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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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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24. 13:37 비만과 건강
비만과 건강 (3) 뚱뚱하고 싶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지난 회에 저는 저의 억울함에 대해서 호소했습니다만...  저의 억울함이 다 풀어지지 않아서 조금 더 호소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어렸을때부터 우량아였고 (무신 우량아 대회 상도 받았다고 합니다... 쿨럭!) 언제나 늘 푸짐하고 듬직한 체구와 몸매를 자랑해 왔습니다.  늘 한결같음은 저의 자랑이자 소신이었지요.

물론 군대에서, 결혼하기 전등의 몇몇 중요한 때에 몸무게가 상당히 많이 줄어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결코 눈이 작지 않음을 그때 처음 알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나 언제나 저는 2-3개월 안에 본래의 몸무게로 쥐도새도 모르게 돌아오곤 했었고, 늘 한결같은 모양과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저를 보시는 분들은 저보고 '하나도 안변했다' 는 둥의 말씀을 하십니다. 

근데 여기서 꼭 고백하고 싶은 것은, 비록 제가 한결같이 푸짐한 몸매로 나름 제 평생을 살아왔지만, 단 한순간도 제 몸매에 만족하거나 다이어트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2그릇째를 먹는 도중에도 속으로는 '내일부터 다시 하면 되겠지?' 하면서 늘 마음 속을 다 잡습니다.  저는 늘 새로운 모습의 저를 꿈꿉니다.  저도 칼캍은 턱선 한번 가지고 살아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저와 같은 푸짐한 분들의 마음 역시 저와 거의 동일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구도 뚱뚱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다 살을 빼고 날씬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즉, 살이 찌고 몸무게가 많은 것이 '자발적'이거나 '원해서' 그런 것이 절대 그리고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예를 들기 위해 제가 흔히 2가지의 비유를 들곤 하는데 그것은 공부(성적)과 키입니다.  학창시절, 누구나 공부를 잘 하고 싶어하고 좋은 등수와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을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머리가 좋고 나쁠 수도 있고, 시험 당일 날 기가막히게 운이 좀 더 좋았을 수도 있고, 현 수능이나 학력고사 체제에 좀 더 능력을 잘 발휘 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공부를 못하려고 하거나 성적을 일부로 낮게 받거나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이 안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흐흑! 다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가고 싶어하지만 다 그렇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키 크고 싶어합니다만 다 키가 크지 않습니다.  아니 키가 크지 않더라도 보통키라도 되고 싶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보통 키가 큰 집안에서 키가 큰 사람들이 많은 경우가 많지만...가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다 보통 혹은 보통 이상의 키가 크기를 바라지만...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누구는 곰국이나 우유를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잠을 많이 자야고 합니다.  근데 우유 하나도 안먹고 180인 사람도 있고, 우유에 밥말아먹고 살았어도 평균키가 안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 못했다고 키가 작다고 손가락질 하지 않습니다.  공부 못하고 성적않좋다고 하더라도 손가락질 하면 저는 그 사람이랑친하게 안 지낼 것입니다.  --;; 마찬가지로 키가 작다고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몇년전에 루저파동으로 나라가 뒤집어 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살찐 사람, 몸무게 많이 나가는 사람, 뚱뚱한 사람에 대해서는 알게 모르게 손가락질 합니다.  물론 안하는 사람도 많습니다만...  저같이 정말 눈치없고 둔감한 사람도 어느정도 그 손가락질과 시선을 느낀 적이 많습니다.  한국이 제일 심할 거라 생각합니다. 

저 정말 한번도 뚱뚱하고 싶은 적 없었고, 늘 날씬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결코 제가 적게 먹지는 않습니다. --;;   그렇지만 나름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근데 왜 저에게 돌을 던지시나요?  저도 칼같은 턱선으로 분위기있게 고개한번 돌려보고 싶습니다. 

왜 뚱뚱한 사람은 자기 조절을 잘 못하고 절제를 못한 사람으로 취급받거나 여겨지게 되는 경우가 흔할 까요? 우리는 무슨 조절력이 부족하고 자기통제가 안되어서 뚱뚱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문제의 핵심에 Nature (genes) VS. Nurture (environment)의 문제가 있습니다.


2012.01.23
 
posted by paulusnam
2012. 1. 24. 12:24 비만과 건강
비만과 건강 (2) 많이 먹으면 살이찌고 적게 먹으면 살이 안찌나요?


자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드려봅니다.  이른바, 이런 말들을 흔히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재는 먹어도 살이 않쪄?"

"재는 물만 먹어도 살이 쪄."

이 말에 어느정도 수긍하고 동의하시나요?  


저는 두살 아래 남동생이 있습니다. 키는 저보다 아주 조금 작지만 몸무게는 저보다 무척 적습니다. 이른바 흔히 제 남동생은 '정상'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근데 전 조금 억울합니다. 제 남동생은 저보다 훨씬 더 많이 먹고, 더 술도 많이 드십니다. --;;  근데 왜 저는 좀 아담하고(?), 왜 동생은 '정상'인 것인가요?

저에게 비수를 찌르는 말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숨겨놓고 먹는게 있으신 거 아니어요?" 
"동생분이 운동을 더 많이 하는 거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잘 생각해 보시면 동생분 보다 많이 드시는 걸 꺼여요."

자...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제 동생, 정말 저보다 많이 먹습니다. 진짜 잘먹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훨씬 날씬합니다.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저의 억울함에 결정타를 날리는 사람은 몇몇 의사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살이 찌는 원리는 간단합니다.  들어오는 칼로리보다, 소모되는 칼로리가 적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적게 드시고 (칼로리를 적게 섭취하시고), 많이 운동하십시오 (칼로리 소모를 많이 하십시오)."

아! 정말 수능수석한 수험생이 교과서를 중심으로 예습, 복습을 충실히 했다는 소감문과 무엇이 다릅니까? 누가 모릅니까?  근데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정말 저는 제 동생보다 많이 먹고 적게 운동해서 아담한 것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12.01.23
 
posted by paulusnam
2012. 1. 24. 12:12 비만과 건강
비만과 건강 (1) : 당신의 BMI는?

흔히 비만은 BMI (Body Mass Index)라는 것으로 측정합니다. 단위는 kg/m2 이니, 한마디로 몸무게를 부피로 나눈 값이지요.  즉, 분자인 몸무게가 크면 BMI가 높고, 분모인 키(부피)가 크면 BMI가 작아지는 것이라고 초단순화 시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글 제일 아래의 링크는 자신의 BMI 측정해 볼 수 사이트 입니다. 그 사이트에서 자신의 키와 몸무게를 넣어보시면 자신의 BMI를 알 수 있습니다. 

Underweight = <18.5
Normal weight = 18.5–24.9
Overweight = 25–29.9
Obesity = BMI of 30 or greater

그럼 자신의 BMI를 확인해 보셨습니까?  어디에 속하십니까? 저는 비밀입니다.  --;;

이 BMI 는 18.5-25일때 이른바 정상 이라고 하며 그 이상이면 과체중, 30이상이면 비만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상범위가 아닌 저체중, 과체중, 그리고 비만의 카테고리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면 여러가지 각종 질병의 위험이 높고, 건강이 위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뭐 비만이 여러가지 성인병들의 위험적 요소라는 것은 굳히 반복할 필요는 없겠지요.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제가 공부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대략 34프로가 비만이라고 합니다. (http://www.cdc.gov/obesity/data/trends.html) 

즉 약 삼분의 일이 과체중도 아닌 비만이라는 것이고 아마 과체중까지 합하면 전체인구의 70프로가 넘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BMI 18.5-25 라는 범위를 정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니라 18.5-25 정도로 정상을 해야 하지는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길게 쓰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인종적 비교가 늘 중요한 미국에서는 건강자료도늘 인종별로 나누곤 하는데요... 이 BMI별로 인종적 차이를 한번 보고 마치겠습니다. 

흑인의 약 45프로 정도가 비만, 히스패닉은 약 40프로, 백인은 약 33프로가 비만이라고 합니다 (아시안은 물론 훨씬 적습니다.)
(http://www.cdc.gov/obesity/data/adult.html)

http://www.nhlbisupport.com/bmi/bmi-m.htm


2012.01.23

 
posted by paulusnam
2012. 1. 24. 12:10 비만과 건강
비만과 건강 (프롤로그)

제 연구분야는 비만입니다.  어떤 분은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오늘부터 비정기적으로 제 연구분야에 대한 저의 검증되지 않은 생각들을 한번 시리즈로 올려보고 싶습니다. 뭐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많은 분들의 창조적인 피드백을 받아보고...  제 생각을 좀 더 다듬어 보고자하는데 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에게 조금 유익(?)한 정보를 드리기도 하는 것도 있구요. 장기적으로는 이 생각들을 중심으로 책을 한번 써보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씨리즈물이 자주 올라오지 않으면 제가 열심히 논문을 잘 쓰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201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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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함께 잘 다니는 교회 (4) 강남 복음주의자


                                                                                                                                                                                                                                                  April 30, 2011 남상곤

 

 

 

 

 

들어가며

 

지난번 꼭지인 막장의 사람들에 대한 호응이 예상외로 뜨거워서 놀랐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염려와 걱정을 해주셨고,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라는 질문도 많이 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본문보다 별책부록이 더 주목을 받았나 봅니다.  결론적으로 그 글의 주제는 특정 막장의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막장의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어야 할까? 하는 저의 개인적인 고민을 나누었었습니다.  나중에 특정 막장의 사람에 대한 일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눌 기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중이고, 제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최선의 해답이 아닐 수도 있기에 많은 주변의 분들의 생각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많은 위로와 격려해주신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강남 좌파


최근 강남 좌파라는 말이 세간에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하게 언급하기에 아직 무엇이다 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제가 이해한 바로는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남에 살고있는 (현재에 어느정도 경제적인 기반을 가지고 성공한) 지식인들을 일컫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 ‘강남좌파라는 단어가 전통적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데, 이 단어가 명칭되는 사회적 실체가 분명한 상황이기에 더욱 주목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이 조어는 세분화 되어, ‘분당 우파등으로 파생되기도 하고 아직 완성된 조어는 아닙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두 단어가 전통적으로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데, 요즘 같이 붙어서 쓰이는 새로운 용어 라고는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남 복음주의자

 

이 신조어가 만들어져서 유통되기 전부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강남의 대형교회들을 다니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강남 복음주의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서투른 조어같지만, 과연 강남의 성공한몇몇 대형교회에 다니는 복음주의자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하여, 강남 복음주의자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 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으로 조금씩 확장되었었습니다.   물론 복음주의자에 대한 정의도 쉽지 않은 데, ‘강남 복음주의자라는 말은 강남 좌파의 조어와 마찬가지로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인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반드시지역적으로 강남을 호칭하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이른바 중산층 이상 교양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대형교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러한 대형교회들이 주로 강남에 많이 있기는 합니다.  

