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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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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16. 19:40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다섯번째  03/01/2010

 

우리안의 샤머니즘

                                                                                                          남상곤

 

세계제일의 영적인 민족

 

우리나라는 영적인 민족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우리나라를 거쳐가면 세계최고가 되는 것을 보면 잘알수 있습니다.  이른바 토속신앙인 샤머니즘도 그렇고, 불교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로는 대승불교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유교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로는 유교의 본산인 중국을 넘어 유교를 전승할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남아있으며, 가장 늦게 들어온 기독교도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부흥과 발전을 이룩해내어 현재는 가장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중에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즐비합니다.  어떤 종교든지 우리나라를 거치면 가장 발전하는 것을 보면 우리민족은 참으로 영적인 민족이 아닐수 없을것 같습니다.

 

 

대학입시때만 되면

 

우리나라의 영성이 확인되는 순간은 주로 겨울철입니다.  해마다 대학입시때만 되면 교회나 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벌어집니다.  입시 100일 기도회같은 것이지요.   이때만큼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던지 거의 동일한 기도를 합니다.  집사님은 십자가 앞에서, 보살님은 불상앞에서, 이도 저도 아닌 분들은 당산나무나 보름달을 바라보며 우리 아들, 우리 딸, 대학 합격시켜주십시오.”  이 기도외에 다른 기도가 있겠습니까?  대학입시 정원은 정해져 있기에 합격자의 수도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하나님보다 세면, 불상앞에서 기도했던 부모들이 자녀들이 대학합격을 더 많이 할까요?  서울에 A 교회보다 부산의 B교회가 더 새벽기도를 많이 하면, 부산의 B 교회 자녀들이 더 많이 합격할까요?  서울의 대형교회인 C 교회에서는 서울대를 지원한 학생만 수백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 학생들의 부모들이 각각 기도하면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더 오래 기도하고 더 많이 헌금하면 들어주실까요?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많이 맞고 적게 틀린 학생이 합격하고, 적게 맞고 많이 틀린 학생이 떨어집니다.  기도가 모자르거나 헌금이 부족해서 떨어지고, 새벽기도를 많이하고 헌금을 많이해서 합격하는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명문대 합격한 것과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은 우리는 이미 잘 알고있지 않습니까?

 

 

 

비빔밥과 샤머니즘

 

우리나라의 문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종교적 문화가 혼합이 되어있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이훈구 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의비빔밥이라고 비유했습니다.  한국 사상의 밑바닥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토속신앙(土俗信仰) 곧 무속신앙(巫俗信仰)이 있다. 그 위에 천 여 년에 걸친 불교사상이 얹혀 있고 또 그 위에는 오백 년의 유교 사상이 얹혀 있다. 그리고 지금은 기독교와 서구의 사상들이 표면을 덮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동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마저 곁들어 있어 한국은 동서고금의 모든 지혜가 갈무리된 곳간과도 같다. 즉 비빔밥이다."(「한국 전통 종교와 한국 교회」이훈구 저, 글로리아).

 

그런데 많은 종교학자들은 외래종교가 우리나라로 들어올때마다 늘 이 토속신앙인 샤머니즘이 새로들어오는 종교에 의해 밀려났다기 보다는 샤머니즘과 혼합되어 융화되는 성격을 가진다고 지적합니다.  즉 불교도 한국에 들어와서 무속신앙과 섞여 한국만의 고유의 불교가 되었고, 유교와 기독교 역시 각각 전승되었지만 무속신앙을 개혁했다기 보다는 무속신앙안에서 자연스레 융화가 되어 독특한 한국의 유교, 한국의 기독교를 만들어 냈다고 보고있습니다.

 

 

샤머니즘이란?

