 것들을 조금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느꼈던 것들을 이제는 조금씩 나누어야 겠다는 생각도 들구요.  그것은 제가 글쓰기가 부족하거나 사회적인 위치가 안되어서 미루거나 포기해야 겠다는 생각보다 이제는 우선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동안 '함께잘다니는 교회'라는 제 글들에 대해서 많은 격려와 기도 그리고 조언 해주셨던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그 분들의 격려와 기도, 조언으로 저와 저희 아내가 버틸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3개월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실제로 느끼고 배우고 겪을수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격려와 위로, 비판과 조언 주신 분들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ㅇㅇ교회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인사를 글로 대신하여 드릴려고 합니다.  2년이 조금 못되는 시간이었지만 ㅇㅇ교회에서 저희 가정이 받은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에 조금이라도 덕을 세워보고자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본의 아니게 교회 어른들이 걱정과 우려를 가지고 계셨다면 그것은 다 저의 부덕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저의 글에 대해서 불편하셨거나 힘들었던 분이 계시다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글을 쓰면서,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제 글이 강제로 지워짐을 당하게 되면 제가 교회를 떠나야 할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는 누구는 잘했고,  누구는 잘못했다,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톰 라이트라는 신학자가 그의 책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에서 "선과 악의 경계선은우리그들사이에 있지 않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관통한다" 라는 솔제니친의 말을 인용했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이제 조금이라도 불미스럽고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저희 가정이 다 가지고 가겠습니다.  다만 ㅇㅇ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진리안에서 더욱 굳건히 서 가기를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잘 다니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기도했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잘 다니는 교회의 꿈과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직접 성도분들을 만나뵙고 일일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떠나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ㅇㅇ교회에 하나님의 평안과 사랑이 늘 넘쳐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동안 사랑으로 대해주셨던 많은 성도분들에게 그리고 남아서 기도하시는 많은 분들에게 참으로 죄송스러운 마음을 전합니다. 주님의 평화와 평안이 늘 넘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후 2010 5월 어느 화창한 날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남상곤 가정 드림

 

 

 

 

 

김두식 변호사의 기독법률가의 삶과 죽음 이라는 글은 아래의 링크로 가시면 볼수 있습니다. http://paulusnam.tistory.com/15 


자유게시판의 글로 파문 당한 교인의 신앙 고백 
함께 잘 다니는 교회 (마지막회) - A교회를 떠나며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541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23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세번째 05/07/2010

                                           남상곤

 

“헌금리스트와 헌금채”

 

 

들어가며

ㅇㅇ교회에 와서 이전과 다녔던 교회와 색다르게 보았던 몇가지 중에 하나는 헌금입니다.  우선 주보에 헌금별로 한 성도분들의 이름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주 인상깊었고 두번째로는 헌금시간에 헌금통이 돌아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이전에 다녔던 한국이나 미국의 다른 교회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교회와 같이 주보에 헌금을 한 성도들의 이름을 나열하거나 헌금채를 쓰는 많은 교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제가 이것에 대해 접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은 처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이 두가지의 낯선 광경을 거의 2년동안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조심스러운 것은 제가우리교회의 이런 부분을 비판을 해서 바꾸자!’ 라는 것이 아닌이것이 어떠한 의미와 의도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한번 좀 다르게 생각해 보자입니다.  부디 오해가 없으시기를 두손모아 기도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가상의 예화

 

목사님의 설교가 지루하고 졸릴때, 설교시간동안 유달리 오래동안 주보의 이곳저곳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교회주보의 헌금하신 분들의 명단을 보며 이름을 하나하나 보며, 머리속으로 주보에 나와있는 이름과 머리속에 저장되어 있는 이미지를 하나하나 맞춰보기도 합니다.  A집사님은 이번주에 주일헌금, 십일조헌금, 감사헌금에 선교헌금까지 하셨음을 보면서 웬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듭니다.  역시 요즘 사업이 잘되시는가 부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 얄밉게 여겨져서 웬지 싫었던 B집사님의 이름을 찾아봅니다.  역시 없습니다. 웬지 뿌듯하며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각 헌금별 헌금액수를 봅니다.  우리교회에서 십일조헌금이 어느정도 퍼센트가 되는지도 보고, 머리속으로 일년 혹은 한달 헌금 총액도 재빠르게 계산해 봅니다.  이만하면 불경기에도 불구하고교회재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겠다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직도 설교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창을 주보를 뒤척이다가 이제 성경을 여기저기 들추어봅니다.  성경사이에 끼어져 있던 옛날 교회행사 간지가 있습니다.  그것도 꺼내 여기저기 봅니다.  ! 다행히 설교가 끝났습니다.  마음을 모두어 눈을 감고 기도를 합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헌금시간입니다.  헌금위원분들이 나오셔서 기도하시고 헌금채를 돌립니다.  헌금채를 돌리는 것을 보면서 헌금을 빨리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갑을 꺼내 보니 아차!  5불짜리와 50불짜리 지페만 있습니다.  5불짜리만 넣기에는 뭔가 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50불짜리 넣기도 좀 그렇습니다.  헌금채는 다가옵니다.  무엇을 넣어야 하는 것인가?  한창 고민하다가 오늘은 50불 짜리를 넣습니다.  재빠르게 돈을 넣고 헌금봉투에 이름을 쓰고 침을 발라 붙였습니다.  찬송을 은혜롭게 부르다가 헌금채가 올 시점에 긴장하고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합니다.  왔습니다. 헌금채를 받고 헌금을 하고 옆분에게 헌금채를 돌리고 비로소 안심하며 찬송에 집중합니다.  좀 아깝고 아쉬운 생각이 들긴 하지만 뭐 나중에 택스면제혜택을 받는 부분도 있는데다가 하나님께 헌금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은거지 라고 생각하며 나의 믿음을 스스로 대견히 여깁니다.  이제 축도 마치면 빨리 가서 식사줄에 너무 늦지 않게 설 준비해야 겠습니다.

 

 

 

주보에 나오는 헌금한 성도 리스트

 

주보에는 일주일간의 교회소식이나 예배안내와 순서등이 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중요한 사적인 문서가 아닌 교회의 공적문서입니다.  거기에 매주 헌금하신 분들의 명단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올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 리스트를 올리는 것이 중요할지 정말 진지하게 그리고 오래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게 생각한 것은헌금 하신 분들이 헌금을 했는데, 혹시나 교회가 누락할까봐 확인을 시켜준다였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거 같은 것이, 저도 헌금을 할때 이름을 쓰기도 하고 안쓰기도 하는데, 이름 쓸때는 다음주의 헌금에 제 이름을 찾아봅니다.  그런데 없을때도 몇번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이름을 고의로 누락시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리과정에서 제 이름이 다다음주에 올라갈수도 있는 것이고 무슨 실수가 있을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정부에 가서지난주 헌금했는데 왜 내이름이 없냐라고 따지지는 않습니다.  그런것을 보면 꼭 확인차 올리는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두번째로 생각해본 것은 교육적인 효과입니다.  주보에 헌금하신 분들의 이름을 보면서 신앙교육적으로 이렇게 헌금을 정기적으로 꼭 해야한다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육적 효과라면 왜 교회 주보에는 리스트를 올리는데 홈페이지에는 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번째로는 헌금하는 것을 장려하고 경쟁관계를 유발시켜서 많은 헌금을 하게하려는 것일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한 실명이 나오기에 내 이름이 안나오면 상대방이 나를 교회에서 믿음없는 사람, 혹은 헌금않는 사람으로 오해당할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 이름이 나와야 하는 것을 의무처럼 여길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같이 헌금할때 이름을 쓰기도 하고 안쓰기도 하는 사람과, 혹은 아예 늘 무명으로 헌금을 드리시는 분들은 저 리스트로 무슨 피해를 보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밖에도 다른 중요한 이유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부족한 머리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리스트를 올리는 것인지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럴수는 없겠지만 주보에 헌금한 분들 리스트를 안올려본 주와 올려본 주의 헌금액수를 비교해보면 좀 의미있는 차이가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만 해보게 됩니다.

 

또한 헌금할 때 저는 꼭 제 이름과 안해 이름을 같이 적습니다.  그런데 헌금리스트에는 꼭 제 이름만 올라갑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 안해 이름을 먼저적고 제 이름을 나중에 적어보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제 이름만 나왔습니다.  괜히 안해에게 미안해 졌었습니다.  헌금리스트를 주보에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면 안해 (혹은 자매)의 이름도 같이 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혹시교회에서 부부도 헌금을 각각 따로하라라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헌금의 항목에 대해서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교회주보를 보면 주일헌금과 십일조, 선교헌금이 큰 카테고리로 나옵니다.  중요헌금이라고 여겨지기에 그렇겠지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헌금보다 구제헌금을 주로 합니다.  저는 따로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고 (자세한 것은 아래 더 읽어볼 거리를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제 십분의 일을 교회에 보고하는 것도 좀 거북스럽습니다.  그래서 몇몇 헌금으로 헌금을 나누어 내는데 이름을 쓰기도 하고 익명으로 하기도 합니다.  주로 구제헌금을 하는데, 구제헌금을 하고 다음주 주보를 살펴보면 제 이름은 선교헌금 항목에 있거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선교헌금을 한 것이 아닌데 거기 들어간 이름을 보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삼대헌금이 아닌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마이너헌금이 되는 것도 어떠한 근거와 의도인지 좀 궁금한 생각입니다.  물론 주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큰 액수를 차지하는 의미라면 그러한 규모의 기준보다 차라리 이번주 헌금하신 분들을 통칭적으로 (감사, 주일, 십일조 헌금의 구분없이) 그냥 올리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헌금항목별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번주 헌금하신 분들 하고 그 리스트를 헌금구별없이 그냥 이름만 주르륵 올리는 거지요.  그러면 감사, 주일,  십일조 헌금 세번 다 한 분은 이름에 꽃표를 해드려야 하는지 고민도 여전히 생기네요.  ^^

 

 

 

헌금함과 헌금채

 

헌금시간이 되면 헌금채가 돕니다.  제가 헌금채에 좀 불편한 이유는 세가지입니다.  첫번째는 저는 부부가 한몸이기에 (돈주머니가 하나이기에) 저의 안해와 제가 통상 헌금을 따로 하지 않고 같이 하는데헌금채에는 한사람만 헌금봉투를 넣을수 밖에 없습니다.  주로 안해는저보고 하라라고 하고 자신은 헌금채에 헌금봉투를 넣는 권리를 저를 줍니다.  하지만 저는 그 권리(?)를 안해에게 주기도 하는데 그럴때  참 난감할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채가 제 차례에 왔는데 저는 헌금봉투가 없기에 그것을 받아 옆에 분에게 전달할때 헌금봉투 안넣고 옆으로 돌리면 뻘쭘(?)합니다.  제가 다른 분들을 유심히 보면 전혀 당황하거나 뻘쭘하지 않으시고 옆으로 잘 돌리시는 내공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저는 그런 내공이 아직 안되어서 헌금채가 왔는데 헌금봉투를 못넣고 돌릴때마다 얼굴이 화끈화끈 해집니다.  매주 노력합니다.  뻘쭘하지 않고 최대한 나이스하고 아무렇지 않게 해보려고 하는데  그래도 어색하기는 여전합니다. 