 

 

 

 

요즘 우리 강남에서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처음 사람을 만나게 되면, 조금씩 서로를 소개하는 대화로, “한국서 어디에서 사셨어요?”  혹은 한국에서 어느 교회에 다니다가 오셨어요?” 하는 질문을 흔히 들었습니다.  저는 저의 아버님이 개척목회를 하시는 조그마한 교회를 다니다 왔다고 말하고, 제가 결혼하고 신혼생활을 하던 진짜 강남(? 금천구) 혹은 용인(본가)에서 왔다고 답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그 질문을 했던 분들이 저에게 경계감을 쉽게 푸시곤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지방에 있는 대학을 나온 것 까지 아시면, 갑자기 말투까지 놓으시는 경우까지 있어 좀 당황스러웠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에피소드는 2년전 즈음에 있었습니다.  미주의 한 한인교회에서 만났던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그 목사님께서 자신이 강남에서 부목회를 하다가 왔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셨던 것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강남의 한 건실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재직을 했지만 그것을 내려놓고 지금 이곳에서 목회하시는 것을 내려놓음처럼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은근히 다시 강남에 가서 목회하시는 비전을 비추시기도 하셨습니다.  대화가 조금 진행되다가 그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우리 강남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에 눈치가 없던 저는 ! 강남이라는 곳에서 살고, 교회를 다니고, 목회를 하는 것이 이 정도로 자랑 할 만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모님께서는 강남에서는 지금 무엇이 유행이고, 어떠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세한 나눔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 목사님과 사모님이 강남에서 사시면서 부목회를 하셨던 기간이 2-3년정도라고 들었습니다.  도대체 강남이 무엇이기에 2-3년의 거주기간이 우리 강남이 되는지 참 신기했습니다.    

 

 

강남 대형교회에서는?

 

강남의 대형교회들의 특징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쉽지않는 일일 것입니다 어리석지만 거칠게 묶어보면,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보통 교회의 설교나 행사 등이 강남의 중산층 들에게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강남에서 산다는 것은, 어느정도 경제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하기에, 교회에서는 삶을 살아가면서의 성공적인 처세술 등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주로 제시하고, 현재의 삶을 어떻게 잘 유지하면서 균형된 크리스챤으로의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설교를 통해서 강조한다고 합니다.   

 

교회내의 구성원들에게 설교나 교회의 관심이 당연히 집중될 수 밖에 없기에,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그 강남 중산층의 현재의 삶을 대변해주고, 또 유지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중산층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좁은 길을, 나눔의 길을, 그리고 낮아지는 길과는 반대의 길을 가야한다는 복음과는 양립하기 쉽지 않은 것 처럼 보입니다. 강남의 대형교회에서 가난한 사람, 장애우, 소외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어느정도 비슷한 평수에, 비슷한 규모의 연봉과 자가용이 맞추어져야  구역모임에서도 말이 통할 수 있고, 증권과 파생상품등의 관심사도 어느정도 비슷해야, 비슷한 모양의 신앙생활을 유지할수 있다고 합니다.  강남에 살지만, 주변과 비슷하지 않은 배경의 친구가 강남의 대형교회생활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도 생활수준과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만이 다닐 수 있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게 되었었습니다. 

 

교회안은 흡사 잘 꾸며진 대기업 건물을 들어온 것 같습니다.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깔끔하고 잘 생기셨으며 다들 박사에 교수들 이십니다.  설교는 세련된 어조와 적절한 비유,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감동까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카페와 서점, 카페테리아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고, 점심은 쿠폰을 사서 먹습니다.  화장실 남자 소변기 바닥에는 얼음덩어리들이 있습니다.  (이거 왜 두는 건가요?  --;; ) 들리는 말로는 이 화장실을 꾸미는 비용이면 시골의 개척교회 10곳을 후원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모든 공간은 사전 일주일전에 예약을 해야하고, 자신이 봉사하는 영역을 제외하고는 같은 교회의 사람들이지만 서로 모릅니다.  예배를 마치면 빨리 차를 빼러 나가야 합니다.  조금 지체했다가는 주차난 때문에 나가는 데만 한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모두들 깔끔한 옷차림에 웃는 얼굴에 다들 세련되고 멌있습니다.  매주 새로운 사람이 몇십명도 넘지만 매주 안나오는 사람도 그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강남 중산층이면 문제가 있나요?

 

아니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강남에서 살고, 강남에 있는 대형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복음주의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강남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문제가 있습니까?  세련되고 갈끔한 신앙생활, 교회생활 하는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강남에 살면 안되나요?  일부로 이사라도 가야하는 건가요?  아니면 교회를 일부러 강북으로 다녀야 하나요?  대형교회를 다니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겁니까?”

 

제 대답은 아닙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입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합니다.  교회다니는 사람이 돈 많이 버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되면 신앙생활 하는데 문제가 생깁니까?  내가 내 능력껏 열심히 일해서 받는 월급의 액수가 많다고 문제가 되나요?  일부러 회사에 이야기해서 월급을 적게 달라고 해야 합니까?  어떤 목사님도 이야기 합니다. “내가 설교를 잘하고 책을 잘 써서 교회로부터 많은 월급과 인세를 받습니다.  그만큼 노력하고 기도하고 준비해서 설교하고 목회하는데, 성도가 3천명, 3만명인데그 정도 액수 받는 것이 문제라도 됩니까?”

 

제 대답은 아닙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입니다.

 

 

나는 강남에 살고, 강남의 대형교회에 다닙니다.  아이패드도 있고, 아이폰도 씁니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교외에 나들이도 가기도 하고, 차도 두대나 굴리고 있습니다.  교양있는 지식을 가지려고 최근에는 샌델의 정의도 읽고 보았고,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꾸준히 시사와 경제지식을 챙깁니다.  하고싶은 것, 갖고 싶은것을 마음대로 할수는 없지만 저축하면서 가끔은 지르기도 합니다.  노후를 위한 재테크에도 관심이 많고 워렌버핏 처럼 가치주에 장기투자하는 것에 관심도 있습니다.  현재 제일 잘 나가는 신앙서적도 놓치지않고 읽고 있으며, 컴패션과 월드비전 후원도 매달 하고 있고, 석달에 한번씩 고아원과 양로원에 봉사도 갑니다.  제가 문제가 있나요?

 

 

제 대답은 아닙니다.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입니다.

 

 

 


저도 한때

 

저는 강남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강남 재건축의 상징인 은마아파트에서 유치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 20년 가까이 살았었고, 그곳에서 초중고를 졸업했습니다.  강남에서 계속 교회생활을 했으며, 아버님이 뒤늦게 목회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지역적으로는 강남이 아니지만 심정적으로는 강남의 대형교회에 나름 열심히 다니기도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때의 대치동은 지금의 대치동과는 많이 다릅니다.  저는 양재천으로 친구들과 올챙이와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있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은마아파트 놀이터에서 형들을 쫓아다니며 박쥐를 보고 도망쳤던 기억, 야구하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님이 조기정년을 하시고 강남을 떠나 용인 양지로 이사가게 된 뒤로, 강남은 더 이상 제 삶의 터전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우연히 가보게 된 대치동은 학원간판이 즐비하고, 초고층 아파트들이 새로 들어선 조금은 낯선 동네가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유난히 ‘8학군이라 하여 교육열이 높은 동네이기는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삼수와 사수 생활을 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강남을 벗어나 노량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노량진은 한강 이남에 있는 지역이지만 당시 강남구를 제외하고는 강남이라고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강남구를 제외하고는 다 강북이라고 여겨지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새로 접하게 된 노량진에서의 생활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저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는 동네이기도 했고, 그곳은 언제나 흥미진진했습니다.  물론 각종 고시와 입시로 인한 수험생들의 어두음이 짙게 내리깔린 동네이기도 했지만 저는 그 수많은 노점상들과 만화방과 오락실, 활기찬 육교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한때 속상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노량진에 와서 수많은 입시생, 고시생들을 바라보면서 힘을 얻어가기도 했었습니다. ^^

 

하지만 그 이후, 저는 직감적으로 제 평생 다시는 강남에 들어와 살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이유는 별것 없습니다.  강남에서 살수있는 아파트 전세값을 마련할 경제적 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

 

 

 

 

아닙니다 그런데 미안합니다

 

 

서론만 길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강남 좌파의 아이콘으로 많이 언급되는 서울대학교 법대의 조국교수의 페이스북의 한 글귀가 기억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강남 좌파라는 딱지를 굳이 피하지 않겠다라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강남 좌파가 그리 뭐 자랑스럽거나 부끄러운 것도 아닌 것이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저도 조국 교수의 말에 동의합니다.  강남 좌파라고 해서 좌파가 아닌 것도 아니고, 좌파면서 강남에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때 강남에 살았기에 강남 복음주의자였던 저는 제가 강남에서 살면서 복음주의자로 자처했던 것이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그래서 요새는 제가 강남에 살았다고 하거나 고등학교를 어디 나왔다고 잘 말하지 않는 편입니다.   "누구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것이냐?" 라고 물으신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냥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저도 이성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제 과거를 부끄러워 하거나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처럼 감추고 싶습니다.  (경제적으로 다시 강남에 살수도 없겠지만,) 경제적으로 강남에 살 수 있게 되더라도 강남에는 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가지 드는 분명한 생각은

저를 통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아직 정리되지 못한 일개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 때문에 혹시라도 강남에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것이 있다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 개인의 적용과 고민이었습니다.

