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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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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 해당되는 글 3

  1. 2010.07.22 (13) 헌금리스트와 헌금채2
  2. 2010.07.22 (8) ㅇㅇㅇ 집사님께
  3. 2010.07.22 (1) 예배가 너무 졸려요
2010. 7. 22. 16:23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세번째 05/07/2010

                                           남상곤

 

“헌금리스트와 헌금채”

 

 

들어가며

ㅇㅇ교회에 와서 이전과 다녔던 교회와 색다르게 보았던 몇가지 중에 하나는 헌금입니다.  우선 주보에 헌금별로 한 성도분들의 이름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주 인상깊었고 두번째로는 헌금시간에 헌금통이 돌아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이전에 다녔던 한국이나 미국의 다른 교회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교회와 같이 주보에 헌금을 한 성도들의 이름을 나열하거나 헌금채를 쓰는 많은 교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제가 이것에 대해 접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은 처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이 두가지의 낯선 광경을 거의 2년동안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조심스러운 것은 제가우리교회의 이런 부분을 비판을 해서 바꾸자!’ 라는 것이 아닌이것이 어떠한 의미와 의도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한번 좀 다르게 생각해 보자입니다.  부디 오해가 없으시기를 두손모아 기도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가상의 예화

 

목사님의 설교가 지루하고 졸릴때, 설교시간동안 유달리 오래동안 주보의 이곳저곳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교회주보의 헌금하신 분들의 명단을 보며 이름을 하나하나 보며, 머리속으로 주보에 나와있는 이름과 머리속에 저장되어 있는 이미지를 하나하나 맞춰보기도 합니다.  A집사님은 이번주에 주일헌금, 십일조헌금, 감사헌금에 선교헌금까지 하셨음을 보면서 웬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듭니다.  역시 요즘 사업이 잘되시는가 부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조금 얄밉게 여겨져서 웬지 싫었던 B집사님의 이름을 찾아봅니다.  역시 없습니다. 웬지 뿌듯하며그러면 그렇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각 헌금별 헌금액수를 봅니다.  우리교회에서 십일조헌금이 어느정도 퍼센트가 되는지도 보고, 머리속으로 일년 혹은 한달 헌금 총액도 재빠르게 계산해 봅니다.  이만하면 불경기에도 불구하고교회재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겠다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직도 설교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창을 주보를 뒤척이다가 이제 성경을 여기저기 들추어봅니다.  성경사이에 끼어져 있던 옛날 교회행사 간지가 있습니다.  그것도 꺼내 여기저기 봅니다.  ! 다행히 설교가 끝났습니다.  마음을 모두어 눈을 감고 기도를 합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헌금시간입니다.  헌금위원분들이 나오셔서 기도하시고 헌금채를 돌립니다.  헌금채를 돌리는 것을 보면서 헌금을 빨리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갑을 꺼내 보니 아차!  5불짜리와 50불짜리 지페만 있습니다.  5불짜리만 넣기에는 뭔가 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50불짜리 넣기도 좀 그렇습니다.  헌금채는 다가옵니다.  무엇을 넣어야 하는 것인가?  한창 고민하다가 오늘은 50불 짜리를 넣습니다.  재빠르게 돈을 넣고 헌금봉투에 이름을 쓰고 침을 발라 붙였습니다.  찬송을 은혜롭게 부르다가 헌금채가 올 시점에 긴장하고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합니다.  왔습니다. 헌금채를 받고 헌금을 하고 옆분에게 헌금채를 돌리고 비로소 안심하며 찬송에 집중합니다.  좀 아깝고 아쉬운 생각이 들긴 하지만 뭐 나중에 택스면제혜택을 받는 부분도 있는데다가 하나님께 헌금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은거지 라고 생각하며 나의 믿음을 스스로 대견히 여깁니다.  이제 축도 마치면 빨리 가서 식사줄에 너무 늦지 않게 설 준비해야 겠습니다.

 

 

 

주보에 나오는 헌금한 성도 리스트

 

주보에는 일주일간의 교회소식이나 예배안내와 순서등이 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중요한 사적인 문서가 아닌 교회의 공적문서입니다.  거기에 매주 헌금하신 분들의 명단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올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 리스트를 올리는 것이 중요할지 정말 진지하게 그리고 오래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게 생각한 것은헌금 하신 분들이 헌금을 했는데, 혹시나 교회가 누락할까봐 확인을 시켜준다였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거 같은 것이, 저도 헌금을 할때 이름을 쓰기도 하고 안쓰기도 하는데, 이름 쓸때는 다음주의 헌금에 제 이름을 찾아봅니다.  그런데 없을때도 몇번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 이름을 고의로 누락시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처리과정에서 제 이름이 다다음주에 올라갈수도 있는 것이고 무슨 실수가 있을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정부에 가서지난주 헌금했는데 왜 내이름이 없냐라고 따지지는 않습니다.  그런것을 보면 꼭 확인차 올리는 것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두번째로 생각해본 것은 교육적인 효과입니다.  주보에 헌금하신 분들의 이름을 보면서 신앙교육적으로 이렇게 헌금을 정기적으로 꼭 해야한다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육적 효과라면 왜 교회 주보에는 리스트를 올리는데 홈페이지에는 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번째로는 헌금하는 것을 장려하고 경쟁관계를 유발시켜서 많은 헌금을 하게하려는 것일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을 한 실명이 나오기에 내 이름이 안나오면 상대방이 나를 교회에서 믿음없는 사람, 혹은 헌금않는 사람으로 오해당할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 이름이 나와야 하는 것을 의무처럼 여길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같이 헌금할때 이름을 쓰기도 하고 안쓰기도 하는 사람과, 혹은 아예 늘 무명으로 헌금을 드리시는 분들은 저 리스트로 무슨 피해를 보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밖에도 다른 중요한 이유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부족한 머리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리스트를 올리는 것인지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럴수는 없겠지만 주보에 헌금한 분들 리스트를 안올려본 주와 올려본 주의 헌금액수를 비교해보면 좀 의미있는 차이가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만 해보게 됩니다.

