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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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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22. 16:23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세번째 05/07/2010

                                           남상곤

 

“헌금리스트와 헌금채”

 

 

들어가며

ㅇㅇ교회에 와서 이전과 다녔던 교회와 색다르게 보았던 몇가지 중에 하나는 헌금입니다.  우선 주보에 헌금별로 한 성도분들의 이름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주 인상깊었고 두번째로는 헌금시간에 헌금통이 돌아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이전에 다녔던 한국이나 미국의 다른 교회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교회와 같이 주보에 헌금을 한 성도들의 이름을 나열하거나 헌금채를 쓰는 많은 교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제가 이것에 대해 접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은 처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이 두가지의 낯선 광경을 거의 2년동안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조심스러운 것은 제가우리교회의 이런 부분을 비판을 해서 바꾸자!’ 라는 것이 아닌이것이 어떠한 의미와 의도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한번 좀 다르게 생각해 보자입니다.  부디 오해가 없으시기를 두손모아 기도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가상의 예화

 

목사님의 설교가 지루하고 졸릴때, 설교시간동안 유달리 오래동안 주보의 이곳저곳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교회주보의 헌금하신 분들의 명단을 보며 이름을 하나하나 보며, 머리속으로 주보에 나와있는 이름과 머리속에 저장되어 있는 이미지를 하나하나 맞춰보기도 합니다.  A집사님은 이번주에 주일헌금, 십일조헌금, 감사헌금에 선교헌금까지 하셨음을 보면서 웬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듭니다.  역시 요즘 사업이 잘되시는가 부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 얄밉게 여겨져서 웬지 싫었던 B집사님의 이름을 찾아봅니다.  역시 없습니다. 웬지 뿌듯하며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각 헌금별 헌금액수를 봅니다.  우리교회에서 십일조헌금이 어느정도 퍼센트가 되는지도 보고, 머리속으로 일년 혹은 한달 헌금 총액도 재빠르게 계산해 봅니다.  이만하면 불경기에도 불구하고교회재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겠다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직도 설교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창을 주보를 뒤척이다가 이제 성경을 여기저기 들추어봅니다.  성경사이에 끼어져 있던 옛날 교회행사 간지가 있습니다.  그것도 꺼내 여기저기 봅니다.  ! 다행히 설교가 끝났습니다.  마음을 모두어 눈을 감고 기도를 합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헌금시간입니다.  헌금위원분들이 나오셔서 기도하시고 헌금채를 돌립니다.  헌금채를 돌리는 것을 보면서 헌금을 빨리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갑을 꺼내 보니 아차!  5불짜리와 50불짜리 지페만 있습니다.  5불짜리만 넣기에는 뭔가 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50불짜리 넣기도 좀 그렇습니다.  헌금채는 다가옵니다.  무엇을 넣어야 하는 것인가?  한창 고민하다가 오늘은 50불 짜리를 넣습니다.  재빠르게 돈을 넣고 헌금봉투에 이름을 쓰고 침을 발라 붙였습니다.  찬송을 은혜롭게 부르다가 헌금채가 올 시점에 긴장하고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합니다.  왔습니다. 헌금채를 받고 헌금을 하고 옆분에게 헌금채를 돌리고 비로소 안심하며 찬송에 집중합니다.  좀 아깝고 아쉬운 생각이 들긴 하지만 뭐 나중에 택스면제혜택을 받는 부분도 있는데다가 하나님께 헌금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은거지 라고 생각하며 나의 믿음을 스스로 대견히 여깁니다.  이제 축도 마치면 빨리 가서 식사줄에 너무 늦지 않게 설 준비해야 겠습니다.