 

두번째로는 저에게 다가오는 헌금채 때문에 기도나 찬송에 집중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헌금채가 오면 빨리 헌금봉투를 넣고 (혹은 넣지않고) 다른 분에게 넘겨야 하기에, 지금 헌금채가 어디까지 와야 집중해서 봐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헌금시간에 하는 찬송의 가사에 집중해서 찬양하기가 쉽지않고 헌금채 돌리는 시간을 때운다는 생각이 듭니다.  헌금채가 아직 다 돌지않으면 목사님은 다시 3! 혹은 4!을 외치시면서 후렴을 한번 더 부르자고 하십니다. 헌금채는 다 돌지 않았는데 찬송이 끝나면 무시무시한(?) 정적감이 찾아올 수 있기에, 한번 더 그 집중하지 못하고 불렀던 찬송을 한번 더 불러야 합니다. 

 

세번째로는 동전을 넣거나 봉투없이 넣을때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우선 헌금채가 돌때 봉투가 아닌 그냥 돈이나 동전을 그냥 넣기가 힘듭니다. 웬지 반드시 헌금은 액수에 상관없이 봉투에 넣어서 해야할것 같은 의무감이 듭니다.  봉투에 넣어서 하면 더 성의있고 준비된 느낌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겁니다.  봉투에 넣어서 하면 더 준비했다라는 뜻도 있을수 있겠지만 그 액수가 숨겨져 있다는 것으로 부담없이(?) 헌금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폐를 넣을때는 웬지 옆사람이 내 헌금액수를 알게 되는 것 같아 좀 꺼려집니다.  그리고 헌금을 동전으로 하시는 분은 최근에는 거의 못 본것 같습니다만, 헌금을 동전으로 할수도 있습니다.  형편이 그럴수도 있고, 액수가 적다고 헌금 못내는 것은 아닐겁니다.  그런데 동전으로 헌금을 내면 웬지 분위기상 쪽팔리는 것 같고, 헌금채에 넣었는데 혹시나 헌금채안에 동전이 있을 경우에 내가 넣는 동전과 부딪혀 그 금속성의딸랑이 울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정말 뻘쭘할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거부감과 압박감

 

제가 이전에 다녔던 교회들은 헌금리스트가 주보에 올라가지 않았고, 헌금채가 돌지 않았습니다.  헌금리스트가 안올라오니 굳이 누가 헌금을 내고, 누가 헌금을 안내고 등의 전혀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 지금같은 생각을 아예 안해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헌금채 대신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전에 헌금함에 헌금을 했었고, 그때는 봉투가 있던 없던, 동전을 넣던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헌금함이 있다고 예배시간에 헌금순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시간이 되면 헌금위원분들이 교회헌금함을 열어서 그 헌금을 모아 앞으로 가지고 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올립니다.  헌금시간에 찬송을 방해받거나 다시한번 4절을 해야하는 경우가 적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헌금리스트가 주보에 올라는 것과 헌금채가 도는 것에 대한 성경적 혹은 역사적 의미나 맥락이 있는지 조금 찾아보았습니다.  몇몇 소수의 의견이나 자료가 있었지만 어느것도 확실한 성경적 혹은 역사적 의미를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 개교회 별로 하고있는 방식은 다 달랐던 것 같습니다.

 

혹자는 헌금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헌금리스트나 헌금채에 대한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신경쓸 필요는 없다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 같이 믿음이 부족하고 재정이 튼튼하지 않는 사람이나 새신자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새신자나 저같이 믿음이 부족한 신자들의 경우, 주보에 올라간 헌금하신 분들의 리스트나 헌금시간에 돌아다니는 헌금채를 보면서 웬지 모를 거부감(?)을 느낍니다.  게다가 헌금을 하기가 힘들정도의 재정상태를 맞은 성도들의 경우 (이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분들도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그 리스트와 헌금채로 인하여 받게되는 압박감은 참으로 큽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헌금은 하나님과 나와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헌금(봉헌)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체면때문에 헌금을 하는 것과 그 액수가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보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내 재산이 100만불인데 1불 헌금했다고 그 사람을 나무랄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재산이 100만불이지만 부채가 200만불 일수도 있고 (그사람의 사정을 모를수 있고), 그 사람의 믿음이 1불짜리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이지 제 3자가 왈가불가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헌금액수에 따라서 믿음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에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액수를 보시지 않고 그 헌금하는 사람의 자세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제가 부족하기에 헌금리스트를 주보에 올리거나 헌금채를 돌리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요소에 대한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노파심에 강조하는 것은, ‘이것들이 문제가 있으니 바꾸는 것이 좋겠다가 아니라왜 이렇게 하는 것인지를 한편 되집어보자의 시도일뿐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헌금을 내는 것에 대한 세금보고 혜택에 대해서는 지면상 더 다루어 보지는 않았지만 한번즈음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간 기회가 있겠지요.

 

 

하나님과 나 사이의 헌금
함께잘다니는 교회(13) 헌금 리스트와 헌금채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532

 

 



더 읽어볼거리

 

 

십일조와 직분 없는 새들녘교회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740

 

교회 재정의 십일조로 아이들 밥 먹이자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45

 

십일조와 삼겹살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865

 

십일조 수호자들의 불의함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166

 

한국교회의 변절과 십일조 강요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88

 

말씀을 전하고 돈을 받는 목사님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56

 

"장로·권사 되고 싶어? 돈 내"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755

 

헌금 채, 세상보다도 더 세속적인 악습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51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23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두번째 04/30/2010

 

 

  함께 잘 다니는 교회 (12)


“예수님도 후레자식이었습니다”
 


  
들어가며
 
후레자식이라는 뜻은 사전에서 살펴보면, "배운 데 없이 제풀로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입니다.
 
후레자식이란 뜻은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홀의 자식'에서 왔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버릇이 없는 아이라고 상스럽게 낮추어 부르던 말이라고 합니다. 두번째 설은, ‘호로자식’ 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때의 호로는 중국 북방의 이민족의 흉노(凶奴)를 일컫는 '호로(胡虜)'를 가리킨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오랑캐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볼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로 싸울때 이 ‘후레자식’ 이라는 말을 쓸때는 전자의 뜻인, ‘아비없이 자라서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는 뜻으로 주로 받아들여 집니다. 일반적으로 아비가 없이 자라면, 엄한 아비가 없기에 예의와 버릇이 없는 사람으로 흔히 간주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후례자식?
 
이렇게 ‘아비없이 자라서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는 뜻으로 후레자식이라는 욕이 쓰인다면, 예수님도 후레자식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서, ‘어라, 예수님에게 욕을 하는 바로 니가 후레자식이구나!’ 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예수님에게 욕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예수님은 본래 아비가 없었습니다. 물론 요셉이라는 아버지가 예수님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의 핏줄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잘 알고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아비없이 나온 후레자식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이들과 예수님과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씨가 다른 형제인 것이죠.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낳아준 아비가 없었습니다. 길러준 아버지 요셉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낳아준 핏줄의 아버지는 없습니다. 물론 좀 융통성있게 하나님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말할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니기에 혈족의 아버지 (인간으로서의)라고는 말하기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은 저에게 오히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보통 거룩한 핏줄에서 태어나 여렵고 힘든 성장시절을 거쳐 다시 그 거룩한 핏줄이 확인되는 세상에서의 성공이 확인되는 영웅신화와 달리, 예수님은 별 볼일 없이 태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저에게는 그래서 위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통계적’ 으로
 
그런데 이런 아비없는 우리에게 ‘후레자식’이라는 욕이 생기게 된 것은 보통 아비없이 자란 아이들이 정말로 예의없고 버릇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버지가 없어서 ‘후레자식’이라는 욕을 그 아이들이게 함부로 하는 경우이기도 하지만, 보통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비뚤어진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사는 우리가 흑인들에게 하는 욕인 “깜뚱이 새끼들” 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보통 흑인출신으로 편모하에서 자라 교육을 받지못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결국에는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는 그러한 흑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흑인들에게 무슨 일을 당하면 ‘깜뚱이 새끼들!’ 이라고 하면서 ‘그 놈들은 본래 그래’, ‘그냥 피하는 게 낫다’ 라고 합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보통 그러한 경우가 많고, 저 또한 그러한 흑인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후레자식’ 혹은 ‘깜뚱이 새끼들’ 하는 말은 근거없는 말이 아닙니다. 통계적으로 열에 아홉은 그런 경우가 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가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아비없이 자란 사람들이나 고아를 보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을거라 생각하는 선입견이 있게 되고, 조금만 옷차림이 거친(?) 흑인들을 보면 우리는 웬지 무섭고 피하려고 합니다. 통계적으로 어느정도, 아니 거의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결손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범죄자가 되는 확률이 많은 것은 학문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며, 흑인들이 가장 교육을 덜 받고, 각종 범죄에 연루된 것이 인구대비로 가장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단 한 사람 때문이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비없이 자랗거나 옷차림이 거친 흑인들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선입견을 대하면 안됩니다. 왜 그럴까요? 통계적으로 열에 아홉, 혹은 백에 아흔아옵은 그러한데 왜 그러한 통계를 무시하고 그러면 안될까요? 그것은 열에 하나, 혹은 백에 하나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한 사람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좋은 학교를 좋은 선생님밑에서 좋은 사람들과 지낸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될 확률이 월등할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거의 진리에 가깝습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래도 최소한 예일, 하버드, 조지타운… 뭐 이런 학교들 출신이며, 다들 뼈대있는 정치가 집안 출신입니다. 성공한 기업가나 존경받는 사회인사들도 보통 보면 다 좋은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좋은 가정에서 잘 자란 사람들이 대다수 입니다. ‘통계적’ 으로 거의 그렇습니다. 반대로 나쁜 가문에서 나쁜 학교를 다니고 (혹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 자란 사람은 보통 나쁜 사람이 됩니다. 열에 아홉이 아니라 백에 아흔아홉은 될것입니다. 이러한 통계는 세월을 통해서 거의 사실에 근접한 진리가 됩니다. 
 
그런데 그 열에 하나, 혹은 백에 하나에 해당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어진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애를 쓰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출발선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선입견과 이러한 열에 아홉에 의한 통계입니다. ‘너는 배경이 이러니 천하고 나쁜 사람이 될것이다’ ‘너 같이 배경도 없이 비천한 놈이 어딜 감히’ 라는 바로 시작하기도 전에 좌절하게 되는 그 사람들입니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정말 하나님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하나님을 찾고 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통계로 잡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아무런 빽도 절도 없이 오직 하나님으로만 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잘 알려지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역할들을 해왔고 하고있습니다. 자신들이 받았던 불공평과 학대를 조금이나마 없애고자 노력하고 그러한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소설 [장발장]에서 미리엘신부는 자신을 배신하고 은그릇과 은촛대를 훔쳤던 장발장을 사랑으로 덮고 용서합니다. 만약 그때 미리엘 신부가 장발장을 그래도 경찰에 넘겼더라면, 아마도 장발장은 그 통계대로 열에 아홉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리엘신부의 사랑과 선입견없는 시선으로 그는 열에 하나, 통계에서는 outlier (아웃라이어: 정상이 아닌 극단치의 통계값)가 된 것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제 주변에는 다들 좋은 백그라운드와 돈많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가문출신의 성공한 분들이 참 많이들 계십니다. 아마도 그분들의 자녀들은 그 부모처럼 또 그렇게 좋은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성공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에게 위로를 받거나, 닮고 싶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런데 그 열에 하나, 어쩌면 백에 하나의 그 한 사람이 그 백그라운드가 없다고 혹은 좋은 가문 출신이 아니라고 받게되는 편견과 불이익을 받는 그 한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후레자식’으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 바로 그 이유 한가지만 으로도 예수님이라면 기꺼이 ‘후레자식’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통계에 따라 백에 아흔아옵, 혹은 천에 구백구십구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뭐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백에 하나는 무시할 만한 수치이고, 실제로 거의 그러하니까요. 그러나 그 만에 하나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시선을 한번 가져보는 연습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을 평가하고 논하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배경과 집안, 재물과 학력으로 미리 제단하고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바로 보는 그 시선, 바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바라봐주는 사랑과 격려의 시선을… 우리도 한번 가져보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닮아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예수님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자체를 보기보다는 늘 그 사람의 배경을 보기 좋아합니다. 누구의 자식이며, 어느 학교를 나왔으며, 고향은 어디며, 집안에 재산이 어느정도 있으며 를 늘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강을 알고나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끝납니다. ‘그 사람은 그 집안과 학력과 재산과 부모를 토대로 계산하건대 이 정도의 사람이다’ 라고 제단하고 끝냅니다. 세상은 늘 이렇습니다. 그 사람 자체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살고, 무엇을 타고 다니고, 누구의 자식이고, 몇평짜리 집에살며, 어디에서 배우고… 이런 것으로 늘 평가합니다. 그래서 빽도 절도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절망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말씀을 나누실때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 문제 삼은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3장 54-57절)
 