 

 

 

 

 

읽어볼만한 강남 좌파에 대한 글

 

강남 좌파, 그들은 누구인가? (김호기)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10414144447

 

다가오는 자유주의의 시대  (안병진)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1896.html

 

강남 좌파가 밀려온다 (신기주)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9447

 

강남 좌파 감별법 (최희진 모음)

http://media.khan.kr/789

 

강남 좌파세상 밖으로 걸어나오다 (김은남·고재)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951

 

 

posted by paulusnam

다시함께 잘 다니는 교회 (3) “막장의 사람들”

                                                                                              March 3, 2011 남상곤

 

 

들어가며

교회안의 88만원 세대의 두번째 꼭지의 부교역자에 대한 글은 좀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직 첫꼭지의 평신도 사역자에대한 피드백에 대한 제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글을 쉽게 잘 쓰지 못하는 저로써는 아직 부교역자에 대한 사례가 아직 충분히 조사되지 않았기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준비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졸업한 모교에서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 터져서 2월, 한달동안 여러가지를 고민하고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래서 오랜시간동안 고민하고 기도해왔던 “막장의 사람들”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저는 남의 사람들의 뒷담화를 잘 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를 불편해하고, 또 그런 이야기가 나와도 쉬이 잘 믿는 편도 아닙니다.  그런 제가 몇몇의 교회안의 막장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공개적으로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들에 대한 저의 솔직한 고민이자 기도입니다.  이것을 이번에 나누고 싶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 중에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 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보통 ‘원수’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기에 어쩌면 이 말씀은 그리 큰 깊이를 가지고 다가오지 않을 수 있지만, 세상의 비정함을 겪어 본 사람들은 (원수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이 말씀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말씀인지 알고있습니다.  상대방으로 인해서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리거나, 인격적인 살인을 당하거나, 그들에게 가족이 협박을 당하게 되는 일을 당해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일관되게 ‘원수를 사랑하라’ 라고 하시고, 주기도문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면, 그 어떤 죄를 우리에게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지만, 그것이 과연그렇게 쉽게 할수 있는 일일까요?  정말 막장인 사람들을 만나보고 당해보면, 그말씀은 예수님이시기에 하실 수 있는 말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만 들게 됩니다.  

 

 

 

그들을 만나다

저는 미국에 오기 전까지, 한국에서다녔던 교회들은 하나같이 다 좋은 곳이었고, 좋은 분들을 만났고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왔었던 것 같습니다.  제 안해와 친구들은 저보고 좋은 교회만 다녀와서 너무 교회와 세상을 모른다고 이야기 하곤 했었습니다.  그것은 참 내 자신이 신앙의 여정을 걸어오는 데 큰 자산이었고 좋은 기억이지만, 세상의 실상을 아는 것에 있어서 제한적인 이해만 가지게 되었었습니다.  즉 ‘모든 교회와 모든 교회 사람들은 선하고 착하다’ 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지금까지 생각지도 아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막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막장의 사람인 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피하나,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도 그들이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 이말에 이해하는 분들의 마음을 제가 압니다 ^^;;)

 

 

 

돈과 섹스

지금은 거의 소설가라기 보다는 정치인으로 기억되는 이문열의 초기작 중에 하나이자 표절문제로 얼룩진 ‘사람의 아들’의 초반부에  보면, 살인사건을 두고 수사를 시작하는 남경사가 보통 범죄는 돈과 여자 때문에 일어난다고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은 잘 안나지만, 만약 어떤 범죄가 이 두 가지의 중의 하나로 벌어지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거의 수사가 미제로 남게된다고 하면서  이 살인사건 수사의 어려움을 이야기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로 소설에서의 살인사건은 돈과 여자와 관련된 문제라기 보다는 신과 신을 찾는 사람들인 민용섭과 조동팔, 아하스 페르츠에 대한 이야기였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제가 만났던 교회에서의 막장의 사람들도 이 남경사의 이야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만났던 교회에서의 막장의 사람들은 나이가 어린 사람도 있고, 많은 사람도 있고, 평신도도 있고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관통하는 한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돈과 여자’ 였습니다.   막장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두가지의 문제에 최소 한가지는 반드시 걸렸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에서 양심을 팔거나, 성적인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등지고 어둠속의 일들을 저지리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아니면 두 가지 모두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이 두가지의 문제에 걸리지 않은 것 같이 보여도, 실상 속을 들여다 보면 이 두가지의 문제가 늘 이 막장의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 두가지의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씁쓸한 것은 그 막장의 사람들을 교회에서 나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 두가지의 문제가 아니라면 막장까지는 아니었을텐데… 신앙과 영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으면 막장까지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세가지의 질문과 고민

저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세가지의 질문입니다.  첫번째로, 과연 내가 그들을 막장이라고 부를 만한 떳떳한 사람인가?  두번째로,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할수 있는가?  세번째로 그렇게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저의 고민이 이 꼭지의 핵심입니다. 

우선 첫번째의 물음에 대해서는 제 스스로 그렇게 떳떳하고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은 충분히 막장이라고 부를만 하다 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결론입니다.  이것에 대해 저에게 ‘교만하다’ 혹은 ‘아직 인격적인 성숙이 덜 되었다’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제가 그냥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뒷부분에 조금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그 분들은 막장이라고 충분히 불릴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제가 지는 것이겠지요.  제가 아직 부족한 탓일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과 내가 하나님앞에서는 ‘오십보 백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들과 내가 오십보의 차이가 있더라도 절대적인 선과 정의의 하나님앞에서면 그 차이는 거의 제로에 가깝게 됩니다.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하라고 하시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저를 용서해 주신 것 처럼, 그들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이것이 제가 아직 고민하고 있는 접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들과 저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그러나 부족하고 모자란 저로서는 아직 그 오십보 때문에 무척이나 괴롭습니다.

두번째에 질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또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돌아볼때, 나도 그들을 용서하고 용납하고 사랑하고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됩니까?  물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때는 일시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때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의식적으로 품으려는 결단을 매일 매일 해야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상대를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기본적인 예의와 상식이 없는 것을 넘어서, 파렴치하고 무례한 그들을 보면서 매일매일 저는 시험에 듭니다.  제가 아직 부족한 탓이겠지요?  하지만 역시 풀리지 않은 문제입니다.  저는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없습니다.  솔직한 제 고백입니다.

세번째 질문에 대한 고민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고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저의 잠정적인 결론은 그냥 피하는 것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무섭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합니다.  거의 모든 말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서 삼자대면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삼자가 대면해도 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모든 것이 거짓이니 기본적인 공통된 가정 자체가 없어집니다.  대화 자제가 진행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 분들은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하를 보게되는’ 분들입니다.  예를 들어 그분과 제가 말싸움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가 내 생각은 이렇고 논거는 이렇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보통 상대방은 거기에 대한 반론과 그 근거를 대겠지요.  그러나 그 분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저의 집에 와서 방화를 하고 가는 식입니다.  이런 분들은 정말 예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상궃어서 별로 어디가서 겁을 느껴보지 못한 저로서는, 이분들 앞에서는 정말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을 합니다.  상대할 만한 가치가 없기에 피하기도 하지만, 무서워서 피하는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 다름의 문제이겠지만

톰 라이트라는 신학자가 그의 책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에서 "선과 악의 경계선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 있지 않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은 우리 모두의 가슴을 관통한다" 라는 솔제니친의 말을 인용했던 것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막장의 사람들은 악하고 저는 선한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러한 사정없이 무책임하게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해라 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인간적인 연약함을 느끼며 하루하루 십자가앞에 나가야 함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여전히 무섭습니다.  나는 그들이 무섭습니다.  정말 인간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금도 듭니다.  가슴이 콩딱콩딱 뜁니다.  그들에게 한마디를 하면 그들은 저의 이야기를 백마디 왜곡되어 퍼트립니다.  기본적인 상식과 예의가 없는 상황에서 파렴치함과 무례함 그리고 거짓말과 왜곡으로 당당하게 서있는 그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정치인이 된다면, 무엇보다 유치원을 의무교육으로 시킬 것입니다.   -

 

 

 


-별책 부록편-

이부분을 쓰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우선 그 분에게 해가 가지않고 또 그분이 누구인지 모를 것이기에 구체적으로 사례를 나누것이 글의 이해를 돕기에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생각이 부족했다면 이 부분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언 주십시오.