 

 

 

주보에 나오는 헌금한 성도 리스트

 

주보에는 일주일간의 교회소식이나 예배안내와 순서등이 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중요한 사적인 문서가 아닌 교회의 공적문서입니다.  거기에 매주 헌금하신 분들의 명단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올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 리스트를 올리는 것이 중요할지 정말 진지하게 그리고 오래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게 생각한 것은헌금 하신 분들이 헌금을 했는데, 혹시나 교회가 누락할까봐 확인을 시켜준다였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거 같은 것이, 저도 헌금을 할때 이름을 쓰기도 하고 안쓰기도 하는데, 이름 쓸때는 다음주의 헌금에 제 이름을 찾아봅니다.  그런데 없을때도 몇번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이름을 고의로 누락시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리과정에서 제 이름이 다다음주에 올라갈수도 있는 것이고 무슨 실수가 있을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정부에 가서지난주 헌금했는데 왜 내이름이 없냐라고 따지지는 않습니다.  그런것을 보면 꼭 확인차 올리는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두번째로 생각해본 것은 교육적인 효과입니다.  주보에 헌금하신 분들의 이름을 보면서 신앙교육적으로 이렇게 헌금을 정기적으로 꼭 해야한다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육적 효과라면 왜 교회 주보에는 리스트를 올리는데 홈페이지에는 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번째로는 헌금하는 것을 장려하고 경쟁관계를 유발시켜서 많은 헌금을 하게하려는 것일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한 실명이 나오기에 내 이름이 안나오면 상대방이 나를 교회에서 믿음없는 사람, 혹은 헌금않는 사람으로 오해당할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 이름이 나와야 하는 것을 의무처럼 여길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같이 헌금할때 이름을 쓰기도 하고 안쓰기도 하는 사람과, 혹은 아예 늘 무명으로 헌금을 드리시는 분들은 저 리스트로 무슨 피해를 보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밖에도 다른 중요한 이유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부족한 머리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리스트를 올리는 것인지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럴수는 없겠지만 주보에 헌금한 분들 리스트를 안올려본 주와 올려본 주의 헌금액수를 비교해보면 좀 의미있는 차이가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만 해보게 됩니다.

 

또한 헌금할 때 저는 꼭 제 이름과 안해 이름을 같이 적습니다.  그런데 헌금리스트에는 꼭 제 이름만 올라갑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 안해 이름을 먼저적고 제 이름을 나중에 적어보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제 이름만 나왔습니다.  괜히 안해에게 미안해 졌었습니다.  헌금리스트를 주보에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면 안해 (혹은 자매)의 이름도 같이 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혹시교회에서 부부도 헌금을 각각 따로하라라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헌금의 항목에 대해서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교회주보를 보면 주일헌금과 십일조, 선교헌금이 큰 카테고리로 나옵니다.  중요헌금이라고 여겨지기에 그렇겠지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헌금보다 구제헌금을 주로 합니다.  저는 따로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고 (자세한 것은 아래 더 읽어볼 거리를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제 십분의 일을 교회에 보고하는 것도 좀 거북스럽습니다.  그래서 몇몇 헌금으로 헌금을 나누어 내는데 이름을 쓰기도 하고 익명으로 하기도 합니다.  주로 구제헌금을 하는데, 구제헌금을 하고 다음주 주보를 살펴보면 제 이름은 선교헌금 항목에 있거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선교헌금을 한 것이 아닌데 거기 들어간 이름을 보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삼대헌금이 아닌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마이너헌금이 되는 것도 어떠한 근거와 의도인지 좀 궁금한 생각입니다.  물론 주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큰 액수를 차지하는 의미라면 그러한 규모의 기준보다 차라리 이번주 헌금하신 분들을 통칭적으로 (감사, 주일, 십일조 헌금의 구분없이) 그냥 올리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헌금항목별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번주 헌금하신 분들 하고 그 리스트를 헌금구별없이 그냥 이름만 주르륵 올리는 거지요.  그러면 감사, 주일,  십일조 헌금 세번 다 한 분은 이름에 꽃표를 해드려야 하는지 고민도 여전히 생기네요.  ^^

 

 

 

헌금함과 헌금채

 