 

또한 헌금할 때 저는 꼭 제 이름과 안해 이름을 같이 적습니다.  그런데 헌금리스트에는 꼭 제 이름만 올라갑니다.  그래서 한번은 제 안해 이름을 먼저적고 제 이름을 나중에 적어보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제 이름만 나왔습니다.  괜히 안해에게 미안해 졌었습니다.  헌금리스트를 주보에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면 안해 (혹은 자매)의 이름도 같이 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혹시교회에서 부부도 헌금을 각각 따로하라라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헌금의 항목에 대해서도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교회주보를 보면 주일헌금과 십일조, 선교헌금이 큰 카테고리로 나옵니다.  중요헌금이라고 여겨지기에 그렇겠지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헌금보다 구제헌금을 주로 합니다.  저는 따로 십일조 헌금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근거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고 (자세한 것은 아래 더 읽어볼 거리를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제 십분의 일을 교회에 보고하는 것도 좀 거북스럽습니다.  그래서 몇몇 헌금으로 헌금을 나누어 내는데 이름을 쓰기도 하고 익명으로 하기도 합니다.  주로 구제헌금을 하는데, 구제헌금을 하고 다음주 주보를 살펴보면 제 이름은 선교헌금 항목에 있거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선교헌금을 한 것이 아닌데 거기 들어간 이름을 보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삼대헌금이 아닌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마이너헌금이 되는 것도 어떠한 근거와 의도인지 좀 궁금한 생각입니다.  물론 주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큰 액수를 차지하는 의미라면 그러한 규모의 기준보다 차라리 이번주 헌금하신 분들을 통칭적으로 (감사, 주일, 십일조 헌금의 구분없이) 그냥 올리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헌금항목별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번주 헌금하신 분들 하고 그 리스트를 헌금구별없이 그냥 이름만 주르륵 올리는 거지요.  그러면 감사, 주일,  십일조 헌금 세번 다 한 분은 이름에 꽃표를 해드려야 하는지 고민도 여전히 생기네요.  ^^

 

 

 

헌금함과 헌금채

 

헌금시간이 되면 헌금채가 돕니다.  제가 헌금채에 좀 불편한 이유는 세가지입니다.  첫번째는 저는 부부가 한몸이기에 (돈주머니가 하나이기에) 저의 안해와 제가 통상 헌금을 따로 하지 않고 같이 하는데헌금채에는 한사람만 헌금봉투를 넣을수 밖에 없습니다.  주로 안해는저보고 하라라고 하고 자신은 헌금채에 헌금봉투를 넣는 권리를 저를 줍니다.  하지만 저는 그 권리(?)를 안해에게 주기도 하는데 그럴때  참 난감할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헌금채가 제 차례에 왔는데 저는 헌금봉투가 없기에 그것을 받아 옆에 분에게 전달할때 헌금봉투 안넣고 옆으로 돌리면 뻘쭘(?)합니다.  제가 다른 분들을 유심히 보면 전혀 당황하거나 뻘쭘하지 않으시고 옆으로 잘 돌리시는 내공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저는 그런 내공이 아직 안되어서 헌금채가 왔는데 헌금봉투를 못넣고 돌릴때마다 얼굴이 화끈화끈 해집니다.  매주 노력합니다.  뻘쭘하지 않고 최대한 나이스하고 아무렇지 않게 해보려고 하는데  그래도 어색하기는 여전합니다. 

 

두번째로는 저에게 다가오는 헌금채 때문에 기도나 찬송에 집중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헌금채가 오면 빨리 헌금봉투를 넣고 (혹은 넣지않고) 다른 분에게 넘겨야 하기에, 지금 헌금채가 어디까지 와야 집중해서 봐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헌금시간에 하는 찬송의 가사에 집중해서 찬양하기가 쉽지않고 헌금채 돌리는 시간을 때운다는 생각이 듭니다.  헌금채가 아직 다 돌지않으면 목사님은 다시 3! 혹은 4!을 외치시면서 후렴을 한번 더 부르자고 하십니다. 헌금채는 다 돌지 않았는데 찬송이 끝나면 무시무시한(?) 정적감이 찾아올 수 있기에, 한번 더 그 집중하지 못하고 불렀던 찬송을 한번 더 불러야 합니다. 

 

세번째로는 동전을 넣거나 봉투없이 넣을때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우선 헌금채가 돌때 봉투가 아닌 그냥 돈이나 동전을 그냥 넣기가 힘듭니다. 웬지 반드시 헌금은 액수에 상관없이 봉투에 넣어서 해야할것 같은 의무감이 듭니다.  봉투에 넣어서 하면 더 성의있고 준비된 느낌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겁니다.  봉투에 넣어서 하면 더 준비했다라는 뜻도 있을수 있겠지만 그 액수가 숨겨져 있다는 것으로 부담없이(?) 헌금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폐를 넣을때는 웬지 옆사람이 내 헌금액수를 알게 되는 것 같아 좀 꺼려집니다.  그리고 헌금을 동전으로 하시는 분은 최근에는 거의 못 본것 같습니다만, 헌금을 동전으로 할수도 있습니다.  형편이 그럴수도 있고, 액수가 적다고 헌금 못내는 것은 아닐겁니다.  그런데 동전으로 헌금을 내면 웬지 분위기상 쪽팔리는 것 같고, 헌금채에 넣었는데 혹시나 헌금채안에 동전이 있을 경우에 내가 넣는 동전과 부딪혀 그 금속성의딸랑이 울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정말 뻘쭘할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거부감과 압박감

 

제가 이전에 다녔던 교회들은 헌금리스트가 주보에 올라가지 않았고, 헌금채가 돌지 않았습니다.  헌금리스트가 안올라오니 굳이 누가 헌금을 내고, 누가 헌금을 안내고 등의 전혀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 지금같은 생각을 아예 안해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헌금채 대신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전에 헌금함에 헌금을 했었고, 그때는 봉투가 있던 없던, 동전을 넣던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헌금함이 있다고 예배시간에 헌금순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시간이 되면 헌금위원분들이 교회헌금함을 열어서 그 헌금을 모아 앞으로 가지고 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올립니다.  헌금시간에 찬송을 방해받거나 다시한번 4절을 해야하는 경우가 적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헌금리스트가 주보에 올라는 것과 헌금채가 도는 것에 대한 성경적 혹은 역사적 의미나 맥락이 있는지 조금 찾아보았습니다.  몇몇 소수의 의견이나 자료가 있었지만 어느것도 확실한 성경적 혹은 역사적 의미를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 개교회 별로 하고있는 방식은 다 달랐던 것 같습니다.

 

혹자는 헌금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헌금리스트나 헌금채에 대한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신경쓸 필요는 없다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 같이 믿음이 부족하고 재정이 튼튼하지 않는 사람이나 새신자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는 새신자나 저같이 믿음이 부족한 신자들의 경우, 주보에 올라간 헌금하신 분들의 리스트나 헌금시간에 돌아다니는 헌금채를 보면서 웬지 모를 거부감(?)을 느낍니다.  게다가 헌금을 하기가 힘들정도의 재정상태를 맞은 성도들의 경우 (이 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분들도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그 리스트와 헌금채로 인하여 받게되는 압박감은 참으로 큽니다. 

 

 

 

글을 마무리하며

 

헌금은 하나님과 나와의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헌금(봉헌)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체면때문에 헌금을 하는 것과 그 액수가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보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내 재산이 100만불인데 1불 헌금했다고 그 사람을 나무랄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재산이 100만불이지만 부채가 200만불 일수도 있고 (그사람의 사정을 모를수 있고), 그 사람의 믿음이 1불짜리 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이지 제 3자가 왈가불가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헌금액수에 따라서 믿음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에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액수를 보시지 않고 그 헌금하는 사람의 자세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나가면서

 

제가 부족하기에 헌금리스트를 주보에 올리거나 헌금채를 돌리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요소에 대한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노파심에 강조하는 것은, ‘이것들이 문제가 있으니 바꾸는 것이 좋겠다가 아니라왜 이렇게 하는 것인지를 한편 되집어보자의 시도일뿐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헌금을 내는 것에 대한 세금보고 혜택에 대해서는 지면상 더 다루어 보지는 않았지만 한번즈음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간 기회가 있겠지요.