사람들은 예수님이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고 특별히 내세울것 없는 백그라운드가 없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을 배쳑합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괘씸합니다. 배운 것도 없고, 재산도 없고, 직분도 없고, 뭐 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나이도 서른밖에 안되고, 뭐 내세울것도 없는 목수 주제에… 감히 어디서 나대는 것인지 괘씸할 나름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후레자식’ 인것을 알고나면 아마도 그 배척은 절정에 이르렀겠지요. ‘어디서 근본도 없는 놈이 와서 감히 설쳐’ 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바로 이것입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아무런 빽도없이 어디서 감히…’ 그런데… 성령으로 난 사람, 통계를 넘어 나타난 사람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한복음 3장 8절)
 
 
 
예수님도 빽도 절도 없으셨습니다.
 
배운것도 없고, 나이도 어리고, 재산도 없고, 집안도 별로고, 사회적 지위도 없고.. 다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으로 제자 삼으신 적 없고,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사람 평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열에 하나, 아니 백에 하나라도… 그 중심만을 봐주시는 분이십니다.   ‘후레자식’도 좋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따르면 됩니다. 다만 그 한 사람을 가로막는 바리새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만은 안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장발장에 나왔던 미리엘 신부처럼, 사람을 믿어주고, 속임을 당해도 또 믿어주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바라보기를 소원합니다. 그 한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심어주시기 위해서 바로 예수님이 ‘후레자식’으로 오셨습니다.  
 
안그래도 아비없이 자라 서럽고 힘들고 원통한 그 한 사람의 눈물 씻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기꺼이 ‘후레자식’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한사람… 통계적으로 비뚤고 나쁘게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후레자식이 되었습니다. 그 후레자식이 바로 세상을 구원한 메시야,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 하나님이 되신 예수입니다. 누구 후레자식을 감히 욕할 것입니까? 누가 감히 후레자식이라고 함부로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할 것입니까? 빽도 없고, 재산도 없고, 집안도 별로고, 나이도 어리다고 무시한다면, 먼저 예수님께 손가락질 하시고 다시 오십시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셨으니까요.
 
 
 
나가면서
 
이글을 통해, 저는 다니고 있던 교회에서 예수님께 욕을 하고 성경을 거스렀다고 이단취급을 받았습니다. 제가 과연 예수님께 욕을 하려는 생각과 의도였는지는 글을 읽고 다시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하는 바램이었지만 그분들께는 빽도 절도 없는 저 역시 후레자식 이었던 것 같습니다.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22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한번째 04/24/2010


                                           남상곤



내가 왕년에는…”





들어가며

 

최근에 많은 분들에게 분이 넘친 격려와 칭찬을 받으면서, 처음에 기도하고 고민하였던 초심에 대한 생각을 더욱 많이 하게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외침과 논의가 무엇을 바꾸거나 이룰려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더욱 확인시켜주시며, 더욱 우리 교회 성도분들과 다양한 소재를 하나님안에서 고민하고 논의하고 기도해야 겠다는 생각을 굳건게하시는 것 같습니다. 

 

"Quo Vadis Domine"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너는 나를 따르라! (Follow me!)

 

 

 

 

 

초등학교때 반장안해본 사람이 어딨어?

 

사람들과 모여서 어린시절을 이야기 하게되면 언제나 듣게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소싯적에 반장 안 해본 사람이 어딨어?’ 혹은초등학교때 공부 못한 사람이 어딨어?’ 입니다.  그러한 이야기가 깊어가다 보면, 이제내가 왕년에…’ 의 레파토리가 시작됩니다.  정말 왕년에는 다들 대단하십니다.  행군나가서 호랑이를 만났다는 둥, 철책선에서 근무할때 북한군 초병과 말뚝박기하고 놀았다는 둥, 수많은 여자(혹은 남자)가 나를 뒤쫓아 다녔다는 둥, 한 공부했다는 둥, 엄청난 사업으로 어마어마하게 잘 나갔다는 둥  그러한 이야기 듣고 있으면참 대단한 사람들이 모여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왕년에 특별한 게 없었던 저로서는과연  정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초등학교때 반장 안해본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도 한때, 젊었을 적에 그러했었다!

 

 

재미있게도 이야기가 깊어질 수록내가 왕년에는…’ 을 강조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왕년에는 잘 나갔는데, 결국 지금은 잘 안나간다입니다.  제가 아는 한 형님은 서울대를 나오셨습니다. 그것도 전국에서 손꼽는 등수로 입학하셨습니다.  그 형님은 그 때가 그분의 전성기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왕년에는이란 말은 그 형님에게는 서울대 입학하실 때 인가 봅니다.  그때가 정확히 기억은 못하겠는데 아마도 1989년인가 그런데 그 형님의 인생은 그 1989년에 정확히 멈춰 있습니다.  비록 아직도 직장도 못 가져 보시고 집에서 눈치 보며 대박을 여전히 꿈꾸시지만 서울대를 나오신 형님이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지금 잘 나가시는 분들은 굳이왕년을 들먹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그 빛나는 순간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좀 잘 안되는 분들이 늘 강조하시는 것이 바로내가 왕년에는…’ 레파토리 입니다.  그래서 그 레파토리가 시작될때는 조금 서글퍼 집니다.  그렇게 왕년에 화려하셨던 분들이 왜 지금은 저렇게 초라해지셨는지 궁금도 하고, 그 반복되는 레파토리에 조금씩 싫증이 나기도 하면서과연 정말일까?’ 하는 의심까지 들기도 합니다.  더 심해지면, 그분들은 무슨 이야기만 나오면 자신이 젊었을때 겪어보고 고민해본 문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모른다는 둥, 결론은 버킹검 이라는 둥 의 이야기를 늘어놓으십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만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새벽기도, 금식기도 안해본 사람이 어딨어?

 

이 이야기가 교회안에서 시작하게 되면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40일 새벽기도, 40일 금식기도  (혹은 20, 10) 안해 본 사람이 없고, 다들 신앙적으로 잘 나가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날마다 새벽을 깨우고, 24시간을 성령에 충만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그렇게 하나님과 가깝게 지냈다는 고백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작정기도 끝에 응답을 얻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니님께서 도와주셨고, 역사해주셨고, 지켜주시고 함께해 주셨다고 합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저도 신앙적으로 잘 나간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몸매(?)에 물만 마시며 일주일 금식기도를 해본 적도 있는 것 같고, 성경말씀이 꿀송이 처럼 달다라는 말을 경험하고 성경읽기에 온통 시간을 뺏겨본 적도 있는 것도 같고,  기도한답시고 산에 올라가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도 외쳐도 보았고, 40일 새벽기도에 개근해서 공로패(?) 같은 것도 받아 본 것 같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그때의 훈장인 너덜너덜 해진 성경과 공로패를 보면 저도 모르게 뿌듯해 졌던 것 같습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나도 왕년에는 정말 성령충만했었지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단 저 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왕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십니까?

 

이러한 신앙의왕년이 있는 우리는, 우리안에 지체가 하니님께 받은 은혜나 말씀을 나눌때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마음 잘 알지,’ ‘그때가 좋을 때지,’ ‘나도 겪어봤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한바탕 나도왕년에는레파토리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서나도 한때, 젊었을 적에 그러했었다라는 분에넘은 훈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무리수가 시작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의왕년에는 지금의 초라함이 묻어나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현실과 타협하고, 바리새인같은 율법주의자가 되어 섵불리 남을 판단하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왕년을 회복하지 못하고 무리수를 두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를 속이는 심각한 상황이 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나누는 지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현재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겸손히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치유가 어려운 거짓은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 어떠한 사람인지를 모르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현재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해도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는지 모르는 위선적인 바리새인의 모습만 남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외치고 나누는 자가 눈에 가시같이 보이게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잊고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 지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사도행전 7 54)

 

바로 신앙에서의왕년만 강조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지금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믿음생활에서의 경험은 지금 내가 혹은 우리 공동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이고 나침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그리고 모세나 다윗의 하나님을 강조했던 것은, 자신들의 선조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을때, 어떠한 일들을 경험했는지를 상기하고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선조들의 믿음의 경험은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할수 있는 바로미터이었던 것입니다.  ! 그 시절 모세의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셨었지.  그때 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나아가면 모세와 유대백성들에게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역사하시겠구나!’ 하고 나아가는 믿음의 선진들의 교훈인 것입니다. 

 

내가 왕년에는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도 그왕년에 때에 갖혀 한발자욱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내가 왕년에 겪었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때에 그렇게 역사하셨으니 지금 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공의를 외치고 나아가면 그때처럼 역사하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때 필요한 것이 바로왕년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왕년의 하나님이 바로지금의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고 그 모세의 하나님이 바로 나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서 남겨준 수많은 선진들의 이야기들은 바로이 왕년의 하나님을 왕년에 갇혀두지 말고 현재 나의,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라!’ 라는 것입니다. 

 

'내가 왕년에는'은 결코 지금 내가 하나님앞에 바로 서 있다라는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큰 일들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지금 바로 서 있지 않은 모습들을 성경에서도, 역사에서도 그리고 지금 교회에서도 수없이 목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왕년에는'는 훈장처럼 고이고이 모셔두는 전가의 보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었던 그 '왕년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때의 마음과 기도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무릎을 끓고 그 하나님을 지금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수없이 나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면 그냥 역사의 교훈으로 끝나지만,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바로 나와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나아갈때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지금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글을 맺으며

 

 

우리의 하나님은 옛날의 그왕년의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그 왕년에서 나오셔서 지금 여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그 왕년에서 하나님을 가두고 스스로 왕년에서 멈추어 사실겁니까아니면 바로 지금 여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것입니까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왕년에 젖어내가 소싯적에 젊었을 적에 그러했었지에 영원히 멈추어 사실겁니까선택은 우리의 몫이지만,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과거의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이를 거울삼아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때 요단강을 갈랐던 그 하나님은 바로 지금 나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할렐루야!

 

 

"나도 왕년에는…"
함께잘다니는 교회(9) 왕년의 하나님, 지금은?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507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21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번째  04/12/2010

 

 

                                                                남상곤

                                                                                                                                                                                                                                                                                                                                     

 

 

아직도 숨기워진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

 

 

 

들어가며

 

벌써 열번째 글입니다.  처음에 생각하고 기도한 바와는 달리 제가 고민했던 주제들을 거의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열번의 글을 통해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됩니다.  좀 더 가볍고, 좀 더 부담없이 다양한 소재를 다뤄보고자 하는 저의 인간적인 의도와는 달리 좀 더 진지하고 좀 더 고민해야하는 것들을 좀 더 쉽게 써야하는 변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은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하게 됩니다. 