 

샤머니즘(무속신앙) 이란 쉽게 이야기해서 오직 샤먼(무당)만이 선과 악에 주관하며 영적 의식을 수행함을 믿는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체계입니다.  샤먼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로 신과 사람들 사이의 대리자의 역할을 합니다.  샤먼은 이상심리나 공포의 상태로 분위기를 몰입시켜 초자연적 신령계와 접신하여 그 정보를 전달하고, 길흉을 점치고, 악령을 제거하고 귀신을 불러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의 초자연적 신령계는 인격체가 아닙니다.  샤먼을 통해 나타나는 그 초자연적 신령계는 주로 협박과 공포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샤먼은 그 신령계를 달래고 빌어서 신령계로부터 복을 받고 병을 치료받습니다. 거기에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샤머니즘은 현세의 물질적인 복을 강조합니다.  샤먼을 통해 물질을 바침으로써 초자연적인 신령계를 달래고 어르는 것이지요.  인격체가 아니기에  필요할때만 샤먼을 불러 물질을 바칩니다.   쉽게 말하면 알라딘의 램프의 지니라고 볼수도 있을 겁니다.  뭐가 아쉽고 필요한 것이 있을때 지니를 불러 금 나와라 뚝딱!”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와 결정적인 차이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는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아울러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시고 우리를 벌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래의 내용은 저의 생각이나 견해라기 보다는 박노찬씨의샤머니즘과 한국 기독교의 내용을 제가 요약한 내용입니다.   뒤새겨 볼만한 내용이라 생각해서 나누어봅니다.

 

 

한국에서의 샤머니즘의 영향을 살펴보면 쉽게 단군신화를 떠올리면 쉽게 알수있습니다.  신화를 통해 우리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단군은 재정일치 즉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통합적인 샤먼 즉 무당이었음을 알게됩니다.  단군뿐만이 아니라 주몽신화, 박혁거세 신화등, 초기 부족국가들의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제정일치의 사회의 지도자인 샤먼(무당)이 다스렸던 사회였습니다.  거기에 쉽게 들어본적이 있는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다는 어머님들의 이야기들은 모든 물체에 정령이 존재한다고 믿는 자연숭배 또는 정령숭배의 원시종교로 애니미즘을 포함합니다.

 

어쨌든 우리나라는 이렇게 무속신앙을 토대로 발전되어온 나라이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과 문화 심지어 우리가 믿는 기독교안에도 이러한 샤먼니즘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목사를 샤먼으로, 예배를 굿판으로 빗대어 쉽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바른 말씀을 전하거나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목사보다는 어떤 영적이고 신적인 권위를 통해 복과 화를 주관하는 샤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목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지나치게 영적권위를 내세우며 성경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가감없이 선포하고 그에 따르지 않을 경우 화가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다른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의 기독교에서는 목사를 지나치게 신격화하여 대우하고 그것을 목사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예배가 굿판과도 비슷하게 신학이나 회개가 없는 기복신앙만을 강조합니다.  굿판에서 무당이 작두를 타고 초자연적인 영과 접신하는 것과 비슷하게 기독교에서는 예배를 통해 성도들은 참관자가 되어 샤먼인 목사가 집례하는 공연으로 생각하게 되고 이러한 교회일수록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됩니다.  샤먼은 자신의 말을 따르면 복을 받고 자신을 뜻에 위배되면 화를 받게 될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예배출석의 이유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마치 지난주에 우리집에 불이 난것이 지난주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헌금도 좀 더 많은 축복을 받기위해 내게됩니다.  심방의 경우도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가 심방이라는 것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만 유달리 발달된 것이나 자동차를 새로 샀다고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는 등의 행동은 다른 기독교에서는 볼수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기독교문화의 형태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예들이 기독교안에 남아있는 샤머니즘의 한 형태로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샤머니즘으로 인한 피해는 신앙이 개인주의화 되고 삶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예배의 형식을 잘 갖추어 어떤 웅장함이 깃들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예배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목사의 축복기도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 하나 예수믿고 이땅에서 축복받고 죽은후 천국가면 그만이다라는 개인주의가 발달하게 되며, 결정적으로 복음을 듣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전혀 변화되지 않게됩니다.  예배가 끝나면 내면의 변화없이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굿판에서 굿이 끝나고 돌아가는 구경꾼의 모습과 흡사한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안의 샤머니즘

 