헌금시간이 되면 헌금채가 돕니다.  제가 헌금채에 좀 불편한 이유는 세가지입니다.  첫번째는 저는 부부가 한몸이기에 (돈주머니가 하나이기에) 저의 안해와 제가 통상 헌금을 따로 하지 않고 같이 하는데헌금채에는 한사람만 헌금봉투를 넣을수 밖에 없습니다.  주로 안해는저보고 하라라고 하고 자신은 헌금채에 헌금봉투를 넣는 권리를 저를 줍니다.  하지만 저는 그 권리(?)를 안해에게 주기도 하는데 그럴때  참 난감할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채가 제 차례에 왔는데 저는 헌금봉투가 없기에 그것을 받아 옆에 분에게 전달할때 헌금봉투 안넣고 옆으로 돌리면 뻘쭘(?)합니다.  제가 다른 분들을 유심히 보면 전혀 당황하거나 뻘쭘하지 않으시고 옆으로 잘 돌리시는 내공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저는 그런 내공이 아직 안되어서 헌금채가 왔는데 헌금봉투를 못넣고 돌릴때마다 얼굴이 화끈화끈 해집니다.  매주 노력합니다.  뻘쭘하지 않고 최대한 나이스하고 아무렇지 않게 해보려고 하는데  그래도 어색하기는 여전합니다. 

 

두번째로는 저에게 다가오는 헌금채 때문에 기도나 찬송에 집중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헌금채가 오면 빨리 헌금봉투를 넣고 (혹은 넣지않고) 다른 분에게 넘겨야 하기에, 지금 헌금채가 어디까지 와야 집중해서 봐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헌금시간에 하는 찬송의 가사에 집중해서 찬양하기가 쉽지않고 헌금채 돌리는 시간을 때운다는 생각이 듭니다.  헌금채가 아직 다 돌지않으면 목사님은 다시 3! 혹은 4!을 외치시면서 후렴을 한번 더 부르자고 하십니다. 헌금채는 다 돌지 않았는데 찬송이 끝나면 무시무시한(?) 정적감이 찾아올 수 있기에, 한번 더 그 집중하지 못하고 불렀던 찬송을 한번 더 불러야 합니다. 

 

세번째로는 동전을 넣거나 봉투없이 넣을때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우선 헌금채가 돌때 봉투가 아닌 그냥 돈이나 동전을 그냥 넣기가 힘듭니다. 웬지 반드시 헌금은 액수에 상관없이 봉투에 넣어서 해야할것 같은 의무감이 듭니다.  봉투에 넣어서 하면 더 성의있고 준비된 느낌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겁니다.  봉투에 넣어서 하면 더 준비했다라는 뜻도 있을수 있겠지만 그 액수가 숨겨져 있다는 것으로 부담없이(?) 헌금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폐를 넣을때는 웬지 옆사람이 내 헌금액수를 알게 되는 것 같아 좀 꺼려집니다.  그리고 헌금을 동전으로 하시는 분은 최근에는 거의 못 본것 같습니다만, 헌금을 동전으로 할수도 있습니다.  형편이 그럴수도 있고, 액수가 적다고 헌금 못내는 것은 아닐겁니다.  그런데 동전으로 헌금을 내면 웬지 분위기상 쪽팔리는 것 같고, 헌금채에 넣었는데 혹시나 헌금채안에 동전이 있을 경우에 내가 넣는 동전과 부딪혀 그 금속성의딸랑이 울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정말 뻘쭘할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거부감과 압박감

 

제가 이전에 다녔던 교회들은 헌금리스트가 주보에 올라가지 않았고, 헌금채가 돌지 않았습니다.  헌금리스트가 안올라오니 굳이 누가 헌금을 내고, 누가 헌금을 안내고 등의 전혀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 지금같은 생각을 아예 안해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헌금채 대신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전에 헌금함에 헌금을 했었고, 그때는 봉투가 있던 없던, 동전을 넣던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헌금함이 있다고 예배시간에 헌금순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시간이 되면 헌금위원분들이 교회헌금함을 열어서 그 헌금을 모아 앞으로 가지고 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올립니다.  헌금시간에 찬송을 방해받거나 다시한번 4절을 해야하는 경우가 적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헌금리스트가 주보에 올라는 것과 헌금채가 도는 것에 대한 성경적 혹은 역사적 의미나 맥락이 있는지 조금 찾아보았습니다.  몇몇 소수의 의견이나 자료가 있었지만 어느것도 확실한 성경적 혹은 역사적 의미를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 개교회 별로 하고있는 방식은 다 달랐던 것 같습니다.

