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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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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22. 16:21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번째  04/12/2010

 

 

                                                                남상곤

                                                                                                                                                                                                                                                                                                                                     

 

 

아직도 숨기워진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

 

 

 

들어가며

 

벌써 열번째 글입니다.  처음에 생각하고 기도한 바와는 달리 제가 고민했던 주제들을 거의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열번의 글을 통해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됩니다.  좀 더 가볍고, 좀 더 부담없이 다양한 소재를 다뤄보고자 하는 저의 인간적인 의도와는 달리 좀 더 진지하고 좀 더 고민해야하는 것들을 좀 더 쉽게 써야하는 변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의도와 생각은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하게 됩니다. 

 

"Quo Vadis Domine"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혹시 의도적으로?

 

하나님 나라 (Kingdom of God)’ 라는 말은 신약성경에만 100번이상 나오는 말입니다.  중요한 말이 자주 반복되어 나온다는 상식에 비추어보더라도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 개념이고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하나님 나라라는 구체적 표현이 거의 없지만 신약에 특별히 복음서에 집중적으로 반복, 그리고 강조되어 나오는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 의미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라 보다는, 예수님이 등장하시면서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에 더 가시적으로 신약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등장하시면서 하셨던 말씀도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5) 이였습니다.  어떤 분들은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복음서를 이해할수 없다고도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주 언급되고 강조되어진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잘 모르고 있거나, 배우지 못하거나,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할 정도로  일부로 그런 것 같이  왜 우리는 교회에서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배우고 가르치고 나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비유들

 

하나님 나라는 참 정의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무엇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늘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한번 실제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좀 잡히는 것이 있지 않을까요?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보아라.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누가 17:20-21)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누가 18:1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요한복음 3:3-5)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내가 그것을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마치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에다가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가루 서 말 속에 섞어 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올랐다." (누가복음 13:18-2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마태복음 19:23-24)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마가복음 10: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마가복음 4:1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은 열매를 저절로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의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길까? 또는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겨자씨와 같으니, 그것은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씨보다도 더 작다. 그러나 심고 나면 자라서,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수 있게 된다." (마가복음 4:26-32)

 

 

어떠십니까?  좀 감이 오십니까? 위의 예화나 비유외에도, 수많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들과 말씀들이 있습니다.  열거한 성경 말씀들만 보면, 감은 오는데 여전히 잘 잡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하나님 나라에 논의중에서 위의 예시를 토대로 몇가지의 특성만 좀 주목해서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하나님 나라

1. 예수님 그 분 자체라는 것,

2.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

3. 하나님나라는 숨기워져 있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도대체 뭔가요?

 

하나님나라는 우선 우리가 죽어서 가게 될거라고 생각하는 천국이 아닙니다.  위에 예수님이 드신 예화들을 잘 살펴보면 죽어서 가게 된다고 흔히 알려진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공간이나 영역적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첫째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 곧 하나님의 왕권 (주되심) 과 통치를 의미한다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과 공간은 예수님이 오셔서 시작되었고, 예수님 그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분이셨기에, 예수님이 바로하나님 나라그 자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하나하나씩 실현해가시는 삶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따르는 그 예수님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내가 만약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그분에 뜻을 순종하게 되면 거기에서 또 작은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하나님 나라의 D-Day (예수님의 초림)이라고 하고, 독일의 전쟁항복선언을 하나님 나라의 V-Day (예수님의 재림)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미래성 각각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속성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여 현재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Already (이미), but not yet (그러나 아직 완전히는 아닌) 으로 이해합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시작되었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로 약속하신 그 날에서야 온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고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도래한 것은 아닌 그 중간단계에 살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비밀스럽고 숨기워져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초반부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왜 비유로 설명하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 (11),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1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그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라고 하셨는데그것은 바로 나, 나아가서 우리,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인 교회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제가 처음에 궁금해했던 것,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데 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잘 배우지못하고 들어보지 못하고 나누어본적이 없는가? 에 대한 답변을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수많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과 속성중에서 위의 세가지에 비추어서 살펴본다면,