 

 

하나님과 나 사이의 헌금
함께잘다니는 교회(13) 헌금 리스트와 헌금채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532

 

 



더 읽어볼거리

 

 

십일조와 직분 없는 새들녘교회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740

 

교회 재정의 십일조로 아이들 밥 먹이자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45

 

십일조와 삼겹살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1865

 

십일조 수호자들의 불의함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166

 

한국교회의 변절과 십일조 강요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988

 

말씀을 전하고 돈을 받는 목사님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56

 

"장로·권사 되고 싶어? 돈 내"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755

 

헌금 채, 세상보다도 더 세속적인 악습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51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18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여덟번째  03/22/2010
 


ㅇㅇㅇ 집사님께


                                                                                                      남상곤

 

 

이 글은 제가 전에 다녔던 미주의 한 한인교회의 게시판을 통해 제가 연재했던 ‘함께 잘 다니는 교회’의 글들을 보고 A집사님께서 저에게 쓰신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A집사님께서는 당시 저의 첫글인 ‘예배가 너무 졸려요’ 에서 댓글로 기도를 좀 더 하고 글을 써라 라고 조언을 해주시고, 자장면이냐 탕수육이냐 라는 글 다음에는 저에게 직접 게시판을 통해 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좀 많이 길어서 걱정입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여지는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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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잘다니는 교회 – A 집사님께

  

들어가며

우선 A 집사님이 용기있고 진지하게 제 글에 대해 의견을 개진해주셔서 참 감사를 드립니다. 문제를 은폐하고 회피하는 것보다 이렇게 열어서 논의하고 또 이를 계기로 더 기도할 수 있는 계기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계속적으로 교회 안에서 진지하고 고민하면서 우리의 문제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계시는지 논의하고 기도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남상곤 형제님 

연초에 출장떠나 있을때 저를 포함해서 형제님도 교회서 집사임명이 되었다는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먼저글에는 형제님으로 호칭했으나 "형제님"은 여전히 좋은 단어이고 부를수록 친숙하게 느껴지기에 그대로 쓰겠습니다.  

 

--->A 집사님,

제가 서리집사가 된지 이제 8년째가 되는 것 같습니다.  유학을 나오기전에 집사임직을 받았고, 작년에 제가 서리집사가 아니었던 것은, 휴스턴으로 새로 이사와서 A교회에 새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것보다는 제 스스로 집사로서의 안식년을 개인적으로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직분보다는 차라리 교회안의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A 형제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혹시나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A 집사님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불편해 하실 분도 계실 것 같아, 저는 계속 집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글을 쓸 때는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리 신경 써도 읽는 사람이 글을 선택적으로 읽거나 또는 선택적으로 인용되면 곡해가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글을 쓸때에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기 위해 쓴 글이 종종 잘못 오해 혹은 오독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우선 A 집사님께서 제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거나, 선택적인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지 않으신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쓴 '짜장면이냐, 탕수육이냐?'의 글의 요지를 뭐라고 보시는지요?  제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것은 마지막 부분의 첫째, 둘째, 셋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집사님의 이해를 돕고자 간단히 요약하면, 첫째, 목회자에게 과도의존하여 신도들이 스스로 성경을 펴서 읽고 고민하는 데에 게을리 하는 것을 우려했고, 둘째, 대제사장이라면 대제사장의 직무를 소홀히 하거나 목회자에게 맡기지말고 스스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현재의 목회자 수준의 헌신과 섬김이 신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 세번째로 전 신자 제사장 교리가 단순히 우리가 제사장이라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일상의 삶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배가 되야한다 라는 세가지 입니다.

그런데 집사님의 글에 요지는 (제가 읽건데) 1. 하나님안에서 하나되는 것은 잠잠하고 침묵해야 한다, 2. 하나님은 권위와 질서의 하나님이기에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3. 그리고 기도하는 것은 어렵고 글을 쓰는 것은 쉽다. 4. 아울러 순종과 기도로 교회를 위해 문제제기를 하지말라 라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만약 제가 잘못 읽었다면 확인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제가 왜 집사님이 제 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고 생각했는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제 글의 요지는 '전 신자 제사장 (Priesthood of All Believers) 교리' 가 아닙니다. 제가 위에 언급한 세가지를 논하고자, '전 신자 제사장 교리'를 언급한 것입니다.  만약 집사님이 제 글의 요지를 이해하셨다면, 먼저 이 세가지에 대한 의견을 먼저 주시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집사님께서 '전 신자 대제사장 교리'에 대해서 이해나 동의가 어려우시다면, 제 글에 대한 반박보다 루터나 칼빈의 글을 읽으시고 그 글에 반박을 하시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2. 권위와 질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제 글에서 권위와 질서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언급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한 '전 신자 제사장 교리'에서 목회자가 더 이상 구약시대에 제사장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이야기한 것이, 하나님이 질서와 권위의 하나님이기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더 더욱 이해가 어렵습니다. 

3. 그리고 목회자의 권위와 설교권을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근거로 말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은 아니라고 알고있습니다.  그러면, 집사님의 개인적인 견해이신가요?  제가 부족하지만 성경을 읽고 공부한 바로는, 목회자의 권위와 설교권은 더 이상 목회자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고 배웠고 알고 있습니다. 