헌금이 부족하고, 봉사가 부족하고, 새벽기도에 나오지않고, 기도가 부족하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망하시거나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 신령계도 램프안의 지니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이 나의 생각과 뜻을 너무나 잘 이해하시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잘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몰아가시거나 협박하지 않으십니다.  탕자에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좀 못나고 괜찮습니다.  재주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양아들을 삼아주셨고, 후사로 삼아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못박히시게 하면서까지 우리를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해주시고 사랑합니다.  거기에 어떠한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안에 뿌리깊이 남아있는 샤머니즘의 전통은 이것을 위협합니다.  복을 받기위해 자꾸 무엇을 더 해야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헌금을 더 많이 해야하고, 새벽기도에 나와 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몸이 부서지도록 봉사를 해야하고 한다고 요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그리스도가 내안에 계시는 것, 바로 이것이 복입니다.  복을 달라는 기도는 우리 기독교에서는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푸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 4-9: 표준새번역)

 

 

복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될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성숙한 신앙으로 이어지고, 비로소 우리는 내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 이웃과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는 나만 잘먹고 잘살면 되는게 아닙니다.  같이 잘다니는 교회, 더불어 잘 사는 세상에 대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님을 따라 지고가야할 십자가  고난을 받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쫓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가복음 9 12: 표준새번역)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 20: 표준새번역)

.

 

 

 

 

그러면 어떻게?

 

한국교회안에 뿌리깊은 샤머니즘은 누구를 탓할필요가 없는우리들의문제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한국교회의 문제입니다.  물론 샤머니즘의 영향이 2백년의 한국 기독교역사에 흘러온것을 두고 어떻게 칼로 물을 베어내듯 그것을 잘라내어 척결할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것을 쉽게 분리할수도, 또 분리해서 쉽게 없앨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안에 샤머니즘으로 인한 문제는 결국 우리가 말씀위에 올바로 섰을때 하나씩 자연스럽게 껍질이 벗겨지게 될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공부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덮어놓고 믿지말고, 열어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생각하고 묵상해서 하나님은 누구시며,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시며, 우리는 어떤존재이고 또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소그룹으로 모여 말씀을 보고 나누고 말씀앞에 자신의 삶이 드러나는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겪어야 합니다.  말씀이 검이 되어 우리가 그 말씀앞에 꿰뜷어지고 갈라질때, 우리는 복음이 아닌 것은 분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 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 냅니다. (히브리서 4 12: 표준새번역)

 

 

 

또 한편으로는 비록 그 전통이 샤머니즘이라고 할지라도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으로 남아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샤머니즘의 내용을 잘 분별해서 수용하는 것도 필요할것입니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와 심방과 같은 전통은 이제 한국기독교문화의 커다란 줄기와도 같은 부분입니다.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내려왔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의 새로운면을 한국식으로 수용해서 그 내용을 더 풍성히 했다라고 볼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새벽에 정한수를 떠놓고 자손들의 복을 비는 것은 비록 가장 대표적인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의 전형이지만,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때 이러한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샤머니즘을 기독교적으로 바꾸어보고자 예수님이 새벽미명에 기도하셨던 것을 고려하여 한국교회만의 특징인 새벽기도가 탄생되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한국적인 기독교의 문화를 만들어낸 예라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는 문제가 생기면 무당을 부르는 것이 한국의 전통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기독교적으로 바꾸어 보고자 교회에서는 대심방 등의 이름으로 목사가 성도들의 집을 찾아가 목사가 목자와 아비의 마음으로 성도들의 삶을 먼저 찾아가 기도하고 위로하게 되는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늘 이것의 뿌리가 샤머니즘으로 부터 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지나친 새벽기도나 심방으로 인한 폐해 역시 늘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새벽기도에 출석하여 복을 달라고만 기도하고 새벽기도에 참석했으니 나의 믿음을 보였다고 생각하거나, 성도들의 집을 골고루 심방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하러 오신 목사님에게 축복의 기도만 바라는 것은 새벽기도와 심방의 폐해가 될수도 있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나 교회의 리더인 목사가 성도의 가정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다만 이것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않도록 유의하는 자세가 필요할것입니다.