 

첫째,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그 자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말씀은 예수님의 생과 삶에 대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삶과 말씀, 그 자체가 우리에게 불편하고 어렵고 찔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들은 참으로 행하기 어렵고, 불가능하기까지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빰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대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주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어라, 일곱번씩 일흔번도 용서해라, 이제는 아예 용서를 넘어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시지요.  이러한 말씀들을 들으면 아득해 집니다.  상식적으로 절대 이해가 안될 뿐더러 그럴게 할수도 없을 것 같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씀이 바로 하나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완전히 임하는 그날에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불가능하게 보이는 말씀을 회피할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already)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행하는 사람에게 바로 하나님나라가 시작되고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빨간색으로 나와있는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있는 그대로를 가르치고 선포하는 교회는 요즘에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듣기에 귀에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귀에 거슬린다는 것이 그렇게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선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 쓰라렵기 때문입니다. 이 쓰라림의 경험이 없으시다면 한번 가슴에 손을 얻고 냉정히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믿는 것은 잘먹고 잘사는 축복된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십자가에 매일 매일 못박는 삶입니다.  예수믿고 축복받는다는 것이 돈 잘벌고 사회에서 성공하고 호위호식한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오늘날의 교회는 거리낌 없이 가르칩니다.  바로 하나님나라가 없는 가르침입니다. 

 

둘째로 하나님나라가 이미 우리가운데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인식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도래할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현세에는 하나님 나라를 외면합니다.  ,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나라는 어차피 미래의 일이니, 지금에는 그저 좀 대강대강 살고, 또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어차피 미래에 일이니 지금 현재는 대강 내 사리사욕 챙기며 권력욕과 돈을 추구하며 평수를 늘리고 자녀보험을 하나 더 들어두는 것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어차피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는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알아서 역사하시는 것이고, 그러기에 내가 현재 뭐 특별히 할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좀 한눈팔고 살아도 괜찮다고 은근슬쩍 타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틀리지는 않은 말 같습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맞기는 합니다.  그러나 유명한 신학자인 톰 라이트의 비유로 설명하면, 우리는 설계자에게로 부터 각자에게 맡긴 설계도면을 받았고, 그 도면에 따라 각자 자기의 맡은 부분에 따라 돌을 깎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돌이 어느 자리에 가서 어떻게 놓여 건물 일부가 될지는 현재 지금 이 돌을 깍으면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 설계자가 오시면, 그 건물 전체의 윤곽이 드러나고 결국에는 설계된 건물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그때를 기다리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나라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위한건설인 것입니다.

 

세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숨기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유로 말씀하시고 설명하셔도 결국 귀있는자가 듣는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 닫는 마음은 하나님도 여실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들었던 모두가 그 뜻을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당시 유대신앙의 리더격인 대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아예 그 비유를 듣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을 쫓았던 제자와 그 무리들만이 그 비유를 듣고, 또 그 비유의 의미를 예수님이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하지만 희한하게도 다 알수가 없습니다.  숨겨져있고 가려워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 많은 교회들에게도 이 하나님의 나라가 숨겨져있고 가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교회안에서도 잘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맡겨 주셨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들린다. (마가복음 4:11)  한마디로 많은 교회가 저 바깥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없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함이 없으면 비록 교회의 형태를 띄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저 바깥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숨기워진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중심주제이면서 기독교신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교회에서는 잘 들을수 없고 배울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교회가 교회다운 기능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잘 드려서 돈을 많이 벌어 성공했다는 록펠러나 카네기를 예를 들면서도, 자기 부모와 친족을 버리면서까지 십자가를 쫓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없는 교회에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의 물질주의와 상향성에 대한 욕구가 교회에 만연한 체로 세상의 기득권과 권력체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교회에서는, 끊임없는 자신을 돌아봄과 회개가 요청되는 하나님 나라는 선포될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무엇인가로 고립된 섬같은 고독을 느껴보지도 못한 체, 끊임없는 큰 집과 더 높은 지위만을 바라보고 쫓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날개를 달아주는 역할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러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들을 수 없고 배울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바깥 사람들에게 숨기워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거룩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주되심을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인정할때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한 두 영역이 아닌 전영역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주되심 (Lordship)이 세워져야 합니다돈과 재물에 대해서는, 자녀에 관해서는, 출세에 대해서는 눈감아 지는 것이 아닌...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이 인정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회개와 기도, 용서와 사랑, 그리고 그 의를 구하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질때...  우리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고 운동성을 가지고 미래에 완성되어질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주되심을 인정한다는 것은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라는 엄청난 주제를 짧게 쓰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을 글 쓰기 전부터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실행을 해본 무지막지한 저의 용기에 저도 놀라곤 합니다.  ^^  무식하지 않으면 용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부디 성령하나님의 도움으로 제 부족한 글쓰기가 많은 성도분들에게 잘 이해되기를 계속 기도하게 됩니다그리고, 계속해서, 모든 영역에서 주되심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부를 쫓는 교회가 숨겨둔 하나님나라 
함께잘다니는교회'(8) '아직도 숨겨진 하나님나라 (Kingdom of God)'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93

