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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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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22. 16:10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여섯번째  03/13/2010
 

하나님앞에서 모두가 겸손해야 합니다.


                                                                                                     남상곤

 

누가 문제였나요?

 

교회가 역사앞에 범죄를 저지른 일이 수없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것만 대표적으로 살펴봐도,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십자군 전쟁을 감행하여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노략질한 것,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성의 권리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던 것,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노예가 합법한 것이며 열등한 종족이 있다고 하여 노예제도를 실시했던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땅을 개척하교 교회를 세운다고 아메리카에 인디언들을 수천만명 학살한 일 등등  가장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은 것도 당시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저지른 것입니다.

 

교회가 혹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저지른 어처구니가 없는 수많은 범죄들이 있습니다.  당시에 이러한 일들이 자행되었을때는 정말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혹은하나님을 위해서이런 일들을 거리낌없이 저지렀던 것 같습니다.  왜 이러한 일들을 한 사람들은 이것이 왜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하나님께서 실수가 없으시고 온전히 선하신 분이심을 믿는다면 이러한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 인간에 있음이 명확해 집니다.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래전에는 카리스마나 전통에 따라 지배가 이루어지고 정당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모든 사회는 법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 어느 국가이던 헌법이나 기본규칙을 통해서 지배는 합법화됩니다.  국가는 상위법인 헌법에 의하여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헌법에 명시된 권력만을 대통령이 수행합니다.  이러한 통치자인 대통령조차 임기제를 바탕으로 할뿐더러, 대통령이라도 헌법과 위배되면 처벌받거나 탄핵될수 있는 것이 오늘날 입니다.  이전까지의 오락가락하고 일관성이 없던 카리스마적 통치나 전통에 의한 통치는 사라졌습니다.  이는 비단 국가에 국한된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단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각각 규칙에 따라 그 법규대로 운영이 이루어집니다.  회사나 학교도 정관이나 교칙에 의해 운영이 되고, 심지어 교회도 교회정관으로 운영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신뢰할수 없지만 글로 쓰여진 법은 신뢰할수 있다라는 가정이 깔려있습니다.  인간은 신뢰할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제가 스스로 신뢰할수 없는 사람인것을 늘 느끼고 살아갑니다.  스스로 어떤 것을 하겠다 또는 안하겠다 계획을 세워 수십번 다짐하지만, 참으로 스스로에게 끝없이 관대하고 늘 용서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신뢰할수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을 함부로 생각하거나 무시해서 의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한계가 분명한 존재입니다. 이익 앞에서는 흔들리고, 강자앞에서는 약해지고, 약자앞에서는 강해지는  모든 사람은 다 연약하고 다 쓰러지기 쉬운 존재입니다.

 

사람을 믿을수 없기에 늘 권력이나 권위에 대해서는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굳이절대 권력은 절대 타락한다와 같은 경구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권력이나 권위는 늘 견제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힘이기 때문입니다.  힘은 지니차게 견제를 받아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힘이 한번 잘못 발휘되면 사람이 죽거나 다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최소한으로 실행되어야 하고, 최대한으로 견제받아야 합니다.

 

 

사람을 신뢰할수 없으면 우리는 누구를 믿나요?

 

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신뢰할수 있는 분이십니다.  어제와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익에 치우치시지 아니하시고 공평하고 완전하신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출애굽기 3:14)

공평한 간칭과 명칭은 여호와의 것이요 (잠언 16:11)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

 

 

2.     그리고 씌여져 있는 성경을 믿습니다.  씌여져 있는 성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통치자가 바뀌어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성경 외에 있는 수많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의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한 10:35)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6)

 

 

3.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성경외에 모든 것이 틀릴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앞에서 다 겸손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A가 맞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B가 맞을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념이 있더라도, 상대방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념도 마찬가지로 존중을 해주어야 합니다.  내가 믿고 신뢰하는 믿음만큼이나 남들도 각자의 경험과 사고를 통해 믿고 있는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습니다.  자기가 맞다고 해서 (설사 맞다고 하더라도) 누구를 쉽게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는 참으로 위험합니다.

 

누구를 변화시키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몸으로 행함과 사랑입니다.  본질적인 복음을 인정하고 동의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다양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한가지의 생각과 사상으로만 표현되고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in necessariis unitas,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in non-necessariis libertas,

모든 것에는 사랑을. in utrisque caritas.