 

 

 

 

나오면서

 

1.     우리안의 샤머니즘의 주제로 글을 쓰다가 발견하게 된 박노찬씨의샤머니즘과 한국기독교의 글이 저의 생각보다 더 정교하고 잘 정리했음을 알게되어 제 글보다는 그 정리한 글을 잘 요약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2.     글이 진행될수록 갈수록 양이 길어지고 재미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잘 모르니 횡설수설 한다는 것이지요.  그저 제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 안의 샤머니즘
'함께잘다니는교회'(4) 예배와 굿판의 차이는?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33




 

참고문헌

 

샤머니즘과 한국 기독교, 박노찬 (http://1tim612.net/others/shamanism.htm )

「한국 전통 종교와 한국 교회」이훈구 저, 글로리아

 

 

더 읽어볼거리

 

양복입은 무당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624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120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59

 

한국 교회, 기복주의에 푹 빠지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774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27 나누고픈 이야기

어느 기독 법률가의 삶과 죽음
(내수동 교회 증인들 1200호 특집호)

 

 

김두식 저


(가상 이야기)
S고등학교에서 1, 2등을 다투는 K군은 어려서부터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자란 학생입니다. 교회 장로님인 아버지와, 권사님인 어머니는 늘 그에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일찍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K는 우연히 교회에서 한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뇌성마비를 앓아 걷기와 말하기에 장애가 있는 그의 이름은 L이었습니다. 어려운 집안 환경과 신체적 장애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L은 혼자 힘으로 고입 검정고시를 마치고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K군은 L군을 처음 보는 순간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 L군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 주게 되었습니다. 비록 고 3 신분으로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L군을 도와주기 시작한지 두 달쯤 지난 후 치러진 모의고사에서 K군은 난생 처음 심각한 좌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모의고사가 끝난 후 학교 현관 입구에 나붙은 우등생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평소 아들의 학교 성적에 애써 초연한 척 하던 K장로도 이번에는 좀 충격을 받았는지, 조용히 K군을 불렀습니다. "얘야.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한 번 생각을 해 보았니? 내 생각에는 역시 네가 그 L이란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구나. 물론 네가 좋은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한 것은 잘 알고 있다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거다. 지금은 네 공부에 주력해야 할 때고,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만약 지금 공부에 주력하지 않아서 대학입시에 실패한다면, 나중에 네가 진짜로 누군가를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게 되고 만다. 우선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다." 물론, K군은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자기 방문을 잠그고 들어간 그는 곧 아버지 말씀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고, 조용히 L군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의외로 L군은 선선히 "잘한 결정이다. 학력고사 잘 보라"고 격려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해 겨울, K군은 그럭저럭 좋은 성적으로 원하던 법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L군이 지방에 있는 어느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그 이후 K군은 L군을 다시 만나지 못했고, 이 경험은 훗날 장애인 문제를 이야기하게 될 때마다 "나도 한때는 말이야 뇌성마비 장애인을 도와 준 적이 있어"라고 무용담을 늘어놓는 소재로만 활용되게 되었습니다.

K군이 법과대학을 다니던 때는 군사독재정권의 횡포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주요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고, 자고 일어나면 친구 중 누군가가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던 암울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잃지 않고 있던 K군은 "고시 공부를 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친구들처럼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 것이냐"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독교인은 잘못된 권위라도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는 말씀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계시던 때라, 기독학생으로서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기본적인 갈등도 있었습니다. 1987 6 10, 그는 마침내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했고, 아버지의 눈을 피해 조용히 집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 앞길에서 마주친 어머니는 곧 아들이 어디로 가려 하는지를 알아차리셨고, 그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들아. 나도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는 거다. 지금 네가 고시공부를 그만 두고, 학생운동에 뛰어든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고시에 한두 번 떨어지더니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다고 하지 않겠니?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다. 우선 고시부터 붙고 나서 남을 돕는 일에 나서도 늦지 않다. 지금 네가 아무리 자유와 평등을 떠들어 봐야 누가 네 말에 귀 기울여 주겠니? 변호사 타이틀이라도 가진 후 뭔가를 말하는 것과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 뭔가를 말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먼저 너 자신부터 남들이 귀 기울여줄만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 이번에도 그는 어머니의 설득에 못이기는 척 발길을 돌렸고, 다음 해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K의 머리 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제야 비로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그러나, 사법연수원은 수험생활의 연장이었을 뿐, 도대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법연수생들을 교육하는 교수들(모두 다 부장판사 또는 부장검사들입니다)의 한결같은 가르침은 "요즘은 사법시험 합격생 숫자가 많아져서 그냥 변호사를 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무조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선 판검사로 임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르침 때문인지, 사법연수원에 처음 들어간 3월부터 이미 대부분의 연수생들은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고,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하나같이 다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일하는 법률가가 되겠다"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제 그들의 목표는 오직 판검사 임용으로 통일되었습니다. 누구도 이제 더 이상 그런 순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긴 워낙 끝없는 경쟁에 익숙해져 있는 사법연수생들인지라, "최고"가 되기 위한 이 새로운 경쟁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친구들도 많아보였습니다. K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판검사 하자고 이 시험을 친 게 아닌데.... 하나님께서 나를 이 시험에 붙여주신데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었을텐데....'

