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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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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22. 16:11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일곱번째  03/18/2010


짜장면이냐 탕수육이냐?


                                                                                                   남상곤

 


 

짜장면이냐 탕수육이냐?

 

김장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가게되었습니다.  천국문에 다다르자 예수님이 두팔을 벌려 수고했다 라고 맞아주셨습니다.  김장로는 상기된 표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이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구나하는 마음에 설레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까지의 먼 여정에 출출하겠다며 천국중화요리식당으로 김장로를 데려가서 짜장면을 시켜주셨습니다.  김장로는 예수님께서 직접 맞이해주신데다가 처음 맛보는 천국짜장면의 맛에 황홀했습니다.  천국 짜장면은 너무 맛있었지요.  그런데 반쯤 먹었을까, 옆의 자리에 같은 교회에 다녔던 김집사가 탕수육을 먹고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김장로는 너무 반가워서! 김집사 아닌가?  이거 너무 반갑네!” 하고 즐겁게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반가운 인사도 잠시, 김장로는 갑자기 예수님께 서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김집사는 더 비싸고 맛있는 탕수육을 먹고있는데 자신은 짜장면만 먹고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장로는 예수님께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예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김집사는 집사고 저는 장로인데, 왜 김집사는 탕수육을 주시고 저는 짜장면만 주신 겁니까?” 하고 볼멘소리를 하자 예수님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김장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김목사배달나갔다.”

 

 

 

전 신자 제사장 교리

 

이 가상의 우스개 이야기는 우리에게 소중한 단초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웬지 집사-장로-목회자의 순으로 하나님의 일을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인양 생각하곤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는성직()’ 라는 말을 씁니다만, 우리 개신교에서는성직()’ 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직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성직이고 모두가 제사장이지, 성직자라는 특수한 계급의 사람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로마카톨릭의 부패에 대항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의 핵심중의 하나가 바로전 신자 제사장 (Priesthood of All Believers) 교리입니다 (흔히만인 대제사장교리라고도 합니다만, 저는전 신자 제사장교리라고 쓰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링크에 있는 김기현 목사의 글을 참조하십시오.)

 

전신자 제사장 교리는 말 그대로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우리의 죄 때문에 제사장이 주관하는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때 찢어진 성소의 휘장은 이것을 상장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태복음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마가복음 15:38)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누가복음 23:45)

 

 

구약시대에 지성소에서는 대 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갈수 있었던 것이 이제 모든 신자가 모든 날에 지성소를 들어갈수 있도록 개방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제사장의 집전하는 제사없이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왕과 같은 제사장이 되었고,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며, 거룩한 민족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 모두를 제사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더 이상 제사장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않으며,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담대하게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베드로전서 2:5)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5:10)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전 신자 제사장교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이루신 일이며, 종교개혁을 통해 다시한번 강조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잘 실감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는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에서 지도자로 섬기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의 제사장과 비슷한 역할을 주관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가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같은 권위와 신분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본질적인 차이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목회자가 보다 전문적으로 목회를 하기 위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훈련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평신도와의 아무런 신분적 차이가 없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 즉 분업의 차이이지,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똑같은 제사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목회자에게는 특별한 영적인 능력과 권위가 있고, 마치 구약의 제사장이나 선지자 같이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목회자는 제사장이나 선지자라기 보다는 교회의 리더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있어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목회자는 반장일 뿐 선생님이 아닙니다. 반장은 선생님의 필요에 의해 특정한 역할을 맡은 한 학생에 불과합니다. 반장이 선생님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반장은 그저 여러 학생 중 한 명입니다. 단지 특정한 역할을 맡았을 뿐입니다. 목회자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반장으로 등장하는 엄석대처럼 선생님(하나님)의 권위를 자기 권위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목회자는 결국 엄석대처럼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남오성 ,” 교회 개혁 Q&A (1) 만인 제사장주의에 대하여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57

 

 

 

 

전 신자 제사장 교리가 그래서 뭐?