 

"Quo Vadis Domine"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혹시 의도적으로?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 라는 말은 신약성경에만 100번이상 나오는 말입니다.  중요한 말이 자주 반복되어 나온다는 상식에 비추어보더라도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 개념이고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하나님 나라라는 구체적 표현이 거의 없지만 신약에 특별히 복음서에 집중적으로 반복, 그리고 강조되어 나오는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 의미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라 보다는, 예수님이 등장하시면서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에 더 가시적으로 신약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등장하시면서 하셨던 말씀도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5) 이였습니다.  어떤 분들은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복음서를 이해할수 없다고도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주 언급되고 강조되어진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잘 모르고 있거나, 배우지 못하거나,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일부로 그런 것 같이  왜 우리는 교회에서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배우고 가르치고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유들

 

하나님 나라는 참 정의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무엇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늘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한번 실제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좀 잡히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보아라.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누가 17:20-2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누가 18:1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복음 3:3-5)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내가 그것을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마치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올랐다." (누가복음 13:18-2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마태복음 19:23-24)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마가복음 10: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마가복음 4:1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은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의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수 있게 된다." (마가복음 4:26-32)

 

 

어떠십니까?  좀 감이 오십니까? 위의 예화나 비유외에도, 수많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들과 말씀들이 있습니다.  열거한 성경 말씀들만 보면, 감은 오는데 여전히 잘 잡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하나님 나라에 논의중에서 위의 예시를 토대로 몇가지의 특성만 좀 주목해서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하나님 나라

1. 예수님 그 분 자체라는 것,

2.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

3. 하나님나라는 숨기워져 있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도대체 뭔가요?

 

하나님나라는 우선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될거라고 생각하는 천국이 아닙니다.  위에 예수님이 드신 예화들을 잘 살펴보면 죽어서 가게 된다고 흔히 알려진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공간이나 영역적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첫째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 곧 하나님의 왕권 (주되심) 과 통치를 의미한다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과 공간은 예수님이 오셔서 시작되었고, 예수님 그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분이셨기에, 예수님이 바로하나님 나라그 자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하나하나씩 실현해가시는 삶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따르는 그 예수님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내가 만약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에 뜻을 순종하게 되면 거기에서 또 작은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하나님 나라의 D-Day (예수님의 초림)이라고 하고, 독일의 전쟁항복선언을 하나님 나라의 V-Day (예수님의 재림)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미래성 각각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속성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현재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Already (이미), but not yet (그러나 아직 완전히는 아닌) 으로 이해합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시작되었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로 약속하신 그 날에서야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고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도래한 것은 아닌 그 중간단계에 살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비밀스럽고 숨기워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초반부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왜 비유로 설명하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11),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1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그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라고 하셨는데그것은 바로 나, 나아가서 우리,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인 교회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제가 처음에 궁금해했던 것,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데 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잘 배우지못하고 들어보지 못하고 나누어본적이 없는가? 에 대한 답변을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수많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과 속성중에서 위의 세가지에 비추어서 살펴본다면,

 

첫째,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그 자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말씀은 예수님의 생과 삶에 대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삶과 말씀, 그 자체가 우리에게 불편하고 어렵고 찔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들은 참으로 행하기 어렵고, 불가능하기까지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빰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대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어라, 일곱번씩 일흔번도 용서해라, 이제는 아예 용서를 넘어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시지요.  이러한 말씀들을 들으면 아득해 집니다.  상식적으로 절대 이해가 안될 뿐더러 그럴게 할수도 없을 것 같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이 바로 하나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완전히 임하는 그날에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불가능하게 보이는 말씀을 회피할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already)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행하는 사람에게 바로 하나님나라가 시작되고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빨간색으로 나와있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를 가르치고 선포하는 교회는 요즘에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듣기에 귀에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귀에 거슬린다는 것이 그렇게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선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 쓰라렵기 때문입니다. 이 쓰라림의 경험이 없으시다면 한번 가슴에 손을 얻고 냉정히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믿는 것은 잘먹고 잘사는 축복된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십자가에 매일 매일 못박는 삶입니다.  예수믿고 축복받는다는 것이 돈 잘벌고 사회에서 성공하고 호위호식한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오늘날의 교회는 거리낌 없이 가르칩니다.  바로 하나님나라가 없는 가르침입니다. 

 

둘째로 하나님나라가 이미 우리가운데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인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도래할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현세에는 하나님 나라를 외면합니다.  ,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나라는 어차피 미래의 일이니, 지금에는 그저 좀 대강대강 살고, 또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어차피 미래에 일이니 지금 현재는 대강 내 사리사욕 챙기며 권력욕과 돈을 추구하며 평수를 늘리고 자녀보험을 하나 더 들어두는 것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역사하시는 것이고, 그러기에 내가 현재 뭐 특별히 할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좀 한눈팔고 살아도 괜찮다고 은근슬쩍 타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틀리지는 않은 말 같습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맞기는 합니다.  그러나 유명한 신학자인 톰 라이트의 비유로 설명하면, 우리는 설계자에게로 부터 각자에게 맡긴 설계도면을 받았고, 그 도면에 따라 각자 자기의 맡은 부분에 따라 돌을 깎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돌이 어느 자리에 가서 어떻게 놓여 건물 일부가 될지는 현재 지금 이 돌을 깍으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설계자가 오시면, 그 건물 전체의 윤곽이 드러나고 결국에는 설계된 건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그때를 기다리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위한건설인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숨기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유로 말씀하시고 설명하셔도 결국 귀있는자가 듣는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닫는 마음은 하나님도 여실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들었던 모두가 그 뜻을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당시 유대신앙의 리더격인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아예 그 비유를 듣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을 쫓았던 제자와 그 무리들만이 그 비유를 듣고, 또 그 비유의 의미를 예수님이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지만 희한하게도 다 알수가 없습니다.  숨겨져있고 가려워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 많은 교회들에게도 이 하나님의 나라가 숨겨져있고 가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교회안에서도 잘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마가복음 4:11)  한마디로 많은 교회가 저 바깥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없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함이 없으면 비록 교회의 형태를 띄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저 바깥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숨기워진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중심주제이면서 기독교신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교회에서는 잘 들을수 없고 배울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교회가 교회다운 기능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잘 드려서 돈을 많이 벌어 성공했다는 록펠러나 카네기를 예를 들면서도, 자기 부모와 친족을 버리면서까지 십자가를 쫓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없는 교회에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물질주의와 상향성에 대한 욕구가 교회에 만연한 체로 세상의 기득권과 권력체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교회에서는, 끊임없는 자신을 돌아봄과 회개가 요청되는 하나님 나라는 선포될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무엇인가로 고립된 섬같은 고독을 느껴보지도 못한 체, 끊임없는 큰 집과 더 높은 지위만을 바라보고 쫓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들을 수 없고 배울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바깥 사람들에게 숨기워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거룩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주되심을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인정할때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한 두 영역이 아닌 전영역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주되심 (Lordship)이 세워져야 합니다돈과 재물에 대해서는, 자녀에 관해서는, 출세에 대해서는 눈감아 지는 것이 아닌...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이 인정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회개와 기도, 용서와 사랑, 그리고 그 의를 구하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질때...  우리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고 운동성을 가지고 미래에 완성되어질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주되심을 인정한다는 것은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라는 엄청난 주제를 짧게 쓰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을 글 쓰기 전부터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실행을 해본 무지막지한 저의 용기에 저도 놀라곤 합니다.  ^^  무식하지 않으면 용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부디 성령하나님의 도움으로 제 부족한 글쓰기가 많은 성도분들에게 잘 이해되기를 계속 기도하게 됩니다그리고, 계속해서, 모든 영역에서 주되심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부를 쫓는 교회가 숨겨둔 하나님나라 
함께잘다니는교회'(8) '아직도 숨겨진 하나님나라 (Kingdom of God)'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93

 

 

더 읽어볼만한 책들

 

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짐 월리스, “회심

양용의,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19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아홉번째  03/29/2010

 

                                                                                                                                                                                                                  남상곤

 

 

"상처입기 쉬운 (Vulnerable)"

 

 

Vulnerable

 

유학을 올때, GRE라는 시험을 보았습니다.  GRE 라는 시험이 생소하신 분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를 갈때 보는 시험인 SAT와 비슷하면서 좀 더 어려운 시험으로 보시면 될듯 합니다. 그래서 SAT와 유형이나 구성이 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SAT 문제 (특히 영어)를 보신분은 아시겠지만은 낯설고 어려운 단어들을 외워야만 풀수 있는 문제들이 대다수입니다.  GRE의 경우는 아무래도 SAT보다 고등시험이니 훨씬 더 어렵고 잘 안쓰는 어휘가 많이 나오고, 그 뜻을 알아야만 풀수 있는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미국학생들도 어렵고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저같은 사람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어마어마한 단어를 매일 외우고 잃어버리고를 반복하고, 가장 덜 까먹을때를 잡아, 그날 시험을 보고 간신히 원하는 점수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러한 단어들을 공부하면서도, 실제로 공부할때는 그러한 단어들을 거의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지금 그 단어들을 우연히 보게되면어디서 본 단어인데? ! GRE 공부할 때 외웠던 단어였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뜻을 모르는 것을 보면서 쓴웃음을 짓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어떤 옷의 단추를 뜻하는 단어도 그 당시에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사전에도 없는 단어들도 많았었습니다.  그런 단어들 중에 유달리 기억에 남는 몇 안되는 단어가 ‘vulnerable’ 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그리 어려운 어휘는 아니어서 가끔 일상생활에서 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쉽게보는 단어는 아닙니다.  뜻은취약한, 연약한(신체적정서적으로 상처받기 쉬움을 나타냄)’ 이었고 발음도 쉽지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http://endic.naver.com/enkrEntry.nhn;jsessionid=AD63B98C69F52CBD6E6CB28E18828971?entryId=6deacba33f1643cf87df8bf052e3cd68&query=Vulnerable

(링크를 따라가셔서  아이콘을 누르시면 발음을 들으실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vulnerable 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된 신앙서적을 읽을 때 심심찮게 나타나곤 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언급할때 자주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표현하는 여려 형용사 중에 가장 낯설었던 단어가 바로 vulnerable (상처입기 쉬운) 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념이 잘 정리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저 vulnerable라는 단어가 예수님과 관련있고, 그래서주목해서 봐야할 필요가 있겠구나란 생각을 하게되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

 

 

그 즈음, 한국에헨리 나우엔이라는 가톨릭 예수회의 사제의 책이 기독교 서점가에 인기였었습니다.  천주교 사제출신의 헨리 나우엔의 책들은 오히려 한국 천주교보다 개신교에서 더 인기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의 책 대부분이 번역되어 나와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저도 몇권을 읽어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제 출신으로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적으로 공부하던 헨리 나우웬은 예일과 하버드의 교수로 봉직하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데이브레이크라는 캐나다 토론토의 장애우를 섬기는 단체로 가서 섬김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습니다.  저도 그분의 삶에도 큰 감명을 받았고, 실제로 그 분의 저작들을 몇권 요약해서 레포트를 쓴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저는 무엇인가 깊은 영성이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한 이해도 하지 못한채로 그냥 참대단한 영성가다라는 생각으로 흘려버린지 이제 10년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때 나우웬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상처입은 치유자 (Wounded Healer)’는 우리들 사이에 자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용어였지만 무슨 뜻인지는 그 당시에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Vulnerable 과 상처입은 치유자

 

그런데 이 ‘vulnerable’ 라는 단어와 헨리나우웬의상처입은 치유자가 제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게 되면서 연결된 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vulnerable’ 하면서 동시에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생각을 하게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묘사하는 형용사로서의 ‘vulnerable’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잘 표현해주는 단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은 자신이 상처받을 것을 아시고도 몸을 던져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특히 십자가에서 벌거벗긴채 달려, 친구와 제자들의 배신과, 사람들의 모욕과 오해속에, 마지막으로 기대었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외면을 당하고 외롭고 고독하게 십자가서 죽임당하시는 장면은 ‘vulnerable’라는 말을 잘 실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완벽한 인간이셨기에, 외롭고 고독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고뇌, 십자가를 저야만 하는 것, 그리고 하나였던 성부 하나님과 분리되는 고통, 그리고 사람들에게 몸을 내어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셨지만, 예수님께 남은 것은 배신과 모욕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잘 상징한 장면이 바로 십자가에 벌거벗은채로 달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군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들고 다녔으면서저 꼴 좀 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지?’  갖은 저주, 비아냥, 조롱과 오해, 박해와 질시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으로서도 견디시기 쉬운 일이 아니었을것 같습니다.  온몸을 던져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배신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불러보지만, 하나님마저도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예수님은 상처받기 쉬운 분이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상처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온몸을 던져 상처입을 것을 알고도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아무말 없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시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vulnerable’ 하셨던 것입니다.