4. 기도가 어렵고, 글을 쓰는것은 쉽다는 것은 어떤 생각과 근거에서 말씀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왜 기도는 어렵고 글은 쉽지요?  기도와 글이 반대의 개념인가요?  기도도 글로 나타납니다.  성경의 시가서들은 글로 된 기도입니다.  왜 기도와 글이 반대의 개념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시편의 기자들의 많은 기도들이 쉽게 쓰여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5. 왜 교회에 문제제기를 하면 순종과 기도에 위배가 되는지 역시 잘 이해가 어렵습니다.  문제제기가 순종과 기도에 위배되는 것인가요?  저는 예수님이 오셔서 하셨던 사역의 대부분은 '문제 제기'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시고, 성전에 가셔서는 불같이 화를 내시고 판을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늘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고 논쟁과 토론(질문과 답변)이 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맞으니 잠잠하고 순종해라’ 라고 아니하시고 어처구니가 없는 뻔한 질문에도 더 좋은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6. 만에 하나라도 집사님이 말씀하신 순종과 기도라는 것이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그냥 눈감고 좋은 게 좋은 것이고 그저 은혜 (?)로 덮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정상이고,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기도로 함께 해야겠지요.  역사적으로도 문제가 없었던 교회가 없었고, 지금도 문제가 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형제님이 몇 번에 걸쳐 쓴 글을 관심과 또한 우려를 가지고 읽어 보았습니다. 많은 부분이 젊었을 때 저의 고민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공감도 합니다. 저도 한때 기성교회에 대해 많은 반발도 있었고 많은 상처도 있었습니다. 다음주 출장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분주한 가운데도 형제님의 마지막 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형제님께 글을 써야 하겠다는 마음을 주시네요. 형제님이 저를 위해서 기도한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몇 주 전부터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 집사님께서 제 첫글에 첫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또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하구요.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저도 집사님이 글을 읽고 기도하는 중에 집사님께 글을 써야 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집사님을 위해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글의 내용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 갈 수 있는 만인 제사장인 것은 맞습니다. 사역은 목회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평신도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평신도"라는 호칭도 어떤 의미로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사명 받은 "사역자"로 선 것이니까요. 전임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가 아니면 생업을 가진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가로 나눌뿐이지요. 어찌 보면 평신도라는 소극적 단어로 인해 생업을 가진 사역자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수동적인 교회안의 종교인으로 끝나는 우를 범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제가 만인 제사장이 아닌 ‘전 신자 제사장’ 이라고 표현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이 아닌 믿는 신자가 모두 제사장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평신도에 대한 표현도 맞지 않는 것에 동의합니다.  저 역시 평신도라는 용어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대처할 만한 용어를 만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그냥 성도라고 써도 좋을 것 같구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를 허락하였는가도 알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 만인 제사장을 허락하고 그것으로 끝난다면 각자 집에서 성경보고 기도하며 직접 하나님과 관계 맺고 신앙생활 하면 되지 왜 교회에 모여야 하나요?  그것은 우리가 공동체로 모여서 해야 하는 사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새로운 약속)은 교회를 통하여만 이루어 가십니다.  모여서 하나되어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건강한 교회 공동체는 하나가 됨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건강치 못한 교회들이 많기에 꿈과 같은 일 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신 일이고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되는 일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매주 정확하고 탁월한 지적이십니다.  교회의 핵심 중에 하나는 공동체성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적예배가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의 부르심은 개인적이면서 또한 공동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에서의 예배와 공적 예배가 공존해야 우리의 부르심이 완전해 진다고 믿습니다.  제가 '전 신자 제사장' 을 강조하고 일상에서의 예배를 강조한 것이 공적예배에 대해서 소홀히 해야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공적예배가 일상의 예배에 비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고, 일상에서의 예배는 덜 인식되거나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하나님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이, 한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여러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분열’이나 ‘하나됨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전체주의적 사고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하나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연합됨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집사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다양하고 배경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나가 될수 있을까요? 형제님처럼 꾸준히 자기생각을 교회사이트에 올려서 하나가 될수 있을까요? 그러면 몇백명의 사람들이 다 같이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교회는 하나가 될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함락할때 하나님께서 왜 7일동안이나 침묵케 하셨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잠히 하나님이 앞서 하시는 일을 보라 하시는 명령을 많이 보게됩니다. 우리가 말을 많이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없습니다.

 

------->집사님의 궁금점이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배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해서 한가지의 통일된 생각을 가져야 할까요?  저는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이트에 올린 글들은 그 배경과 생각이 다른 한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는 제 글을 모두가 다 동의할거라고 당연히 생각치 않으며, 동의할 수도 없다고 당연히 생각합니다.  자기 생각을 꾸준히 교회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왜 하나가 될수 없을거라 생각하시는지요?  오히려 생각이 다른 데, 아무 말 없이 있는 것이 더 하나되고 연합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안드시는지요?

중요한 것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서로의 인정과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생각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집사님께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되었다고 생각하시는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핵심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다른 신앙의 색깔과 노선을 같이 안고 갈 수 있는가?  그리고 내가 믿는 신앙만큼이나 상대방의 신앙도 존중해 줄수 있는가?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저는 집사님이 말씀하신 ‘자기생각을 자기가 편한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우선 다른 생각을 우리 교회안에서 표현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우리 교회 상황에서는 결코 편안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전체주의적으로 사고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하나의 시각을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A 집사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됨은 무엇인지요?  의견과 생각은 다르지만 잠잠하고 조용하는 것인가요?  생각은 다른데 그래도 잠잠하고 조용히 있어서, 다른 생각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됨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함락할때 7일간 침묵한 일이 집사님께서 이 맥락에서 드신 합당한 예가 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듭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위해 7일간 침묵한 것이, 과연 침묵하고 잠잠하라라는 문자적 의미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 상황에서 7일간 침묵하고 잠잠해야 했을까요?  저는 전적으로 여리고 성의 함락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 읽었고 묵상했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다르게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성경에 잠잠하고 침묵했다고 나오면, 모든 상황에서 침묵하고 잠잠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집사님께서 여러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생각만을 해야하니 잠잠하고 말을 하지말아라 하는 뜻으로 이 예를 드셨다면 저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깊은 영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에 저는 절대 동의합니다.  침묵을 통해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교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극복하려는 논의와 토론을 혼란으로 여기시는 것은, 집사님께서 교회사적인 전통에 대해서 잘 모르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문제에 대한 논의와 토론의 역사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조 등은 기독교의 공의회에서 토론으로 형성된 교리이며 (우리가 진리로 믿고 있는 삼위일체 교리의 경우, 성경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사항이 아니라 니케아 신조에서 여러 사람들의 논의와 토론으로 정립된 사항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당시의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회의, 하이델베르크 논쟁을 통해, 당시 로마카톨릭 교회신학자들과 격렬히 토론함으로써 종교개혁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러한 논의와 토론(말과 글) 으로 지금의 개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시면, 사도들은 토론을 통해서 교의를 형성해갔음을 알수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오라 우리가 와서 서로 변론하자’ 라고 말씀하시는 변론과 토론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

 

하나님의 교회를 허락하시고 교회에 질서를 원하셨습니다.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질서는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신앙적으로 검증받은 사람들을 세워서 장로로 교회를 취리하게 하셨고 신학교에서 훈련받은 목사로 말씀선포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권한과 권위는 어찌하다보니 우연히 그리 된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아무나 나서서 가르치면 질서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집니다. 완벽한 교회는 이땅에는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안드는 부분들이 많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훈련을 위해서 이용하시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고치자는 목적이 질서보다 우선하지는 않습니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습니다.

 

--------> 교회에 질서를 원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질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제가 잘 이해를 못했습니다.  집사님은 권위와 질서를 혼용해서 쓰시는 것 같은데 제가 볼 때는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의 단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일하시기에 편하라고 질서를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바라보는 하나님은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비효율적이고 일을 어렵게 하십니다.  4일이면 갈 수 있는 애굽에서 가나안의 여정을 40년으로 돌리십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비효율적인 일에 대한 비용을 하나님께서 감당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일하기 편하다’ 혹은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라는 것은 우리의 시각입니다.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시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입장에서 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질서가 있어야 일하시기 편하신 분이 아니고, 우리가 보기에 질서가 없어 불편해 보여도, 하나님께는 전혀 불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질서가 없더라도 그분의 일을 행하시는데 전혀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  집사님이 말씀하신 질서는 사람들이 일하기 편하기 위해 질서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집사님께서는 교회의 질서를 강조하시고, 질서가 있어야 하나님이 일하시기 편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교회안의 자유함이 필요하고, 주의 영이 계신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고린도 후서 3장 17절을 읽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 자유의 하나님 모두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어느 한가지의 속성이 우월하다라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여러가지 하나님의 성품 중에 집사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을 더 많이 만나시고 느끼셨듯이, 저는 자유의 하나님을 더 많이 체험합니다.  질서가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이라면, 자유 역시 하나되는 훈련이고 순종의 훈련입니다. 