 

-리처드 벡스터의 개혁된 목사(The Reformed Pastor, 1656)-

 

 

 

교회에 일곱빛깔 무지개를

 

 

글의 서두에서 예를 들었던 교회가 역사에 행했던 범죄들도 그 이면에는 어쨌든하나님을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신념이 너무나 강했던 것 같습니다.  신념이 강할수는 있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지나치게 강요하다가 돌이킬수 없는 역사적인 범죄가 된것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 자신과 다르다고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실수할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이니까요.  그러나 그왜곡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일방적인 강요로 이르게될때 진정 우려할 사태가 일어날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각 성경을 펴고 각각 자신의 해석과 적용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부는 맞을수도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옳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이야기하기에 당연히 문제가 생깁니다.  누구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늘 자신이 틀릴수도 있다는 겸손함과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부분, 부분일수도 있습니다.  무지개의 한 색깔만을 보고 무지개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때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일곱가지의 색깔이 모여서 아름다운 무지개로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조금씩 표현될수 있을것 입니다.  한 부분을 가지고 전체인양 호도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한 해석을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적용하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 될수 있습니다. 보통 말씀을 통한 적용은, 해석을 하는 그 자신에게 해당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중요한 우리의 문제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기보다는 본인이 깨닫도록 말씀과 상황을 통해서 이끌어 가심을 우리는 많이 경험적으로 목도한바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희미하게 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명하게 보게 될 때가 옵니다.  지금은 비록 불완전하고 충분하게 알수 없지만 그때에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알게될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서로에게 겸손하고 늘 열린마음과 열린자세를 가져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안에 아름다운 일곱빛깔의 무지개가 펼쳐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2)

 

 

교회에 일곱빛깔 무지개를...
'함께잘다니는교회'(5)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41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07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네번째  02/24/2010

 

친절하신가요?

                                                                                                   남상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많은 분들이 격려해주시고 응원해주시고 위로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글 잘 읽었다고 손잡아 주시던 장로님, 기도하겠다고 힘내라고 해주신 권사님, 말없이 등 두드려주시던 집사님등  그래서 더욱 깨어있고 기도하고 고민하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다시하게 됩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기도해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들어가며

 

미국에 와서 처음에 낯설었던 두 단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awesome” 이고 다른 하나는 “cool” 입니다.  미국친구들이 가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아썸!’ ‘아썸!’ 그러길래 저는 무슨 유명스타이름 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툭하면아썸!” 이라고 해서 더 이상 모르고 살다가는 언젠가 큰일나겠다는 생각에 미국친구에게 창피하지만 물어봤습니다.  도대체 아썸, 아썸하는데그 아썸 스펠링이 뭐냐?”  스펠링을 받으면 사전을 찾아볼 요령이었죠.   친구가 알려준 아썸은 awesome, 우리말로 하자면끝내준다정도 될려나요?  참 이걸가지고 그렇게 고민한 제가 민망했었습니다.  또 하나는 ‘cool’ 인데, 차갑다는 뜻으로 알고있는데, 대화중에 갑자기 쿨! ! 하니도대체 이건 또 뭔가 싶었습니다.  역시 나중에 알았지만 쿨이라는 것은 차가운게 아니라멋있다’, ‘좋다’, 뭐 이런 뜻이었습니다.  눈치로 대강 짐작은 했지만, 왜 쿨이 멋있는 건지 좀 이해가 잘 되지않기는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cool’ 보다 ‘warm’ 같은 것이 낫지 않나요?  *^^*

 

 

인자 (kindness)’?

 

작년 여름에 잠언을 11주간에 걸쳐 묵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보았던 부분이 새롭게 다르게 보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잠언 3 3절에 나오는인자 (kindness)’ 라는 단어입니다.  이전에는 그인자라는 단어를 그냥 인자하다 정도로 뜻을 새기고 지나갔었습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다른 버전의 성경을 보게되면서인자라는 단어가 단순히 인자하다 라는 뜻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두란노성경사전에 보면, “인자한 이라는 형용사는크레스토스 (krestos)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친절하고 관대하다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자비한 마음이나 동정심, 연민의 정과 같은 단순한 느낌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라고 나와있습니다.  (http://www.holybible.or.kr/B_DICT/cgi/bdictftxt.php?DN=538 )

 

잠언 3 3-4절 말씀에, “인자와 진리를 저버리지 말고 ,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며, 너의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라.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네가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표준새번역).  에서 나오는 인자는 영어성경 NASB로 보면 kindness 로 나옵니다.  한마디로친절인거지요. 

