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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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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22. 16:21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번째  04/12/2010

 

 

                                                                남상곤

                                                                                                                                                                                                                                                                                                                                     

 

 

아직도 숨기워진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

 

 

 

들어가며

 

벌써 열번째 글입니다.  처음에 생각하고 기도한 바와는 달리 제가 고민했던 주제들을 거의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열번의 글을 통해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됩니다.  좀 더 가볍고, 좀 더 부담없이 다양한 소재를 다뤄보고자 하는 저의 인간적인 의도와는 달리 좀 더 진지하고 좀 더 고민해야하는 것들을 좀 더 쉽게 써야하는 변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은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하게 됩니다. 

 

"Quo Vadis Domine"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혹시 의도적으로?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 라는 말은 신약성경에만 100번이상 나오는 말입니다.  중요한 말이 자주 반복되어 나온다는 상식에 비추어보더라도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 개념이고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하나님 나라라는 구체적 표현이 거의 없지만 신약에 특별히 복음서에 집중적으로 반복, 그리고 강조되어 나오는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 의미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라 보다는, 예수님이 등장하시면서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에 더 가시적으로 신약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등장하시면서 하셨던 말씀도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5) 이였습니다.  어떤 분들은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복음서를 이해할수 없다고도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주 언급되고 강조되어진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잘 모르고 있거나, 배우지 못하거나,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일부로 그런 것 같이  왜 우리는 교회에서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배우고 가르치고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유들

 

하나님 나라는 참 정의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무엇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늘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한번 실제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좀 잡히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보아라.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누가 17:20-2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누가 18:1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복음 3:3-5)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내가 그것을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마치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올랐다." (누가복음 13:18-2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마태복음 19:23-24)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마가복음 10: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마가복음 4:1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은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의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수 있게 된다." (마가복음 4:26-32)

 

 

어떠십니까?  좀 감이 오십니까? 위의 예화나 비유외에도, 수많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들과 말씀들이 있습니다.  열거한 성경 말씀들만 보면, 감은 오는데 여전히 잘 잡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하나님 나라에 논의중에서 위의 예시를 토대로 몇가지의 특성만 좀 주목해서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하나님 나라

1. 예수님 그 분 자체라는 것,

2.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

3. 하나님나라는 숨기워져 있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도대체 뭔가요?

 

하나님나라는 우선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될거라고 생각하는 천국이 아닙니다.  위에 예수님이 드신 예화들을 잘 살펴보면 죽어서 가게 된다고 흔히 알려진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공간이나 영역적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첫째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 곧 하나님의 왕권 (주되심) 과 통치를 의미한다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과 공간은 예수님이 오셔서 시작되었고, 예수님 그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분이셨기에, 예수님이 바로하나님 나라그 자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하나하나씩 실현해가시는 삶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따르는 그 예수님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내가 만약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에 뜻을 순종하게 되면 거기에서 또 작은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하나님 나라의 D-Day (예수님의 초림)이라고 하고, 독일의 전쟁항복선언을 하나님 나라의 V-Day (예수님의 재림)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미래성 각각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속성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현재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Already (이미), but not yet (그러나 아직 완전히는 아닌) 으로 이해합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시작되었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로 약속하신 그 날에서야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고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도래한 것은 아닌 그 중간단계에 살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비밀스럽고 숨기워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초반부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왜 비유로 설명하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11),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1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그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라고 하셨는데그것은 바로 나, 나아가서 우리,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인 교회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제가 처음에 궁금해했던 것,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데 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잘 배우지못하고 들어보지 못하고 나누어본적이 없는가? 에 대한 답변을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수많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과 속성중에서 위의 세가지에 비추어서 살펴본다면,

 

첫째,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그 자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말씀은 예수님의 생과 삶에 대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삶과 말씀, 그 자체가 우리에게 불편하고 어렵고 찔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들은 참으로 행하기 어렵고, 불가능하기까지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빰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대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어라, 일곱번씩 일흔번도 용서해라, 이제는 아예 용서를 넘어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시지요.  이러한 말씀들을 들으면 아득해 집니다.  상식적으로 절대 이해가 안될 뿐더러 그럴게 할수도 없을 것 같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이 바로 하나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완전히 임하는 그날에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불가능하게 보이는 말씀을 회피할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already)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행하는 사람에게 바로 하나님나라가 시작되고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빨간색으로 나와있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를 가르치고 선포하는 교회는 요즘에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듣기에 귀에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귀에 거슬린다는 것이 그렇게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선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 쓰라렵기 때문입니다. 이 쓰라림의 경험이 없으시다면 한번 가슴에 손을 얻고 냉정히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믿는 것은 잘먹고 잘사는 축복된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십자가에 매일 매일 못박는 삶입니다.  예수믿고 축복받는다는 것이 돈 잘벌고 사회에서 성공하고 호위호식한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오늘날의 교회는 거리낌 없이 가르칩니다.  바로 하나님나라가 없는 가르침입니다. 

 