목사만이 말씀선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점이 듭니다.  그것이 만약 목사만이 말씀을 선포할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이라면 저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으로 말씀을 선포할수 있습니다.  다만 말씀을 더욱 깊이있게 보기위해 그 역할을 전문적인 신학훈련을 받은 목사가 주로 하는 것이지 그것이 목사나 장로만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게 ‘전 신자 제사장 교리’ 이지 않습니까?

집사님께서 말하시는 '아무나 나서서 가르치면 질서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진다' 는 말씀도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 서로의 선생이요 제자입니다.  '아무나' 를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교회 평신도를 말씀하신 것이라면 역시 위험한 생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사님의 ‘아무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직분인지요?  직분이 되면 나서서 가르칠수 있고, 직분이 안되면 가르칠수 없나요?  과연 어디에 누가 직분이 되면 서서 가르칠수 있고, 안되면 서서 가르칠수 없는지 나와있는지요?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아무나' 일어나 가르친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 지금과 같은 권위를 당시에는 존중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의 고백을 보면 그 ‘아무나’ 인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는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이 임해 일어나 설교할때는 예수님을 3번이나 배반하고 나서 아마도 2달 정도의 시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당시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배반하고 부인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 입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와의 차이는 한사람은 자살했고, 한사람은 살아서 회개했던 차이입니다.   둘 다 예수님을 배신한 배반자였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베드로는 당시 '아무나' 보다도 못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예수님을 배반한 자가 무슨 설교냐?' 라고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한술 더 뜹니다.  바울은 스테판집사를 돌로 때려 죽인 사람입니다.  스테판 집사를 돌로 죽인 살인자가 다시와서 그 스테판 집사가 설교하던 예수를 전했습니다.  당시의 바울은 ‘아무나’ 보다도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구약시대와 달리 한명의 선지자나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이루어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야고보가, 안디옥에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또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이가, 바로 집사님이 말씀하셨던 '아무나' 가 성령을 받고 일어나서 가르치고 설교합니다.  구약에서는 '아무나' 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 '아무나'가 있습니까?  그 '아무나'는 이제 왕같은 대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대제사장을 집사님은 여전히 '아무나' 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집사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아무나’를 통해서 지금도 역사하시고 계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심지어 초대교회에서도 언제나 문제투성이었습니다.  과연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가한가?  바울이 과연 사도권이 있는 사람인가?  이스라엘을 두고 이방인의 땅에 가서 전도하는 것이 과연 먼저인가?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주의하고 대할 것인가?

당연히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제가 없는 척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죄인들인 사람들이 모였기에 당연히 문제가 있고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문제에 대해서 오픈하고 논의하는게 빈대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일까요 아니면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없는 척 질서만을 강조해서 회칠한 무덤이 되는 것일까요?  제가 경험한 바로는 오히려 문제가 없는 것처럼 덮는 곳에서 후에 폭발성을 가지고 문제가 크게 발생해서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문제가 있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용기있고 정직한 태도라고 믿습니다.  

교회의 문제를 고치는 목적이 질서보다 우선하지 않는 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은 아닌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제가 읽었던 성경중에 그러한 내용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성경읽기가 짧아 미처 못 읽었던 것이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은 교회의 질서에 관한 집사님의 개인적인 견해인 것 같습니다.  비록 그 견해에 저는 전혀 동의하지는 않지만, 집사님이 그러한 견해를 가지신다는 것 자체는 존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든지 견해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신앙생활은 권위의 싸움입니다. 평생 삶속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느냐 아니면 내속에서 속사람의 권위에 순종하느냐는 권위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국가나 교회의 권위도 하나님이 허락치 않으면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권위를 인정치 않으면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의 권위는 더더욱 인정하기 힘듭니다. 교회도 질서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가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위에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권위가 있듯이 교회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가 있습니다.

 

------->신앙생활과  바울선생님이 말한 내 속에서의 또다른 사람에 대한 갈등을 권위의 관점에서 보시는 것은 참 참신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서로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집사님은 국가나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셨지요?  그럼 하나 여쭈어 보겠습니다.  극단적인 예가 될 수도 있겠지만, 2차 세계대전에 히틀러의 독일도 국가이고, 국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니 무조건 순종해야 되는 것인가요?  당시의 일본제국주의 역시 국가였으니 집사님의 말씀대로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이니 무조건 따라야 하는것인가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에 천주교회도 어찌되었던 분명히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가 면죄부를 돈을 받고 팔았는데 그 교회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이고 그런 권위에서 나온 하나님의 명령이니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인가요?  집사님의 말씀, '국가나 교회의 권위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 과연 언제나 통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게다가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는 교회에서는 섬김입니다.  남에게 명령하고 ‘내 말에 잠잠히 순종하라’ 하는 것이 권위가 아니고, 예수님처럼 낮아지셔서 죄인들을 만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권위는 세상에서 말하는 권위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상에서의 권위는 ‘무조건 잠잠하고 순종하라’ 가 통하는 사회겠지요.   그런데 세상에서도 실제로 권위가 있는 사람은 ‘내가 권위가 있으니 잠잠하라’ 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정 권위가 있으면 알아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세상에서도 그러한데, 교회에서 하나님이 주신 권위라면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요? 더 잘 알고 더 잘 고개 숙일 것입니다.  보통은 권위가 없는 사람이 억지로 권위를 주장할때 하는 말이 ‘내가 권위가 있으니 잠잠하라’ 입니다.  ‘내가 권위가 있으니 내게 순종하라’ 라는 것은 최소한 기독교의 진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권위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가장 낮아지셨던 예수 그리스도에 가장 높은 권위를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집사님이 예로 드신 바로 그 로마서 13장이 과연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해서 무조건 적으로 순종하라라는 말씀일까요?  문자적으로만 보면 그렇게 쉽게 볼수 있습니다.    저도 그 구절을 주로 이용해서 무조건적으로 귄위에 순종해야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되었습니다.  말씀을 볼때는 그 말씀의 콘텍스트를 같이 보는 것을 교회에서 훈련받아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곡해되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i] 

질서와 권위를 강조하시는 분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하시는 로마서 13장을 강조하시는 분들 중에 그 배경이 되는 로마서 12장을 언급하시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간단하게만 언급하면, 로마서는 당시 로마제국에 의해 핍박받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쓴 바울의 편지입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은 이유는 로마의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을 흔드는 정치적인 반역행위였고 그래서 반역죄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마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기독인들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반역자들었습니다.  정치적인 반역의 의도가 전혀없는 순수한 신앙인들이 정치인으로 처벌받는 아이러니속에서 사도바울은 귄위에 대한 복종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복종은 무조건 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교회공동체는 국가에 대해서 언제나 '조건적' 으로 복종할수 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우상숭배나 살인(당시 로마군에 입대하는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할때, 기독인들은 그 요구에 복종할수 없습니다.  로마에 대한 반역의도가 없는 초대교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을 받을때 사도바울은 그 교회공동체들에게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나서 로마서 13장이 등장합니다.   바울사도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교회를 지속적으로 박해하던 거대한 악 (로마제국)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방법으로 '복종'의 윤리가 제시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배경을 깡그리 무시하고 로마서 13장을 대하면 그저 모든 권세와 권위는 다 하나님께로 온 것이니 무조건 순종해야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서가 쓰여진 콘텍스트를 고려한다면 과연 시대를 초월에 모든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라라는 의미가 아님을 명확하게 알게됩니다. 