두세분의 막장의 최고봉이 생각나지만 그분 중에서도 최고를 논해야 될 것 같습니다.

  

  

상식과 예의가 없는 파렴치한 파렴치한…너무도 파렴치한…

이 막장의 사람들은 보통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치원에서 다 배웠어야 할 ‘상식’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식이 없으니 자신이 왜 욕을 먹는지 모릅니다.   그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이 괜찮으면 그것으로 다 괜찮은 것입니다.  이 분들 중에 최고봉에 이른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분의 이야기를 조금 나누어 보겠습니다.  편의상 이분을 A라고 하겠습니다.

처음 만났을때, A 부부는 눈치가 좀 심하게 없다라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의 모임을 할때, 자신에게 할당 된 일들을 너무나 무책임 하게 하지않고 경우에 맞지않은 예의가 없는 말을 많이 하기에 뭐 그런가 보다 싶었습니다. 

머리가 이가 난 자신의 아이를 구역모임에 버젓이 데리고 나와서 사람들을 경악시켰고, 아이들은 씻기지 않아 냄새가 났지만 전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은 모임에서 다른 아이들을 때리고 괴롭히는데도, 자신의 아이들도 그렇게 하면서 자랐다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기에 다른 아이에게 피해를 줄때 엄하게 혼을 내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 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츰 이 분이 단순히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습니다.  우선 어디에선가 출처가 모호한 신앙에 대한 간증과 글들을 마치 자신의 경험담인 것 처럼 자랑스럽게 나누는 것을 보고 고개가 갸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S교회의 J목사였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A는 교회에서 직분을 통해 돈을 버는 것에 혈안이 되었지만 그 직분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워했습니다.  게다가 직분을 이용해서 자신이 교회의 예산을 전용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나갔고, 그래서 건성으로 대충대충 그 직분을 하면서도 이미 거기서 부터 들어오는 A의 수입은 이제 그 직분을 멈추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수입을 통해서 쇼핑을 한 것을 자랑거리 처럼 내놓는 것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A에게 그것을 말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직분을 이용해서 예산의 전용하여 이익을 챙겼지만 그 일에 대한 능력이 없고 책임감이 없으니 차츰 많은 교회 사람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내고,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목사와 장로에게 거짓증거 들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목사에 눈에 드는 것이 신앙생활에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A는 다행히 자신과 비슷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목사에게 충성을 다짐합니다.  목사는 A를 잘 파악하고 적절히 조종을 하기도 하면서 A를 충분히 활용합니다.  그러면서 암묵적인 보상을 약속합니다.  1-2년 뒤에는 안수집사를 파격적으로 제시하겠다고.  그래서 A는 더욱 목을 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존경받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인 A는 안수집사가 되면 그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날이었습니다.  나보다 연배가 약간 위인 A는 자신이 나이를 먹었으니 자신이 더 많이 안다면서 나에게 충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동생같아서 그렇다를 수십번 반복하면서 자기가 관심과 애정이 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니 닥치고 가만이 있어라 의 이야기 였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엄하고 감정표현이 없는 부모님 밑에서 심한 상처를 받고 자라난 A는 자신의 동생에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해서 동생과의 사이가 좋지 못할 뿐더러, 그 상처를 그대로 자신의 아이에게 쏟아붇고 있어서 옆에서 지켜보는 몇몇 교회분들이 심한 걱정을 많은 상태였었습니다. 

A는 어느날 교회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저의 뒷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목사의사주로 시작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스스로 충성된 모습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미니홈피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저를 조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제가 가입한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제 글들이나 행적들을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제 글들과 제 글들에 대한 다른 분들의 댓글등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그것을 교회에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면서 저를 이단으로 몰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글들을 자신이 교묘히 편집을 해 놓고 자신이 이메일을 보냈으면서 자신도 이러한 이메일을 받았으니 나누겠다고 하는 이중인격의 최고봉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 메일을 우연히 받은 한 분은 이런 사람이 교회에 있다는 것에 정말 충격을 받아서 자신이 직접 교회에 공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겠다고 했지만 제가 말렸던 기억이 납니다.

A는 그렇게 제 뒷조사를 하다가 제 개인(가족)클럽을 존재여부를 알게됩니다. 참 신촐귀몰한 분입니다.  그러더니 어느날 저에게 와서 너무나도 당당하게 그 클럽에 자신의 가입시켜 달라고 요구합니다.  제 안해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만든 그 클럽은 아주 극소수의 저희 부부를 잘 아는 분들이 회원으로 되어있고, 거기에 저희의 연애시절의 추억부터 지금까지의 사진과 글을 보관해 온 개인클럽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밀클럽으로 되어있어 검색을 해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개인클럽에 자신이 생각하는 무슨 월척(?)이 있을지도 모르는 A는 그의 부인을 대동하여 자신이 같은 교회에서의 지체이니 당연히 자신도 가입을 시켜달라고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간은 최근 4-5년은 새로 멤버를 받은 적도 없고, 저희 가정의 비밀적인 내용을 나누어도 기도를 해주실 분만 멤버로 되어있는 곳인데… 그곳에 너무나도 당당하게 가입시켜 달라고 우기면서, 무엇인가 켕기는(?) 것이 있으니 오픈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너무 어이가 없는 저는 개인의 사적인 공간의 오픈여부를 강요받는 것에 대해서 어디서 이야기를 해야할지 말 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자신들도 교회의 가족이 아니냐고 가입을 시켜서 투명하게 공개하라라고 너무다도 담대하게(?) 외치는 A부부의 모습에서 저는 그 부부가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것을 확신한채 어디서부터 상식강의를 해야할지 정말이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A는 저를 불러내어 자신이 저에 대한 안좋은 이메일을 받았는데 (자신이 보내놓고 자신이 받았다고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정말 아연실색했습니다), 교회를 나가야 하지 않겠냐고?  어떻게 교회를 다니겠냐고? 은근히 협박을 하시더군요.

그분의 메일에서 몇몇 내용을 직접 인용을 해보겠습니다.

“여기 오기전 메일을 안보신 것 같습니다. 카페를 처음 입구에서 막았네요. 아마도 10분 이상 글쎄 이글들을 읽고 이메일로 더 많은 분들이 돌리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겁니다.  원래 글 내용에서 예기하신 대로 좋은 교회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모른체 하고 다른 사람들과 보고 생활하기가? 제 동생과 나이가 같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서 더 기도해야 겠네요.”

자신이 저에대한 악의적 편집을 한 글들을 첨부해서 사람들에게 보내놓고 저에게도 한부 슬쩍 보내면서 자신이 이런 메일을 받았으니 조심하라(?)라고 친절히 조언을 해주십니다.

그리고는 제 가족클럽을 오픈하던지 아니면 구역모임에서 나가라는 양자택일을 하라고 은은한 협박을 해주십니다.

“그 제가 말씀 그대로 비밀클럽을 오픈하던가 (자신이 있으시면 오픈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 중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입니다. 교회에 문제제기를 해서 교회를 완전히 바꾸는게 목적인지 아니면 교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 끌어 내려는 목적인지 명확하지가 않군요. 아마도 비밀클럽으로 차단하면 더 비밀스러워져서 더 의심만 생길겁니다. 구역은 허울뿐인 가족이구요 카페공동체는 진심을 나누는 곳으로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런 구역원은 원치 않습니다. 같이 나누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가족같은 구역이 되길 원합니다. 저두 남상곤 형제님 가정을 잘 모릅니다. 너무나 많은 비밀이 있어서 왠지 어떨때는 남같이 느껴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다음에는 저희 구역으나 저희 교회에 관련된 분의 필터링이 있은 후  글을 올리시면 어떨까 생각하는데 ...  선택은 본인이 한다고 하셨으니까 구역을 원하시던 카페를 원하시던 신중히 결정하시고 메일로 알려 주세요.”

A와 관련된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고 황당하고 파렴치한 일들이 계속 생각이 납니다.  제 주변의 많은 분들도 저와 동일한 생각으로 A를 불쌍하게 보기도 하지만 가까이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A는 늘 외롭지만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기에 받는 고난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을 냅니다.  오늘도 그는 사람들에게 배설물을 뿌리고 상처를 줍니다.  무섭지만 불쌍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정말 제가 감당할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셔서 제 근처에 두게 하셨는지 정말 진지하게 궁금합니다.  A부부는 오늘도 제 주변을 돌면서 제 뒷조사를 하고, 제가 이단이라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고 다니느데 열심이십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몇몇 분들이 저희에게 와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자신들도 A부부를 멀리하게 된다고...  A부부만 여전히 모르십니다.