둘째로 하나님나라가 이미 우리가운데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인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도래할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현세에는 하나님 나라를 외면합니다.  ,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나라는 어차피 미래의 일이니, 지금에는 그저 좀 대강대강 살고, 또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어차피 미래에 일이니 지금 현재는 대강 내 사리사욕 챙기며 권력욕과 돈을 추구하며 평수를 늘리고 자녀보험을 하나 더 들어두는 것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역사하시는 것이고, 그러기에 내가 현재 뭐 특별히 할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좀 한눈팔고 살아도 괜찮다고 은근슬쩍 타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틀리지는 않은 말 같습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맞기는 합니다.  그러나 유명한 신학자인 톰 라이트의 비유로 설명하면, 우리는 설계자에게로 부터 각자에게 맡긴 설계도면을 받았고, 그 도면에 따라 각자 자기의 맡은 부분에 따라 돌을 깎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돌이 어느 자리에 가서 어떻게 놓여 건물 일부가 될지는 현재 지금 이 돌을 깍으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설계자가 오시면, 그 건물 전체의 윤곽이 드러나고 결국에는 설계된 건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그때를 기다리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위한건설인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숨기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유로 말씀하시고 설명하셔도 결국 귀있는자가 듣는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닫는 마음은 하나님도 여실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들었던 모두가 그 뜻을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당시 유대신앙의 리더격인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아예 그 비유를 듣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을 쫓았던 제자와 그 무리들만이 그 비유를 듣고, 또 그 비유의 의미를 예수님이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지만 희한하게도 다 알수가 없습니다.  숨겨져있고 가려워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 많은 교회들에게도 이 하나님의 나라가 숨겨져있고 가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교회안에서도 잘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마가복음 4:11)  한마디로 많은 교회가 저 바깥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없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함이 없으면 비록 교회의 형태를 띄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저 바깥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숨기워진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중심주제이면서 기독교신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교회에서는 잘 들을수 없고 배울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교회가 교회다운 기능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잘 드려서 돈을 많이 벌어 성공했다는 록펠러나 카네기를 예를 들면서도, 자기 부모와 친족을 버리면서까지 십자가를 쫓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없는 교회에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물질주의와 상향성에 대한 욕구가 교회에 만연한 체로 세상의 기득권과 권력체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교회에서는, 끊임없는 자신을 돌아봄과 회개가 요청되는 하나님 나라는 선포될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무엇인가로 고립된 섬같은 고독을 느껴보지도 못한 체, 끊임없는 큰 집과 더 높은 지위만을 바라보고 쫓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들을 수 없고 배울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바깥 사람들에게 숨기워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거룩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주되심을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인정할때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한 두 영역이 아닌 전영역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주되심 (Lordship)이 세워져야 합니다돈과 재물에 대해서는, 자녀에 관해서는, 출세에 대해서는 눈감아 지는 것이 아닌...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이 인정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회개와 기도, 용서와 사랑, 그리고 그 의를 구하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질때...  우리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고 운동성을 가지고 미래에 완성되어질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주되심을 인정한다는 것은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라는 엄청난 주제를 짧게 쓰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을 글 쓰기 전부터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실행을 해본 무지막지한 저의 용기에 저도 놀라곤 합니다.  ^^  무식하지 않으면 용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부디 성령하나님의 도움으로 제 부족한 글쓰기가 많은 성도분들에게 잘 이해되기를 계속 기도하게 됩니다그리고, 계속해서, 모든 영역에서 주되심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부를 쫓는 교회가 숨겨둔 하나님나라 
함께잘다니는교회'(8) '아직도 숨겨진 하나님나라 (Kingdom of God)'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93

 

 

더 읽어볼만한 책들

 

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짐 월리스, “회심

양용의,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19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아홉번째  03/29/2010

 

                                                                                                                                                                                                                  남상곤

 

 

"상처입기 쉬운 (Vulnerable)"

 

 

Vulnerable

 

유학을 올때, GRE라는 시험을 보았습니다.  GRE 라는 시험이 생소하신 분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를 갈때 보는 시험인 SAT와 비슷하면서 좀 더 어려운 시험으로 보시면 될듯 합니다. 그래서 SAT와 유형이나 구성이 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SAT 문제 (특히 영어)를 보신분은 아시겠지만은 낯설고 어려운 단어들을 외워야만 풀수 있는 문제들이 대다수입니다.  GRE의 경우는 아무래도 SAT보다 고등시험이니 훨씬 더 어렵고 잘 안쓰는 어휘가 많이 나오고, 그 뜻을 알아야만 풀수 있는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미국학생들도 어렵고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저같은 사람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어마어마한 단어를 매일 외우고 잃어버리고를 반복하고, 가장 덜 까먹을때를 잡아, 그날 시험을 보고 간신히 원하는 점수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러한 단어들을 공부하면서도, 실제로 공부할때는 그러한 단어들을 거의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지금 그 단어들을 우연히 보게되면어디서 본 단어인데? ! GRE 공부할 때 외웠던 단어였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뜻을 모르는 것을 보면서 쓴웃음을 짓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어떤 옷의 단추를 뜻하는 단어도 그 당시에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사전에도 없는 단어들도 많았었습니다.  그런 단어들 중에 유달리 기억에 남는 몇 안되는 단어가 ‘vulnerable’ 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그리 어려운 어휘는 아니어서 가끔 일상생활에서 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쉽게보는 단어는 아닙니다.  뜻은취약한, 연약한(신체적정서적으로 상처받기 쉬움을 나타냄)’ 이었고 발음도 쉽지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http://endic.naver.com/enkrEntry.nhn;jsessionid=AD63B98C69F52CBD6E6CB28E18828971?entryId=6deacba33f1643cf87df8bf052e3cd68&query=Vulnerable

(링크를 따라가셔서  아이콘을 누르시면 발음을 들으실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vulnerable 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된 신앙서적을 읽을 때 심심찮게 나타나곤 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언급할때 자주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표현하는 여려 형용사 중에 가장 낯설었던 단어가 바로 vulnerable (상처입기 쉬운) 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념이 잘 정리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저 vulnerable라는 단어가 예수님과 관련있고, 그래서주목해서 봐야할 필요가 있겠구나란 생각을 하게되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

 

 

그 즈음, 한국에헨리 나우엔이라는 가톨릭 예수회의 사제의 책이 기독교 서점가에 인기였었습니다.  천주교 사제출신의 헨리 나우엔의 책들은 오히려 한국 천주교보다 개신교에서 더 인기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의 책 대부분이 번역되어 나와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저도 몇권을 읽어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제 출신으로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적으로 공부하던 헨리 나우웬은 예일과 하버드의 교수로 봉직하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데이브레이크라는 캐나다 토론토의 장애우를 섬기는 단체로 가서 섬김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습니다.  저도 그분의 삶에도 큰 감명을 받았고, 실제로 그 분의 저작들을 몇권 요약해서 레포트를 쓴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저는 무엇인가 깊은 영성이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한 이해도 하지 못한채로 그냥 참대단한 영성가다라는 생각으로 흘려버린지 이제 10년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때 나우웬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상처입은 치유자 (Wounded Healer)’는 우리들 사이에 자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용어였지만 무슨 뜻인지는 그 당시에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Vulnerable 과 상처입은 치유자

 

그런데 이 ‘vulnerable’ 라는 단어와 헨리나우웬의상처입은 치유자가 제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게 되면서 연결된 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vulnerable’ 하면서 동시에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생각을 하게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묘사하는 형용사로서의 ‘vulnerable’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잘 표현해주는 단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은 자신이 상처받을 것을 아시고도 몸을 던져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특히 십자가에서 벌거벗긴채 달려, 친구와 제자들의 배신과, 사람들의 모욕과 오해속에, 마지막으로 기대었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외면을 당하고 외롭고 고독하게 십자가서 죽임당하시는 장면은 ‘vulnerable’라는 말을 잘 실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완벽한 인간이셨기에, 외롭고 고독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고뇌, 십자가를 저야만 하는 것, 그리고 하나였던 성부 하나님과 분리되는 고통, 그리고 사람들에게 몸을 내어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셨지만, 예수님께 남은 것은 배신과 모욕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잘 상징한 장면이 바로 십자가에 벌거벗은채로 달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군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들고 다녔으면서저 꼴 좀 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지?’  갖은 저주, 비아냥, 조롱과 오해, 박해와 질시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으로서도 견디시기 쉬운 일이 아니었을것 같습니다.  온몸을 던져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배신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불러보지만, 하나님마저도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예수님은 상처받기 쉬운 분이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상처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온몸을 던져 상처입을 것을 알고도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아무말 없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시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vulnerable’ 하셨던 것입니다.