 

 

 

 

용기있는 자가 미녀를 쟁취한다

 

삼수를 해서 들어간 대학에서는 많은 후배들이, 두 세살 많은 저에게 자주 연애상담을 하러 오곤 했습니다. ‘형님, A자매가 좋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럴때마다 저는 거리낌없이 후배들에게가서 고백해라,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하는 거야!’ 하면서 후배들의 등을 떠밀어 주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번도 성공했던 후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대가 된 자매의 눈에 백마를 타고 왕자님이 나타난 들,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저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격려하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가라!  이 자매(산지)를 내가 주소서! 하고 갈렙의 믿음으로 나아가라!’  보통 거절당하고 온 후배들은 너무 괴로워했었고, 저는 등 떠밀은 죄가 있기에, 그 후배들을 주로 맛있는 것을 사줌으로써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 후배들은 그렇게 그렇게 마음이 강하여져 갔었고, 지금은 다들 어쩜 그리 하나님안에서 아름답고 지혜로운 자매들을 만나 좋은 가정들을 다들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제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  어쨌든, 제가 말하고자 하려는 것은 이렇게 마음의 고백을 하러 나아갈때, 그 때가 바로 vulnerable이 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없이 살다보면 이렇게 무방비상태의 vulnerable한 채로 다른 사람에게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자매에게 마음을 고백하러 나가던 제 후배들은, 갑옷을 해체하고 상처받을 것을 각오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방어가 없기에 그때 당하는 상처는 치명적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vulnerable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시도조차 못하는 것이고, 자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없으면 사랑도 얻지 못하고, 상대방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 20대 초반의 자매가 당연히 거절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후배가 상처받을 것도 너무 명백히 알고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그 후배를 말린다고 한들, 그 후배가 그 마음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몸과 마음을 던져 vulnerable한 채로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그 도전을 하지 못한 사람은 그 아픔이 어떤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냥 아프고 고통스러우나, 뜻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란?

 

 

헨리나우웬의상처입은 치유자는 정말 제가 단순무식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하는 제가 참 무식해서 용감하다고 자부합니다), 상처입은 자가 상처받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으로 이용되는 방법을 사역자가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처받은 사람에게 나아갈 때 우리는 환대(hospitality)의 방법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환대는 상처받은 사람이 제공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가 치유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곳에서 상처가 치료되고 아픔이 경감되어서가 아니라 상처와 아픔이 새로운 비전을 위한 출구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고백할 때 서로의 소망이 깊어지며, 서로의 나약함을 공유할 때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힘을 기억하게 됩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중에서- 

 

 

상처입은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지않고 정면으로 직시해서 그것을 온몸으로 부딪히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는 (깊이 있게 나누기는 지면상 곤란하지만) 소외감, 분리, 고립,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그를 깊은 영성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들 자신의 고뇌를 통해 영적인 삶을 살도록 격려하게 했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속에서 내가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받은 상처를, 내가 이웃과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마음을 던져 vulnerable한 각오를 하고 마주하는 상처들을 통해 새로히 사람들을 치유하기 원하시고, 또 그러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상처가 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vulnerable 상태로 벌거벗은 채 몸과 마음을 던져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통에는 소명이 있고,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의 가볍고 단순한 차원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러한 고통은 내 죄로 인한 것이거나 상대방의 죄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고통과 상처는 남에게 자신을 내어주기위해 용기를 가지고 vulnerable하게 나아갈때 받는 상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나아가려면 반드시 갑옷을 벗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던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매에게 마음을 고백할때도 마음을 던져 vulnerable한 상태가 되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데 마음을 던지지 않으면 치유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던져 사랑한 예수님앞에서 언제나 무한한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먼저 가셨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을 것임을 아시고, 아프고 고통스러울 것을 아시고 몸과 마음을 던지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위로가 있고 치유가 있습니다. 

 

 

 

그 길 가시렵니까?

 

제가 헨리나우웬의 영성에 대한 이해가 짧아 글이 횡설수설하고 길어짐을 느낍니다.  짧게 정리하면, 아무도 상처받기 원하지 않은 이 시대에, 하지만 상처를 받을수 밖에 없는 지금에 하나님께서는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부름에 답하려려면 반드시 갑옷을 벗고 벌거벋은 vulnerable 상태가 되야 합니다.  그리고 그 vulnerable한 상태에서 받게되는 상처는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그 길만이 다른 사람에게 진정 나아가는너의 이웃을 너의 몸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9)의 가장 큰 둘째되는 계명을 지키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길에 초대받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아직 때가 아닐 수도 있고, 아직 웬지나는 멀었다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완전히 준비하고 가는 길이 아니라 바로 지금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첫 발자욱을 디디기만 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물론 평평대로는 더욱 아닙니다.  사막이 될수도 있고, 거친 비탈길이 될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고통스럽고 고난의 길입니다   이 길에 초대받은 사람도 소수이지만, 초대를 받은 사람 중에서도 그 길을 실제로 걷기로 한 사람은 더 소수입니다.  모두가 나이스하고 쿨하고 깔끔하고 상처받기 원하지 않는 지금의 시대에는 정말 더 좁은 문입니다. 

 

그래도 그길 가시겠습니까?  자신 있으십니까?  이 길은 정말 아픕니다.  그리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도 가시렵니까?  그럼 같이 가십시다.  그 여정에 많지는 않지만 친구들도 있고, 먼저 걸어갔던 선배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가셔서 길을 내셨기 때문에 곳곳마다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정말 헨리나우웬의 깊은 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체, 이렇게 글을 쓰는 제가 참 한심하기도 하고 용감하기도 하고, 걱정이 앞섭니다만, 읽으시는 분들을 잘 이해하게 해 주실 성령하나님을 기대합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헨리나우웬의 책들을 읽어보시기를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영적 발돋움> <모든 것을 새롭게> <춤추시는 하나님> <친밀함> 등등 많은 책들이 잘 번역되어 있고 우리교회 도서실에도 몇 권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두껍지는 않은데 생각보다 페이지가 잘 안 나가실수도 있습니다.  ^^

 


 

더 읽어볼거리

 

헨리 나우웬의 생애와 영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한 사이트입니다.

http://blog.ohmynews.com/junnamu/29827

 

 

 

'상처입기 쉬운(Vulnerable), 상처 입어야 하는'
'함께잘다니는교회'(7) 상처 받기 원치 않는 시대를 살며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77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18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여덟번째  03/22/2010
 


ㅇㅇㅇ 집사님께


                                                                                                      남상곤

 

 

이 글은 제가 전에 다녔던 미주의 한 한인교회의 게시판을 통해 제가 연재했던 ‘함께 잘 다니는 교회’의 글들을 보고 A집사님께서 저에게 쓰신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A집사님께서는 당시 저의 첫글인 ‘예배가 너무 졸려요’ 에서 댓글로 기도를 좀 더 하고 글을 써라 라고 조언을 해주시고, 자장면이냐 탕수육이냐 라는 글 다음에는 저에게 직접 게시판을 통해 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좀 많이 길어서 걱정입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여지는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함께잘다니는 교회 – A 집사님께

  

들어가며

우선 A 집사님이 용기있고 진지하게 제 글에 대해 의견을 개진해주셔서 참 감사를 드립니다. 문제를 은폐하고 회피하는 것보다 이렇게 열어서 논의하고 또 이를 계기로 더 기도할 수 있는 계기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계속적으로 교회 안에서 진지하고 고민하면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계시는지 논의하고 기도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남상곤 형제님 

연초에 출장떠나 있을때 저를 포함해서 형제님도 교회서 집사임명이 되었다는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먼저글에는 형제님으로 호칭했으나 "형제님"은 여전히 좋은 단어이고 부를수록 친숙하게 느껴지기에 그대로 쓰겠습니다.  

 

--->A 집사님,

제가 서리집사가 된지 이제 8년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유학을 나오기전에 집사임직을 받았고, 작년에 제가 서리집사가 아니었던 것은, 휴스턴으로 새로 이사와서 A교회에 새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것보다는 제 스스로 집사로서의 안식년을 개인적으로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직분보다는 차라리 교회안의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A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혹시나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A 집사님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불편해 하실 분도 계실 것 같아, 저는 계속 집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글을 쓸 때는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리 신경 써도 읽는 사람이 글을 선택적으로 읽거나 또는 선택적으로 인용되면 곡해가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글을 쓸때에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기 위해 쓴 글이 종종 잘못 오해 혹은 오독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우선 A 집사님께서 제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거나, 선택적인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지 않으신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쓴 '짜장면이냐, 탕수육이냐?'의 글의 요지를 뭐라고 보시는지요?  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것은 마지막 부분의 첫째, 둘째, 셋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집사님의 이해를 돕고자 간단히 요약하면, 첫째, 목회자에게 과도의존하여 신도들이 스스로 성경을 펴서 읽고 고민하는 데에 게을리 하는 것을 우려했고, 둘째, 대제사장이라면 대제사장의 직무를 소홀히 하거나 목회자에게 맡기지말고 스스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현재의 목회자 수준의 헌신과 섬김이 신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 세번째로 전 신자 제사장 교리가 단순히 우리가 제사장이라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일상의 삶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배가 되야한다 라는 세가지 입니다.

그런데 집사님의 글에 요지는 (제가 읽건데) 1. 하나님안에서 하나되는 것은 잠잠하고 침묵해야 한다, 2. 하나님은 권위와 질서의 하나님이기에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3. 그리고 기도하는 것은 어렵고 글을 쓰는 것은 쉽다. 4. 아울러 순종과 기도로 교회를 위해 문제제기를 하지말라 라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만약 제가 잘못 읽었다면 확인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제가 왜 집사님이 제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고 생각했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제 글의 요지는 '전 신자 제사장 (Priesthood of All Believers) 교리' 가 아닙니다. 제가 위에 언급한 세가지를 논하고자, '전 신자 제사장 교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만약 집사님이 제 글의 요지를 이해하셨다면, 먼저 이 세가지에 대한 의견을 먼저 주시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집사님께서 '전 신자 대제사장 교리'에 대해서 이해나 동의가 어려우시다면, 제 글에 대한 반박보다 루터나 칼빈의 글을 읽으시고 그 글에 반박을 하시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2. 권위와 질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제 글에서 권위와 질서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언급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한 '전 신자 제사장 교리'에서 목회자가 더 이상 구약시대에 제사장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하나님이 질서와 권위의 하나님이기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더 더욱 이해가 어렵습니다. 