 

A께서 저지른 일들이 이외에도 많지만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 같아 여기서 우선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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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함께 다니는 교회 (번외편)

침묵의 동조이론

2011-02-01

 

 

침묵의 나선이론

학부전공이 언론정보이면서도 무엇을 배웠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찬양을 원없이 했다라고 이야기할 밖에 없는 나에게, 남은 안되는 전공지식으로 기억나는 중에 하나가침묵의 나선이론이다.  침묵의 나선이론은 독일의 노엘레-노이만이 1966년에 발표한 이론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다수이면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만, 소수라고 판단되면 입을 다문다는 이론이다.  이러한 현상이 회오리나선 모양으로 진행되면서 목소리만 소수의견이 대세가 되기도 한다고 설명하였다.  노엘레-노이만은 매스미디어가 어떻게 권력을 갖게 되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이론을 내놓았지만, 나는 보다도 사람들이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다수라고생각할때표현하고, 소수일때라고생각할때침묵한다는 설명이 무척 인상 깊었던 같다.  이렇듯, 사회에서 소수의 생각이나 사상에 마음속으로는 동조하거나 동의해도, 생각이 소수인 처럼 보이기 때문에, 동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만 동의하고 인정하는 침묵의 나선이론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너무나 무서울정도로 정확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최근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침묵의 동조이론

나는 여기서 보다 나의 모교에서의 벌어지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적용한, 나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침묵의 동조이론이다.  이론에 배경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면,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생각과 의견이 다른 것에 대하여 그것을분쟁혹은하나되지 못함으로 규정하고 관용하지 못한다.  생각과 사상이 다른 대상이 힘이 없거나 소수이면, 쉽게 그들을 잔인하게 밟아버리고 하나님의 뜻으로 거룩한 전쟁을 치루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반하는 자들은 그저 하나님앞에서 제거해야할 이방인들일 뿐이고, 그러한 어려움과 시련을 통해서 연단되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구현된다고 그들은 믿는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기에 포기와 타협은 없다.  따르던지 죽던지  그들은 자신들 만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들에게 힘이 있기에 절대 다수는 앞에서 침묵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다수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사실관계를 따져보자고’, ‘지금은 기도를 해야할 때다,’ ‘양쪽 잘못했고 문제가 있다고’, ‘이렇게 시끄럽고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그리고 공동체에 덕이 되지 못한다고,’ ‘이러한 일이 어떠한 여파를 가지고 올지 아느냐고?’  그리고는 침묵한다.  그것은 암묵의 동의다.  이것이 침묵의 동조이론이다.

 

 

 

필드스터디

아직 나의 최신 이론인침묵의 동조이론은 아직까지 연구가 거의 되지 않은 분야이다.  나도 분야를 연구하면서 선행연구가 없어 애를 많이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결국 이론을 경험하기 위해, 필드스터디를 나갔다가 비이성적인 폭력과 협박, 심지어 가족에게까지 들어오는 위협에 고개를 돌려야만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론의 선행연구자들의 연구는 많이 있지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아주 오래된 고문서에서는좁은길이라고도 하고, 선행연구의 첫번째 필드스터디를 하신 선배님은 십자가인지 십자대 인지 라는 곳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는 전설도 얼핏 들었던 같다.

 

 

 

탓할 없다

나는 다수의 침묵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몰랐다.  무서웠다.  있는자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고, 자칫하면 밥그릇이, 가족이 위험해 질지도 모르기에 그러했다.  어떤 보다도 개인의 평안과 가정의 행복은 내가 지켜야만 하는 최고의 가치였다.  그래서침묵의 동조이론으로 보이게 유지되는 평화만 주장하는 힘있는 자들에게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을 비난 없다.  그것도 자신들의 선택이다.  게다가 개인의 행복과 가정의 안전은 여전히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할 없고 양보할수 없는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침묵을 비난할수 없고, 침묵의 동조자들을 탓할 없다심지어 초대 필드스터디를 나섰던 선배님도 사람들의 침묵을 탓하지 않으셨다.

 

 

 

후회

다만침묵의 동조이론을 실제로 경험한 필드스터디로 다녀온 이후, 옛날 이론에 매여 침묵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후회가 많이 되었다.  그때 누가 나를 탓하고, 비난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필드트립을 나갈것이다.  내가 필드트립을 나간다고 해서, 무시무시한 이론은 절대로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침묵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보다 예전처럼 나는 이상 침묵할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개인의 행복과 가정의 안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지만, 그것은 침묵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필드스터디를 다녀왔다고 실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기에 실수도 있고, 실패도 있고, 사고도 친다.  그런데 그것이 두려워서 침묵을 하기보다는 다녀와서 실수를 반성하는 편이 낫다. 

 

 

 

여전히 이론은 강력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나는 그러면 좁은 필드스터디의 길을 고민없이 두려움없이 같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소시민일 뿐이다.  필드스터디를 다녀왔지만 지금도 자주 침묵하곤 한다.  지금도 두렵고 무섭다.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뛰어서 가슴이 터질것만 같다.  다음번에는 침묵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고문서에 따르면, 초기 선행 연구자들이 당시 필드스터디에서 당한 협박에도 불구하고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없다라고 나와있다.  나는 선행연구자들의 고백과 첫번째 필드스터디를 선배를 믿는다. 

 

 

 

지금 침묵을 깨고, 필드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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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aulusnam
2010. 12. 17. 00:11 다시함께 잘다니는 교회

다시 함께 다니는 교회 (1)  탓입니다                                                          Dec 15. 2010

 

들어가며

함께  다니는 교회시리즈 글을 마지막으로 것이 확인해 보니 올해 5월이었습니다.  어느덧 7개월이 흘렀네요.  그동안  하고싶은 말이 참으로 많았지만, 안으로 나름 삭히고, 고민하고 기도하는 좋은 시간을 보냈던 같습니다.  예전에는 멋모르고 글을 썼지만 지금은 약간의 사명감(?) 가지고 다시 펜을 잡았습니다.  저와 저희 가정에게 가해졌던 비정상적, 비이성적 폭력에 대한  사항도 약간은 보고해야 필요도 느끼구요 (미주 한인교회의 실상을 조금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씩 하지만 깊이 고민하고 기도하고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이제 쫓겨날 교회도 없으니 마음은 많이 편하네요.   교회는 저를 파문하고 자유게시판을 닫았다고 합니다.  자유는 불온한 것이니까요.  ^^

 

 

내탓이오

아주 오래 전에 지금은 소천하신 김수경 추기경께서 천주교안에서 내탓이오운동을 펼쳐오셨음을 기억합니다.  어릴 적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내탓이오운동은 비단 천주교계를 넘어 한국 사회에 전체에 영향을 미쳤던 같습니다.  마치 유행어 처럼, 무슨 일이 일어나고 발생하면, ‘내탓이다라고 고백하시는 많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무슨 비판이나 쓴소리를 하려는 분들이 뻘쭘해지시고는 입을 다물곤 했던 같습니다.   그래서 보통 내탓이오 논쟁이나 사고의 원인을 저적하고 파헤져 , 그것을 잠재우는 만능의 주문이었던 같습니다.  물론 내탓이오운동의 순기능 혹은 긍정적 영향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보통 내탓입니다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탓이다라는 뜻으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간혹 있었던 같습니다. 

 

 

나는야, 성골 기독교인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교단책에 나올 만한  촉망(?)받는 신앙인으로 교회안 에서 자라온 저는 학부를 졸업하기 전에 불온한(?) 분의 선생님과 여러 책들을 통해, 사회와 상황속에 신앙에 대해 깊이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름  고민(?)끝에 당시에   스스로, 사회과학의 신학(?)이라고 생각하는 사회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서울의 사립대에 대학원과정을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사회과학을 공부해 보신 분들이시라면  아시겠지만, 대학원에서 사회학이라는 수업은 세미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날 읽어야 책이나 페이퍼를 읽어 온후, 그것에 대한 (?) 푸는 것으로 3시간을 보냅니다.  성격이 급하신 선생님은 치열한(?) 침묵을 참지 못하시고 그날 수업분량을 요약정리 해주시기도 하시고, 가끔 현실정치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셨지만, 보통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말하기 까지 참고 기다리십니다.  학생들이 알아서 어떻게 썰을 푸는지 지켜보시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보니, 누가 의견을 내면, 의견에 대한 찬성과 반대, 비판과 비판에 대한 살벌한(?) 토론이 시작되고  어쩔때는 3시간을 넘어 거의 쌈판이 벌어지는 같기도 했습니다.   온건하고 모범적으로 교회안에서 자라 저는 은혜로 덮는다,’ 혹은 내탓이다 분위기 속에서 자라왔기에 한동안 세미나수업에 적응을 했었습니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인간을 비판하고 지적하나요?  내눈에 들보를 먼저 봐야지요.

 

 

변했어!

즈음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저와 절친했던 지체들이 저에게 , 변했어,”  오빠, 이리 사람이 까칠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 라고 하곤 했습니다.  난감했습니다.  학교수업에서는 가장 말도 못하고 비판도 못하는 사람이, 교회에서는 가장 비판적이고 쓴소리 하는 사람이 되버린 것입니다.   교회와 학교, 어디에도 적응을 하지 못하던 저는 결국 훗날에 전공을 바꾸게 됩니다 (농담입니다.  이것 때문에 전공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

 

 

이단에서 삼단을 훌쩍 넘어 사단도 되어 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흘러, 저에게 교회에서 반동분자(?), 이단(?), 교회를 가르는 사단(?)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함께 다니는 교회http://paulusnam.tistory.com 보시면 나와있습니다).   그분들은 앞에서는 한번도 반대의견을 개진하지 못하시면서, 제가 없는 자리에서 저를 감당할 없는 사람으로 만들곤 하셨지요.  그러면서 몇몇 분들이 없는 곳에서 내탓이오.’ 라는 말씀을 하셨더랬습니다.  그분들은 평상시에도 무슨 문제가 교회안에 불거질 때마다 내탓이다라는 말로 상대방의 입을 막으시는 분들 이셨습니다.  저는 곱게(?) 그리고 모범적으로 교회에서 자랐기에 그러한 말들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생각이 사단적이거나 이단 같니?’  확인을 많이 해보았던 같고, 실제로 내가 문제가 있나? ‘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문제가 없기는 없겠지요.   부분이 내탓이오라는 말이 강력한 창이 되어 모든 사람의 입을 막는 병기가 되어 들어오는 부분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어느정도는 부족하고 잘못이 있으니, 만능의 무기인 내탓이오앞에 나가 떨어지게 됩니다.  여러 신앙의 선후배들과 성경, 그리고 여러 좋은 책들을 통해 생각이 유별나지 않다는 (그저 상식이라는 ) 확인한 후에, 분들이 저에 입을 닫는 무기로 내탓이오라는 말씀을 남들에게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차라리 앞에서 대놓고나 하시지.  