 

 

 

 

용기있는 자가 미녀를 쟁취한다

 

삼수를 해서 들어간 대학에서는 많은 후배들이, 두 세살 많은 저에게 자주 연애상담을 하러 오곤 했습니다. ‘형님, A자매가 좋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럴때마다 저는 거리낌없이 후배들에게가서 고백해라,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하는 거야!’ 하면서 후배들의 등을 떠밀어 주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번도 성공했던 후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대가 된 자매의 눈에 백마를 타고 왕자님이 나타난 들,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저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격려하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가라!  이 자매(산지)를 내가 주소서! 하고 갈렙의 믿음으로 나아가라!’  보통 거절당하고 온 후배들은 너무 괴로워했었고, 저는 등 떠밀은 죄가 있기에, 그 후배들을 주로 맛있는 것을 사줌으로써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 후배들은 그렇게 그렇게 마음이 강하여져 갔었고, 지금은 다들 어쩜 그리 하나님안에서 아름답고 지혜로운 자매들을 만나 좋은 가정들을 다들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제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  어쨌든, 제가 말하고자 하려는 것은 이렇게 마음의 고백을 하러 나아갈때, 그 때가 바로 vulnerable이 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없이 살다보면 이렇게 무방비상태의 vulnerable한 채로 다른 사람에게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자매에게 마음을 고백하러 나가던 제 후배들은, 갑옷을 해체하고 상처받을 것을 각오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방어가 없기에 그때 당하는 상처는 치명적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vulnerable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시도조차 못하는 것이고, 자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없으면 사랑도 얻지 못하고, 상대방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 20대 초반의 자매가 당연히 거절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후배가 상처받을 것도 너무 명백히 알고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그 후배를 말린다고 한들, 그 후배가 그 마음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몸과 마음을 던져 vulnerable한 채로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그 도전을 하지 못한 사람은 그 아픔이 어떤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냥 아프고 고통스러우나, 뜻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란?

 

 

헨리나우웬의상처입은 치유자는 정말 제가 단순무식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하는 제가 참 무식해서 용감하다고 자부합니다), 상처입은 자가 상처받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으로 이용되는 방법을 사역자가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처받은 사람에게 나아갈 때 우리는 환대(hospitality)의 방법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환대는 상처받은 사람이 제공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가 치유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곳에서 상처가 치료되고 아픔이 경감되어서가 아니라 상처와 아픔이 새로운 비전을 위한 출구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고백할 때 서로의 소망이 깊어지며, 서로의 나약함을 공유할 때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힘을 기억하게 됩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중에서- 

 

 

상처입은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지않고 정면으로 직시해서 그것을 온몸으로 부딪히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는 (깊이 있게 나누기는 지면상 곤란하지만) 소외감, 분리, 고립,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그를 깊은 영성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들 자신의 고뇌를 통해 영적인 삶을 살도록 격려하게 했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속에서 내가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받은 상처를, 내가 이웃과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마음을 던져 vulnerable한 각오를 하고 마주하는 상처들을 통해 새로히 사람들을 치유하기 원하시고, 또 그러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상처가 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vulnerable 상태로 벌거벗은 채 몸과 마음을 던져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통에는 소명이 있고,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의 가볍고 단순한 차원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러한 고통은 내 죄로 인한 것이거나 상대방의 죄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고통과 상처는 남에게 자신을 내어주기위해 용기를 가지고 vulnerable하게 나아갈때 받는 상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나아가려면 반드시 갑옷을 벗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던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매에게 마음을 고백할때도 마음을 던져 vulnerable한 상태가 되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데 마음을 던지지 않으면 치유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던져 사랑한 예수님앞에서 언제나 무한한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먼저 가셨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을 것임을 아시고, 아프고 고통스러울 것을 아시고 몸과 마음을 던지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위로가 있고 치유가 있습니다. 

 

 

 

그 길 가시렵니까?

 

제가 헨리나우웬의 영성에 대한 이해가 짧아 글이 횡설수설하고 길어짐을 느낍니다.  짧게 정리하면, 아무도 상처받기 원하지 않은 이 시대에, 하지만 상처를 받을수 밖에 없는 지금에 하나님께서는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부름에 답하려려면 반드시 갑옷을 벗고 벌거벋은 vulnerable 상태가 되야 합니다.  그리고 그 vulnerable한 상태에서 받게되는 상처는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그 길만이 다른 사람에게 진정 나아가는너의 이웃을 너의 몸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9)의 가장 큰 둘째되는 계명을 지키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길에 초대받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아직 때가 아닐 수도 있고, 아직 웬지나는 멀었다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완전히 준비하고 가는 길이 아니라 바로 지금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첫 발자욱을 디디기만 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물론 평평대로는 더욱 아닙니다.  사막이 될수도 있고, 거친 비탈길이 될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고통스럽고 고난의 길입니다   이 길에 초대받은 사람도 소수이지만, 초대를 받은 사람 중에서도 그 길을 실제로 걷기로 한 사람은 더 소수입니다.  모두가 나이스하고 쿨하고 깔끔하고 상처받기 원하지 않는 지금의 시대에는 정말 더 좁은 문입니다. 