 

그러면 이제 전 신자가 제사장이며,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더이상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특수한 계급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지금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첫번째로 그것은 목회자보다는 평신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목회자는 제사장이나 성직이 아니고, 목회자의 설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은 여전히 목사의 설교만을 하나님의 말씀선포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목회자의 설교나 성경공부에만 의존하여, 평신도 스스로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기도하는데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의 설교와 새벽기도의 말씀을 듣고, 충분히 성경을 알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목회자를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어, 평신도 스스로 말씀을 읽고 적용하고 스스로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하게 된다는데 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중세 가톨릭교회처럼 신부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 스스로 성경을 펴서 오늘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에 직접 응답하시기 원하십니다.

 

 

두번째로, 이제 믿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적의 권리를 목회자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제사장의 권리라면,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려고 하셨던 중보의 삶을 우리도 동일하게 전도와 기도를 통해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이것을 목회자의 일이니 목회자에게만 맡겨두자 라고 하면 제사장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모든 덕목은 사실 믿는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야 하는 역할입니다.  섬김과 청빈, 그리고 순종과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일이 목회자에게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가 추구해야하는 삶인 것입니다.  목회자가 삶의 목표를 재물, 소유, 육체, 쾌락, 명예, 인기, 권력, 군림, 권위에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듯이, 우리 믿는 신도들과 목회자 수준의 낮아짐과 섬김과 봉사, 정직과 실천,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구약시대에는 제사(예배)가 성전을 통해서만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 되고, 우리 몸이 성전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제사이자 예배가 되었습니다.  주일날 오전에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의 우리 모든 삶이 다 하나님께 드릴만하고 기뻐하시게 할만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은 공부하다 죽으면 순교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직장일때문에 과로로 숨져도 순교가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 1)

 

 

 

 

마지막 질문

 

 

글을 맺으면서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목사로 평생을 봉직하고 천국에 간 목사와 그냥 평범히 한 가정의 주부로 평생을 지내고 천국에 간 주부가 있을때, 과연 누가 더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을 받을까요?  이제 어떠신가요?  지금도 목사라고 생각하시나요?  답은아무도 모른다가 정답입니다.  목회자라도 목회자의 일에 소홀하면 부끄럽게 천국에 들어갈 것이고, 주부라도 일상의 삶에 충실하면 하늘에서 가장 큰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둘다 제사장이요, 둘다 하나님의 자녀요, 둘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나가면서

 

이 꼭지의 글은 기본적으로 아래의 두 글을 크게 참조하여 썼습니다.  두 글의 내용과 형식을 적극적으로 참조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남오성 ,” 교회 개혁 Q&A (1) 만인 제사장주의에 대하여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57

 

김기현, “만인제사장인가, 전 신자 제사장인가?”

http://blog.daum.net/sionaba/9834391

 

 


목회자가 '엄석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함께잘다니는교회'(6) 다시 '전 신자 제사장 교리'로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49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10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여섯번째  03/13/2010
 

하나님앞에서 모두가 겸손해야 합니다.


                                                                                                     남상곤

 

누가 문제였나요?

 

교회가 역사앞에 범죄를 저지른 일이 수없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것만 대표적으로 살펴봐도,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십자군 전쟁을 감행하여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노략질한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성의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던 것,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노예가 합법한 것이며 열등한 종족이 있다고 하여 노예제도를 실시했던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땅을 개척하교 교회를 세운다고 아메리카에 인디언들을 수천만명 학살한 일 등등  가장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은 것도 당시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저지른 것입니다.

 