그러나, 그의 진로는 엉뚱한 곳에서 결정되고 말았습니다. 사법연수원 1년차를 마칠 때쯤, K는 대학 은사님을 통해 이름 있는 어느 국회의원의 딸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사법연수원에서 마담 뚜의 손에 놀아나는 동료들을 보면서 '절대로 돈이나 권력에 팔려 가지는 않으리라' 수없이 다짐했던 K였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국회의원의 딸인 J양은 명문가의 딸이면서도 너무나 순수했을 뿐 아니라 명문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이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교회 성가대로 봉사하고 있을 정도로 신앙심도 좋았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자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J양과 사랑에 빠진 K J양 집안의 성화에 따라 강남의 어느 호텔에서 처음으로 장래의 장인어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K를 처음 만난 J의원은 대뜸 "자네는 연수원을 수료한 후 뭘 할건가?"하는 질문부터 던졌습니다. K는 늘 생각했던 대로 ", 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J의원의 얼굴이 당장 일그러졌습니다. "어허. K. 변호사는 원래 연수원에서 판검사 임용될 성적이 안되는 사람들만 하는 거라면서? 자네, 그렇게 성적이 좋지 않은가?." K는 일순간 당황했지만, "제 성적이 1, 2등은 아닙니다만, 임용이 안될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J의원은 다시 얼굴을 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다는 건 참 좋은 뜻이야. 하지만, K.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를 않네. 자네 무슨 돈으로 개업을 할건가? 그리고, 자네가 아무리 '나는 성적이 되지만 그래도 변호사를 택했다'고 말한다 한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줄 것 같은가? 아무리 자네 뜻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선은 판검사 임용을 받은 후 나중에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게 순서일세. 그래야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어. 단 하루를 해도 좋으니 일단 판검사 임용을 받도록 하게. 그 이후에는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뭐라 하지 않겠네. 그리고, 남을 돕는다는 것은 원래 자기가 충분히 먹고 살 기반을 가진 다음에 가능한 일일세. 돈도 없이 어떻게 남을 돕나? 그러니, 우선 자네부터 남을 도울만한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네."

J의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K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몇 년 전 어머니께서 하신 이야기와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 우선 최소한 000이 된 후에, 남을 돕도록 하라는 말은 어른들에게 있어서 거의 성경말씀과 같군.' 이런 생각들이 계속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K J의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같이 간판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처음부터 변호사로 나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서 K도 이제 알만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그래, 2-3년만 검사 노릇을 하고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하자. 그 때쯤이면 누구도 더 이상 나에게 "우선 000이 된 후에야 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 그 해 겨울 K J양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고, 다음 해 00지방검찰청의 검사로 임용되었습니다.