 

그래도 그길 가시겠습니까?  자신 있으십니까?  이 길은 정말 아픕니다.  그리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도 가시렵니까?  그럼 같이 가십시다.  그 여정에 많지는 않지만 친구들도 있고, 먼저 걸어갔던 선배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가셔서 길을 내셨기 때문에 곳곳마다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정말 헨리나우웬의 깊은 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체, 이렇게 글을 쓰는 제가 참 한심하기도 하고 용감하기도 하고, 걱정이 앞섭니다만, 읽으시는 분들을 잘 이해하게 해 주실 성령하나님을 기대합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헨리나우웬의 책들을 읽어보시기를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영적 발돋움> <모든 것을 새롭게> <춤추시는 하나님> <친밀함> 등등 많은 책들이 잘 번역되어 있고 우리교회 도서실에도 몇 권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두껍지는 않은데 생각보다 페이지가 잘 안 나가실수도 있습니다.  ^^

 


 

더 읽어볼거리

 

헨리 나우웬의 생애와 영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한 사이트입니다.

http://blog.ohmynews.com/junnamu/29827

 

 

 

'상처입기 쉬운(Vulnerable), 상처 입어야 하는'
'함께잘다니는교회'(7) 상처 받기 원치 않는 시대를 살며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77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18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여덟번째  03/22/2010
 


ㅇㅇㅇ 집사님께


                                                                                                      남상곤

 

 

이 글은 제가 전에 다녔던 미주의 한 한인교회의 게시판을 통해 제가 연재했던 ‘함께 잘 다니는 교회’의 글들을 보고 A집사님께서 저에게 쓰신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A집사님께서는 당시 저의 첫글인 ‘예배가 너무 졸려요’ 에서 댓글로 기도를 좀 더 하고 글을 써라 라고 조언을 해주시고, 자장면이냐 탕수육이냐 라는 글 다음에는 저에게 직접 게시판을 통해 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좀 많이 길어서 걱정입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여지는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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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잘다니는 교회 – A 집사님께

  

들어가며

우선 A 집사님이 용기있고 진지하게 제 글에 대해 의견을 개진해주셔서 참 감사를 드립니다. 문제를 은폐하고 회피하는 것보다 이렇게 열어서 논의하고 또 이를 계기로 더 기도할 수 있는 계기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계속적으로 교회 안에서 진지하고 고민하면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계시는지 논의하고 기도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남상곤 형제님 

연초에 출장떠나 있을때 저를 포함해서 형제님도 교회서 집사임명이 되었다는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먼저글에는 형제님으로 호칭했으나 "형제님"은 여전히 좋은 단어이고 부를수록 친숙하게 느껴지기에 그대로 쓰겠습니다.  

 

--->A 집사님,

제가 서리집사가 된지 이제 8년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유학을 나오기전에 집사임직을 받았고, 작년에 제가 서리집사가 아니었던 것은, 휴스턴으로 새로 이사와서 A교회에 새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것보다는 제 스스로 집사로서의 안식년을 개인적으로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직분보다는 차라리 교회안의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A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혹시나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A 집사님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불편해 하실 분도 계실 것 같아, 저는 계속 집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글을 쓸 때는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리 신경 써도 읽는 사람이 글을 선택적으로 읽거나 또는 선택적으로 인용되면 곡해가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글을 쓸때에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기 위해 쓴 글이 종종 잘못 오해 혹은 오독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우선 A 집사님께서 제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거나, 선택적인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지 않으신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쓴 '짜장면이냐, 탕수육이냐?'의 글의 요지를 뭐라고 보시는지요?  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것은 마지막 부분의 첫째, 둘째, 셋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집사님의 이해를 돕고자 간단히 요약하면, 첫째, 목회자에게 과도의존하여 신도들이 스스로 성경을 펴서 읽고 고민하는 데에 게을리 하는 것을 우려했고, 둘째, 대제사장이라면 대제사장의 직무를 소홀히 하거나 목회자에게 맡기지말고 스스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현재의 목회자 수준의 헌신과 섬김이 신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 세번째로 전 신자 제사장 교리가 단순히 우리가 제사장이라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일상의 삶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배가 되야한다 라는 세가지 입니다.

그런데 집사님의 글에 요지는 (제가 읽건데) 1. 하나님안에서 하나되는 것은 잠잠하고 침묵해야 한다, 2. 하나님은 권위와 질서의 하나님이기에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3. 그리고 기도하는 것은 어렵고 글을 쓰는 것은 쉽다. 4. 아울러 순종과 기도로 교회를 위해 문제제기를 하지말라 라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만약 제가 잘못 읽었다면 확인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제가 왜 집사님이 제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고 생각했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제 글의 요지는 '전 신자 제사장 (Priesthood of All Believers) 교리' 가 아닙니다. 제가 위에 언급한 세가지를 논하고자, '전 신자 제사장 교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만약 집사님이 제 글의 요지를 이해하셨다면, 먼저 이 세가지에 대한 의견을 먼저 주시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집사님께서 '전 신자 대제사장 교리'에 대해서 이해나 동의가 어려우시다면, 제 글에 대한 반박보다 루터나 칼빈의 글을 읽으시고 그 글에 반박을 하시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2. 권위와 질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제 글에서 권위와 질서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언급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한 '전 신자 제사장 교리'에서 목회자가 더 이상 구약시대에 제사장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하나님이 질서와 권위의 하나님이기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더 더욱 이해가 어렵습니다. 

3. 그리고 목회자의 권위와 설교권을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근거로 말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은 아니라고 알고있습니다.  그러면, 집사님의 개인적인 견해이신가요?  제가 부족하지만 성경을 읽고 공부한 바로는, 목회자의 권위와 설교권은 더 이상 목회자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고 배웠고 알고 있습니다. 