 

부끄럽지만 제가 잠언의 3 3-4절 말씀을 읽으며 적었던 묵상노트를 잠깐 공개해봅니다.

 

 

인자와 진리 (Kindness and Truth).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이다.

인자와 진리로 나의 마음판이 채워져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마음을 품었을때

그 하나님의 성품이 내 마음판을 채우는 것이다.  

 

인자함, 친절함 - 나는 인자한 사람이고 친절한 사람인가나는 꽤나 무뚝뚝하고 퉁명한 사람이다그러나, 모든 사람을 최선을 다해서 맞이하고 신경을 집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다그것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며, (cool) 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물론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다언제나 누구에게나 인자롭고 친절할수 있겠는가하지만 내 안에 하나님으로 충만할때...  그 하나님의 성품이 내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진리 - 진정한 이치, 옳고 진실함.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판에 채워져 있는가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생각할때...  그때 그 말씀에서부터 나오는 진실함과 옳음이 내 마음판에서 채움을 뚫고 나올것이다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생각하고 즐겨하는가요즘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것, 그리고 간절함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모하고 있다

 

그렇게 이 인자와 진리가 나의 마음판에 채워져 있을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내가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친절한가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계명이 내 안에 충만한가?

나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고있는가?

 

 

 

 

 

Cool Kind

 

이제 제가 하고싶은 말이 무엇인지 눈치빠른 분이라면 알아채셨을것입니다.  바로 ‘cool’ ‘kind’ 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요즘엔 쿨한것은 친절하다는 것과 반대의 뜻으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쿨하다는 것은 세련되고 멋있고 뒤끝없고 깔끔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말이 좀 적어야 하고, 괜한 부탁하면 안되고, 누군가 부탁하면그래 그러지 뭐하는 것입니다. 구차하게 먼저 다가가면 안됩니다.  하지만 남이 와서 부탁하고 물어보면 쿨하게 답해주거나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친절이라는 것은 먼저 말을 걸고, 안부와 필요를 묻고, 기분을 맞춰주고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요즘 세상에서는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괜히 호의를 가지고 친절을 베풀었다가 상대방이 쿨하게됐거든요라고 하면 상처를 받을수도 있고, 괜히 초라하게 느껴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마음을 써야하고 상냥하게 웃어야 합니다.  괜히 신경써야하는데다가, 웬지 먼저 손내밀기도 좀 어색합니다.  그냥 깔끔하게 쿨한게 좋은 거지요.

 

먼저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은 쿨 한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 먼저 잘 말을 걸지 않습니다.  남에게 쿨하게 보여야 하니 먼저 다가가기는 좀 그렇고, 만약에 친절을 베풀었다가 쿨한 반응이 오면 싫습니다.  그래서 남이 말을 걸어오거나 다가올때까지 기다립니다  쿨하게 보여야 하니까요.  우리는 미리 짐작합니다. ‘괜히 먼저 말을 걸어 민망해지지 말아야지?’  저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다를거야.’ ‘ 저 사람은 내가 호의를 베풀어도 차갑게 나올수도 있어.’ 하지만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오고 안부를 물어보고 도움을 요청하면 그건하게 돕거나 대답할수 있습니다.  나는하니까요.

 

 

 

친절을 목에 걸고 다니며, 마음속에 새겨두어라

 

다시 잠언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인자와 진리를 저버리지 말고 ,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니며, 너의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라.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네가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잠언 3 3-4: 표준새번역).

 

인자를 저버리지말고, 목에 걸고다니고 마음속깊이 새겨두라고 하십니다.  목에 걸고다닌다는 것은 언제라도 그것을 목에서 뺄 준비를 하고있으라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새겨 늘 유념하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은혜를 입고 귀중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며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 쿨하게 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쿨하게 대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쿨하게 대하면, 그 다른 사람도 우리를 쿨하게 대할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쿨한거 보다 친절한게 좋습니다.  비록 어떨때는 귀찮고, 괜히 좋은 호의가 다칠까 염려스럽고, 먼저 다가가면 웬지 어색하고 손해보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은혜를 주시고 귀중하게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친절은 옵션이 아닙니다.