 

혹자는 헌금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헌금리스트나 헌금채에 대한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신경쓸 필요는 없다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 같이 믿음이 부족하고 재정이 튼튼하지 않는 사람이나 새신자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새신자나 저같이 믿음이 부족한 신자들의 경우, 주보에 올라간 헌금하신 분들의 리스트나 헌금시간에 돌아다니는 헌금채를 보면서 웬지 모를 거부감(?)을 느낍니다.  게다가 헌금을 하기가 힘들정도의 재정상태를 맞은 성도들의 경우 (이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분들도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그 리스트와 헌금채로 인하여 받게되는 압박감은 참으로 큽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헌금은 하나님과 나와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헌금(봉헌)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체면때문에 헌금을 하는 것과 그 액수가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보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내 재산이 100만불인데 1불 헌금했다고 그 사람을 나무랄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재산이 100만불이지만 부채가 200만불 일수도 있고 (그사람의 사정을 모를수 있고), 그 사람의 믿음이 1불짜리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이지 제 3자가 왈가불가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헌금액수에 따라서 믿음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에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액수를 보시지 않고 그 헌금하는 사람의 자세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제가 부족하기에 헌금리스트를 주보에 올리거나 헌금채를 돌리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요소에 대한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노파심에 강조하는 것은, ‘이것들이 문제가 있으니 바꾸는 것이 좋겠다가 아니라왜 이렇게 하는 것인지를 한편 되집어보자의 시도일뿐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헌금을 내는 것에 대한 세금보고 혜택에 대해서는 지면상 더 다루어 보지는 않았지만 한번즈음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간 기회가 있겠지요.

 

 

하나님과 나 사이의 헌금
함께잘다니는 교회(13) 헌금 리스트와 헌금채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532

 

 



더 읽어볼거리

 

 

십일조와 직분 없는 새들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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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권사 되고 싶어? 돈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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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채, 세상보다도 더 세속적인 악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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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22. 16:23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두번째 04/30/2010

 

 

  함께 잘 다니는 교회 (12)


“예수님도 후레자식이었습니다”
 


  
들어가며
 
후레자식이라는 뜻은 사전에서 살펴보면, "배운 데 없이 제풀로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입니다.
 
후레자식이란 뜻은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홀의 자식'에서 왔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버릇이 없는 아이라고 상스럽게 낮추어 부르던 말이라고 합니다. 두번째 설은, ‘호로자식’ 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때의 호로는 중국 북방의 이민족의 흉노(凶奴)를 일컫는 '호로(胡虜)'를 가리킨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오랑캐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볼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로 싸울때 이 ‘후레자식’ 이라는 말을 쓸때는 전자의 뜻인, ‘아비없이 자라서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는 뜻으로 주로 받아들여 집니다. 일반적으로 아비가 없이 자라면, 엄한 아비가 없기에 예의와 버릇이 없는 사람으로 흔히 간주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후례자식?
 
이렇게 ‘아비없이 자라서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는 뜻으로 후레자식이라는 욕이 쓰인다면, 예수님도 후레자식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서, ‘어라, 예수님에게 욕을 하는 바로 니가 후레자식이구나!’ 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예수님에게 욕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예수님은 본래 아비가 없었습니다. 물론 요셉이라는 아버지가 예수님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의 핏줄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잘 알고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아비없이 나온 후레자식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이들과 예수님과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씨가 다른 형제인 것이죠.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낳아준 아비가 없었습니다. 길러준 아버지 요셉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낳아준 핏줄의 아버지는 없습니다. 물론 좀 융통성있게 하나님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말할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니기에 혈족의 아버지 (인간으로서의)라고는 말하기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은 저에게 오히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보통 거룩한 핏줄에서 태어나 여렵고 힘든 성장시절을 거쳐 다시 그 거룩한 핏줄이 확인되는 세상에서의 성공이 확인되는 영웅신화와 달리, 예수님은 별 볼일 없이 태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저에게는 그래서 위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통계적’ 으로
 