4. 기도가 어렵고, 글을 쓰는것은 쉽다는 것은 어떤 생각과 근거에서 말씀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왜 기도는 어렵고 글은 쉽지요?  기도와 글이 반대의 개념인가요?  기도도 글로 나타납니다.  성경의 시가서들은 글로 된 기도입니다.  왜 기도와 글이 반대의 개념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시편의 기자들의 많은 기도들이 쉽게 쓰여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5. 왜 교회에 문제제기를 하면 순종과 기도에 위배가 되는지 역시 잘 이해가 어렵습니다.  문제제기가 순종과 기도에 위배되는 것인가요?  저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셨던 사역의 대부분은 '문제 제기'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시고, 성전에 가셔서는 불같이 화를 내시고 판을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늘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고 논쟁과 토론(질문과 답변)이 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맞으니 잠잠하고 순종해라’ 라고 아니하시고 어처구니가 없는 뻔한 질문에도 더 좋은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6. 만에 하나라도 집사님이 말씀하신 순종과 기도라는 것이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그냥 눈감고 좋은 게 좋은 것이고 그저 은혜 (?)로 덮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정상이고,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기도로 함께 해야겠지요.  역사적으로도 문제가 없었던 교회가 없었고, 지금도 문제가 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형제님이 몇 번에 걸쳐 쓴 글을 관심과 또한 우려를 가지고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부분이 젊었을 때 저의 고민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공감도 합니다. 저도 한때 기성교회에 대해 많은 반발도 있었고 많은 상처도 있었습니다. 다음주 출장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분주한 가운데도 형제님의 마지막 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형제님께 글을 써야 하겠다는 마음을 주시네요. 형제님이 저를 위해서 기도한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몇 주 전부터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 집사님께서 제 첫글에 첫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하구요.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저도 집사님이 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집사님께 글을 써야 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집사님을 위해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글의 내용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 갈 수 있는 만인 제사장인 것은 맞습니다. 사역은 목회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평신도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신도"라는 호칭도 어떤 의미로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사명 받은 "사역자"로 선 것이니까요. 전임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가 아니면 생업을 가진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가로 나눌뿐이지요. 어찌 보면 평신도라는 소극적 단어로 인해 생업을 가진 사역자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수동적인 교회안의 종교인으로 끝나는 우를 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제가 만인 제사장이 아닌 ‘전 신자 제사장’ 이라고 표현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이 아닌 믿는 신자가 모두 제사장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평신도에 대한 표현도 맞지 않는 것에 동의합니다.  저 역시 평신도라는 용어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대처할 만한 용어를 만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그냥 성도라고 써도 좋을 것 같구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를 허락하였는가도 알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 만인 제사장을 허락하고 그것으로 끝난다면 각자 집에서 성경보고 기도하며 직접 하나님과 관계 맺고 신앙생활 하면 되지 왜 교회에 모여야 하나요?  그것은 우리가 공동체로 모여서 해야 하는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새로운 약속)은 교회를 통하여만 이루어 가십니다.  모여서 하나되어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는 하나가 됨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건강치 못한 교회들이 많기에 꿈과 같은 일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신 일이고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되는 일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매주 정확하고 탁월한 지적이십니다.  교회의 핵심 중에 하나는 공동체성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적예배가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부르심은 개인적이면서 또한 공동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에서의 예배와 공적 예배가 공존해야 우리의 부르심이 완전해 진다고 믿습니다.  제가 '전 신자 제사장' 을 강조하고 일상에서의 예배를 강조한 것이 공적예배에 대해서 소홀히 해야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공적예배가 일상의 예배에 비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고, 일상에서의 예배는 덜 인식되거나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님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한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여러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분열’이나 ‘하나됨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전체주의적 사고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하나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연합됨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집사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다양하고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나가 될수 있을까요? 형제님처럼 꾸준히 자기생각을 교회사이트에 올려서 하나가 될수 있을까요? 그러면 몇백명의 사람들이 다 같이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함락할때 하나님께서 왜 7일동안이나 침묵케 하셨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잠히 하나님이 앞서 하시는 일을 보라 하시는 명령을 많이 보게됩니다. 우리가 말을 많이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없습니다.

 

------->집사님의 궁금점이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배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한가지의 통일된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저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이트에 올린 글들은 그 배경과 생각이 다른 한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는 제 글을 모두가 다 동의할거라고 당연히 생각치 않으며, 동의할 수도 없다고 당연히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을 꾸준히 교회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왜 하나가 될수 없을거라 생각하시는지요?  오히려 생각이 다른 데, 아무 말 없이 있는 것이 더 하나되고 연합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안드시는지요?

중요한 것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서로의 인정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생각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집사님께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되었다고 생각하시는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핵심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다른 신앙의 색깔과 노선을 같이 안고 갈 수 있는가?  그리고 내가 믿는 신앙만큼이나 상대방의 신앙도 존중해 줄수 있는가?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저는 집사님이 말씀하신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우선 다른 생각을 우리 교회안에서 표현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우리 교회 상황에서는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전체주의적으로 사고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하나의 시각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A 집사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됨은 무엇인지요?  의견과 생각은 다르지만 잠잠하고 조용하는 것인가요?  생각은 다른데 그래도 잠잠하고 조용히 있어서, 다른 생각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됨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함락할때 7일간 침묵한 일이 집사님께서 이 맥락에서 드신 합당한 예가 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듭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위해 7일간 침묵한 것이, 과연 침묵하고 잠잠하라라는 문자적 의미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 상황에서 7일간 침묵하고 잠잠해야 했을까요?  저는 전적으로 여리고 성의 함락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 읽었고 묵상했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다르게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성경에 잠잠하고 침묵했다고 나오면, 모든 상황에서 침묵하고 잠잠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집사님께서 여러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생각만을 해야하니 잠잠하고 말을 하지말아라 하는 뜻으로 이 예를 드셨다면 저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깊은 영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에 저는 절대 동의합니다.  침묵을 통해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교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극복하려는 논의와 토론을 혼란으로 여기시는 것은, 집사님께서 교회사적인 전통에 대해서 잘 모르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문제에 대한 논의와 토론의 역사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등은 기독교의 공의회에서 토론으로 형성된 교리이며 (우리가 진리로 믿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의 경우,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사항이 아니라 니케아 신조에서 여러 사람들의 논의와 토론으로 정립된 사항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당시의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회의, 하이델베르크 논쟁을 통해,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신학자들과 격렬히 토론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러한 논의와 토론(말과 글) 으로 지금의 개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시면, 사도들은 토론을 통해서 교의를 형성해갔음을 알수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오라 우리가 와서 서로 변론하자’ 라고 말씀하시는 변론과 토론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

 

하나님의 교회를 허락하시고 교회에 질서를 원하셨습니다.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질서는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신앙적으로 검증받은 사람들을 세워서 장로로 교회를 취리하게 하셨고 신학교에서 훈련받은 목사로 말씀선포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권한과 권위는 어찌하다보니 우연히 그리 된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아무나 나서서 가르치면 질서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집니다. 완벽한 교회는 이땅에는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안드는 부분들이 많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훈련을 위해서 이용하시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고치자는 목적이 질서보다 우선하지는 않습니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습니다.

 

--------> 교회에 질서를 원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질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제가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집사님은 권위와 질서를 혼용해서 쓰시는 것 같은데 제가 볼 때는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일하시기에 편하라고 질서를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바라보는 하나님은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비효율적이고 일을 어렵게 하십니다.  4일이면 갈 수 있는 애굽에서 가나안의 여정을 40년으로 돌리십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비효율적인 일에 대한 비용을 하나님께서 감당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일하기 편하다’ 혹은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라는 것은 우리의 시각입니다.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시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입장에서 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질서가 있어야 일하시기 편하신 분이 아니고, 우리가 보기에 질서가 없어 불편해 보여도, 하나님께는 전혀 불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질서가 없더라도 그분의 일을 행하시는데 전혀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  집사님이 말씀하신 질서는 사람들이 일하기 편하기 위해 질서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집사님께서는 교회의 질서를 강조하시고,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교회안의 자유함이 필요하고, 주의 영이 계신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을 읽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 자유의 하나님 모두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어느 한가지의 속성이 우월하다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여러가지 하나님의 성품 중에 집사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을 더 많이 만나시고 느끼셨듯이, 저는 자유의 하나님을 더 많이 체험합니다.  질서가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이라면, 자유 역시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입니다. 