그리고 집사님께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권위가 있다고 하셨는데 (물론 당연한 말이고 저도 동의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보통 부모에게 권위가 있다고 강조하시는 분들 중에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라’ 라는 성경 말씀을 더불어 강조하시는 분은 거의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따르라’ 는 아닐 것입니다.

 

형제님이 지적하는 문제의식들은 현대교회들에 분명 존재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은 ㅇㅇ교회사이트 보다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범기독교 사이트에 더 알맞는 내용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사이트에 올려지면 마치 우리 교회에 문제가 있는것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무는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걸고 누구나 볼수 있는 열린 공간에 올리는 글은 좀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쓰는 글들이 구체적인 실례를 들지는 않았지만,  A교회에 현재 다니고 있는 제가 느끼는 (그리고 적지 않은 우리 교인들이) 안타까움들을 나눈 것입니다.  제가 불특정 다수인 한국교회 성도 전체를 다룰 역량과 실력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그럴 위치도 아니구요.  다만 제가 이 글들을 우리 교회 사이트에 올리는 것은, 제가 다니고 있는 우리교회에 문제는 교회외부의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볼 수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를 우리교회 안에서 우리가 다루어야지 그것을 우리 교회 밖에서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집사님께서는 '교회 사이트에 올려지면 우리교회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요? 없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있는데 없는 척 하자라는 것인가요?

그리고 우리 교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이 모인 곳에 문제가 없겠습니까?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같이 열어서 논의하고 기도를 해야지, 문제가 있는데 없는 것처럼 덮는 게 과연 진정으로 교회에 덕이 되는 일일까요?  비단 저희 교회만이 아닙니다.  모든 교회가 다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당연히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모였는데 문제가 없다 라는 교회를 저는 한번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도 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는데 은혜(?)로 덮는 것이 과연 교회를 허무는 빌미가 될까요  아니면 문제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같이 고민하고 기도하는 것이 교회를 허무는 빌미가 될까요? 

 

형제님, 우리의 신앙의 진짜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변화하지 못하는 진짜문제는 몰라서 못하는것이 아닙니다. 교육이 모자라서 못하는것도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좋지않아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토론회가 없어서 못하는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고 싶어도 할수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인간의 능력만으로는 사탄의 세력을 이길수 없습니다. 교회는 말이나 구호로서 일을 하는곳이 아닙니다. 성경은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고 하나님의 신으로만 된다고 합니다. 이런유는 기도로만 이길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문제에 대해서 말만 많이하지 정작 엎드려 기도하지 안는다는 것입니다. 

 

------>집사님, 저는 우리 신앙의 문제가 제대로 온전한 복음을 교회를 통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온전히 배우고 알면 그 이후에 고민되는 행함과 섬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고민과 함께 잘 다니는 교회는 무엇이고 어떻게 사람들과 평화롭게 같이 잘 살아갈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주의화 되어있고 기복 신앙만을 강조하는 반쪽 복음만으로 저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바꿀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하나님께 이것을 놓고 엎드려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기도는 많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앙과 믿음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토론은 잘 안한다고 생각합니다.  근거없는 유언비어나 수군거림은 혹시 많을지도 모르지만, 진지하게 우리교회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태도로 나누는 것은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말하기는 쉽습니다. 글쓰기도 쉽습니다. 남의 허물은 잘 보입니다. 인터넷 뒤져보면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현대교회의 문제점들을 쓴소리로 고발하는 좋은 글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쓴소리로 변화를 가져올까요? 친절합시다! 외친다고 친절해 질까요? 겸손합시다! 외친다고 겸손해 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교회를 위하여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명령하십니다. 구호를 외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말의 성찬에 있지 아니합니다. 순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기도가 어렵고 글쓰는 것은 쉽다고 집사님이 말씀하셨는데, 집사님은 글쓰기가 쉬우신가요?  저는 글쓰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쩔 때는 기도보다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어떠한 면에서 글쓰기는 쉽고 기도가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집사님은 글을 쉽게 쓰시고 기도를 어렵게 하시는지 몰라도 저는 글쓰기도 어렵고 기도도 어렵습니다.  글을 쉽게 쓰시는 집사님이 솔직히 부럽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시면 글을 보고 글쓴이가 기도를 많이 하고 썼는지 적게 하고 썼는지 알 수 있는 것인지요?

그리고 남의 허물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이요, 우리의 문제입니다.  제가 문제 제기를 했다고  남의 허물을 쉽게 보아 남의 허물을 지적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저의 허물, 나아가 우리의 문제를 논한 것입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 제기는 작게는 저의 허물이요 넓혀서는 우리교회의 우리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논해야 하는 것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쓴소리가 변화를 가지오지는 않지만 변화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목회자가 세습하는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뜻있고 용기있는 분들의 문제제기로 이제 그 문제가 심각한 문제이고 기도해야할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세습은 일어나지만 (변화는 없지만), 이것을 문제있다 라고 인식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변화는 우리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 집사님이 저보고 ‘친절하자’, ‘겸손하자’ 구호를 외친다고 하셨는데, 집사님의 논리대로라면 지금 동일하게 집사님도 ‘기도하자’, ‘잠잠하자’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친절하고 겸손하자가 구호라면, 집사님의 기도해야한다 순종해야 한다 역시 구호겠지요?  맞습니다!  집사님 말씀대로 이렇게 구호만 외쳐서야 당연히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요? 