 

 

저는 기질이 본래 말이없고 무뚝뚝해요.  숫기가 없어서 친절할수가 없어요.”   당연합니다.  왜냐하면인자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본래부터 친절할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쿨하지말고 친절한 연습을 해야합니다.  주변이웃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그렇게 연습하고 노력하고 기도하면, 그 친절한 하나님의 성품이 나를 친절하게 만들고, 나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게 될것을 믿습니다.  점찮고 숫기가 없어 말이없는 것이 동양문화권에서는 미덕으로 여기지는 경우도 있어 핑계가 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에서는 인자(친절)을 목에 두르고 마음속에 새겨두라고 하십니다.  기질과 성격탓으로 친절을 멀리할수가 없습니다.  어색하고 힘들지만 지금이라도 연습을 해야합니다.

 

 

친절은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 아닙니다.  배우고 연습하고 익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늘 유난히 친절하신 장로님과 권사님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랜 기도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삶에 배여 먼저 손을 내밀고, 기도제목을 물어보고,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해주십니다.  먼저 살피고 다가가고 필요를 물어보고 안부를 전하고 손을 내미는 친절은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하나님 나라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연습하고 노력하고 시도하고 다가가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우리에게 인자를 베푸십니다. 

 

친절은 옵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노력하고 기도하여 닮아가야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휴스턴이 너무 더워한것이 좋아 보일수는 있지만, 성경은 분명히 인자를 목에 걸어두고 마음판에 새기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더욱 서로 친절하고, 하나님께도 친절하기를 소원합니다.   

 


친절하신가요? 쿨하신가요? 
'함께잘다니는교회' (2) 친절은 성품이 아니라 연습하는 것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228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5:53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세번째  02/18/2010

 

"댁에 아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세요?"

                                                                                                   남상곤

 

 

 

글을 시작하기 전에

 

본래 제가 생각했던 글의 순서를 조금 바꾸어보았습니다.  예배시 회중기도에 대해서는 좀더 기도하고 생각해봐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첫글이었던 예배에 대해서도 더 깊이 기도하고 생각해봐야 될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느끼는 교회안에서의 우리 아이들의 안전문제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들어가며

 

제가 ㅇㅇㅇ  ㅇㅇ교회에 처음와서 가장 놀랬던 것중에 하나가 예배후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서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고 신나게 놀고있는 모습이 너무 좋았습니다. 한편으로는그런데 저렇게 아이들을 놓아두어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아이들이 부모의 지도없이 마음껏 놀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교회안에서는 뛰지도 못했습니다.  교회가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 안전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주일날, 부모들은 예배후에 식당이에서 선생님들에게 아이들을 인수인계를 받았습니다.  부모들은 아이를 데리고가서 점심을 같이먹었습니다.  그 이후의 교회에서의 시간은 부모들이 각각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던 저희 부부는 항상 아이들을 끼고 점심을 먹고, 또 오후에 있는 교회행사에는 아이들을 끼고 참여하였습니다.  그랬던 저희 부부에게, ㅇㅇ교회에서 느꼈던 아이에게서의 해방감은 달콤하면서도 무언가 허전했습니다.

 

 

 

! 자유다!

 

그런데 ㅇㅇ교회에 와서 너무 편해졌습니다.  아이들은 점심을 선생님들의 인솔하에 먹습니다.  아이들이 식사 이후로 교회안의 여러군데로 퍼져 놀게되면서, 저희 부부는 잠시 아이가 없는 자유함(?)을 누리며 그 행복감에 젖었습니다.  비록 아직 둘째가 어려, 둘째는 끼고 있어야 했지만 예전에 둘을 다 끼고 있던 것에 비할바가 아니었습니다.  너무편하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회에서 점심을 먹고,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제 집에 돌아갈 참이었습니다.큰딸, 하원이를 데리러 하원이가 주로 노는 방으로 갔습니다.  하원이가 없길래 하원이가 잘 노는  또 다른 방으로 갔습니다.  하원이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원이를 찾아 교회의 이곳저곳을 다녔습니다.  하원이 또래가 있으면하원이 보았니?’ 라고 물어보았지만, 하원이를 쉽사리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의 2층부터 여러방들을 뒤지고, 체육관의 2층을 돌아보고   한참후에야 하원이를 어느 방에서 간신히 찾았을때….  저는 잠깐 불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래도 되나?’