목사만이 말씀선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점이 듭니다.  그것이 만약 목사만이 말씀을 선포할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이라면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으로 말씀을 선포할수 있습니다.  다만 말씀을 더욱 깊이있게 보기위해 그 역할을 전문적인 신학훈련을 받은 목사가 주로 하는 것이지 그것이 목사나 장로만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게 ‘전 신자 제사장 교리’ 이지 않습니까?

집사님께서 말하시는 '아무나 나서서 가르치면 질서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진다' 는 말씀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 서로의 선생이요 제자입니다.  '아무나' 를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교회 평신도를 말씀하신 것이라면 역시 위험한 생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사님의 ‘아무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직분인지요?  직분이 되면 나서서 가르칠수 있고, 직분이 안되면 가르칠수 없나요?  과연 어디에 누가 직분이 되면 서서 가르칠수 있고, 안되면 서서 가르칠수 없는지 나와있는지요?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아무나' 일어나 가르친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 지금과 같은 권위를 당시에는 존중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고백을 보면 그 ‘아무나’ 인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는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해 일어나 설교할때는 예수님을 3번이나 배반하고 나서 아마도 2달 정도의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당시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배반하고 부인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 입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와의 차이는 한사람은 자살했고, 한사람은 살아서 회개했던 차이입니다.   둘 다 예수님을 배신한 배반자였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베드로는 당시 '아무나' 보다도 못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자가 무슨 설교냐?' 라고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한술 더 뜹니다.  바울은 스테판집사를 돌로 때려 죽인 사람입니다.  스테판 집사를 돌로 죽인 살인자가 다시와서 그 스테판 집사가 설교하던 예수를 전했습니다.  당시의 바울은 ‘아무나’ 보다도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구약시대와 달리 한명의 선지자나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이루어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야고보가, 안디옥에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또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이가, 바로 집사님이 말씀하셨던 '아무나' 가 성령을 받고 일어나서 가르치고 설교합니다.  구약에서는 '아무나' 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아무나'가 있습니까?  그 '아무나'는 이제 왕같은 대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대제사장을 집사님은 여전히 '아무나' 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집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아무나’를 통해서 지금도 역사하시고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초대교회에서도 언제나 문제투성이었습니다.  과연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가한가?  바울이 과연 사도권이 있는 사람인가?  이스라엘을 두고 이방인의 땅에 가서 전도하는 것이 과연 먼저인가?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주의하고 대할 것인가?

당연히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제가 없는 척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죄인들인 사람들이 모였기에 당연히 문제가 있고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문제에 대해서 오픈하고 논의하는게 빈대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일까요 아니면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없는 척 질서만을 강조해서 회칠한 무덤이 되는 것일까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오히려 문제가 없는 것처럼 덮는 곳에서 후에 폭발성을 가지고 문제가 크게 발생해서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문제가 있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용기있고 정직한 태도라고 믿습니다.  

교회의 문제를 고치는 목적이 질서보다 우선하지 않는 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은 아닌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제가 읽었던 성경중에 그러한 내용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성경읽기가 짧아 미처 못 읽었던 것이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은 교회의 질서에 관한 집사님의 개인적인 견해인 것 같습니다.  비록 그 견해에 저는 전혀 동의하지는 않지만, 집사님이 그러한 견해를 가지신다는 것 자체는 존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든지 견해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신앙생활은 권위의 싸움입니다. 평생 삶속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내속에서 속사람의 권위에 순종하느냐는 권위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국가나 교회의 권위도 하나님이 허락치 않으면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권위를 인정치 않으면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의 권위는 더더욱 인정하기 힘듭니다. 교회도 질서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가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위에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권위가 있듯이 교회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가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바울선생님이 말한 내 속에서의 또다른 사람에 대한 갈등을 권위의 관점에서 보시는 것은 참 참신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서로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집사님은 국가나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셨지요?  그럼 하나 여쭈어 보겠습니다.  극단적인 예가 될 수도 있겠지만, 2차 세계대전에 히틀러의 독일도 국가이고, 국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니 무조건 순종해야 되는 것인가요?  당시의 일본제국주의 역시 국가였으니 집사님의 말씀대로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니 무조건 따라야 하는것인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에 천주교회도 어찌되었던 분명히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가 면죄부를 돈을 받고 팔았는데 그 교회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이고 그런 권위에서 나온 하나님의 명령이니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인가요?  집사님의 말씀, '국가나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 과연 언제나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게다가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는 교회에서는 섬김입니다.  남에게 명령하고 ‘내 말에 잠잠히 순종하라’ 하는 것이 권위가 아니고, 예수님처럼 낮아지셔서 죄인들을 만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권위는 세상에서 말하는 권위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상에서의 권위는 ‘무조건 잠잠하고 순종하라’ 가 통하는 사회겠지요.   그런데 세상에서도 실제로 권위가 있는 사람은 ‘내가 권위가 있으니 잠잠하라’ 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 권위가 있으면 알아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그러한데,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권위라면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요? 더 잘 알고 더 잘 고개 숙일 것입니다.  보통은 권위가 없는 사람이 억지로 권위를 주장할때 하는 말이 ‘내가 권위가 있으니 잠잠하라’ 입니다.  ‘내가 권위가 있으니 내게 순종하라’ 라는 것은 최소한 기독교의 진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권위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가장 낮아지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가장 높은 권위를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집사님이 예로 드신 바로 그 로마서 13장이 과연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해서 무조건 적으로 순종하라라는 말씀일까요?  문자적으로만 보면 그렇게 쉽게 볼수 있습니다.    저도 그 구절을 주로 이용해서 무조건적으로 귄위에 순종해야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되었습니다.  말씀을 볼때는 그 말씀의 콘텍스트를 같이 보는 것을 교회에서 훈련받아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곡해되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i] 

질서와 권위를 강조하시는 분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시는 로마서 13장을 강조하시는 분들 중에 그 배경이 되는 로마서 12장을 언급하시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간단하게만 언급하면, 로마서는 당시 로마제국에 의해 핍박받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쓴 바울의 편지입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은 이유는 로마의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을 흔드는 정치적인 반역행위였고 그래서 반역죄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마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기독인들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반역자들었습니다.  정치적인 반역의 의도가 전혀없는 순수한 신앙인들이 정치인으로 처벌받는 아이러니속에서 사도바울은 귄위에 대한 복종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복종은 무조건 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공동체는 국가에 대해서 언제나 '조건적' 으로 복종할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우상숭배나 살인(당시 로마군에 입대하는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할때, 기독인들은 그 요구에 복종할수 없습니다.  로마에 대한 반역의도가 없는 초대교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을 받을때 사도바울은 그 교회공동체들에게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나서 로마서 13장이 등장합니다.   바울사도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교회를 지속적으로 박해하던 거대한 악 (로마제국)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방법으로 '복종'의 윤리가 제시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배경을 깡그리 무시하고 로마서 13장을 대하면 그저 모든 권세와 권위는 다 하나님께로 온 것이니 무조건 순종해야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서가 쓰여진 콘텍스트를 고려한다면 과연 시대를 초월에 모든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라라는 의미가 아님을 명확하게 알게됩니다. 