친절하고 겸손하자고 해서 집사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변화될거라고 의도도 기대도 하지 않았구요.  그런데 집사님의 말씀대로라만 기도하고 순종하라고 해서 변화가 이루어 지던가요?   설사 그렇다고 순종만을, 기도만을 강조한다고 변화가 이루어질까요?  기도를 할때 내가 하는 기도가 바른 기도인가?  바른 기도제목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한번 쯤은 진지하게 기도와 같이 같이 병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대로 보시는 것은 참 위험하신 생각이라고 봅니다.  집사님은 지금 제가 ‘기도는 안하면서 글은 쉽게 쓴다’ 라고 가정을 넘어 아주 위험한 단정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 첫글의 댓글에서도 ‘기도를 하고 글을 써라’ 라고 권유해주셨는데요, 거기에서도 동일하게 제가 ‘기도를 하지않고 글을 쓴다’ 는 아주 위험한 단정을 너무나 쉽게 하시더군요.  제가 여기에 대놓고 유치하게 ‘저 기도하고 글 썼습니다’ 라고 답변을 달아야만 집사님의 위험한 단정이 사라질 수 있을거라는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더욱 글쓰기가 저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는 힘듭니다. 왜냐 기도는 능력이기에 사탄이 우리에게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대여섯시간 앉아서 글쓰기와 한시간 엎드려서 기도하기와 어느것이 더 어려울까요? 저의 경우를 보면 기도하기가 더 힘듭니다. 사탄이 글쓰는것은 방해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러 엎드리면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왜냐? 기도에는 실지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  맞습니다.  기도는 힘듭니다.  기도는 노동이고 노동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기도를 강조하고 기도를 많이한 우리 한국교회는 이렇게도 영향력이 없고 개독교라 불릴까요?  한시간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으로 부족한 것일까요?  두시간, 세시간 엎드려서 기도하면 영향력이 생기고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되는 것일까요?  혹시 잘못된 내용을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나와 내 가족만 잘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닐까요?  한번 우리의 기도를 뒤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요?

집사님은 글은 쉽고 기도하시가 힘들다고 하셨지요?  저는 글쓰기와 기도가 다 힘듭니다.  그리고 대여섯시간 앉아서 하는 글쓰기 자체가 기도가 될수있는다는 것을 저는 배웠습니다.  집사님은 보시기에 ‘젊고 아무것도 모르는 집사가 편하게 앉아 쓰는 글은 쉽게 쓰면서 한시간 엎드려서 하는 기도를 왜 안하나?’ 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말이고 또한 글입니다.  비록 엎드려 한시간 기도하는 것만큼의 육체적 노동은 아니지만, 저는 ‘글을 쓰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구나’ 사실을 요즘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글을 쓴다고 해서, 한시간 엎드려 기도하시는 분들을 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한시간 기도하는 분들은 그만큼 더 겸손하고 더 상대방을 존중하시는 분들 이실거라고 믿습니다.  한시간 엎드려 기도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쉽게 남을 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탄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처럼, 글 쓰는 것을 명백히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글은 역사와 시대를 바꾸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글쓰는 것이 쉽게 느껴지시는 집사님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저는 칼보다 펜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의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서는 글로 남아진 성경이면서 글입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쓰러져가는 천주교회를 향해 종교개혁의 시초를 알린 역사를 바꾼 글이었습니다.   저는 루터가 그렇게 쉽게 글을 썼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단은 글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지우려고 방해할 것입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모습은 교회를 위하여 문제제기를 하는것이 아닙니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모습을 집사님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고, 기도해야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저는 저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모습은 우리의 문제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우리안에 많은 다른 믿음의 생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집사님의 말씀대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저도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얼마나 어떻게 기도했냐에 관심이 있지, 다른 사람이 기도를 많이 했는지 적게 했는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를 많이 하는 (주로 보이게 기도하고, 기도를 오래하는) 바리새인에게 왜 '독사의 자식들!' 이라는 표현을 쓰셨을까요?   ‘기도를 통해서만’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기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하셨을까요?  ‘기도만 통해서만’ 은 무엇가 부족한 것이 있을거라는 생각은 안해보셨는지요?  단순히 ‘기도해야 한다’ 라는 구호보다는 ‘무엇을’ ‘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같이 고민하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단순히 ‘기도많이 해라’ 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라고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기도제목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집사님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합니다.  집사님의 생각이 다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다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울러 제 생각 역시 다 틀리거나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온 모습과 배경이 다르고 만난 하나님의 속성이 조금씩 다르니, 당연히 생각과 믿음의 색깔이 다릅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되는 것, 그것이 저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이고 그리스도안의 공동체의 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과 의견이 다른 데 어떻게 연합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교회가 하나되고 연합되는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입니다.  본질적인 복음에 동의한다면, 비본질적인 요소에 자유함을 구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속할 수도 없구요. 

손을 들어 기도하고, 때를 정해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절기를 지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왜 예수님은 불같이 화를 내시며 '뱀과 독사의 새끼들!' 이라고 하시고,  당시 민족의 반역자였던 세리가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나는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한 세리가 더 의롭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훨씬 더 기도를 많이 했을 텐데요...   미루어 보건대, 엎드려 한시간 이상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됨'과 마찬가지로 진리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치열한 고민과 사색과 생각에서의 영적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이 또한 저희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이야기하고 논하는 것이 언제나 틀린 것일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아래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였을 때...  모두 겸손히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 하나되고 연합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로 연합된다는 것이 하나의 목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이 글을 통해 몇몇 부분에서는 집사님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거나 이해가 안간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생각을 집사님께 강요하지 않습니다.  집사님의 살아오신 배경과 신앙에 따른 신념과 믿음을, 비록 제가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있더라도 그 자체로 존중합니다.  중요한 것은 집사님과 제가 생각이 다르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각과 신앙색깔의 다름을 하나로 묶어주실 수 있으신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면 될 것입니다. 서로의 다른 색깔을 인정하고 그 자체로 정직하게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함께 잘 다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더, 제가 좋아하는 리처드 벡스터의 개혁된 목사의 글을 인용해 볼까 합니다.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in necessariis unitas,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in non-necessariis libertas,

모든 것에는 사랑을. in utrisque caritas.

-리처드 벡스터의 개혁된 목사(The Reformed Pastor, 1656)-

 

제 글에 용기있게 응답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런 계기로 우리가 서로 또 배우게 되고 더 겸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은폐하고 회피하는 것보다 열어 논하고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집사님께서 진지하게 의견을 말씀해주시고 이에 같이 열린공간에서 오픈해서 논의하는 것이, 보다 진리로 한걸음 나아가기 위한 우리 A 교회의 작은 노력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제 답글에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용서를 구합니다. 늘 제가 인격과 믿음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A집사님같은 분들의 좋은 말씀을 듣기 원하고 또 같이 논의하고 기도하면 더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된 남상곤드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i]로마서 13장에 대한 설명은 김두식 교수의 글을 부연설명한 부분입니다.  김두식 변호사의 이 부분에 대한 원글은 “한국교회, 진보와 보수 어디까지 왔나 (상)”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02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5:40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첫이야기


02/09/2010

 

 

 

"예배가 너무 졸려요"

                                                                                                       남상곤

 

 

 

들어가며

 

이 글은 제가 오래동안 OOOOO교회를 다니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쓰는 글입니다.

앞으로 몇주동안 계속적으로 정기적으로 올려볼 예정입니다.   이 글을 쓰게된 목적은 제가 혹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나누어보고자 함입니다제가 이글을 통해서 변화를 기대하거나 무슨 개선을 바라는 것은 절대아닙니다.  (그렇게 될수있지도 않구요). 