 

 

 

그런데 만약에

 

우리 교회는 교회안에 방들과 사무실, 여러 공간들이 많아서 한눈에 아이들이 어느공간에 무엇을 하고있는지 단숨에 파악할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공간들은 교회 2층과 체육관 2층을 포함하여 상대히 넓고 많으며 폐쇄적입니다.  그래서 그 방이나 공간에 직접 들어가 보기 전까지는 그곳에서 누가 무엇을 하는지 알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아침에 아이들과 각자의 예배를 드리기위해 헤어지고 나서 집에가기 위해 만나기전까지, 아이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누구와 함께 놀고있는지  부모들이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쁜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못된짓을 하거나 생각할수도 없는 범죄가 일어난다면 과연 이것을 누가 막을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제 대답은없다.” 였습니다.

 

외부인의 침입으로 일어나는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아이들끼리 모여 노는 장소에는 늘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이들이니 당연합니다.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놀수도 있고 위험한 놀이를 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후 짧게는 한두시간, 길게는 두세시간에 걸쳐 우리들은 아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친구들과 어울려 잘 놀고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뿐입니다. 

 

 

 

안전만큼은 지나친 가정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두세시간동안 우리의 아이들은 안전문제에 노출이 되어있습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큰 사고나 문제가 없었습니다만저는 하원이를 교회안에서 찾는데 시간이 걸렸던 그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사고나 문제가 생기면 엄청나게 큰 여파가 있을수도 있겠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이라는 것은 대부분 불필요한 경우가 많지만, 안전의 문제에 관하여는 지나친 가정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전사고가 발생하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수도 있으니까요. 

 

하원이를 교회안에서 찾아다니던 경험을 한 이후  이제 하원이가 교회안에서 늘 어디에서 누구와 노는지 파악하려고 노력합니다.  최소 30분 간격으로 어느공간에서 누구와 무슨 놀이를 하고 노는지 수시로 확인을 합니다.  어떨때는 하원이가 노는 공간에서 저 스스로 안전요원이 되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다 소중하니까요. 

 

주일 오후, 교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어떠한 사람의 간섭과 시선도 없이 각각 패쇄된 공간에서 놀고있습니다.  위험할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주일오후에는 안전 문제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행히 우리교회 안에서는 아직 이러한 안전사고문제가 크게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방과 대비를 해야합니다.  제가 생각해본 몇가지는 이렇습니다.  첫째, 교회안에서 주일 오후 어른들이 순번을 정해 교회안 이곳저곳을 시간마다 순찰을 합니다.  싸우는 아이들이 있으면 말리기도 하고,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놀고있으면 빼앗기도 하고, 위험한 놀이를 하고있으면 하지말라고 야단도 쳐야합니다.  둘째, 교회안에 더 많은 폐쇄회로 카메라를 설치해서 최대한 더 많은 공간을 커버해야 합니다. 주로 아이들이 자주 모여 노는 곳들을 중심으로 좀 더 많은 카메라가 필요합니다.  셋째, 아이들이 있는 부모들은 최소 30분마다는 자신의 아이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있는지 확인을 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서약서를 제공해서 아이들에게 혹시나 벌어질지도 모르는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은, 바로 그 부모에게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 교회안에서 아이들이 노는 공간을 지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방만 오픈을 해서 그곳에서만 놀수있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더 좋은 방법들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아이는 자신이 돌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하나님도 지키시지만 부모인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저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만약을 기반으로 한것입니다.  아마 안전사고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한 건이라도 안전사고가 발생한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다 늦어버릴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몇시간 동안 부모들이 아이에게서 해방되어 잠시동안의 자유함을 누리는 공간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자녀들의 안전은 여전히 그 부모의 몫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교회안에서 아이들을 지켜주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발생할수 있기에, 우리는 아이들이 주일 오후에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모인 우리에게 자녀를 돌보라고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교회서, 자녀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아세요?" 
'함께잘다니는교회' (3) 교회에서 자녀 안전 문제에 대해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425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5:48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두번째  02/13/2010

"너는 누구며 무엇을 하고있느냐?"