검찰청에 새로 출근한 K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래시계"에서 본 것과 같은 권력과의 투쟁도 아니었고, "보고 또 보고"에서 본 것과 같은 여유롭고 멋있는 검사 생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물밀 듯이 밀려드는 사건들과, 그 사이 사이에 끼어드는 각종 부탁전화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판을 막기 위해서 마련되었다는 끝없는 결재제도도 그를 피곤하게 했습니다. 뭐 한가지도 K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K는 다시 갈등에 빠졌습니다. 내가 이걸 하면서 평생을 보내야 하나... 날로 어두워져 가는 K의 얼굴을 보다못한 S부장검사는 어느 날 퇴근길에 K를 붙잡고 교외에 위치한 조용한 고급 경양식 집을 찾았습니다. 워낙 사람 좋기로 소문난 S부장은 검찰 내에서 K가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아서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K의 폭탄선언에 S부장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내 그럴 줄 알았네. K검사 같은 정의파는 검사생활 초기에 꼭 그런 회의에 부딪히게 되지. 하하하." 하면서 긴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검사 초년시절 경험을 한참 이야기한 S부장의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일단 부장이 될 때까지만 참아봐. 그 다음에는 정말 자네 마음대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온다네. 부장도 못 되어보고 그만둔 사람을 누가 검사로 쳐주기나 한다던가? 이미 이 길에 들어선 이상, 지금 와서 길을 바꾸기도 쉽지 않네. 나중에 부장만 딱 달고 나서 개업하면 초기에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자네하고 싶던 좋은 일을 하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사실 검사 일만큼 보람있는 일이 어디 있나? 변호사만 남을 도울 수 있나? 검사야 말로 약자들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자리지."

그 즈음 한창, 각종 사기사건들을 처리하면서 '검사가 무슨 채권자 대신 돈 받아 주는 기계인가' 하는 회의에 빠져 있던 K로서는 마음 속에 반발이 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로를 수정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직서를 찢어 한강에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0. 검사로서 그는 많은 사건들을 처리했고, 10차례에 가까운 인사이동을 겪으면서 이사도 참 많이 했습니다. 가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던 자신의 꿈을 떠올릴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그저 "허허. 더 나이가 들면 그럴 수 있겠지"하고 넘어갔을 뿐, 이미 편안해진 자신의 위상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기들보다 승진에 뒤쳐진(보통 인사에서 물을 먹었다고 하지요) 그는, 결국 20년의 검사생활을 접고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정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두 딸은 대학에 재학 중이었고, 아들 하나는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교육비로 엄청난 돈이 지출되어야만 했고, 두 딸의 혼수준비도 미리 해 두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습니다. 부장검사 출신이라는 이력 때문에 사건도 엄청나게 밀려들었습니다. 사건을 가져오는 사무장에게는 일정액의 돈을 떼어주었고, 그 돈 중 일부는 경찰이나 검찰로 들어가는 모양이었지만, 돈 버는 재미에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도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은 이번에도 여전히 뒷전으로 밀려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K는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돈을 벌다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문구가 남겨졌습니다. "평생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겠다고 생각만 하던 K, 여기 잠들다."

다음은 여러분을 향한 K의 조언입니다.

"최소한 000이 된 다음에야, 남을 도울 수 있다. 우선은 나부터 안정된 직위를 갖고 난 후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해 생각하라"는 교훈을 잊지 맙시다. 여기서 000은 사법시험일 수도 있고, 판검사, 변호사의 지위일 수도 있고, 로펌의 파트너일 수도 있고, 국회의원일 수도 있고, 부잣집 사위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중요한 것은 당신이 뭔가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이 엄청난 진리의 쇠사슬을 끊고 나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우리 사회는 결코 그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틀 안에 있는 사람", "남이 하는 대로 하는 사람", "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0대에 공익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꿈을 꿔보지 않은 법률가가 있는 줄 아십니까? 20대에는 누구나 그렇게 하는 거고, 대신 30대에는 그저 모두 다 각자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겁니다. 법원에는 법원 나름의 상향성의 논리가, 검찰은 검찰 나름의 상향성의 논리가, 로펌은 로펌 나름대로의 상향성의 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논리에 따라 열심히 살면 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운운하는 것은 경쟁에서 탈락한 변호사들이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말입니다. 거기에 속지 맙시다.