 

 

더 읽어볼만한 책들

 

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톰 라이트,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짐 월리스, “회심

양용의,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19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아홉번째  03/29/2010

 

                                                                                                                                                                                                                  남상곤

 

 

"상처입기 쉬운 (Vulnerable)"

 

 

Vulnerable

 

유학을 올때, GRE라는 시험을 보았습니다.  GRE 라는 시험이 생소하신 분은, 미국에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를 갈때 보는 시험인 SAT와 비슷하면서 좀 더 어려운 시험으로 보시면 될듯 합니다. 그래서 SAT와 유형이나 구성이 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SAT 문제 (특히 영어)를 보신분은 아시겠지만은 낯설고 어려운 단어들을 외워야만 풀수 있는 문제들이 대다수입니다.  GRE의 경우는 아무래도 SAT보다 고등시험이니 훨씬 더 어렵고 잘 안쓰는 어휘가 많이 나오고, 그 뜻을 알아야만 풀수 있는 문제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미국학생들도 어렵고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저같은 사람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어마어마한 단어를 매일 외우고 잃어버리고를 반복하고, 가장 덜 까먹을때를 잡아, 그날 시험을 보고 간신히 원하는 점수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러한 단어들을 공부하면서도, 실제로 공부할때는 그러한 단어들을 거의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지금 그 단어들을 우연히 보게되면어디서 본 단어인데? ! GRE 공부할 때 외웠던 단어였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만 뜻을 모르는 것을 보면서 쓴웃음을 짓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어떤 옷의 단추를 뜻하는 단어도 그 당시에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사전에도 없는 단어들도 많았었습니다.  그런 단어들 중에 유달리 기억에 남는 몇 안되는 단어가 ‘vulnerable’ 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그리 어려운 어휘는 아니어서 가끔 일상생활에서 쓰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쉽게보는 단어는 아닙니다.  뜻은취약한, 연약한(신체적정서적으로 상처받기 쉬움을 나타냄)’ 이었고 발음도 쉽지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http://endic.naver.com/enkrEntry.nhn;jsessionid=AD63B98C69F52CBD6E6CB28E18828971?entryId=6deacba33f1643cf87df8bf052e3cd68&query=Vulnerable

(링크를 따라가셔서  아이콘을 누르시면 발음을 들으실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vulnerable 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된 신앙서적을 읽을 때 심심찮게 나타나곤 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언급할때 자주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표현하는 여려 형용사 중에 가장 낯설었던 단어가 바로 vulnerable (상처입기 쉬운) 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념이 잘 정리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저 vulnerable라는 단어가 예수님과 관련있고, 그래서주목해서 봐야할 필요가 있겠구나란 생각을 하게되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

 

 