                                                                                                   남상곤

 

 

들어가며

 

우선 짧은 시간동안 생각보다 많은 분들의 말씀을 이경로 저경로를 통해서 (주로 간접적인 방식으로) 듣게되었습니다대다수는 우려의 목소리였고, 소수의 격려의 말씀도 있었습니다제가 의도했던 바가 글로 잘 전달되지 않았는지, 많은 분들은 마음아파하셨다는 분들도 계셨다고 들었습니다저로서는 오래 기도하고 생각하고, 또한 누구를 비난하거나 정죄하려는 의도가 전혀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보였다면, 그것은 제 글쓰기가 모자랐고, 제 진심의 마음이 잘 전달되지 못한 저희 부덕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2번째 글을 생각보다 일찍 올리게 되었습니다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제가 이러한 글을 올리게 된 저의 본심을 더 잘 설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우선 그것을 먼저 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도대체 무슨생각으로 올린것이냐?

 

제 의도는 크게 두가지입니다첫번째로 교회안의 소수의 목소리, 다른 목소리를 내보고자 함입니다그것은 현재의 사안들을 약간 다른 각도로 보는 것입니다.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입니다모든 사람이 동일한 시각을 가질수 없는데도, 우리는 동일한 시각을 가지도록 강요받거나 교육을 받은 경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익숙하게 그냥 그대로를 본래 그런것이겠거늘 하고 받아들입니다하지만 기존의 것들을 낯설게 보는 연습을 게을리하고 포기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안일함과 나태에 빠지게되도록 만듭니다다양성은 힘이고 건강함입니다다양성을 존중할줄 알고, 그 다양성 자체를 수용하는 것은 그 조직이나 사회의 힘이 됩니다하지만 흔히 한국사회에서는 그 다양성 자체를 두는 것을 합의되지 못함, 분열, 혹은 일치되지 못함으로 흔히 분류하곤 합니다그러기에 다른 시각 (특별히 그것이 힘이없고 소수인 시각일 경우 특히)을 두는 것을 매우 불편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하지만 그것은 결코 분열이나 일치되지 못함이 아니라 그 자체로의 다양함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제가 첫글에서도 분명하게 밝혔듯이 제가 어떤 변화의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또한 누구도 100프로 옳은 사람이 없고 옳은 주장이 없다라는 말은 결국 그 글을 쓰는 저에게 먼저 적용되는 말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옳거나 맞다라는 것이 아닌 “이렇게 볼수도 있다”를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교회의 제반사안에 대해 투명하게 오픈해서 토의하고 논의하고자 하는 바램입니다교회에 사안이 있습니다그리고 결정이 되었습니다그런데 그 과정은 모릅니다과정을 모르니 그 의중과 뜻이 궁금합니다하지만 알려지지 않습니다그냥 은혜로 모든 것을 덮자라고 말합니다은혜는 조금 불편하거나 덕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그냥 말하지말자라는 뜻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은혜는 죽을수 밖에 없는 죄인이 아무런 조건없이 그저얻는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으로 알고있습니다가장 깨끗하고 뒷말이 없어야할 교회에 불투명함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건강하지않는 것입니다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기에 부족하거나 잘못한 것들이 조금 드러난다고 쉽게 망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오히려 그렇게 연약한 부분들을 통해 역사하시고 진정한 은혜로 감싸주시는 것이 우리의 기도할 바라고 믿습니다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은혜로 덮는 것이 아닌 투명하게 논의하고 설명하고 의견을 교환하고 그리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일년정도를 기도하며 고민했습니다내가 공동체를 위해, 공동체에 덕을 끼칠수 있는 것은 어떤방법이 있을까?

 

 

2.    그런데 너는 누구냐?