제 글쓰기가 교회를 변화시킬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수준도 못되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잘 알고있습니다.  다만 저와 제 주변의 생각을 교회 성도들과 나누어봄으로써 정말 보다 함께 잘 다니는 교회를 꿈꾸기 위함입니다.  같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나누는 것이 머리나쁜 많은 다수가 나름 좋은 대안을 내놓을수있는 차선임을 알기때문입니다.

 

이 글의 대전제는 하나님아래서 누구도 완벽히 옳은 사람, 옳은 주장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안의 여러가지 사안을 이렇게도 볼수있고 저렇게도 볼수있다라는 다양한 시선을 제공해서 우리교회가 보다 더 건강하고 하나님앞에 풍성한 평화와 생명을 누리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달리 다른 재주가 없는 저로써는 이렇게 글로 밖에 그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글에 대한 어떤 비평과 비판,혹은 다른 생각과 제안 혹은 코멘트도 환영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더하면 조금이라도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 그 전제는 100프로 옳은 정답같은 건 없다라는 것 위에 가능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분 하나님과 그 삼위일체 그리고 유일한 성경만을 진리로 믿으니까요.

 

 

 

1. 예배는 너무 졸려요

 

저를 비롯한 많은 성도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예배는 길고 졸립니다하나님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실입니다.

예배에 늦지않기 위해 아침도 거르고 오다보니 배도 고픈데

목사님은 "세번째로..." 를 말씀하시고...  옆에 모 성도님도 저와 같이 졸다가

자기 고개 꾸벅이던것에 깨어 놀라셔서 저와 눈이 마주치고는 지긋이 웃으시면

다시 설교에 집중하십니다.

 

예배는 축제이고 잔치이고 마땅이 하나님께 드릴바의 기쁨이라는 것을 오래전에 배웠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그 예배에 진심과 전심으로 참여하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립니다

제 신앙이 부족해서 그렇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저와같이 신앙이 부족한 분들이 제 주변에서는 너무나 많아서

많은 분들이 졸려하시고 지루해하십니다

 

왜 이렇게 예배가 졸릴까요?

 

 

 

2. 예배는 늘 똑같아요

 

보통 예배가 졸리는 이유는 예배의 형식과 내용이 단조롭기 때문입니다.

흔히 찬양-대표기도-광고-설교-봉헌-축도 로 이어지는 교회 예배의 형식은 어디를 가나 비슷하고

예상되는 형식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예배당의 의자에 앉아 수동적으로 공급되는 찬양과 설교를 듣고있으면 그 형식은 단조로울수 밖에없지요.   게다가 그 찬양과 설교가 매주 비슷하다면 정말 그 단조로움은 정말 지루하고 졸리게 됩니다왜냐하면 안그래도 수동적인 입장에서 예배를 참여하는데 그때 단조로운 내용과 형식이 매주 주어지게 되면, 신앙심의 깊이와는 별개로 너무 흔히 예상되는 형식과 내용으로 사람은 지루함을 느낄수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저는 제 직업의 특성상 다른 사람의 연구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많이 듣고 보게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의 프레젠테이션은 정말 지루하고 심심하고 내내 딴 생각만 듣게되는데,

어떤 분들은 정말 그 한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정도로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연구자체를 보면 지루한 프레젠테이션이 더 훌륭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프레젠테이션을 다시 듣고싶지는 않습니다그것은 그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프레젠터의 프레젠테이션 스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왜냐하면 보통 그 사람이 하는

다른 프레젠테이션도 재미가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학부에 다닐때, 영어예배를 많이 참석했습니다.  (제가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영어예배에서 찬양을 인도했기 때문인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찬양 중간중간에 영어로 말도 많이한거 같은데...  정말 참 용감했던것 같습니다. ^^)

그때 말씀을 전하시던 에디변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지금은 호주에서 목회하시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http://eddiebyun.blogspot.com/  이 목사님의 설교는 참 늘 재밌고 흥미진진했었습니다한번 시간이 되시면 위에 링크에 가셔서 설교를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에디변 목사님의 설교는 결코 짧지는 않습니다그런데 에디변 목사님 설교의 특징은 제스처와 눈빛, 재밌는 예화와 다양한 멀티미디어의 활용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설교후에도 목사님의 메세지가 머리속에 영상으로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나면 에디변 목사님의 설교의 포인트가 늘 마음에 남아 교회를 나서는 발걸음을 따라오곤 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야 어떤 목사님의 통해서 선포되던지간에 그 본질은 동일하고 힘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하는 메세지만큼이나 그 전달방법과 형식에도 신경과 시간을 쓴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성도들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설교자체를 준비하시는 시간의 십분의 일만큼이라도 그 전달방식에 신경을 쓴다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설교가 선포될거라는 생각입니다.

 

 

 

 

3. 너무 길어요

 

예배가 길면 졸립니다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에 충만해서 예배를 드릴때는 2-3시간의 예배도 한순간 같이 지나간다고 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비단 예배 뿐만 아니라 뭐든지 길면 졸립니다길면 짤리고, 길면 지루합니다.

길게 이야기 하는 경우일수록 그 요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주제가 분명할수록 그 주제를 부가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제가 흐릿하거나 확실하지 않을 경우 부가적으로 설명할 필요성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길이가 길어지고... 더욱 그 논지가 흐려지지요.

정확히 무엇을 안다라는 것은 그것을 한두문장으로 이야기하거나 쓸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도 정말 단순합니다그래서 힘있고 어디에서나 영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너무 복잡해서 설명하는데 10-20분이 걸린다면 (물론 그렇게 설명할수도 있겠지만)

지금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있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양이 미덕인 사회에서는 그 질이나 주제에 상관없이

어느정도의 길이가 되지 않으면 깊이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는합니다.

 

예전 제 대학은사님 한분은 숙제를 걷은 후에 그것을 선풍기앞에서 날리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에 떨어진 것 (무거운것) A, 그리고 멀리날라간 것을 차례로 B,C,D를 주시고

아주 멀리 날라가면 F를 주셨다고 하더군요.   양으로 학점을 매기셨지요.  ^^

 

저도 그때의 영향으로 꼭 글은 길게 써야 어느정도 같추어진 글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잘 지우지 못합니다만, 길게쓰면 결정적으로 안읽습니다안읽히는 긴 글을 쓰느니 짧아도 임팩트있는 글이 좋습니다.

 

 

 

나가면서

 

다음주는 제가 정말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회중예배시의 대표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정말 잘 졸고 지루해하는 것이 바로 대표기도인데요...

왜 내가 이렇게 대표기도에 대해서 지루해하고 졸려할까에 대한 나름 심각한 고민을

가졌던 부분입니다.

짧게 써보려고 저도 많이 노력하는데도.... 역시 짦은 것은 쉽지않은 것 같습니다.




"예배가 너무 졸려요"

'함께잘다니는교회' (1) 예배, 저만 졸린가요?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098

posted by paulus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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