그 즈음, 한국에헨리 나우엔이라는 가톨릭 예수회의 사제의 책이 기독교 서점가에 인기였었습니다.  천주교 사제출신의 헨리 나우엔의 책들은 오히려 한국 천주교보다 개신교에서 더 인기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의 책 대부분이 번역되어 나와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저도 몇권을 읽어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제 출신으로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적으로 공부하던 헨리 나우웬은 예일과 하버드의 교수로 봉직하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데이브레이크라는 캐나다 토론토의 장애우를 섬기는 단체로 가서 섬김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습니다.  저도 그분의 삶에도 큰 감명을 받았고, 실제로 그 분의 저작들을 몇권 요약해서 레포트를 쓴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저는 무엇인가 깊은 영성이 있는 것 같은데, 정확한 이해도 하지 못한채로 그냥 참대단한 영성가다라는 생각으로 흘려버린지 이제 10년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때 나우웬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상처입은 치유자 (Wounded Healer)’는 우리들 사이에 자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용어였지만 무슨 뜻인지는 그 당시에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Vulnerable 과 상처입은 치유자

 

그런데 이 ‘vulnerable’ 라는 단어와 헨리나우웬의상처입은 치유자가 제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깊이 바라보게 되면서 연결된 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vulnerable’ 하면서 동시에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생각을 하게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묘사하는 형용사로서의 ‘vulnerable’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잘 표현해주는 단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은 자신이 상처받을 것을 아시고도 몸을 던져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특히 십자가에서 벌거벗긴채 달려, 친구와 제자들의 배신과, 사람들의 모욕과 오해속에, 마지막으로 기대었던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외면을 당하고 외롭고 고독하게 십자가서 죽임당하시는 장면은 ‘vulnerable’라는 말을 잘 실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완벽한 인간이셨기에, 외롭고 고독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고뇌, 십자가를 저야만 하는 것, 그리고 하나였던 성부 하나님과 분리되는 고통, 그리고 사람들에게 몸을 내어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셨지만, 예수님께 남은 것은 배신과 모욕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잘 상징한 장면이 바로 십자가에 벌거벗은채로 달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군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떠들고 다녔으면서저 꼴 좀 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와 보라지?’  갖은 저주, 비아냥, 조롱과 오해, 박해와 질시는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으로서도 견디시기 쉬운 일이 아니었을것 같습니다.  온몸을 던져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도 배신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불러보지만, 하나님마저도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예수님은 상처받기 쉬운 분이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상처받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온몸을 던져 상처입을 것을 알고도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아무말 없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시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vulnerable’ 하셨던 것입니다.

 

 

 

 

용기있는 자가 미녀를 쟁취한다

 

삼수를 해서 들어간 대학에서는 많은 후배들이, 두 세살 많은 저에게 자주 연애상담을 하러 오곤 했습니다. ‘형님, A자매가 좋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럴때마다 저는 거리낌없이 후배들에게가서 고백해라,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쟁취하는 거야!’ 하면서 후배들의 등을 떠밀어 주었습니다.  제 기억에 한번도 성공했던 후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대가 된 자매의 눈에 백마를 타고 왕자님이 나타난 들,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저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그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을 격려하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가라!  이 자매(산지)를 내가 주소서! 하고 갈렙의 믿음으로 나아가라!’  보통 거절당하고 온 후배들은 너무 괴로워했었고, 저는 등 떠밀은 죄가 있기에, 그 후배들을 주로 맛있는 것을 사줌으로써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 후배들은 그렇게 그렇게 마음이 강하여져 갔었고, 지금은 다들 어쩜 그리 하나님안에서 아름답고 지혜로운 자매들을 만나 좋은 가정들을 다들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제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  어쨌든, 제가 말하고자 하려는 것은 이렇게 마음의 고백을 하러 나아갈때, 그 때가 바로 vulnerable이 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없이 살다보면 이렇게 무방비상태의 vulnerable한 채로 다른 사람에게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자매에게 마음을 고백하러 나가던 제 후배들은, 갑옷을 해체하고 상처받을 것을 각오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방어가 없기에 그때 당하는 상처는 치명적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vulnerable하고 나아가지 않으면 시도조차 못하는 것이고, 자매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없으면 사랑도 얻지 못하고, 상대방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 20대 초반의 자매가 당연히 거절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후배가 상처받을 것도 너무 명백히 알고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그 후배를 말린다고 한들, 그 후배가 그 마음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몸과 마음을 던져 vulnerable한 채로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그 도전을 하지 못한 사람은 그 아픔이 어떤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냥 아프고 고통스러우나, 뜻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상처입은 치유자란?