3. 그리고 목회자의 권위와 설교권을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근거로 말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은 아니라고 알고있습니다.  그러면, 집사님의 개인적인 견해이신가요?  제가 부족하지만 성경을 읽고 공부한 바로는, 목회자의 권위와 설교권은 더 이상 목회자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고 배웠고 알고 있습니다. 

4. 기도가 어렵고, 글을 쓰는것은 쉽다는 것은 어떤 생각과 근거에서 말씀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왜 기도는 어렵고 글은 쉽지요?  기도와 글이 반대의 개념인가요?  기도도 글로 나타납니다.  성경의 시가서들은 글로 된 기도입니다.  왜 기도와 글이 반대의 개념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시편의 기자들의 많은 기도들이 쉽게 쓰여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5. 왜 교회에 문제제기를 하면 순종과 기도에 위배가 되는지 역시 잘 이해가 어렵습니다.  문제제기가 순종과 기도에 위배되는 것인가요?  저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셨던 사역의 대부분은 '문제 제기'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시고, 성전에 가셔서는 불같이 화를 내시고 판을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늘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고 논쟁과 토론(질문과 답변)이 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맞으니 잠잠하고 순종해라’ 라고 아니하시고 어처구니가 없는 뻔한 질문에도 더 좋은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6. 만에 하나라도 집사님이 말씀하신 순종과 기도라는 것이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그냥 눈감고 좋은 게 좋은 것이고 그저 은혜 (?)로 덮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정상이고,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기도로 함께 해야겠지요.  역사적으로도 문제가 없었던 교회가 없었고, 지금도 문제가 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형제님이 몇 번에 걸쳐 쓴 글을 관심과 또한 우려를 가지고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부분이 젊었을 때 저의 고민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공감도 합니다. 저도 한때 기성교회에 대해 많은 반발도 있었고 많은 상처도 있었습니다. 다음주 출장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분주한 가운데도 형제님의 마지막 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형제님께 글을 써야 하겠다는 마음을 주시네요. 형제님이 저를 위해서 기도한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몇 주 전부터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 집사님께서 제 첫글에 첫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하구요.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저도 집사님이 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집사님께 글을 써야 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집사님을 위해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글의 내용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 갈 수 있는 만인 제사장인 것은 맞습니다. 사역은 목회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평신도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신도"라는 호칭도 어떤 의미로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사명 받은 "사역자"로 선 것이니까요. 전임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가 아니면 생업을 가진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가로 나눌뿐이지요. 어찌 보면 평신도라는 소극적 단어로 인해 생업을 가진 사역자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수동적인 교회안의 종교인으로 끝나는 우를 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제가 만인 제사장이 아닌 ‘전 신자 제사장’ 이라고 표현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이 아닌 믿는 신자가 모두 제사장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평신도에 대한 표현도 맞지 않는 것에 동의합니다.  저 역시 평신도라는 용어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대처할 만한 용어를 만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그냥 성도라고 써도 좋을 것 같구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를 허락하였는가도 알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 만인 제사장을 허락하고 그것으로 끝난다면 각자 집에서 성경보고 기도하며 직접 하나님과 관계 맺고 신앙생활 하면 되지 왜 교회에 모여야 하나요?  그것은 우리가 공동체로 모여서 해야 하는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새로운 약속)은 교회를 통하여만 이루어 가십니다.  모여서 하나되어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는 하나가 됨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건강치 못한 교회들이 많기에 꿈과 같은 일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신 일이고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되는 일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매주 정확하고 탁월한 지적이십니다.  교회의 핵심 중에 하나는 공동체성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적예배가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부르심은 개인적이면서 또한 공동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에서의 예배와 공적 예배가 공존해야 우리의 부르심이 완전해 진다고 믿습니다.  제가 '전 신자 제사장' 을 강조하고 일상에서의 예배를 강조한 것이 공적예배에 대해서 소홀히 해야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공적예배가 일상의 예배에 비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고, 일상에서의 예배는 덜 인식되거나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님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한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여러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분열’이나 ‘하나됨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전체주의적 사고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하나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연합됨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집사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다양하고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나가 될수 있을까요? 형제님처럼 꾸준히 자기생각을 교회사이트에 올려서 하나가 될수 있을까요? 그러면 몇백명의 사람들이 다 같이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함락할때 하나님께서 왜 7일동안이나 침묵케 하셨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잠히 하나님이 앞서 하시는 일을 보라 하시는 명령을 많이 보게됩니다. 우리가 말을 많이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없습니다.

 

------->집사님의 궁금점이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배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한가지의 통일된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저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이트에 올린 글들은 그 배경과 생각이 다른 한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는 제 글을 모두가 다 동의할거라고 당연히 생각치 않으며, 동의할 수도 없다고 당연히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을 꾸준히 교회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왜 하나가 될수 없을거라 생각하시는지요?  오히려 생각이 다른 데, 아무 말 없이 있는 것이 더 하나되고 연합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안드시는지요?

중요한 것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서로의 인정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생각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집사님께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되었다고 생각하시는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핵심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다른 신앙의 색깔과 노선을 같이 안고 갈 수 있는가?  그리고 내가 믿는 신앙만큼이나 상대방의 신앙도 존중해 줄수 있는가?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저는 집사님이 말씀하신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우선 다른 생각을 우리 교회안에서 표현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우리 교회 상황에서는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전체주의적으로 사고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하나의 시각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A 집사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됨은 무엇인지요?  의견과 생각은 다르지만 잠잠하고 조용하는 것인가요?  생각은 다른데 그래도 잠잠하고 조용히 있어서, 다른 생각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됨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함락할때 7일간 침묵한 일이 집사님께서 이 맥락에서 드신 합당한 예가 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듭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위해 7일간 침묵한 것이, 과연 침묵하고 잠잠하라라는 문자적 의미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 상황에서 7일간 침묵하고 잠잠해야 했을까요?  저는 전적으로 여리고 성의 함락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 읽었고 묵상했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다르게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성경에 잠잠하고 침묵했다고 나오면, 모든 상황에서 침묵하고 잠잠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집사님께서 여러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생각만을 해야하니 잠잠하고 말을 하지말아라 하는 뜻으로 이 예를 드셨다면 저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깊은 영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에 저는 절대 동의합니다.  침묵을 통해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교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극복하려는 논의와 토론을 혼란으로 여기시는 것은, 집사님께서 교회사적인 전통에 대해서 잘 모르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문제에 대한 논의와 토론의 역사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등은 기독교의 공의회에서 토론으로 형성된 교리이며 (우리가 진리로 믿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의 경우,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사항이 아니라 니케아 신조에서 여러 사람들의 논의와 토론으로 정립된 사항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당시의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회의, 하이델베르크 논쟁을 통해,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신학자들과 격렬히 토론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러한 논의와 토론(말과 글) 으로 지금의 개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시면, 사도들은 토론을 통해서 교의를 형성해갔음을 알수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오라 우리가 와서 서로 변론하자’ 라고 말씀하시는 변론과 토론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

 

하나님의 교회를 허락하시고 교회에 질서를 원하셨습니다.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질서는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신앙적으로 검증받은 사람들을 세워서 장로로 교회를 취리하게 하셨고 신학교에서 훈련받은 목사로 말씀선포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권한과 권위는 어찌하다보니 우연히 그리 된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아무나 나서서 가르치면 질서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집니다. 완벽한 교회는 이땅에는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안드는 부분들이 많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훈련을 위해서 이용하시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고치자는 목적이 질서보다 우선하지는 않습니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습니다.

 

--------> 교회에 질서를 원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질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제가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집사님은 권위와 질서를 혼용해서 쓰시는 것 같은데 제가 볼 때는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일하시기에 편하라고 질서를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바라보는 하나님은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비효율적이고 일을 어렵게 하십니다.  4일이면 갈 수 있는 애굽에서 가나안의 여정을 40년으로 돌리십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비효율적인 일에 대한 비용을 하나님께서 감당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일하기 편하다’ 혹은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라는 것은 우리의 시각입니다.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시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입장에서 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질서가 있어야 일하시기 편하신 분이 아니고, 우리가 보기에 질서가 없어 불편해 보여도, 하나님께는 전혀 불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질서가 없더라도 그분의 일을 행하시는데 전혀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  집사님이 말씀하신 질서는 사람들이 일하기 편하기 위해 질서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집사님께서는 교회의 질서를 강조하시고,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교회안의 자유함이 필요하고, 주의 영이 계신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을 읽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 자유의 하나님 모두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어느 한가지의 속성이 우월하다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여러가지 하나님의 성품 중에 집사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을 더 많이 만나시고 느끼셨듯이, 저는 자유의 하나님을 더 많이 체험합니다.  질서가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이라면, 자유 역시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입니다. 

목사만이 말씀선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점이 듭니다.  그것이 만약 목사만이 말씀을 선포할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이라면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으로 말씀을 선포할수 있습니다.  다만 말씀을 더욱 깊이있게 보기위해 그 역할을 전문적인 신학훈련을 받은 목사가 주로 하는 것이지 그것이 목사나 장로만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게 ‘전 신자 제사장 교리’ 이지 않습니까?

집사님께서 말하시는 '아무나 나서서 가르치면 질서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진다' 는 말씀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 서로의 선생이요 제자입니다.  '아무나' 를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교회 평신도를 말씀하신 것이라면 역시 위험한 생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사님의 ‘아무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직분인지요?  직분이 되면 나서서 가르칠수 있고, 직분이 안되면 가르칠수 없나요?  과연 어디에 누가 직분이 되면 서서 가르칠수 있고, 안되면 서서 가르칠수 없는지 나와있는지요?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아무나' 일어나 가르친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 지금과 같은 권위를 당시에는 존중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고백을 보면 그 ‘아무나’ 인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는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해 일어나 설교할때는 예수님을 3번이나 배반하고 나서 아마도 2달 정도의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당시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배반하고 부인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 입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와의 차이는 한사람은 자살했고, 한사람은 살아서 회개했던 차이입니다.   둘 다 예수님을 배신한 배반자였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베드로는 당시 '아무나' 보다도 못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자가 무슨 설교냐?' 라고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한술 더 뜹니다.  바울은 스테판집사를 돌로 때려 죽인 사람입니다.  스테판 집사를 돌로 죽인 살인자가 다시와서 그 스테판 집사가 설교하던 예수를 전했습니다.  당시의 바울은 ‘아무나’ 보다도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구약시대와 달리 한명의 선지자나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이루어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야고보가, 안디옥에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또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이가, 바로 집사님이 말씀하셨던 '아무나' 가 성령을 받고 일어나서 가르치고 설교합니다.  구약에서는 '아무나' 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아무나'가 있습니까?  그 '아무나'는 이제 왕같은 대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대제사장을 집사님은 여전히 '아무나' 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집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아무나’를 통해서 지금도 역사하시고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초대교회에서도 언제나 문제투성이었습니다.  과연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가한가?  바울이 과연 사도권이 있는 사람인가?  이스라엘을 두고 이방인의 땅에 가서 전도하는 것이 과연 먼저인가?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주의하고 대할 것인가?

당연히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제가 없는 척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죄인들인 사람들이 모였기에 당연히 문제가 있고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문제에 대해서 오픈하고 논의하는게 빈대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일까요 아니면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없는 척 질서만을 강조해서 회칠한 무덤이 되는 것일까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오히려 문제가 없는 것처럼 덮는 곳에서 후에 폭발성을 가지고 문제가 크게 발생해서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문제가 있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용기있고 정직한 태도라고 믿습니다.  