 

 

내탓이다라고 말하지만, 니탓이다!

 

내탓이오 생각에 모든 사물의 잘못을 자신의 허물이나 탓에 돌리기 보다는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무한한 창조주앞에 겸손이 머리숙여 나아가는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스스로 내탓이다라고 많이 자책도 회개도 하기도 했던 같습니다.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탓인거 같기는 한데  그것이 모든 상황에서 만능의 무기가 되어, 의견이 다른 상대방의 입을 막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은 부적절한 사용입니다.   그것은 마치 권세앞에 순종하라 비슷한 맥락이겠지요.    물론 모든 피조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므로 탓이므로, 그냥 조용히 기도만 하고 까불지 마라 문자적으로만 적용하려는 분들의 말씀은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닐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능칼이 되어 교회가 스스로 자정하고 개혁하지 못하고, 지금껏 오히려 교회를 내적으로 썩어가게 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설사 내탓이라도 그것은 스스로 자기가 자신에게 내탓이오라고 말할때 적용이 되는 것이지, 의견이 다르다고 내탓이오(실은 니탓이니까 조용히 잠자코 있어라!) 상대방에게 말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 것일까요?  자기가 스스로 혼잣말로 내탓이다라고 되뇌여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원이는 딸입니다

사회학을 계속 공부할 수록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 ‘ 그리 강력하게 비호하고 변호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내가 하원이의 아빠인데, 다른 사람이 하원이 아빠 아니다 라고 해서 제가 사람에게 굳이 하원이 아빠야라고 출생증명서, 어릴   함께 찍은 사진, 이런거 보여주고 목소리 높일 필요가 없을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딸인데요.    거기다 대고 그냥 딸이오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입니다.   (실은 안해도 알고 있습니다.  딸은 아빠를 닮습니다 ^^)

 

 

탓이오!

오늘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내탓이오(실은 니탓이니까 조용히 잠자코 있어라!)’  전가의 보도로, 교회 안에서 생각이 다르다고 무조건 은혜로 덮으려는 분들에게 입막게 하려는 들에게 마디 랍니다. 

 

너나 잘하세요!”

 

 

 

 

나가면서

글들줄에 몇몇 편이 손질(?) 되어서 미주 뉴스앤조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이 그렇게 윤이 나게 만들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편집자분 탓입니다.  ^^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228

 

posted by paulusnam
2010. 11. 16. 19:40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다섯번째  03/01/2010

 

우리안의 샤머니즘

                                                                                                          남상곤

 

세계제일의 영적인 민족

 

우리나라는 영적인 민족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우리나라를 거쳐가면 세계최고가 되는 것을 보면 잘알수 있습니다.  이른바 토속신앙인 샤머니즘도 그렇고, 불교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로는 대승불교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유교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로는 유교의 본산인 중국을 넘어 유교를 전승할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남아있으며, 가장 늦게 들어온 기독교도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부흥과 발전을 이룩해내어 현재는 가장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중에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즐비합니다.  어떤 종교든지 우리나라를 거치면 가장 발전하는 것을 보면 우리민족은 참으로 영적인 민족이 아닐수 없을것 같습니다.

 

 

대학입시때만 되면

 

우리나라의 영성이 확인되는 순간은 주로 겨울철입니다.  해마다 대학입시때만 되면 교회나 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벌어집니다.  입시 100일 기도회같은 것이지요.   이때만큼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던지 거의 동일한 기도를 합니다.  집사님은 십자가 앞에서, 보살님은 불상앞에서, 이도 저도 아닌 분들은 당산나무나 보름달을 바라보며 우리 아들, 우리 딸, 대학 합격시켜주십시오.”  이 기도외에 다른 기도가 있겠습니까?  대학입시 정원은 정해져 있기에 합격자의 수도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하나님보다 세면, 불상앞에서 기도했던 부모들이 자녀들이 대학합격을 더 많이 할까요?  서울에 A 교회보다 부산의 B교회가 더 새벽기도를 많이 하면, 부산의 B 교회 자녀들이 더 많이 합격할까요?  서울의 대형교회인 C 교회에서는 서울대를 지원한 학생만 수백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그 학생들의 부모들이 각각 기도하면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더 오래 기도하고 더 많이 헌금하면 들어주실까요?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많이 맞고 적게 틀린 학생이 합격하고, 적게 맞고 많이 틀린 학생이 떨어집니다.  기도가 모자르거나 헌금이 부족해서 떨어지고, 새벽기도를 많이하고 헌금을 많이해서 합격하는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명문대 합격한 것과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은 우리는 이미 잘 알고있지 않습니까?

 

 

 

비빔밥과 샤머니즘

 

우리나라의 문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종교적 문화가 혼합이 되어있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이훈구 교수는 이를 두고 한국의비빔밥이라고 비유했습니다.  한국 사상의 밑바닥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토속신앙(土俗信仰) 곧 무속신앙(巫俗信仰)이 있다. 그 위에 천 여 년에 걸친 불교사상이 얹혀 있고 또 그 위에는 오백 년의 유교 사상이 얹혀 있다. 그리고 지금은 기독교와 서구의 사상들이 표면을 덮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동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마저 곁들어 있어 한국은 동서고금의 모든 지혜가 갈무리된 곳간과도 같다. 즉 비빔밥이다."(「한국 전통 종교와 한국 교회」이훈구 저, 글로리아).

 

그런데 많은 종교학자들은 외래종교가 우리나라로 들어올때마다 늘 이 토속신앙인 샤머니즘이 새로들어오는 종교에 의해 밀려났다기 보다는 샤머니즘과 혼합되어 융화되는 성격을 가진다고 지적합니다.  즉 불교도 한국에 들어와서 무속신앙과 섞여 한국만의 고유의 불교가 되었고, 유교와 기독교 역시 각각 전승되었지만 무속신앙을 개혁했다기 보다는 무속신앙안에서 자연스레 융화가 되어 독특한 한국의 유교, 한국의 기독교를 만들어 냈다고 보고있습니다.

 

 

샤머니즘이란?

 

샤머니즘(무속신앙) 이란 쉽게 이야기해서 오직 샤먼(무당)만이 선과 악에 주관하며 영적 의식을 수행함을 믿는 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체계입니다.  샤먼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로 신과 사람들 사이의 대리자의 역할을 합니다.  샤먼은 이상심리나 공포의 상태로 분위기를 몰입시켜 초자연적 신령계와 접신하여 그 정보를 전달하고, 길흉을 점치고, 악령을 제거하고 귀신을 불러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의 초자연적 신령계는 인격체가 아닙니다.  샤먼을 통해 나타나는 그 초자연적 신령계는 주로 협박과 공포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샤먼은 그 신령계를 달래고 빌어서 신령계로부터 복을 받고 병을 치료받습니다. 거기에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샤머니즘은 현세의 물질적인 복을 강조합니다.  샤먼을 통해 물질을 바침으로써 초자연적인 신령계를 달래고 어르는 것이지요.  인격체가 아니기에  필요할때만 샤먼을 불러 물질을 바칩니다.   쉽게 말하면 알라딘의 램프의 지니라고 볼수도 있을 겁니다.  뭐가 아쉽고 필요한 것이 있을때 지니를 불러 금 나와라 뚝딱!”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와 결정적인 차이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는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아울러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시고 우리를 벌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아래의 내용은 저의 생각이나 견해라기 보다는 박노찬씨의샤머니즘과 한국 기독교의 내용을 제가 요약한 내용입니다.   뒤새겨 볼만한 내용이라 생각해서 나누어봅니다.

 

 

한국에서의 샤머니즘의 영향을 살펴보면 쉽게 단군신화를 떠올리면 쉽게 알수있습니다.  신화를 통해 우리민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단군은 재정일치 즉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통합적인 샤먼 즉 무당이었음을 알게됩니다.  단군뿐만이 아니라 주몽신화, 박혁거세 신화등, 초기 부족국가들의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제정일치의 사회의 지도자인 샤먼(무당)이 다스렸던 사회였습니다.  거기에 쉽게 들어본적이 있는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다는 어머님들의 이야기들은 모든 물체에 정령이 존재한다고 믿는 자연숭배 또는 정령숭배의 원시종교로 애니미즘을 포함합니다.