 

 

헨리나우웬의상처입은 치유자는 정말 제가 단순무식하게 요약하면 (이렇게 하는 제가 참 무식해서 용감하다고 자부합니다), 상처입은 자가 상처받은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원천으로 이용되는 방법을 사역자가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처받은 사람에게 나아갈 때 우리는 환대(hospitality)의 방법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환대는 상처받은 사람이 제공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공동체가 치유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 곳에서 상처가 치료되고 아픔이 경감되어서가 아니라 상처와 아픔이 새로운 비전을 위한 출구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고백할 때 서로의 소망이 깊어지며, 서로의 나약함을 공유할 때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힘을 기억하게 됩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중에서- 

 

 

상처입은 치유자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지않고 정면으로 직시해서 그것을 온몸으로 부딪히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는 (깊이 있게 나누기는 지면상 곤란하지만) 소외감, 분리, 고립,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그를 깊은 영성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들 자신의 고뇌를 통해 영적인 삶을 살도록 격려하게 했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속에서 내가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받은 상처를, 내가 이웃과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마음을 던져 vulnerable한 각오를 하고 마주하는 상처들을 통해 새로히 사람들을 치유하기 원하시고, 또 그러한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상처가 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vulnerable 상태로 벌거벗은 채 몸과 마음을 던져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통에는 소명이 있고,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다의 가볍고 단순한 차원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러한 고통은 내 죄로 인한 것이거나 상대방의 죄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는 고통과 상처는 남에게 자신을 내어주기위해 용기를 가지고 vulnerable하게 나아갈때 받는 상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나아가려면 반드시 갑옷을 벗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던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매에게 마음을 고백할때도 마음을 던져 vulnerable한 상태가 되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데 마음을 던지지 않으면 치유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던져 사랑한 예수님앞에서 언제나 무한한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먼저 가셨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을 것임을 아시고, 아프고 고통스러울 것을 아시고 몸과 마음을 던지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위로가 있고 치유가 있습니다. 

 

 

 

그 길 가시렵니까?

 

제가 헨리나우웬의 영성에 대한 이해가 짧아 글이 횡설수설하고 길어짐을 느낍니다.  짧게 정리하면, 아무도 상처받기 원하지 않은 이 시대에, 하지만 상처를 받을수 밖에 없는 지금에 하나님께서는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부름에 답하려려면 반드시 갑옷을 벗고 벌거벋은 vulnerable 상태가 되야 합니다.  그리고 그 vulnerable한 상태에서 받게되는 상처는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그 길만이 다른 사람에게 진정 나아가는너의 이웃을 너의 몸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9)의 가장 큰 둘째되는 계명을 지키는 길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길에 초대받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아직 때가 아닐 수도 있고, 아직 웬지나는 멀었다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완전히 준비하고 가는 길이 아니라 바로 지금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첫 발자욱을 디디기만 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물론 평평대로는 더욱 아닙니다.  사막이 될수도 있고, 거친 비탈길이 될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고통스럽고 고난의 길입니다   이 길에 초대받은 사람도 소수이지만, 초대를 받은 사람 중에서도 그 길을 실제로 걷기로 한 사람은 더 소수입니다.  모두가 나이스하고 쿨하고 깔끔하고 상처받기 원하지 않는 지금의 시대에는 정말 더 좁은 문입니다. 

 

그래도 그길 가시겠습니까?  자신 있으십니까?  이 길은 정말 아픕니다.  그리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도 가시렵니까?  그럼 같이 가십시다.  그 여정에 많지는 않지만 친구들도 있고, 먼저 걸어갔던 선배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가셔서 길을 내셨기 때문에 곳곳마다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수 있습니다.  