교회의 문제를 고치는 목적이 질서보다 우선하지 않는 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은 아닌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제가 읽었던 성경중에 그러한 내용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성경읽기가 짧아 미처 못 읽었던 것이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은 교회의 질서에 관한 집사님의 개인적인 견해인 것 같습니다.  비록 그 견해에 저는 전혀 동의하지는 않지만, 집사님이 그러한 견해를 가지신다는 것 자체는 존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든지 견해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신앙생활은 권위의 싸움입니다. 평생 삶속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내속에서 속사람의 권위에 순종하느냐는 권위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국가나 교회의 권위도 하나님이 허락치 않으면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권위를 인정치 않으면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의 권위는 더더욱 인정하기 힘듭니다. 교회도 질서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가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위에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권위가 있듯이 교회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가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바울선생님이 말한 내 속에서의 또다른 사람에 대한 갈등을 권위의 관점에서 보시는 것은 참 참신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서로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집사님은 국가나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셨지요?  그럼 하나 여쭈어 보겠습니다.  극단적인 예가 될 수도 있겠지만, 2차 세계대전에 히틀러의 독일도 국가이고, 국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니 무조건 순종해야 되는 것인가요?  당시의 일본제국주의 역시 국가였으니 집사님의 말씀대로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니 무조건 따라야 하는것인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에 천주교회도 어찌되었던 분명히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가 면죄부를 돈을 받고 팔았는데 그 교회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이고 그런 권위에서 나온 하나님의 명령이니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인가요?  집사님의 말씀, '국가나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 과연 언제나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게다가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는 교회에서는 섬김입니다.  남에게 명령하고 ‘내 말에 잠잠히 순종하라’ 하는 것이 권위가 아니고, 예수님처럼 낮아지셔서 죄인들을 만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권위는 세상에서 말하는 권위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상에서의 권위는 ‘무조건 잠잠하고 순종하라’ 가 통하는 사회겠지요.   그런데 세상에서도 실제로 권위가 있는 사람은 ‘내가 권위가 있으니 잠잠하라’ 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 권위가 있으면 알아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그러한데,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권위라면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요? 더 잘 알고 더 잘 고개 숙일 것입니다.  보통은 권위가 없는 사람이 억지로 권위를 주장할때 하는 말이 ‘내가 권위가 있으니 잠잠하라’ 입니다.  ‘내가 권위가 있으니 내게 순종하라’ 라는 것은 최소한 기독교의 진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권위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가장 낮아지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가장 높은 권위를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집사님이 예로 드신 바로 그 로마서 13장이 과연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해서 무조건 적으로 순종하라라는 말씀일까요?  문자적으로만 보면 그렇게 쉽게 볼수 있습니다.    저도 그 구절을 주로 이용해서 무조건적으로 귄위에 순종해야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되었습니다.  말씀을 볼때는 그 말씀의 콘텍스트를 같이 보는 것을 교회에서 훈련받아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곡해되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i] 

질서와 권위를 강조하시는 분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시는 로마서 13장을 강조하시는 분들 중에 그 배경이 되는 로마서 12장을 언급하시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간단하게만 언급하면, 로마서는 당시 로마제국에 의해 핍박받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쓴 바울의 편지입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은 이유는 로마의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을 흔드는 정치적인 반역행위였고 그래서 반역죄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마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기독인들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반역자들었습니다.  정치적인 반역의 의도가 전혀없는 순수한 신앙인들이 정치인으로 처벌받는 아이러니속에서 사도바울은 귄위에 대한 복종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복종은 무조건 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공동체는 국가에 대해서 언제나 '조건적' 으로 복종할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우상숭배나 살인(당시 로마군에 입대하는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할때, 기독인들은 그 요구에 복종할수 없습니다.  로마에 대한 반역의도가 없는 초대교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을 받을때 사도바울은 그 교회공동체들에게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나서 로마서 13장이 등장합니다.   바울사도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교회를 지속적으로 박해하던 거대한 악 (로마제국)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방법으로 '복종'의 윤리가 제시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배경을 깡그리 무시하고 로마서 13장을 대하면 그저 모든 권세와 권위는 다 하나님께로 온 것이니 무조건 순종해야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서가 쓰여진 콘텍스트를 고려한다면 과연 시대를 초월에 모든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라라는 의미가 아님을 명확하게 알게됩니다. 

그리고 집사님께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권위가 있다고 하셨는데 (물론 당연한 말이고 저도 동의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보통 부모에게 권위가 있다고 강조하시는 분들 중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라’ 라는 성경 말씀을 더불어 강조하시는 분은 거의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따르라’ 는 아닐 것입니다.

 

형제님이 지적하는 문제의식들은 현대교회들에 분명 존재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은 ㅇㅇ교회사이트 보다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기독교 사이트에 더 알맞는 내용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사이트에 올려지면 마치 우리 교회에 문제가 있는것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무는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걸고 누구나 볼수 있는 열린 공간에 올리는 글은 좀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쓰는 글들이 구체적인 실례를 들지는 않았지만,  A교회에 현재 다니고 있는 제가 느끼는 (그리고 적지 않은 우리 교인들이) 안타까움들을 나눈 것입니다.  제가 불특정 다수인 한국교회 성도 전체를 다룰 역량과 실력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그럴 위치도 아니구요.  다만 제가 이 글들을 우리 교회 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제가 다니고 있는 우리교회에 문제는 교회외부의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볼 수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를 우리교회 안에서 우리가 다루어야지 그것을 우리 교회 밖에서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집사님께서는 '교회 사이트에 올려지면 우리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요? 없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있는데 없는 척 하자라는 것인가요?

그리고 우리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이 모인 곳에 문제가 없겠습니까?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같이 열어서 논의하고 기도를 해야지, 문제가 있는데 없는 것처럼 덮는 게 과연 진정으로 교회에 덕이 되는 일일까요?  비단 저희 교회만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다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당연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모였는데 문제가 없다 라는 교회를 저는 한번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도 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는데 은혜(?)로 덮는 것이 과연 교회를 허무는 빌미가 될까요  아니면 문제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같이 고민하고 기도하는 것이 교회를 허무는 빌미가 될까요? 

 

형제님, 우리의 신앙의 진짜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변화하지 못하는 진짜문제는 몰라서 못하는것이 아닙니다. 교육이 모자라서 못하는것도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좋지않아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토론회가 없어서 못하는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고 싶어도 할수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사탄의 세력을 이길수 없습니다. 교회는 말이나 구호로서 일을 하는곳이 아닙니다. 성경은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고 하나님의 신으로만 된다고 합니다. 이런유는 기도로만 이길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문제에 대해서 말만 많이하지 정작 엎드려 기도하지 안는다는 것입니다. 

 

------>집사님, 저는 우리 신앙의 문제가 제대로 온전한 복음을 교회를 통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온전히 배우고 알면 그 이후에 고민되는 행함과 섬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고민과 함께 잘 다니는 교회는 무엇이고 어떻게 사람들과 평화롭게 같이 잘 살아갈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주의화 되어있고 기복 신앙만을 강조하는 반쪽 복음만으로 저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바꿀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하나님께 이것을 놓고 엎드려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기도는 많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앙과 믿음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은 잘 안한다고 생각합니다.  근거없는 유언비어나 수군거림은 혹시 많을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우리교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태도로 나누는 것은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말하기는 쉽습니다. 글쓰기도 쉽습니다. 남의 허물은 잘 보입니다. 인터넷 뒤져보면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현대교회의 문제점들을 쓴소리로 고발하는 좋은 글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쓴소리로 변화를 가져올까요? 친절합시다! 외친다고 친절해 질까요? 겸손합시다! 외친다고 겸손해 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교회를 위하여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명령하십니다. 구호를 외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말의 성찬에 있지 아니합니다. 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기도가 어렵고 글쓰는 것은 쉽다고 집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집사님은 글쓰기가 쉬우신가요?  저는 글쓰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쩔 때는 기도보다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면에서 글쓰기는 쉽고 기도가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집사님은 글을 쉽게 쓰시고 기도를 어렵게 하시는지 몰라도 저는 글쓰기도 어렵고 기도도 어렵습니다.  글을 쉽게 쓰시는 집사님이 솔직히 부럽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시면 글을 보고 글쓴이가 기도를 많이 하고 썼는지 적게 하고 썼는지 알 수 있는 것인지요?

그리고 남의 허물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이요, 우리의 문제입니다.  제가 문제 제기를 했다고  남의 허물을 쉽게 보아 남의 허물을 지적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저의 허물, 나아가 우리의 문제를 논한 것입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 제기는 작게는 저의 허물이요 넓혀서는 우리교회의 우리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논해야 하는 것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쓴소리가 변화를 가지오지는 않지만 변화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목회자가 세습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뜻있고 용기있는 분들의 문제제기로 이제 그 문제가 심각한 문제이고 기도해야할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세습은 일어나지만 (변화는 없지만), 이것을 문제있다 라고 인식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변화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 집사님이 저보고 ‘친절하자’, ‘겸손하자’ 구호를 외친다고 하셨는데, 집사님의 논리대로라면 지금 동일하게 집사님도 ‘기도하자’, ‘잠잠하자’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친절하고 겸손하자가 구호라면, 집사님의 기도해야한다 순종해야 한다 역시 구호겠지요?  맞습니다!  집사님 말씀대로 이렇게 구호만 외쳐서야 당연히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요? 