교회가 혹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저지른 어처구니가 없는 수많은 범죄들이 있습니다.  당시에 이러한 일들이 자행되었을때는 정말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혹은하나님을 위해서이런 일들을 거리낌없이 저지렀던 것 같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을 한 사람들은 이것이 왜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하나님께서 실수가 없으시고 온전히 선하신 분이심을 믿는다면 이러한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 인간에 있음이 명확해 집니다.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래전에는 카리스마나 전통에 따라 지배가 이루어지고 정당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모든 사회는 법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 어느 국가이던 헌법이나 기본규칙을 통해서 지배는 합법화됩니다.  국가는 상위법인 헌법에 의하여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헌법에 명시된 권력만을 대통령이 수행합니다.  이러한 통치자인 대통령조차 임기제를 바탕으로 할뿐더러, 대통령이라도 헌법과 위배되면 처벌받거나 탄핵될수 있는 것이 오늘날 입니다.  이전까지의 오락가락하고 일관성이 없던 카리스마적 통치나 전통에 의한 통치는 사라졌습니다.  이는 비단 국가에 국한된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단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각각 규칙에 따라 그 법규대로 운영이 이루어집니다.  회사나 학교도 정관이나 교칙에 의해 운영이 되고, 심지어 교회도 교회정관으로 운영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신뢰할수 없지만 글로 쓰여진 법은 신뢰할수 있다라는 가정이 깔려있습니다.  인간은 신뢰할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제가 스스로 신뢰할수 없는 사람인것을 늘 느끼고 살아갑니다.  스스로 어떤 것을 하겠다 또는 안하겠다 계획을 세워 수십번 다짐하지만, 참으로 스스로에게 끝없이 관대하고 늘 용서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신뢰할수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함부로 생각하거나 무시해서 의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한계가 분명한 존재입니다. 이익 앞에서는 흔들리고, 강자앞에서는 약해지고, 약자앞에서는 강해지는  모든 사람은 다 연약하고 다 쓰러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사람을 믿을수 없기에 늘 권력이나 권위에 대해서는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굳이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와 같은 경구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권력이나 권위는 늘 견제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힘이기 때문입니다.  힘은 지니차게 견제를 받아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한번 잘못 발휘되면 사람이 죽거나 다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최소한으로 실행되어야 하고, 최대한으로 견제받아야 합니다.

 

 

사람을 신뢰할수 없으면 우리는 누구를 믿나요?

 

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신뢰할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제와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익에 치우치시지 아니하시고 공평하고 완전하신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출애굽기 3:14)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잠언 16:11)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

 

 

2.     그리고 씌여져 있는 성경을 믿습니다.  씌여져 있는 성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통치자가 바뀌어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성경 외에 있는 수많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의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한 10:3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

 

 

3.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성경외에 모든 것이 틀릴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다 겸손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A가 맞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B가 맞을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념이 있더라도, 상대방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념도 마찬가지로 존중을 해주어야 합니다.  내가 믿고 신뢰하는 믿음만큼이나 남들도 각자의 경험과 사고를 통해 믿고 있는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가 맞다고 해서 (설사 맞다고 하더라도) 누구를 쉽게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는 참으로 위험합니다.

 

누구를 변화시키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몸으로 행함과 사랑입니다.  본질적인 복음을 인정하고 동의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다양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한가지의 생각과 사상으로만 표현되고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in necessariis unitas,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in non-necessariis libertas,

모든 것에는 사랑을. in utrisque caritas.

 

-리처드 벡스터의 개혁된 목사(The Reformed Pastor, 1656)-

 

 

 

교회에 일곱빛깔 무지개를

 

 

글의 서두에서 예를 들었던 교회가 역사에 행했던 범죄들도 그 이면에는 어쨌든하나님을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신념이 너무나 강했던 것 같습니다.  신념이 강할수는 있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지나치게 강요하다가 돌이킬수 없는 역사적인 범죄가 된것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 자신과 다르다고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실수할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이니까요.  그러나 그왜곡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일방적인 강요로 이르게될때 진정 우려할 사태가 일어날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각 성경을 펴고 각각 자신의 해석과 적용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부는 맞을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옳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이야기하기에 당연히 문제가 생깁니다.  누구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자신이 틀릴수도 있다는 겸손함과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부분, 부분일수도 있습니다.  무지개의 한 색깔만을 보고 무지개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때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일곱가지의 색깔이 모여서 아름다운 무지개로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조금씩 표현될수 있을것 입니다.  한 부분을 가지고 전체인양 호도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한 해석을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적용하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될수 있습니다. 보통 말씀을 통한 적용은, 해석을 하는 그 자신에게 해당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중요한 우리의 문제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기보다는 본인이 깨닫도록 말씀과 상황을 통해서 이끌어 가심을 우리는 많이 경험적으로 목도한바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희미하게 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명하게 보게 될 때가 옵니다.  지금은 비록 불완전하고 충분하게 알수 없지만 그때에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알게될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서로에게 겸손하고 늘 열린마음과 열린자세를 가져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안에 아름다운 일곱빛깔의 무지개가 펼쳐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교회에 일곱빛깔 무지개를...
'함께잘다니는교회'(5)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41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07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네번째  02/24/2010

 

친절하신가요?