 

저는 남상곤이라고 하고 OOOOO교회에 다닌지는 일년 반정도가 된것 같습니다저희 아버님은 서울에서 목회를 하십니다그러기에 누구보다도 목회자의 고뇌와 노고를 잘알고 있습니다저는 한국에서 기독교대학을 나왔고, 한때 목회자가 되려고 준비를 한적도 있습니다지금은 학생으로 학문연구에 뜻을 두었지만, 그래도 그러한 학문연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할까를 하루하루 고민합니다제가 이렇게 제 이이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제가 교회의 바깥사람이 아닌 안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입니다저는 유치원때부터 교회에서 자라고 커왔습니다교회는 저희 놀이터였고, 저의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들은 교회의 친구들이며, 교회안에서 세상을 보았고, 구원도 받았고, 믿음도 자랐습니다친구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그렇지않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때도 있었고, 무엇이 예수님의 뜻을 쫓는 것일까 하는 마음에 몇달며칠을 고민하고 기도했던 적도 있었습니다저는 교회만이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바꾸는 희망임을 늘 믿습니다아무리 교회가 개독교라고 불려도 그리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사람만도 못한 일들을 해도 결코 교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포기한적이 없습니다왜냐하면 교회야 말로 예수님의 피값주고 사신 몸이며, 세상에 전할 복음이 선포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저는 부족하지만 교회공동체를 살리고 또 세우는 일이 가장 복되고 중요한 일임을 믿습니다그래서 저는 그러한 일을 하고싶습니다. 제가 이러한 글을 쓴 동기는 바로 공동체를 세우고,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고, 공동체 굳건하게 하는 이것입니다결론적으로 저는 교회를 음해하거나 분열시키거나 누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고자 부족한 글쓰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3.    그렇다고 해도 결론적으로 특정인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냐?

 

제가 첫글을 쓰면서 그리고 쓰고나서 스스로 기도하고 제 마음을 점검해 보았습니다제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그리고 제 마음이 누구를 비방하려는 마음이 없음을 하나님앞에서 확인하고 글을 올렸습니다만약 제가 누구를 비방하거나 교회를 분열한 계획이 있었다면 굳이 실명으로 만천하에 제이름을 걸고 내가 지금 누구를 비난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다라고 하지 않겠지요저는 제가 생각하거나 글로 쓰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그렇기에 그것을 강요하거나 설득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다만 저같이 사안을 다르게 볼수도 있고, 또 그렇게 다르게 볼수도 있는 눈으로 교회의 제반사안에 대해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기도해보자 라고 한것입니다하지만 교회라는 구조의 특징상,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되면 그 정점에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거론되기가 쉬울수 밖에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하지만 교회에 애정을 가지고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는 시각으로 논한다면 그것이 처음에는 누구를 비방하고 비판하는 것 처럼 보일지라도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시간을 통해서 나타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왜냐하면 진심은 결국에는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요그래서 우리는 동기나 진심, 혹은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저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십시오시간을 두고도 제가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하고 특정인을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드신다면 저도 붓을 꺾겠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을 쓰기전에도 기도하고, 쓰면서도 기도하고, 쓰고나서도 기도를 했습니다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개혁가도 아니고, 의협심과 혈기에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특별히 믿음이 깊은 사람도 아닙니다왜 제가 굳이 저도 바라지않는 방향으로 교회에서 유명해(?)지는 길을 택하겠습니까그것은 제가 이 공동체에 대한 포기할수 없는 믿음과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그렇지 않다면 제가 굳이 안좋은 소리를 들어가며 잘쓰지도 못하는 글을 쓰려고 하겠습니까제 마음의 진심이 조금이라도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혹시라도 저로인해서 마음이 아프셨다는 분이 계셨다면 다시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5:40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첫이야기


02/09/2010

 

 

 

"예배가 너무 졸려요"

                                                                                                       남상곤

 

 

 

들어가며

 

이 글은 제가 오래동안 OOOOO교회를 다니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쓰는 글입니다.

앞으로 몇주동안 계속적으로 정기적으로 올려볼 예정입니다.   이 글을 쓰게된 목적은 제가 혹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나누어보고자 함입니다제가 이글을 통해서 변화를 기대하거나 무슨 개선을 바라는 것은 절대아닙니다.  (그렇게 될수있지도 않구요). 

제 글쓰기가 교회를 변화시킬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수준도 못되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잘 알고있습니다.  다만 저와 제 주변의 생각을 교회 성도들과 나누어봄으로써 정말 보다 함께 잘 다니는 교회를 꿈꾸기 위함입니다.  같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나누는 것이 머리나쁜 많은 다수가 나름 좋은 대안을 내놓을수있는 차선임을 알기때문입니다.