그런데 이런 아비없는 우리에게 ‘후레자식’이라는 욕이 생기게 된 것은 보통 아비없이 자란 아이들이 정말로 예의없고 버릇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버지가 없어서 ‘후레자식’이라는 욕을 그 아이들이게 함부로 하는 경우이기도 하지만, 보통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비뚤어진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사는 우리가 흑인들에게 하는 욕인 “깜뚱이 새끼들” 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보통 흑인출신으로 편모하에서 자라 교육을 받지못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결국에는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는 그러한 흑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흑인들에게 무슨 일을 당하면 ‘깜뚱이 새끼들!’ 이라고 하면서 ‘그 놈들은 본래 그래’, ‘그냥 피하는 게 낫다’ 라고 합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보통 그러한 경우가 많고, 저 또한 그러한 흑인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후레자식’ 혹은 ‘깜뚱이 새끼들’ 하는 말은 근거없는 말이 아닙니다. 통계적으로 열에 아홉은 그런 경우가 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가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아비없이 자란 사람들이나 고아를 보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을거라 생각하는 선입견이 있게 되고, 조금만 옷차림이 거친(?) 흑인들을 보면 우리는 웬지 무섭고 피하려고 합니다. 통계적으로 어느정도, 아니 거의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결손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범죄자가 되는 확률이 많은 것은 학문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며, 흑인들이 가장 교육을 덜 받고, 각종 범죄에 연루된 것이 인구대비로 가장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단 한 사람 때문이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비없이 자랗거나 옷차림이 거친 흑인들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선입견을 대하면 안됩니다. 왜 그럴까요? 통계적으로 열에 아홉, 혹은 백에 아흔아옵은 그러한데 왜 그러한 통계를 무시하고 그러면 안될까요? 그것은 열에 하나, 혹은 백에 하나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한 사람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좋은 학교를 좋은 선생님밑에서 좋은 사람들과 지낸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될 확률이 월등할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거의 진리에 가깝습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래도 최소한 예일, 하버드, 조지타운… 뭐 이런 학교들 출신이며, 다들 뼈대있는 정치가 집안 출신입니다. 성공한 기업가나 존경받는 사회인사들도 보통 보면 다 좋은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좋은 가정에서 잘 자란 사람들이 대다수 입니다. ‘통계적’ 으로 거의 그렇습니다. 반대로 나쁜 가문에서 나쁜 학교를 다니고 (혹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 자란 사람은 보통 나쁜 사람이 됩니다. 열에 아홉이 아니라 백에 아흔아홉은 될것입니다. 이러한 통계는 세월을 통해서 거의 사실에 근접한 진리가 됩니다. 
 