                                                                                                   남상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많은 분들이 격려해주시고 응원해주시고 위로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글 잘 읽었다고 손잡아 주시던 장로님, 기도하겠다고 힘내라고 해주신 권사님, 말없이 등 두드려주시던 집사님등  그래서 더욱 깨어있고 기도하고 고민하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다시하게 됩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기도해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들어가며

 

미국에 와서 처음에 낯설었던 두 단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awesome” 이고 다른 하나는 “cool” 입니다.  미국친구들이 가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아썸!’ ‘아썸!’ 그러길래 저는 무슨 유명스타이름 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툭하면아썸!” 이라고 해서 더 이상 모르고 살다가는 언젠가 큰일나겠다는 생각에 미국친구에게 창피하지만 물어봤습니다.  도대체 아썸, 아썸하는데그 아썸 스펠링이 뭐냐?”  스펠링을 받으면 사전을 찾아볼 요령이었죠.   친구가 알려준 아썸은 awesome, 우리말로 하자면끝내준다정도 될려나요?  참 이걸가지고 그렇게 고민한 제가 민망했었습니다.  또 하나는 ‘cool’ 인데, 차갑다는 뜻으로 알고있는데, 대화중에 갑자기 쿨! ! 하니도대체 이건 또 뭔가 싶었습니다.  역시 나중에 알았지만 쿨이라는 것은 차가운게 아니라멋있다’, ‘좋다’, 뭐 이런 뜻이었습니다.  눈치로 대강 짐작은 했지만, 왜 쿨이 멋있는 건지 좀 이해가 잘 되지않기는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cool’ 보다 ‘warm’ 같은 것이 낫지 않나요?  *^^*

 

 

인자 (kindness)’?

 

작년 여름에 잠언을 11주간에 걸쳐 묵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보았던 부분이 새롭게 다르게 보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잠언 3 3절에 나오는인자 (kindness)’ 라는 단어입니다.  이전에는 그인자라는 단어를 그냥 인자하다 정도로 뜻을 새기고 지나갔었습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다른 버전의 성경을 보게되면서인자라는 단어가 단순히 인자하다 라는 뜻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두란노성경사전에 보면, “인자한 이라는 형용사는크레스토스 (krestos)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친절하고 관대하다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자비한 마음이나 동정심, 연민의 정과 같은 단순한 느낌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라고 나와있습니다.  (http://www.holybible.or.kr/B_DICT/cgi/bdictftxt.php?DN=538 )

 

잠언 3 3-4절 말씀에, “인자와 진리를 저버리지 말고 ,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며, 너의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라.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네가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에서 나오는 인자는 영어성경 NASB로 보면 kindness 로 나옵니다.  한마디로친절인거지요. 

 

부끄럽지만 제가 잠언의 3 3-4절 말씀을 읽으며 적었던 묵상노트를 잠깐 공개해봅니다.

 

 

인자와 진리 (Kindness and Truth).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이다.

인자와 진리로 나의 마음판이 채워져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마음을 품었을때

그 하나님의 성품이 내 마음판을 채우는 것이다.  

 

인자함, 친절함 - 나는 인자한 사람이고 친절한 사람인가나는 꽤나 무뚝뚝하고 퉁명한 사람이다그러나, 모든 사람을 최선을 다해서 맞이하고 신경을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다그것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며, (cool) 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물론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다언제나 누구에게나 인자롭고 친절할수 있겠는가하지만 내 안에 하나님으로 충만할때...  그 하나님의 성품이 내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진리 - 진정한 이치, 옳고 진실함.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판에 채워져 있는가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생각할때...  그때 그 말씀에서부터 나오는 진실함과 옳음이 내 마음판에서 채움을 뚫고 나올것이다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생각하고 즐겨하는가요즘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것, 그리고 간절함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모하고 있다

 

그렇게 이 인자와 진리가 나의 마음판에 채워져 있을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내가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친절한가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계명이 내 안에 충만한가?

나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고있는가?