친절하고 겸손하자고 해서 집사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될거라고 의도도 기대도 하지 않았구요.  그런데 집사님의 말씀대로라만 기도하고 순종하라고 해서 변화가 이루어 지던가요?   설사 그렇다고 순종만을, 기도만을 강조한다고 변화가 이루어질까요?  기도를 할때 내가 하는 기도가 바른 기도인가?  바른 기도제목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한번 쯤은 진지하게 기도와 같이 같이 병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대로 보시는 것은 참 위험하신 생각이라고 봅니다.  집사님은 지금 제가 ‘기도는 안하면서 글은 쉽게 쓴다’ 라고 가정을 넘어 아주 위험한 단정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 첫글의 댓글에서도 ‘기도를 하고 글을 써라’ 라고 권유해주셨는데요, 거기에서도 동일하게 제가 ‘기도를 하지않고 글을 쓴다’ 는 아주 위험한 단정을 너무나 쉽게 하시더군요.  제가 여기에 대놓고 유치하게 ‘저 기도하고 글 썼습니다’ 라고 답변을 달아야만 집사님의 위험한 단정이 사라질 수 있을거라는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더욱 글쓰기가 저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는 힘듭니다. 왜냐 기도는 능력이기에 사탄이 우리에게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대여섯시간 앉아서 글쓰기와 한시간 엎드려서 기도하기와 어느것이 더 어려울까요? 저의 경우를 보면 기도하기가 더 힘듭니다. 사탄이 글쓰는것은 방해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러 엎드리면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왜냐? 기도에는 실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  맞습니다.  기도는 힘듭니다.  기도는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기도를 강조하고 기도를 많이한 우리 한국교회는 이렇게도 영향력이 없고 개독교라 불릴까요?  한시간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으로 부족한 것일까요?  두시간, 세시간 엎드려서 기도하면 영향력이 생기고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되는 것일까요?  혹시 잘못된 내용을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나와 내 가족만 잘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번 우리의 기도를 뒤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집사님은 글은 쉽고 기도하시가 힘들다고 하셨지요?  저는 글쓰기와 기도가 다 힘듭니다.  그리고 대여섯시간 앉아서 하는 글쓰기 자체가 기도가 될수있는다는 것을 저는 배웠습니다.  집사님은 보시기에 ‘젊고 아무것도 모르는 집사가 편하게 앉아 쓰는 글은 쉽게 쓰면서 한시간 엎드려서 하는 기도를 왜 안하나?’ 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말이고 또한 글입니다.  비록 엎드려 한시간 기도하는 것만큼의 육체적 노동은 아니지만, 저는 ‘글을 쓰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구나’ 사실을 요즘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글을 쓴다고 해서, 한시간 엎드려 기도하시는 분들을 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한시간 기도하는 분들은 그만큼 더 겸손하고 더 상대방을 존중하시는 분들 이실거라고 믿습니다.  한시간 엎드려 기도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쉽게 남을 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탄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처럼, 글 쓰는 것을 명백히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글은 역사와 시대를 바꾸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글쓰는 것이 쉽게 느껴지시는 집사님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저는 칼보다 펜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의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서는 글로 남아진 성경이면서 글입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쓰러져가는 천주교회를 향해 종교개혁의 시초를 알린 역사를 바꾼 글이었습니다.   저는 루터가 그렇게 쉽게 글을 썼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단은 글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지우려고 방해할 것입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모습은 교회를 위하여 문제제기를 하는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모습을 집사님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고, 기도해야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저는 저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모습은 우리의 문제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우리안에 많은 다른 믿음의 생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집사님의 말씀대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저도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얼마나 어떻게 기도했냐에 관심이 있지, 다른 사람이 기도를 많이 했는지 적게 했는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주로 보이게 기도하고, 기도를 오래하는) 바리새인에게 왜 '독사의 자식들!' 이라는 표현을 쓰셨을까요?   ‘기도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하셨을까요?  ‘기도만 통해서만’ 은 무엇가 부족한 것이 있을거라는 생각은 안해보셨는지요?  단순히 ‘기도해야 한다’ 라는 구호보다는 ‘무엇을’ ‘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같이 고민하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단순히 ‘기도많이 해라’ 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기도제목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집사님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합니다.  집사님의 생각이 다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다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울러 제 생각 역시 다 틀리거나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온 모습과 배경이 다르고 만난 하나님의 속성이 조금씩 다르니, 당연히 생각과 믿음의 색깔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되는 것, 그것이 저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이고 그리스도안의 공동체의 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과 의견이 다른 데 어떻게 연합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교회가 하나되고 연합되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입니다.  본질적인 복음에 동의한다면, 비본질적인 요소에 자유함을 구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속할 수도 없구요. 

손을 들어 기도하고, 때를 정해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절기를 지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왜 예수님은 불같이 화를 내시며 '뱀과 독사의 새끼들!' 이라고 하시고,  당시 민족의 반역자였던 세리가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나는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한 세리가 더 의롭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훨씬 더 기도를 많이 했을 텐데요...   미루어 보건대, 엎드려 한시간 이상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됨'과 마찬가지로 진리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치열한 고민과 사색과 생각에서의 영적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이 또한 저희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이야기하고 논하는 것이 언제나 틀린 것일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아래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였을 때...  모두 겸손히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 하나되고 연합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로 연합된다는 것이 하나의 목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이 글을 통해 몇몇 부분에서는 집사님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거나 이해가 안간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생각을 집사님께 강요하지 않습니다.  집사님의 살아오신 배경과 신앙에 따른 신념과 믿음을, 비록 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그 자체로 존중합니다.  중요한 것은 집사님과 제가 생각이 다르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각과 신앙색깔의 다름을 하나로 묶어주실 수 있으신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면 될 것입니다. 서로의 다른 색깔을 인정하고 그 자체로 정직하게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함께 잘 다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더, 제가 좋아하는 리처드 벡스터의 개혁된 목사의 글을 인용해 볼까 합니다.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in necessariis unitas,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in non-necessariis libertas,

모든 것에는 사랑을. in utrisque caritas.

-리처드 벡스터의 개혁된 목사(The Reformed Pastor, 1656)-

 

제 글에 용기있게 응답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런 계기로 우리가 서로 또 배우게 되고 더 겸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은폐하고 회피하는 것보다 열어 논하고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집사님께서 진지하게 의견을 말씀해주시고 이에 같이 열린공간에서 오픈해서 논의하는 것이, 보다 진리로 한걸음 나아가기 위한 우리 A 교회의 작은 노력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제 답글에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늘 제가 인격과 믿음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A집사님같은 분들의 좋은 말씀을 듣기 원하고 또 같이 논의하고 기도하면 더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된 남상곤드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i]로마서 13장에 대한 설명은 김두식 교수의 글을 부연설명한 부분입니다.  김두식 변호사의 이 부분에 대한 원글은 “한국교회, 진보와 보수 어디까지 왔나 (상)”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02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11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일곱번째  03/18/2010


짜장면이냐 탕수육이냐?


                                                                                                   남상곤

 


 

짜장면이냐 탕수육이냐?

 

김장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가게되었습니다.  천국문에 다다르자 예수님이 두팔을 벌려 수고했다 라고 맞아주셨습니다.  김장로는 상기된 표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이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구나하는 마음에 설레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까지의 먼 여정에 출출하겠다며 천국중화요리식당으로 김장로를 데려가서 짜장면을 시켜주셨습니다.  김장로는 예수님께서 직접 맞이해주신데다가 처음 맛보는 천국짜장면의 맛에 황홀했습니다.  천국 짜장면은 너무 맛있었지요.  그런데 반쯤 먹었을까, 옆의 자리에 같은 교회에 다녔던 김집사가 탕수육을 먹고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김장로는 너무 반가워서! 김집사 아닌가?  이거 너무 반갑네!” 하고 즐겁게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반가운 인사도 잠시, 김장로는 갑자기 예수님께 서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김집사는 더 비싸고 맛있는 탕수육을 먹고있는데 자신은 짜장면만 먹고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장로는 예수님께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예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김집사는 집사고 저는 장로인데, 왜 김집사는 탕수육을 주시고 저는 짜장면만 주신 겁니까?” 하고 볼멘소리를 하자 예수님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김장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김목사배달나갔다.”

 

 

 

전 신자 제사장 교리

 

이 가상의 우스개 이야기는 우리에게 소중한 단초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웬지 집사-장로-목회자의 순으로 하나님의 일을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인양 생각하곤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는성직()’ 라는 말을 씁니다만, 우리 개신교에서는성직()’ 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직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성직이고 모두가 제사장이지, 성직자라는 특수한 계급의 사람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로마카톨릭의 부패에 대항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의 핵심중의 하나가 바로전 신자 제사장 (Priesthood of All Believers) 교리입니다 (흔히만인 대제사장교리라고도 합니다만, 저는전 신자 제사장교리라고 쓰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링크에 있는 김기현 목사의 글을 참조하십시오.)

 

전신자 제사장 교리는 말 그대로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우리의 죄 때문에 제사장이 주관하는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때 찢어진 성소의 휘장은 이것을 상장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태복음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마가복음 15:38)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누가복음 23:45)

 

 

구약시대에 지성소에서는 대 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갈수 있었던 것이 이제 모든 신자가 모든 날에 지성소를 들어갈수 있도록 개방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제사장의 집전하는 제사없이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왕과 같은 제사장이 되었고,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며, 거룩한 민족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 모두를 제사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더 이상 제사장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않으며,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담대하게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베드로전서 2:5)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5:10)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전 신자 제사장교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이루신 일이며, 종교개혁을 통해 다시한번 강조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잘 실감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는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에서 지도자로 섬기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의 제사장과 비슷한 역할을 주관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가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같은 권위와 신분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본질적인 차이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목회자가 보다 전문적으로 목회를 하기 위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훈련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평신도와의 아무런 신분적 차이가 없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 즉 분업의 차이이지,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똑같은 제사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목회자에게는 특별한 영적인 능력과 권위가 있고, 마치 구약의 제사장이나 선지자 같이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목회자는 제사장이나 선지자라기 보다는 교회의 리더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있어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목회자는 반장일 뿐 선생님이 아닙니다. 반장은 선생님의 필요에 의해 특정한 역할을 맡은 한 학생에 불과합니다. 반장이 선생님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반장은 그저 여러 학생 중 한 명입니다. 단지 특정한 역할을 맡았을 뿐입니다. 목회자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반장으로 등장하는 엄석대처럼 선생님(하나님)의 권위를 자기 권위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목회자는 결국 엄석대처럼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남오성 ,” 교회 개혁 Q&A (1) 만인 제사장주의에 대하여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57

 

 

 

 

전 신자 제사장 교리가 그래서 뭐?

 

그러면 이제 전 신자가 제사장이며,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더이상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특수한 계급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지금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첫번째로 그것은 목회자보다는 평신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목회자는 제사장이나 성직이 아니고, 목회자의 설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은 여전히 목사의 설교만을 하나님의 말씀선포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목회자의 설교나 성경공부에만 의존하여, 평신도 스스로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기도하는데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의 설교와 새벽기도의 말씀을 듣고, 충분히 성경을 알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목회자를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어, 평신도 스스로 말씀을 읽고 적용하고 스스로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하게 된다는데 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중세 가톨릭교회처럼 신부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 스스로 성경을 펴서 오늘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에 직접 응답하시기 원하십니다.

 

 

두번째로, 이제 믿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적의 권리를 목회자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제사장의 권리라면,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려고 하셨던 중보의 삶을 우리도 동일하게 전도와 기도를 통해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이것을 목회자의 일이니 목회자에게만 맡겨두자 라고 하면 제사장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모든 덕목은 사실 믿는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야 하는 역할입니다.  섬김과 청빈, 그리고 순종과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일이 목회자에게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가 추구해야하는 삶인 것입니다.  목회자가 삶의 목표를 재물, 소유, 육체, 쾌락, 명예, 인기, 권력, 군림, 권위에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듯이, 우리 믿는 신도들과 목회자 수준의 낮아짐과 섬김과 봉사, 정직과 실천,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구약시대에는 제사(예배)가 성전을 통해서만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 되고, 우리 몸이 성전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제사이자 예배가 되었습니다.  주일날 오전에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의 우리 모든 삶이 다 하나님께 드릴만하고 기뻐하시게 할만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은 공부하다 죽으면 순교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직장일때문에 과로로 숨져도 순교가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 1)

 

 

 

 

마지막 질문

 

 

글을 맺으면서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목사로 평생을 봉직하고 천국에 간 목사와 그냥 평범히 한 가정의 주부로 평생을 지내고 천국에 간 주부가 있을때, 과연 누가 더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을 받을까요?  이제 어떠신가요?  지금도 목사라고 생각하시나요?  답은아무도 모른다가 정답입니다.  목회자라도 목회자의 일에 소홀하면 부끄럽게 천국에 들어갈 것이고, 주부라도 일상의 삶에 충실하면 하늘에서 가장 큰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둘다 제사장이요, 둘다 하나님의 자녀요, 둘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나가면서

 

이 꼭지의 글은 기본적으로 아래의 두 글을 크게 참조하여 썼습니다.  두 글의 내용과 형식을 적극적으로 참조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남오성 ,” 교회 개혁 Q&A (1) 만인 제사장주의에 대하여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57

 

김기현, “만인제사장인가, 전 신자 제사장인가?”

http://blog.daum.net/sionaba/9834391

 

 


목회자가 '엄석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함께잘다니는교회'(6) 다시 '전 신자 제사장 교리'로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49

 

posted by paulusnam
prev 1 2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