그런데 그 열에 하나, 혹은 백에 하나에 해당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어진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애를 쓰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출발선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선입견과 이러한 열에 아홉에 의한 통계입니다. ‘너는 배경이 이러니 천하고 나쁜 사람이 될것이다’ ‘너 같이 배경도 없이 비천한 놈이 어딜 감히’ 라는 바로 시작하기도 전에 좌절하게 되는 그 사람들입니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정말 하나님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하나님을 찾고 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통계로 잡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아무런 빽도 절도 없이 오직 하나님으로만 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잘 알려지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역할들을 해왔고 하고있습니다. 자신들이 받았던 불공평과 학대를 조금이나마 없애고자 노력하고 그러한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소설 [장발장]에서 미리엘신부는 자신을 배신하고 은그릇과 은촛대를 훔쳤던 장발장을 사랑으로 덮고 용서합니다. 만약 그때 미리엘 신부가 장발장을 그래도 경찰에 넘겼더라면, 아마도 장발장은 그 통계대로 열에 아홉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리엘신부의 사랑과 선입견없는 시선으로 그는 열에 하나, 통계에서는 outlier (아웃라이어: 정상이 아닌 극단치의 통계값)가 된 것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제 주변에는 다들 좋은 백그라운드와 돈많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가문출신의 성공한 분들이 참 많이들 계십니다. 아마도 그분들의 자녀들은 그 부모처럼 또 그렇게 좋은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성공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에게 위로를 받거나, 닮고 싶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런데 그 열에 하나, 어쩌면 백에 하나의 그 한 사람이 그 백그라운드가 없다고 혹은 좋은 가문 출신이 아니라고 받게되는 편견과 불이익을 받는 그 한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후레자식’으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 바로 그 이유 한가지만 으로도 예수님이라면 기꺼이 ‘후레자식’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통계에 따라 백에 아흔아옵, 혹은 천에 구백구십구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뭐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백에 하나는 무시할 만한 수치이고, 실제로 거의 그러하니까요. 그러나 그 만에 하나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시선을 한번 가져보는 연습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을 평가하고 논하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배경과 집안, 재물과 학력으로 미리 제단하고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바로 보는 그 시선, 바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바라봐주는 사랑과 격려의 시선을… 우리도 한번 가져보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닮아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예수님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자체를 보기보다는 늘 그 사람의 배경을 보기 좋아합니다. 누구의 자식이며, 어느 학교를 나왔으며, 고향은 어디며, 집안에 재산이 어느정도 있으며 를 늘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강을 알고나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끝납니다. ‘그 사람은 그 집안과 학력과 재산과 부모를 토대로 계산하건대 이 정도의 사람이다’ 라고 제단하고 끝냅니다. 세상은 늘 이렇습니다. 그 사람 자체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살고, 무엇을 타고 다니고, 누구의 자식이고, 몇평짜리 집에살며, 어디에서 배우고… 이런 것으로 늘 평가합니다. 그래서 빽도 절도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절망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말씀을 나누실때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 문제 삼은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3장 54-57절)
 
사람들은 예수님이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고 특별히 내세울것 없는 백그라운드가 없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을 배쳑합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괘씸합니다. 배운 것도 없고, 재산도 없고, 직분도 없고, 뭐 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나이도 서른밖에 안되고, 뭐 내세울것도 없는 목수 주제에… 감히 어디서 나대는 것인지 괘씸할 나름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후레자식’ 인것을 알고나면 아마도 그 배척은 절정에 이르렀겠지요. ‘어디서 근본도 없는 놈이 와서 감히 설쳐’ 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바로 이것입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아무런 빽도없이 어디서 감히…’ 그런데… 성령으로 난 사람, 통계를 넘어 나타난 사람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한복음 3장 8절)
 
 
 
예수님도 빽도 절도 없으셨습니다.
 
배운것도 없고, 나이도 어리고, 재산도 없고, 집안도 별로고, 사회적 지위도 없고.. 다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으로 제자 삼으신 적 없고,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사람 평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열에 하나, 아니 백에 하나라도… 그 중심만을 봐주시는 분이십니다.   ‘후레자식’도 좋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따르면 됩니다. 다만 그 한 사람을 가로막는 바리새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만은 안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장발장에 나왔던 미리엘 신부처럼, 사람을 믿어주고, 속임을 당해도 또 믿어주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바라보기를 소원합니다. 그 한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심어주시기 위해서 바로 예수님이 ‘후레자식’으로 오셨습니다.  
 
안그래도 아비없이 자라 서럽고 힘들고 원통한 그 한 사람의 눈물 씻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기꺼이 ‘후레자식’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한사람… 통계적으로 비뚤고 나쁘게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후레자식이 되었습니다. 그 후레자식이 바로 세상을 구원한 메시야,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 하나님이 되신 예수입니다. 누구 후레자식을 감히 욕할 것입니까? 누가 감히 후레자식이라고 함부로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할 것입니까? 빽도 없고, 재산도 없고, 집안도 별로고, 나이도 어리다고 무시한다면, 먼저 예수님께 손가락질 하시고 다시 오십시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셨으니까요.
 