그리고 집사님께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권위가 있다고 하셨는데 (물론 당연한 말이고 저도 동의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보통 부모에게 권위가 있다고 강조하시는 분들 중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라’ 라는 성경 말씀을 더불어 강조하시는 분은 거의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따르라’ 는 아닐 것입니다.

 

형제님이 지적하는 문제의식들은 현대교회들에 분명 존재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은 ㅇㅇ교회사이트 보다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기독교 사이트에 더 알맞는 내용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사이트에 올려지면 마치 우리 교회에 문제가 있는것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무는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걸고 누구나 볼수 있는 열린 공간에 올리는 글은 좀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쓰는 글들이 구체적인 실례를 들지는 않았지만,  A교회에 현재 다니고 있는 제가 느끼는 (그리고 적지 않은 우리 교인들이) 안타까움들을 나눈 것입니다.  제가 불특정 다수인 한국교회 성도 전체를 다룰 역량과 실력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그럴 위치도 아니구요.  다만 제가 이 글들을 우리 교회 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제가 다니고 있는 우리교회에 문제는 교회외부의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볼 수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를 우리교회 안에서 우리가 다루어야지 그것을 우리 교회 밖에서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집사님께서는 '교회 사이트에 올려지면 우리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요? 없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있는데 없는 척 하자라는 것인가요?

그리고 우리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이 모인 곳에 문제가 없겠습니까?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같이 열어서 논의하고 기도를 해야지, 문제가 있는데 없는 것처럼 덮는 게 과연 진정으로 교회에 덕이 되는 일일까요?  비단 저희 교회만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다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당연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모였는데 문제가 없다 라는 교회를 저는 한번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도 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는데 은혜(?)로 덮는 것이 과연 교회를 허무는 빌미가 될까요  아니면 문제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같이 고민하고 기도하는 것이 교회를 허무는 빌미가 될까요? 

 

형제님, 우리의 신앙의 진짜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변화하지 못하는 진짜문제는 몰라서 못하는것이 아닙니다. 교육이 모자라서 못하는것도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좋지않아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토론회가 없어서 못하는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고 싶어도 할수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사탄의 세력을 이길수 없습니다. 교회는 말이나 구호로서 일을 하는곳이 아닙니다. 성경은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고 하나님의 신으로만 된다고 합니다. 이런유는 기도로만 이길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문제에 대해서 말만 많이하지 정작 엎드려 기도하지 안는다는 것입니다. 

 

------>집사님, 저는 우리 신앙의 문제가 제대로 온전한 복음을 교회를 통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온전히 배우고 알면 그 이후에 고민되는 행함과 섬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고민과 함께 잘 다니는 교회는 무엇이고 어떻게 사람들과 평화롭게 같이 잘 살아갈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주의화 되어있고 기복 신앙만을 강조하는 반쪽 복음만으로 저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바꿀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하나님께 이것을 놓고 엎드려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기도는 많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앙과 믿음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은 잘 안한다고 생각합니다.  근거없는 유언비어나 수군거림은 혹시 많을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우리교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태도로 나누는 것은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말하기는 쉽습니다. 글쓰기도 쉽습니다. 남의 허물은 잘 보입니다. 인터넷 뒤져보면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현대교회의 문제점들을 쓴소리로 고발하는 좋은 글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쓴소리로 변화를 가져올까요? 친절합시다! 외친다고 친절해 질까요? 겸손합시다! 외친다고 겸손해 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교회를 위하여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명령하십니다. 구호를 외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말의 성찬에 있지 아니합니다. 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기도가 어렵고 글쓰는 것은 쉽다고 집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집사님은 글쓰기가 쉬우신가요?  저는 글쓰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쩔 때는 기도보다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면에서 글쓰기는 쉽고 기도가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집사님은 글을 쉽게 쓰시고 기도를 어렵게 하시는지 몰라도 저는 글쓰기도 어렵고 기도도 어렵습니다.  글을 쉽게 쓰시는 집사님이 솔직히 부럽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시면 글을 보고 글쓴이가 기도를 많이 하고 썼는지 적게 하고 썼는지 알 수 있는 것인지요?

그리고 남의 허물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이요, 우리의 문제입니다.  제가 문제 제기를 했다고  남의 허물을 쉽게 보아 남의 허물을 지적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저의 허물, 나아가 우리의 문제를 논한 것입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 제기는 작게는 저의 허물이요 넓혀서는 우리교회의 우리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논해야 하는 것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쓴소리가 변화를 가지오지는 않지만 변화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목회자가 세습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뜻있고 용기있는 분들의 문제제기로 이제 그 문제가 심각한 문제이고 기도해야할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세습은 일어나지만 (변화는 없지만), 이것을 문제있다 라고 인식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변화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 집사님이 저보고 ‘친절하자’, ‘겸손하자’ 구호를 외친다고 하셨는데, 집사님의 논리대로라면 지금 동일하게 집사님도 ‘기도하자’, ‘잠잠하자’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친절하고 겸손하자가 구호라면, 집사님의 기도해야한다 순종해야 한다 역시 구호겠지요?  맞습니다!  집사님 말씀대로 이렇게 구호만 외쳐서야 당연히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요? 