우리는 모두 오직 위만 보고 달려가면 됩니다. 그것만이 이 상향성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입니다. 2000년 전 중동지방의 어느 나라에, 더 낮고 더 낮은 곳을 향해 계속 내려가기만 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말로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사람의 뒤를 따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 옆의 누군가가 "이제는 상향성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진로를 생각해야 할 때"라고 속삭일지 모릅니다. 그럴 때면, "아직은 너무 일러" 또는 "이제는 너무 늦었어"라는 한 마디로 그 속삭임을 물리치십시오. 그게 당신의 행복을 지키는 길입니다. 당신이 혹시라도 "하나님 나라", "정의가 강물처럼"이니 하는 허황된 구호를 믿는 사람이 아닌 이상 말입니다. 넓은 길을 택하십시오. 좁은 길은 실패자의 길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를 향해 달려가십시오.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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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22. 15:48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두번째  02/13/2010

"너는 누구며 무엇을 하고있느냐?"

                                                                                                   남상곤

 

 

들어가며

 

우선 짧은 시간동안 생각보다 많은 분들의 말씀을 이경로 저경로를 통해서 (주로 간접적인 방식으로) 듣게되었습니다대다수는 우려의 목소리였고, 소수의 격려의 말씀도 있었습니다제가 의도했던 바가 글로 잘 전달되지 않았는지, 많은 분들은 마음아파하셨다는 분들도 계셨다고 들었습니다저로서는 오래 기도하고 생각하고, 또한 누구를 비난하거나 정죄하려는 의도가 전혀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보였다면, 그것은 제 글쓰기가 모자랐고, 제 진심의 마음이 잘 전달되지 못한 저희 부덕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2번째 글을 생각보다 일찍 올리게 되었습니다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제가 이러한 글을 올리게 된 저의 본심을 더 잘 설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우선 그것을 먼저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도대체 무슨생각으로 올린것이냐?

 

제 의도는 크게 두가지입니다첫번째로 교회안의 소수의 목소리, 다른 목소리를 내보고자 함입니다그것은 현재의 사안들을 약간 다른 각도로 보는 것입니다.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입니다모든 사람이 동일한 시각을 가질수 없는데도, 우리는 동일한 시각을 가지도록 강요받거나 교육을 받은 경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익숙하게 그냥 그대로를 본래 그런것이겠거늘 하고 받아들입니다하지만 기존의 것들을 낯설게 보는 연습을 게을리하고 포기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안일함과 나태에 빠지게되도록 만듭니다다양성은 힘이고 건강함입니다다양성을 존중할줄 알고, 그 다양성 자체를 수용하는 것은 그 조직이나 사회의 힘이 됩니다하지만 흔히 한국사회에서는 그 다양성 자체를 두는 것을 합의되지 못함, 분열, 혹은 일치되지 못함으로 흔히 분류하곤 합니다그러기에 다른 시각 (특별히 그것이 힘이없고 소수인 시각일 경우 특히)을 두는 것을 매우 불편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하지만 그것은 결코 분열이나 일치되지 못함이 아니라 그 자체로의 다양함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제가 첫글에서도 분명하게 밝혔듯이 제가 어떤 변화의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또한 누구도 100프로 옳은 사람이 없고 옳은 주장이 없다라는 말은 결국 그 글을 쓰는 저에게 먼저 적용되는 말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옳거나 맞다라는 것이 아닌 “이렇게 볼수도 있다”를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교회의 제반사안에 대해 투명하게 오픈해서 토의하고 논의하고자 하는 바램입니다교회에 사안이 있습니다그리고 결정이 되었습니다그런데 그 과정은 모릅니다과정을 모르니 그 의중과 뜻이 궁금합니다하지만 알려지지 않습니다그냥 은혜로 모든 것을 덮자라고 말합니다은혜는 조금 불편하거나 덕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그냥 말하지말자라는 뜻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은혜는 죽을수 밖에 없는 죄인이 아무런 조건없이 그저얻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으로 알고있습니다가장 깨끗하고 뒷말이 없어야할 교회에 불투명함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건강하지않는 것입니다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기에 부족하거나 잘못한 것들이 조금 드러난다고 쉽게 망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오히려 그렇게 연약한 부분들을 통해 역사하시고 진정한 은혜로 감싸주시는 것이 우리의 기도할 바라고 믿습니다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은혜로 덮는 것이 아닌 투명하게 논의하고 설명하고 의견을 교환하고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일년정도를 기도하며 고민했습니다내가 공동체를 위해, 공동체에 덕을 끼칠수 있는 것은 어떤방법이 있을까?