 
 
나가면서
 
이글을 통해, 저는 다니고 있던 교회에서 예수님께 욕을 하고 성경을 거스렀다고 이단취급을 받았습니다. 제가 과연 예수님께 욕을 하려는 생각과 의도였는지는 글을 읽고 다시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하는 바램이었지만 그분들께는 빽도 절도 없는 저 역시 후레자식 이었던 것 같습니다.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22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한번째 04/24/2010


                                           남상곤



내가 왕년에는…”





들어가며

 

최근에 많은 분들에게 분이 넘친 격려와 칭찬을 받으면서, 처음에 기도하고 고민하였던 초심에 대한 생각을 더욱 많이 하게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외침과 논의가 무엇을 바꾸거나 이룰려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더욱 확인시켜주시며, 더욱 우리 교회 성도분들과 다양한 소재를 하나님안에서 고민하고 논의하고 기도해야 겠다는 생각을 굳건게하시는 것 같습니다. 

 

"Quo Vadis Domine"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너는 나를 따르라! (Follow me!)

 

 

 

 

 

초등학교때 반장안해본 사람이 어딨어?

 

사람들과 모여서 어린시절을 이야기 하게되면 언제나 듣게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소싯적에 반장 안 해본 사람이 어딨어?’ 혹은초등학교때 공부 못한 사람이 어딨어?’ 입니다.  그러한 이야기가 깊어가다 보면, 이제내가 왕년에…’ 의 레파토리가 시작됩니다.  정말 왕년에는 다들 대단하십니다.  행군나가서 호랑이를 만났다는 둥, 철책선에서 근무할때 북한군 초병과 말뚝박기하고 놀았다는 둥, 수많은 여자(혹은 남자)가 나를 뒤쫓아 다녔다는 둥, 한 공부했다는 둥, 엄청난 사업으로 어마어마하게 잘 나갔다는 둥  그러한 이야기 듣고 있으면참 대단한 사람들이 모여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왕년에 특별한 게 없었던 저로서는과연  정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초등학교때 반장 안해본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도 한때, 젊었을 적에 그러했었다!

 

 

재미있게도 이야기가 깊어질 수록내가 왕년에는…’ 을 강조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왕년에는 잘 나갔는데, 결국 지금은 잘 안나간다입니다.  제가 아는 한 형님은 서울대를 나오셨습니다. 그것도 전국에서 손꼽는 등수로 입학하셨습니다.  그 형님은 그 때가 그분의 전성기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왕년에는이란 말은 그 형님에게는 서울대 입학하실 때 인가 봅니다.  그때가 정확히 기억은 못하겠는데 아마도 1989년인가 그런데 그 형님의 인생은 그 1989년에 정확히 멈춰 있습니다.  비록 아직도 직장도 못 가져 보시고 집에서 눈치 보며 대박을 여전히 꿈꾸시지만 서울대를 나오신 형님이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지금 잘 나가시는 분들은 굳이왕년을 들먹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그 빛나는 순간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좀 잘 안되는 분들이 늘 강조하시는 것이 바로내가 왕년에는…’ 레파토리 입니다.  그래서 그 레파토리가 시작될때는 조금 서글퍼 집니다.  그렇게 왕년에 화려하셨던 분들이 왜 지금은 저렇게 초라해지셨는지 궁금도 하고, 그 반복되는 레파토리에 조금씩 싫증이 나기도 하면서과연 정말일까?’ 하는 의심까지 들기도 합니다.  더 심해지면, 그분들은 무슨 이야기만 나오면 자신이 젊었을때 겪어보고 고민해본 문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모른다는 둥, 결론은 버킹검 이라는 둥 의 이야기를 늘어놓으십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만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새벽기도, 금식기도 안해본 사람이 어딨어?