 

 

 

 

나가면서

 

정말 헨리나우웬의 깊은 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체, 이렇게 글을 쓰는 제가 참 한심하기도 하고 용감하기도 하고, 걱정이 앞섭니다만, 읽으시는 분들을 잘 이해하게 해 주실 성령하나님을 기대합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헨리나우웬의 책들을 읽어보시기를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영적 발돋움> <모든 것을 새롭게> <춤추시는 하나님> <친밀함> 등등 많은 책들이 잘 번역되어 있고 우리교회 도서실에도 몇 권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두껍지는 않은데 생각보다 페이지가 잘 안 나가실수도 있습니다.  ^^

 


 

더 읽어볼거리

 

헨리 나우웬의 생애와 영성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한 사이트입니다.

http://blog.ohmynews.com/junnamu/29827

 

 

 

'상처입기 쉬운(Vulnerable), 상처 입어야 하는'
'함께잘다니는교회'(7) 상처 받기 원치 않는 시대를 살며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77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11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일곱번째  03/18/2010


짜장면이냐 탕수육이냐?


                                                                                                   남상곤

 


 

짜장면이냐 탕수육이냐?

 

김장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나라로 가게되었습니다.  천국문에 다다르자 예수님이 두팔을 벌려 수고했다 라고 맞아주셨습니다.  김장로는 상기된 표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이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구나하는 마음에 설레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까지의 먼 여정에 출출하겠다며 천국중화요리식당으로 김장로를 데려가서 짜장면을 시켜주셨습니다.  김장로는 예수님께서 직접 맞이해주신데다가 처음 맛보는 천국짜장면의 맛에 황홀했습니다.  천국 짜장면은 너무 맛있었지요.  그런데 반쯤 먹었을까, 옆의 자리에 같은 교회에 다녔던 김집사가 탕수육을 먹고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김장로는 너무 반가워서! 김집사 아닌가?  이거 너무 반갑네!” 하고 즐겁게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반가운 인사도 잠시, 김장로는 갑자기 예수님께 서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김집사는 더 비싸고 맛있는 탕수육을 먹고있는데 자신은 짜장면만 먹고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장로는 예수님께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예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김집사는 집사고 저는 장로인데, 왜 김집사는 탕수육을 주시고 저는 짜장면만 주신 겁니까?” 하고 볼멘소리를 하자 예수님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김장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김목사배달나갔다.”

 

 

 

전 신자 제사장 교리

 

이 가상의 우스개 이야기는 우리에게 소중한 단초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웬지 집사-장로-목회자의 순으로 하나님의 일을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인양 생각하곤 합니다.  교회의 일을 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천주교에서는성직()’ 라는 말을 씁니다만, 우리 개신교에서는성직()’ 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직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성직이고 모두가 제사장이지, 성직자라는 특수한 계급의 사람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로마카톨릭의 부패에 대항하여 일어난 종교개혁의 핵심중의 하나가 바로전 신자 제사장 (Priesthood of All Believers) 교리입니다 (흔히만인 대제사장교리라고도 합니다만, 저는전 신자 제사장교리라고 쓰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링크에 있는 김기현 목사의 글을 참조하십시오.)

 

전신자 제사장 교리는 말 그대로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우리의 죄 때문에 제사장이 주관하는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때 찢어진 성소의 휘장은 이것을 상장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태복음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마가복음 15:38)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누가복음 23:45)

 

 