 

 

2.    그런데 너는 누구냐?

 

저는 남상곤이라고 하고 OOOOO교회에 다닌지는 일년 반정도가 된것 같습니다저희 아버님은 서울에서 목회를 하십니다그러기에 누구보다도 목회자의 고뇌와 노고를 잘알고 있습니다저는 한국에서 기독교대학을 나왔고, 한때 목회자가 되려고 준비를 한적도 있습니다지금은 학생으로 학문연구에 뜻을 두었지만, 그래도 그러한 학문연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할까를 하루하루 고민합니다제가 이렇게 제 이이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제가 교회의 바깥사람이 아닌 안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입니다저는 유치원때부터 교회에서 자라고 커왔습니다교회는 저희 놀이터였고, 저의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들은 교회의 친구들이며, 교회안에서 세상을 보았고, 구원도 받았고, 믿음도 자랐습니다친구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그렇지않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도 있었고, 무엇이 예수님의 뜻을 쫓는 것일까 하는 마음에 몇달며칠을 고민하고 기도했던 적도 있었습니다저는 교회만이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바꾸는 희망임을 늘 믿습니다아무리 교회가 개독교라고 불려도 그리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만도 못한 일들을 해도 결코 교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포기한적이 없습니다왜냐하면 교회야 말로 예수님의 피값주고 사신 몸이며, 세상에 전할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저는 부족하지만 교회공동체를 살리고 또 세우는 일이 가장 복되고 중요한 일임을 믿습니다그래서 저는 그러한 일을 하고싶습니다. 제가 이러한 글을 쓴 동기는 바로 공동체를 세우고,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고, 공동체 굳건하게 하는 이것입니다결론적으로 저는 교회를 음해하거나 분열시키거나 누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자 부족한 글쓰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3.    그렇다고 해도 결론적으로 특정인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냐?

 

제가 첫글을 쓰면서 그리고 쓰고나서 스스로 기도하고 제 마음을 점검해 보았습니다제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그리고 제 마음이 누구를 비방하려는 마음이 없음을 하나님앞에서 확인하고 글을 올렸습니다만약 제가 누구를 비방하거나 교회를 분열한 계획이 있었다면 굳이 실명으로 만천하에 제이름을 걸고 내가 지금 누구를 비난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다라고 하지 않겠지요저는 제가 생각하거나 글로 쓰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그렇기에 그것을 강요하거나 설득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다만 저같이 사안을 다르게 볼수도 있고, 또 그렇게 다르게 볼수도 있는 눈으로 교회의 제반사안에 대해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기도해보자 라고 한것입니다하지만 교회라는 구조의 특징상,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되면 그 정점에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거론되기가 쉬울수 밖에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하지만 교회에 애정을 가지고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시각으로 논한다면 그것이 처음에는 누구를 비방하고 비판하는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시간을 통해서 나타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왜냐하면 진심은 결국에는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요그래서 우리는 동기나 진심, 혹은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저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십시오시간을 두고도 제가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하고 특정인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드신다면 저도 붓을 꺾겠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을 쓰기전에도 기도하고, 쓰면서도 기도하고, 쓰고나서도 기도를 했습니다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개혁가도 아니고, 의협심과 혈기에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특별히 믿음이 깊은 사람도 아닙니다왜 제가 굳이 저도 바라지않는 방향으로 교회에서 유명해(?)지는 길을 택하겠습니까그것은 제가 이 공동체에 대한 포기할수 없는 믿음과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렇지 않다면 제가 굳이 안좋은 소리를 들어가며 잘쓰지도 못하는 글을 쓰려고 하겠습니까제 마음의 진심이 조금이라도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혹시라도 저로인해서 마음이 아프셨다는 분이 계셨다면 다시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posted by paulus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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