 

어쨌든 우리나라는 이렇게 무속신앙을 토대로 발전되어온 나라이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과 문화 심지어 우리가 믿는 기독교안에도 이러한 샤먼니즘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목사를 샤먼으로, 예배를 굿판으로 빗대어 쉽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바른 말씀을 전하거나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목사보다는 어떤 영적이고 신적인 권위를 통해 복과 화를 주관하는 샤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목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지나치게 영적권위를 내세우며 성경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가감없이 선포하고 그에 따르지 않을 경우 화가 있을 것을 경고합니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다른나라와 달리 우리나라의 기독교에서는 목사를 지나치게 신격화하여 대우하고 그것을 목사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예배가 굿판과도 비슷하게 신학이나 회개가 없는 기복신앙만을 강조합니다.  굿판에서 무당이 작두를 타고 초자연적인 영과 접신하는 것과 비슷하게 기독교에서는 예배를 통해 성도들은 참관자가 되어 샤먼인 목사가 집례하는 공연으로 생각하게 되고 이러한 교회일수록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됩니다.  샤먼은 자신의 말을 따르면 복을 받고 자신을 뜻에 위배되면 화를 받게 될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예배출석의 이유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마치 지난주에 우리집에 불이 난것이 지난주 교회를 출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헌금도 좀 더 많은 축복을 받기위해 내게됩니다.  심방의 경우도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가 심방이라는 것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만 유달리 발달된 것이나 자동차를 새로 샀다고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는 등의 행동은 다른 기독교에서는 볼수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기독교문화의 형태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예들이 기독교안에 남아있는 샤머니즘의 한 형태로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샤머니즘으로 인한 피해는 신앙이 개인주의화 되고 삶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예배의 형식을 잘 갖추어 어떤 웅장함이 깃들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예배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목사의 축복기도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 하나 예수믿고 이땅에서 축복받고 죽은후 천국가면 그만이다라는 개인주의가 발달하게 되며, 결정적으로 복음을 듣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전혀 변화되지 않게됩니다.  예배가 끝나면 내면의 변화없이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굿판에서 굿이 끝나고 돌아가는 구경꾼의 모습과 흡사한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안의 샤머니즘

 

헌금이 부족하고, 봉사가 부족하고, 새벽기도에 나오지않고, 기도가 부족하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망하시거나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 신령계도 램프안의 지니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과 물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이 나의 생각과 뜻을 너무나 잘 이해하시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잘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몰아가시거나 협박하지 않으십니다.  탕자에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좀 못나고 괜찮습니다.  재주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양아들을 삼아주셨고, 후사로 삼아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못박히시게 하면서까지 우리를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해주시고 사랑합니다.  거기에 어떠한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안에 뿌리깊이 남아있는 샤머니즘의 전통은 이것을 위협합니다.  복을 받기위해 자꾸 무엇을 더 해야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헌금을 더 많이 해야하고, 새벽기도에 나와 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몸이 부서지도록 봉사를 해야하고 한다고 요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그리스도가 내안에 계시는 것, 바로 이것이 복입니다.  복을 달라는 기도는 우리 기독교에서는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범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푸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은, 아무도 그것을 자랑할 수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에베소서 2 4-9: 표준새번역)

 

 

복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될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성숙한 신앙으로 이어지고, 비로소 우리는 내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 이웃과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는 나만 잘먹고 잘살면 되는게 아닙니다.  같이 잘다니는 교회, 더불어 잘 사는 세상에 대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님을 따라 지고가야할 십자가  고난을 받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쫓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가복음 9 12: 표준새번역)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 20: 표준새번역)

.

 

 

 

 

그러면 어떻게?

 

한국교회안에 뿌리깊은 샤머니즘은 누구를 탓할필요가 없는우리들의문제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한국교회의 문제입니다.  물론 샤머니즘의 영향이 2백년의 한국 기독교역사에 흘러온것을 두고 어떻게 칼로 물을 베어내듯 그것을 잘라내어 척결할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것을 쉽게 분리할수도, 또 분리해서 쉽게 없앨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안에 샤머니즘으로 인한 문제는 결국 우리가 말씀위에 올바로 섰을때 하나씩 자연스럽게 껍질이 벗겨지게 될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공부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덮어놓고 믿지말고, 열어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생각하고 묵상해서 하나님은 누구시며,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시며, 우리는 어떤존재이고 또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소그룹으로 모여 말씀을 보고 나누고 말씀앞에 자신의 삶이 드러나는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겪어야 합니다.  말씀이 검이 되어 우리가 그 말씀앞에 꿰뜷어지고 갈라질때, 우리는 복음이 아닌 것은 분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 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 냅니다. (히브리서 4 12: 표준새번역)

 

 

 

또 한편으로는 비록 그 전통이 샤머니즘이라고 할지라도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으로 남아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샤머니즘의 내용을 잘 분별해서 수용하는 것도 필요할것입니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와 심방과 같은 전통은 이제 한국기독교문화의 커다란 줄기와도 같은 부분입니다.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내려왔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의 새로운면을 한국식으로 수용해서 그 내용을 더 풍성히 했다라고 볼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새벽에 정한수를 떠놓고 자손들의 복을 비는 것은 비록 가장 대표적인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의 전형이지만,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때 이러한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샤머니즘을 기독교적으로 바꾸어보고자 예수님이 새벽미명에 기도하셨던 것을 고려하여 한국교회만의 특징인 새벽기도가 탄생되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한국적인 기독교의 문화를 만들어낸 예라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는 문제가 생기면 무당을 부르는 것이 한국의 전통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이것도 역시 기독교적으로 바꾸어 보고자 교회에서는 대심방 등의 이름으로 목사가 성도들의 집을 찾아가 목사가 목자와 아비의 마음으로 성도들의 삶을 먼저 찾아가 기도하고 위로하게 되는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늘 이것의 뿌리가 샤머니즘으로 부터 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지나친 새벽기도나 심방으로 인한 폐해 역시 늘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새벽기도에 출석하여 복을 달라고만 기도하고 새벽기도에 참석했으니 나의 믿음을 보였다고 생각하거나, 성도들의 집을 골고루 심방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하러 오신 목사님에게 축복의 기도만 바라는 것은 새벽기도와 심방의 폐해가 될수도 있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나 교회의 리더인 목사가 성도의 가정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다만 이것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않도록 유의하는 자세가 필요할것입니다.

 

 

 

 

나오면서

 

1.     우리안의 샤머니즘의 주제로 글을 쓰다가 발견하게 된 박노찬씨의샤머니즘과 한국기독교의 글이 저의 생각보다 더 정교하고 잘 정리했음을 알게되어 제 글보다는 그 정리한 글을 잘 요약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2.     글이 진행될수록 갈수록 양이 길어지고 재미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잘 모르니 횡설수설 한다는 것이지요.  그저 제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 안의 샤머니즘
'함께잘다니는교회'(4) 예배와 굿판의 차이는?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33




 

참고문헌

 

샤머니즘과 한국 기독교, 박노찬 (http://1tim612.net/others/shamanism.htm )

「한국 전통 종교와 한국 교회」이훈구 저, 글로리아

 

 

더 읽어볼거리

 

양복입은 무당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624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120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59

 

한국 교회, 기복주의에 푹 빠지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774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27 나누고픈 이야기

어느 기독 법률가의 삶과 죽음
(내수동 교회 증인들 1200호 특집호)

 

 

김두식 저


(가상 이야기)
S고등학교에서 1, 2등을 다투는 K군은 어려서부터 기독교의 영향을 받고 자란 학생입니다. 교회 장로님인 아버지와, 권사님인 어머니는 늘 그에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일찍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K는 우연히 교회에서 한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뇌성마비를 앓아 걷기와 말하기에 장애가 있는 그의 이름은 L이었습니다. 어려운 집안 환경과 신체적 장애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L은 혼자 힘으로 고입 검정고시를 마치고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K군은 L군을 처음 보는 순간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도와줘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 L군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 주게 되었습니다. 비록 고 3 신분으로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L군을 도와주기 시작한지 두 달쯤 지난 후 치러진 모의고사에서 K군은 난생 처음 심각한 좌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모의고사가 끝난 후 학교 현관 입구에 나붙은 우등생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평소 아들의 학교 성적에 애써 초연한 척 하던 K장로도 이번에는 좀 충격을 받았는지, 조용히 K군을 불렀습니다. "얘야.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한 번 생각을 해 보았니? 내 생각에는 역시 네가 그 L이란 아이에게 공부를 가르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구나. 물론 네가 좋은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한 것은 잘 알고 있다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거다. 지금은 네 공부에 주력해야 할 때고,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만약 지금 공부에 주력하지 않아서 대학입시에 실패한다면, 나중에 네가 진짜로 누군가를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게 되고 만다. 우선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다." 물론, K군은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자기 방문을 잠그고 들어간 그는 곧 아버지 말씀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고, 조용히 L군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의외로 L군은 선선히 "잘한 결정이다. 학력고사 잘 보라"고 격려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해 겨울, K군은 그럭저럭 좋은 성적으로 원하던 법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L군이 지방에 있는 어느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그 이후 K군은 L군을 다시 만나지 못했고, 이 경험은 훗날 장애인 문제를 이야기하게 될 때마다 "나도 한때는 말이야 뇌성마비 장애인을 도와 준 적이 있어"라고 무용담을 늘어놓는 소재로만 활용되게 되었습니다.