구약시대에 지성소에서는 대 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갈수 있었던 것이 이제 모든 신자가 모든 날에 지성소를 들어갈수 있도록 개방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제사장의 집전하는 제사없이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왕과 같은 제사장이 되었고,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며, 거룩한 민족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 모두를 제사장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더 이상 제사장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지않으며,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직접 담대하게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6)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베드로전서 2:5)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5:10)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전 신자 제사장교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이루신 일이며, 종교개혁을 통해 다시한번 강조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잘 실감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는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에서 지도자로 섬기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의 제사장과 비슷한 역할을 주관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가 구약시대의 제사장과 같은 권위와 신분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본질적인 차이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목회자가 보다 전문적으로 목회를 하기 위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훈련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평신도와의 아무런 신분적 차이가 없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 즉 분업의 차이이지,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똑같은 제사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목회자에게는 특별한 영적인 능력과 권위가 있고, 마치 구약의 제사장이나 선지자 같이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목회자는 제사장이나 선지자라기 보다는 교회의 리더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가 있어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목회자는 반장일 뿐 선생님이 아닙니다. 반장은 선생님의 필요에 의해 특정한 역할을 맡은 한 학생에 불과합니다. 반장이 선생님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반장은 그저 여러 학생 중 한 명입니다. 단지 특정한 역할을 맡았을 뿐입니다. 목회자는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반장으로 등장하는 엄석대처럼 선생님(하나님)의 권위를 자기 권위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목회자는 결국 엄석대처럼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남오성 ,” 교회 개혁 Q&A (1) 만인 제사장주의에 대하여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57

 

 

 

 

전 신자 제사장 교리가 그래서 뭐?

 

그러면 이제 전 신자가 제사장이며,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더이상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특수한 계급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지금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첫번째로 그것은 목회자보다는 평신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목회자는 제사장이나 성직이 아니고, 목회자의 설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선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은 여전히 목사의 설교만을 하나님의 말씀선포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목회자의 설교나 성경공부에만 의존하여, 평신도 스스로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기도하는데 소홀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회자의 설교와 새벽기도의 말씀을 듣고, 충분히 성경을 알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목회자를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어, 평신도 스스로 말씀을 읽고 적용하고 스스로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하게 된다는데 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중세 가톨릭교회처럼 신부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 스스로 성경을 펴서 오늘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에 직접 응답하시기 원하십니다.

 

 

두번째로, 이제 믿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적의 권리를 목회자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제사장의 권리라면, 바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려고 하셨던 중보의 삶을 우리도 동일하게 전도와 기도를 통해서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이것을 목회자의 일이니 목회자에게만 맡겨두자 라고 하면 제사장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모든 덕목은 사실 믿는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야 하는 역할입니다.  섬김과 청빈, 그리고 순종과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일이 목회자에게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가 추구해야하는 삶인 것입니다.  목회자가 삶의 목표를 재물, 소유, 육체, 쾌락, 명예, 인기, 권력, 군림, 권위에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듯이, 우리 믿는 신도들과 목회자 수준의 낮아짐과 섬김과 봉사, 정직과 실천, 자기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구약시대에는 제사(예배)가 성전을 통해서만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 되고, 우리 몸이 성전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제사이자 예배가 되었습니다.  주일날 오전에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의 우리 모든 삶이 다 하나님께 드릴만하고 기뻐하시게 할만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은 공부하다 죽으면 순교고, 직장인은 직장에서 직장일때문에 과로로 숨져도 순교가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 1)

 

 

 

 

마지막 질문

 

 

글을 맺으면서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목사로 평생을 봉직하고 천국에 간 목사와 그냥 평범히 한 가정의 주부로 평생을 지내고 천국에 간 주부가 있을때, 과연 누가 더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을 받을까요?  이제 어떠신가요?  지금도 목사라고 생각하시나요?  답은아무도 모른다가 정답입니다.  목회자라도 목회자의 일에 소홀하면 부끄럽게 천국에 들어갈 것이고, 주부라도 일상의 삶에 충실하면 하늘에서 가장 큰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둘다 제사장이요, 둘다 하나님의 자녀요, 둘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나가면서

 

이 꼭지의 글은 기본적으로 아래의 두 글을 크게 참조하여 썼습니다.  두 글의 내용과 형식을 적극적으로 참조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남오성 ,” 교회 개혁 Q&A (1) 만인 제사장주의에 대하여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57

 

김기현, “만인제사장인가, 전 신자 제사장인가?”

http://blog.daum.net/sionaba/9834391

 

 


목회자가 '엄석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함께잘다니는교회'(6) 다시 '전 신자 제사장 교리'로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49

 

posted by paulus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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