 

이 이야기가 교회안에서 시작하게 되면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40일 새벽기도, 40일 금식기도  (혹은 20, 10) 안해 본 사람이 없고, 다들 신앙적으로 잘 나가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날마다 새벽을 깨우고, 24시간을 성령에 충만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그렇게 하나님과 가깝게 지냈다는 고백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작정기도 끝에 응답을 얻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니님께서 도와주셨고, 역사해주셨고, 지켜주시고 함께해 주셨다고 합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저도 신앙적으로 잘 나간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몸매(?)에 물만 마시며 일주일 금식기도를 해본 적도 있는 것 같고, 성경말씀이 꿀송이 처럼 달다라는 말을 경험하고 성경읽기에 온통 시간을 뺏겨본 적도 있는 것도 같고,  기도한답시고 산에 올라가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도 외쳐도 보았고, 40일 새벽기도에 개근해서 공로패(?) 같은 것도 받아 본 것 같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그때의 훈장인 너덜너덜 해진 성경과 공로패를 보면 저도 모르게 뿌듯해 졌던 것 같습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나도 왕년에는 정말 성령충만했었지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단 저 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왕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십니까?

 

이러한 신앙의왕년이 있는 우리는, 우리안에 지체가 하니님께 받은 은혜나 말씀을 나눌때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마음 잘 알지,’ ‘그때가 좋을 때지,’ ‘나도 겪어봤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한바탕 나도왕년에는레파토리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서나도 한때, 젊었을 적에 그러했었다라는 분에넘은 훈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무리수가 시작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의왕년에는 지금의 초라함이 묻어나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현실과 타협하고, 바리새인같은 율법주의자가 되어 섵불리 남을 판단하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왕년을 회복하지 못하고 무리수를 두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를 속이는 심각한 상황이 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나누는 지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현재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겸손히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치유가 어려운 거짓은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 어떠한 사람인지를 모르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현재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해도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는지 모르는 위선적인 바리새인의 모습만 남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외치고 나누는 자가 눈에 가시같이 보이게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잊고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 지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사도행전 7 54)

 

바로 신앙에서의왕년만 강조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지금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믿음생활에서의 경험은 지금 내가 혹은 우리 공동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이고 나침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그리고 모세나 다윗의 하나님을 강조했던 것은, 자신들의 선조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을때, 어떠한 일들을 경험했는지를 상기하고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선조들의 믿음의 경험은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할수 있는 바로미터이었던 것입니다.  ! 그 시절 모세의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셨었지.  그때 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나아가면 모세와 유대백성들에게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역사하시겠구나!’ 하고 나아가는 믿음의 선진들의 교훈인 것입니다. 

 

내가 왕년에는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도 그왕년에 때에 갖혀 한발자욱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내가 왕년에 겪었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때에 그렇게 역사하셨으니 지금 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공의를 외치고 나아가면 그때처럼 역사하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때 필요한 것이 바로왕년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왕년의 하나님이 바로지금의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고 그 모세의 하나님이 바로 나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서 남겨준 수많은 선진들의 이야기들은 바로이 왕년의 하나님을 왕년에 갇혀두지 말고 현재 나의,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라!’ 라는 것입니다. 

 

'내가 왕년에는'은 결코 지금 내가 하나님앞에 바로 서 있다라는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큰 일들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지금 바로 서 있지 않은 모습들을 성경에서도, 역사에서도 그리고 지금 교회에서도 수없이 목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왕년에는'는 훈장처럼 고이고이 모셔두는 전가의 보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었던 그 '왕년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때의 마음과 기도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무릎을 끓고 그 하나님을 지금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수없이 나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면 그냥 역사의 교훈으로 끝나지만,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바로 나와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나아갈때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지금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글을 맺으며

 

 

우리의 하나님은 옛날의 그왕년의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그 왕년에서 나오셔서 지금 여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그 왕년에서 하나님을 가두고 스스로 왕년에서 멈추어 사실겁니까아니면 바로 지금 여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것입니까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왕년에 젖어내가 소싯적에 젊었을 적에 그러했었지에 영원히 멈추어 사실겁니까선택은 우리의 몫이지만,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과거의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이를 거울삼아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때 요단강을 갈랐던 그 하나님은 바로 지금 나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할렐루야!

 

 

"나도 왕년에는…"
함께잘다니는 교회(9) 왕년의 하나님, 지금은?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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