K군이 법과대학을 다니던 때는 군사독재정권의 횡포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주요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고, 자고 일어나면 친구 중 누군가가 붙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던 암울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잃지 않고 있던 K군은 "고시 공부를 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친구들처럼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 것이냐"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기독교인은 잘못된 권위라도 거기에 순복해야 한다"는 말씀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계시던 때라, 기독학생으로서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기본적인 갈등도 있었습니다. 1987 6 10, 그는 마침내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했고, 아버지의 눈을 피해 조용히 집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 앞길에서 마주친 어머니는 곧 아들이 어디로 가려 하는지를 알아차리셨고, 그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들아. 나도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는 거다. 지금 네가 고시공부를 그만 두고, 학생운동에 뛰어든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고시에 한두 번 떨어지더니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다고 하지 않겠니?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다. 우선 고시부터 붙고 나서 남을 돕는 일에 나서도 늦지 않다. 지금 네가 아무리 자유와 평등을 떠들어 봐야 누가 네 말에 귀 기울여 주겠니? 변호사 타이틀이라도 가진 후 뭔가를 말하는 것과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 뭔가를 말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먼저 너 자신부터 남들이 귀 기울여줄만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 이번에도 그는 어머니의 설득에 못이기는 척 발길을 돌렸고, 다음 해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K의 머리 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제야 비로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그러나, 사법연수원은 수험생활의 연장이었을 뿐, 도대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법연수생들을 교육하는 교수들(모두 다 부장판사 또는 부장검사들입니다)의 한결같은 가르침은 "요즘은 사법시험 합격생 숫자가 많아져서 그냥 변호사를 해서는 먹고 살 수가 없다. 무조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선 판검사로 임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르침 때문인지, 사법연수원에 처음 들어간 3월부터 이미 대부분의 연수생들은 공부에 몰두하고 있었고,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하나같이 다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일하는 법률가가 되겠다"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제 그들의 목표는 오직 판검사 임용으로 통일되었습니다. 누구도 이제 더 이상 그런 순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긴 워낙 끝없는 경쟁에 익숙해져 있는 사법연수생들인지라, "최고"가 되기 위한 이 새로운 경쟁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친구들도 많아보였습니다. K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판검사 하자고 이 시험을 친 게 아닌데.... 하나님께서 나를 이 시험에 붙여주신데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었을텐데....'

그러나, 그의 진로는 엉뚱한 곳에서 결정되고 말았습니다. 사법연수원 1년차를 마칠 때쯤, K는 대학 은사님을 통해 이름 있는 어느 국회의원의 딸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사법연수원에서 마담 뚜의 손에 놀아나는 동료들을 보면서 '절대로 돈이나 권력에 팔려 가지는 않으리라' 수없이 다짐했던 K였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국회의원의 딸인 J양은 명문가의 딸이면서도 너무나 순수했을 뿐 아니라 명문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이기도 했습니다. 거기다가 교회 성가대로 봉사하고 있을 정도로 신앙심도 좋았고, 얼굴도 예뻤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자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J양과 사랑에 빠진 K J양 집안의 성화에 따라 강남의 어느 호텔에서 처음으로 장래의 장인어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K를 처음 만난 J의원은 대뜸 "자네는 연수원을 수료한 후 뭘 할건가?"하는 질문부터 던졌습니다. K는 늘 생각했던 대로 ", 저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J의원의 얼굴이 당장 일그러졌습니다. "어허. K. 변호사는 원래 연수원에서 판검사 임용될 성적이 안되는 사람들만 하는 거라면서? 자네, 그렇게 성적이 좋지 않은가?." K는 일순간 당황했지만, "제 성적이 1, 2등은 아닙니다만, 임용이 안될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J의원은 다시 얼굴을 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다는 건 참 좋은 뜻이야. 하지만, K.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를 않네. 자네 무슨 돈으로 개업을 할건가? 그리고, 자네가 아무리 '나는 성적이 되지만 그래도 변호사를 택했다'고 말한다 한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줄 것 같은가? 아무리 자네 뜻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선은 판검사 임용을 받은 후 나중에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게 순서일세. 그래야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어. 단 하루를 해도 좋으니 일단 판검사 임용을 받도록 하게. 그 이후에는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뭐라 하지 않겠네. 그리고, 남을 돕는다는 것은 원래 자기가 충분히 먹고 살 기반을 가진 다음에 가능한 일일세. 돈도 없이 어떻게 남을 돕나? 그러니, 우선 자네부터 남을 도울만한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네."

J의원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K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몇 년 전 어머니께서 하신 이야기와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 우선 최소한 000이 된 후에, 남을 돕도록 하라는 말은 어른들에게 있어서 거의 성경말씀과 같군.' 이런 생각들이 계속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K J의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같이 간판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처음부터 변호사로 나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서 K도 이제 알만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그래, 2-3년만 검사 노릇을 하고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하자. 그 때쯤이면 누구도 더 이상 나에게 "우선 000이 된 후에야 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 그 해 겨울 K J양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고, 다음 해 00지방검찰청의 검사로 임용되었습니다.

검찰청에 새로 출근한 K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래시계"에서 본 것과 같은 권력과의 투쟁도 아니었고, "보고 또 보고"에서 본 것과 같은 여유롭고 멋있는 검사 생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물밀 듯이 밀려드는 사건들과, 그 사이 사이에 끼어드는 각종 부탁전화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판을 막기 위해서 마련되었다는 끝없는 결재제도도 그를 피곤하게 했습니다. 뭐 한가지도 K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K는 다시 갈등에 빠졌습니다. 내가 이걸 하면서 평생을 보내야 하나... 날로 어두워져 가는 K의 얼굴을 보다못한 S부장검사는 어느 날 퇴근길에 K를 붙잡고 교외에 위치한 조용한 고급 경양식 집을 찾았습니다. 워낙 사람 좋기로 소문난 S부장은 검찰 내에서 K가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무래도 적성에 안 맞아서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K의 폭탄선언에 S부장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는 듯이 "내 그럴 줄 알았네. K검사 같은 정의파는 검사생활 초기에 꼭 그런 회의에 부딪히게 되지. 하하하." 하면서 긴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검사 초년시절 경험을 한참 이야기한 S부장의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일단 부장이 될 때까지만 참아봐. 그 다음에는 정말 자네 마음대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온다네. 부장도 못 되어보고 그만둔 사람을 누가 검사로 쳐주기나 한다던가? 이미 이 길에 들어선 이상, 지금 와서 길을 바꾸기도 쉽지 않네. 나중에 부장만 딱 달고 나서 개업하면 초기에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자네하고 싶던 좋은 일을 하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사실 검사 일만큼 보람있는 일이 어디 있나? 변호사만 남을 도울 수 있나? 검사야 말로 약자들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자리지."

그 즈음 한창, 각종 사기사건들을 처리하면서 '검사가 무슨 채권자 대신 돈 받아 주는 기계인가' 하는 회의에 빠져 있던 K로서는 마음 속에 반발이 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로를 수정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직서를 찢어 한강에 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20. 검사로서 그는 많은 사건들을 처리했고, 10차례에 가까운 인사이동을 겪으면서 이사도 참 많이 했습니다. 가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변호사가 되겠다"던 자신의 꿈을 떠올릴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그저 "허허. 더 나이가 들면 그럴 수 있겠지"하고 넘어갔을 뿐, 이미 편안해진 자신의 위상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기들보다 승진에 뒤쳐진(보통 인사에서 물을 먹었다고 하지요) 그는, 결국 20년의 검사생활을 접고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정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두 딸은 대학에 재학 중이었고, 아들 하나는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교육비로 엄청난 돈이 지출되어야만 했고, 두 딸의 혼수준비도 미리 해 두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았습니다. 부장검사 출신이라는 이력 때문에 사건도 엄청나게 밀려들었습니다. 사건을 가져오는 사무장에게는 일정액의 돈을 떼어주었고, 그 돈 중 일부는 경찰이나 검찰로 들어가는 모양이었지만, 돈 버는 재미에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도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는 일"은 이번에도 여전히 뒷전으로 밀려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K는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돈을 벌다가,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문구가 남겨졌습니다. "평생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겠다고 생각만 하던 K, 여기 잠들다."

다음은 여러분을 향한 K의 조언입니다.

"최소한 000이 된 다음에야, 남을 도울 수 있다. 우선은 나부터 안정된 직위를 갖고 난 후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해 생각하라"는 교훈을 잊지 맙시다. 여기서 000은 사법시험일 수도 있고, 판검사, 변호사의 지위일 수도 있고, 로펌의 파트너일 수도 있고, 국회의원일 수도 있고, 부잣집 사위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중요한 것은 당신이 뭔가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이 엄청난 진리의 쇠사슬을 끊고 나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우리 사회는 결코 그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틀 안에 있는 사람", "남이 하는 대로 하는 사람", "튀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0대에 공익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꿈을 꿔보지 않은 법률가가 있는 줄 아십니까? 20대에는 누구나 그렇게 하는 거고, 대신 30대에는 그저 모두 다 각자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되는 겁니다. 법원에는 법원 나름의 상향성의 논리가, 검찰은 검찰 나름의 상향성의 논리가, 로펌은 로펌 나름대로의 상향성의 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 논리에 따라 열심히 살면 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운운하는 것은 경쟁에서 탈락한 변호사들이 자기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말입니다. 거기에 속지 맙시다.

우리는 모두 오직 위만 보고 달려가면 됩니다. 그것만이 이 상향성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입니다. 2000년 전 중동지방의 어느 나라에, 더 낮고 더 낮은 곳을 향해 계속 내려가기만 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말로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사람의 뒤를 따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 옆의 누군가가 "이제는 상향성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진로를 생각해야 할 때"라고 속삭일지 모릅니다. 그럴 때면, "아직은 너무 일러" 또는 "이제는 너무 늦었어"라는 한 마디로 그 속삭임을 물리치십시오. 그게 당신의 행복을 지키는 길입니다. 당신이 혹시라도 "하나님 나라", "정의가 강물처럼"이니 하는 허황된 구호를 믿는 사람이 아닌 이상 말입니다. 넓은 길을 택하십시오. 좁은 길은 실패자의 길입니다. 열심히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를 향해 달려가십시오.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posted by paulus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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