 

 

 

 

 

Cool Kind

 

이제 제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눈치빠른 분이라면 알아채셨을것입니다.  바로 ‘cool’ ‘kind’ 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요즘엔 쿨한것은 친절하다는 것과 반대의 뜻으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쿨하다는 것은 세련되고 멋있고 뒤끝없고 깔끔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말이 좀 적어야 하고, 괜한 부탁하면 안되고, 누군가 부탁하면그래 그러지 뭐하는 것입니다. 구차하게 먼저 다가가면 안됩니다.  하지만 남이 와서 부탁하고 물어보면 쿨하게 답해주거나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친절이라는 것은 먼저 말을 걸고, 안부와 필요를 묻고, 기분을 맞춰주고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는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괜히 호의를 가지고 친절을 베풀었다가 상대방이 쿨하게됐거든요라고 하면 상처를 받을수도 있고, 괜히 초라하게 느껴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마음을 써야하고 상냥하게 웃어야 합니다.  괜히 신경써야하는데다가, 웬지 먼저 손내밀기도 좀 어색합니다.  그냥 깔끔하게 쿨한게 좋은 거지요.

 

먼저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은 쿨 한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 먼저 잘 말을 걸지 않습니다.  남에게 쿨하게 보여야 하니 먼저 다가가기는 좀 그렇고, 만약에 친절을 베풀었다가 쿨한 반응이 오면 싫습니다.  그래서 남이 말을 걸어오거나 다가올때까지 기다립니다  쿨하게 보여야 하니까요.  우리는 미리 짐작합니다. ‘괜히 먼저 말을 걸어 민망해지지 말아야지?’  저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다를거야.’ ‘ 저 사람은 내가 호의를 베풀어도 차갑게 나올수도 있어.’ 하지만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오고 안부를 물어보고 도움을 요청하면 그건하게 돕거나 대답할수 있습니다.  나는하니까요.

 

 

 

친절을 목에 걸고 다니며, 마음속에 새겨두어라

 

다시 잠언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인자와 진리를 저버리지 말고 ,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며, 너의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라.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네가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잠언 3 3-4: 표준새번역).

 

인자를 저버리지말고, 목에 걸고다니고 마음속깊이 새겨두라고 하십니다.  목에 걸고다닌다는 것은 언제라도 그것을 목에서 뺄 준비를 하고있으라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새겨 늘 유념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며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 쿨하게 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쿨하게 대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쿨하게 대하면, 그 다른 사람도 우리를 쿨하게 대할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쿨한거 보다 친절한게 좋습니다.  비록 어떨때는 귀찮고, 괜히 좋은 호의가 다칠까 염려스럽고, 먼저 다가가면 웬지 어색하고 손해보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은혜를 주시고 귀중하게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친절은 옵션이 아닙니다.

 

 

저는 기질이 본래 말이없고 무뚝뚝해요.  숫기가 없어서 친절할수가 없어요.”   당연합니다.  왜냐하면인자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본래부터 친절할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쿨하지말고 친절한 연습을 해야합니다.  주변이웃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그렇게 연습하고 노력하고 기도하면, 그 친절한 하나님의 성품이 나를 친절하게 만들고, 나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게 될것을 믿습니다.  점찮고 숫기가 없어 말이없는 것이 동양문화권에서는 미덕으로 여기지는 경우도 있어 핑계가 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에서는 인자(친절)을 목에 두르고 마음속에 새겨두라고 하십니다.  기질과 성격탓으로 친절을 멀리할수가 없습니다.  어색하고 힘들지만 지금이라도 연습을 해야합니다.

 

 

친절은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 아닙니다.  배우고 연습하고 익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늘 유난히 친절하신 장로님과 권사님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랜 기도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삶에 배여 먼저 손을 내밀고, 기도제목을 물어보고,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해주십니다.  먼저 살피고 다가가고 필요를 물어보고 안부를 전하고 손을 내미는 친절은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하나님 나라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연습하고 노력하고 시도하고 다가가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우리에게 인자를 베푸십니다. 

 

친절은 옵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노력하고 기도하여 닮아가야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휴스턴이 너무 더워한것이 좋아 보일수는 있지만, 성경은 분명히 인자를 목에 걸어두고 마음판에 새기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더욱 서로 친절하고, 하나님께도 친절하기를 소원합니다.   

 


친절하신가요? 쿨하신가요? 
'함께잘다니는교회' (2) 친절은 성품이 아니라 연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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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usn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