친절하고 겸손하자고 해서 집사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될거라고 의도도 기대도 하지 않았구요.  그런데 집사님의 말씀대로라만 기도하고 순종하라고 해서 변화가 이루어 지던가요?   설사 그렇다고 순종만을, 기도만을 강조한다고 변화가 이루어질까요?  기도를 할때 내가 하는 기도가 바른 기도인가?  바른 기도제목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한번 쯤은 진지하게 기도와 같이 같이 병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대로 보시는 것은 참 위험하신 생각이라고 봅니다.  집사님은 지금 제가 ‘기도는 안하면서 글은 쉽게 쓴다’ 라고 가정을 넘어 아주 위험한 단정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 첫글의 댓글에서도 ‘기도를 하고 글을 써라’ 라고 권유해주셨는데요, 거기에서도 동일하게 제가 ‘기도를 하지않고 글을 쓴다’ 는 아주 위험한 단정을 너무나 쉽게 하시더군요.  제가 여기에 대놓고 유치하게 ‘저 기도하고 글 썼습니다’ 라고 답변을 달아야만 집사님의 위험한 단정이 사라질 수 있을거라는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더욱 글쓰기가 저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는 힘듭니다. 왜냐 기도는 능력이기에 사탄이 우리에게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대여섯시간 앉아서 글쓰기와 한시간 엎드려서 기도하기와 어느것이 더 어려울까요? 저의 경우를 보면 기도하기가 더 힘듭니다. 사탄이 글쓰는것은 방해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러 엎드리면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왜냐? 기도에는 실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  맞습니다.  기도는 힘듭니다.  기도는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기도를 강조하고 기도를 많이한 우리 한국교회는 이렇게도 영향력이 없고 개독교라 불릴까요?  한시간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으로 부족한 것일까요?  두시간, 세시간 엎드려서 기도하면 영향력이 생기고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되는 것일까요?  혹시 잘못된 내용을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나와 내 가족만 잘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번 우리의 기도를 뒤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집사님은 글은 쉽고 기도하시가 힘들다고 하셨지요?  저는 글쓰기와 기도가 다 힘듭니다.  그리고 대여섯시간 앉아서 하는 글쓰기 자체가 기도가 될수있는다는 것을 저는 배웠습니다.  집사님은 보시기에 ‘젊고 아무것도 모르는 집사가 편하게 앉아 쓰는 글은 쉽게 쓰면서 한시간 엎드려서 하는 기도를 왜 안하나?’ 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말이고 또한 글입니다.  비록 엎드려 한시간 기도하는 것만큼의 육체적 노동은 아니지만, 저는 ‘글을 쓰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구나’ 사실을 요즘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글을 쓴다고 해서, 한시간 엎드려 기도하시는 분들을 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한시간 기도하는 분들은 그만큼 더 겸손하고 더 상대방을 존중하시는 분들 이실거라고 믿습니다.  한시간 엎드려 기도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쉽게 남을 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탄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처럼, 글 쓰는 것을 명백히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글은 역사와 시대를 바꾸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글쓰는 것이 쉽게 느껴지시는 집사님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저는 칼보다 펜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의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서는 글로 남아진 성경이면서 글입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쓰러져가는 천주교회를 향해 종교개혁의 시초를 알린 역사를 바꾼 글이었습니다.   저는 루터가 그렇게 쉽게 글을 썼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단은 글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지우려고 방해할 것입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모습은 교회를 위하여 문제제기를 하는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모습을 집사님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고, 기도해야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저는 저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모습은 우리의 문제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우리안에 많은 다른 믿음의 생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집사님의 말씀대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저도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얼마나 어떻게 기도했냐에 관심이 있지, 다른 사람이 기도를 많이 했는지 적게 했는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주로 보이게 기도하고, 기도를 오래하는) 바리새인에게 왜 '독사의 자식들!' 이라는 표현을 쓰셨을까요?   ‘기도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하셨을까요?  ‘기도만 통해서만’ 은 무엇가 부족한 것이 있을거라는 생각은 안해보셨는지요?  단순히 ‘기도해야 한다’ 라는 구호보다는 ‘무엇을’ ‘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같이 고민하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단순히 ‘기도많이 해라’ 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기도제목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집사님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합니다.  집사님의 생각이 다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다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울러 제 생각 역시 다 틀리거나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온 모습과 배경이 다르고 만난 하나님의 속성이 조금씩 다르니, 당연히 생각과 믿음의 색깔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되는 것, 그것이 저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이고 그리스도안의 공동체의 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과 의견이 다른 데 어떻게 연합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교회가 하나되고 연합되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입니다.  본질적인 복음에 동의한다면, 비본질적인 요소에 자유함을 구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속할 수도 없구요. 

손을 들어 기도하고, 때를 정해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절기를 지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왜 예수님은 불같이 화를 내시며 '뱀과 독사의 새끼들!' 이라고 하시고,  당시 민족의 반역자였던 세리가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나는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한 세리가 더 의롭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훨씬 더 기도를 많이 했을 텐데요...   미루어 보건대, 엎드려 한시간 이상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됨'과 마찬가지로 진리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치열한 고민과 사색과 생각에서의 영적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이 또한 저희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이야기하고 논하는 것이 언제나 틀린 것일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아래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였을 때...  모두 겸손히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 하나되고 연합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로 연합된다는 것이 하나의 목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이 글을 통해 몇몇 부분에서는 집사님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거나 이해가 안간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생각을 집사님께 강요하지 않습니다.  집사님의 살아오신 배경과 신앙에 따른 신념과 믿음을, 비록 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그 자체로 존중합니다.  중요한 것은 집사님과 제가 생각이 다르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각과 신앙색깔의 다름을 하나로 묶어주실 수 있으신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면 될 것입니다. 서로의 다른 색깔을 인정하고 그 자체로 정직하게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함께 잘 다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더, 제가 좋아하는 리처드 벡스터의 개혁된 목사의 글을 인용해 볼까 합니다.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in necessariis unitas,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in non-necessariis libertas,

모든 것에는 사랑을. in utrisque caritas.

-리처드 벡스터의 개혁된 목사(The Reformed Pastor, 1656)-

 

제 글에 용기있게 응답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런 계기로 우리가 서로 또 배우게 되고 더 겸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은폐하고 회피하는 것보다 열어 논하고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집사님께서 진지하게 의견을 말씀해주시고 이에 같이 열린공간에서 오픈해서 논의하는 것이, 보다 진리로 한걸음 나아가기 위한 우리 A 교회의 작은 노력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제 답글에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늘 제가 인격과 믿음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A집사님같은 분들의 좋은 말씀을 듣기 원하고 또 같이 논의하고 기도하면 더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된 남상곤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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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로마서 13장에 대한 설명은 김두식 교수의 글을 부연설명한 부분입니다.  김두식 변호사의 이 부분에 대한 원글은 “한국교회, 진보와 보수 어디까지 왔나 (상)”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02

posted by paulusn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