 

이 글의 대전제는 하나님아래서 누구도 완벽히 옳은 사람, 옳은 주장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안의 여러가지 사안을 이렇게도 볼수있고 저렇게도 볼수있다라는 다양한 시선을 제공해서 우리교회가 보다 더 건강하고 하나님앞에 풍성한 평화와 생명을 누리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달리 다른 재주가 없는 저로써는 이렇게 글로 밖에 그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글에 대한 어떤 비평과 비판,혹은 다른 생각과 제안 혹은 코멘트도 환영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더하면 조금이라도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 그 전제는 100프로 옳은 정답같은 건 없다라는 것 위에 가능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분 하나님과 그 삼위일체 그리고 유일한 성경만을 진리로 믿으니까요.

 

 

 

1. 예배는 너무 졸려요

 

저를 비롯한 많은 성도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예배는 길고 졸립니다하나님께는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실입니다.

예배에 늦지않기 위해 아침도 거르고 오다보니 배도 고픈데

목사님은 "세번째로..." 를 말씀하시고...  옆에 모 성도님도 저와 같이 졸다가

자기 고개 꾸벅이던것에 깨어 놀라셔서 저와 눈이 마주치고는 지긋이 웃으시면

다시 설교에 집중하십니다.

 

예배는 축제이고 잔치이고 마땅이 하나님께 드릴바의 기쁨이라는 것을 오래전에 배웠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그 예배에 진심과 전심으로 참여하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립니다

제 신앙이 부족해서 그렇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저와같이 신앙이 부족한 분들이 제 주변에서는 너무나 많아서

많은 분들이 졸려하시고 지루해하십니다

 

왜 이렇게 예배가 졸릴까요?

 

 

 

2. 예배는 늘 똑같아요

 

보통 예배가 졸리는 이유는 예배의 형식과 내용이 단조롭기 때문입니다.

흔히 찬양-대표기도-광고-설교-봉헌-축도 로 이어지는 교회 예배의 형식은 어디를 가나 비슷하고

예상되는 형식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예배당의 의자에 앉아 수동적으로 공급되는 찬양과 설교를 듣고있으면 그 형식은 단조로울수 밖에없지요.   게다가 그 찬양과 설교가 매주 비슷하다면 정말 그 단조로움은 정말 지루하고 졸리게 됩니다왜냐하면 안그래도 수동적인 입장에서 예배를 참여하는데 그때 단조로운 내용과 형식이 매주 주어지게 되면, 신앙심의 깊이와는 별개로 너무 흔히 예상되는 형식과 내용으로 사람은 지루함을 느낄수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저는 제 직업의 특성상 다른 사람의 연구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많이 듣고 보게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의 프레젠테이션은 정말 지루하고 심심하고 내내 딴 생각만 듣게되는데,

어떤 분들은 정말 그 한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정도로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연구자체를 보면 지루한 프레젠테이션이 더 훌륭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프레젠테이션을 다시 듣고싶지는 않습니다그것은 그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프레젠터의 프레젠테이션 스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왜냐하면 보통 그 사람이 하는

다른 프레젠테이션도 재미가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학부에 다닐때, 영어예배를 많이 참석했습니다.  (제가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라 영어예배에서 찬양을 인도했기 때문인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찬양 중간중간에 영어로 말도 많이한거 같은데...  정말 참 용감했던것 같습니다. ^^)

그때 말씀을 전하시던 에디변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지금은 호주에서 목회하시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http://eddiebyun.blogspot.com/  이 목사님의 설교는 참 늘 재밌고 흥미진진했었습니다한번 시간이 되시면 위에 링크에 가셔서 설교를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에디변 목사님의 설교는 결코 짧지는 않습니다그런데 에디변 목사님 설교의 특징은 제스처와 눈빛, 재밌는 예화와 다양한 멀티미디어의 활용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설교후에도 목사님의 메세지가 머리속에 영상으로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나면 에디변 목사님의 설교의 포인트가 늘 마음에 남아 교회를 나서는 발걸음을 따라오곤 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야 어떤 목사님의 통해서 선포되던지간에 그 본질은 동일하고 힘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하는 메세지만큼이나 그 전달방법과 형식에도 신경과 시간을 쓴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성도들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설교자체를 준비하시는 시간의 십분의 일만큼이라도 그 전달방식에 신경을 쓴다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설교가 선포될거라는 생각입니다.

 

 

 

 

3. 너무 길어요

 

예배가 길면 졸립니다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에 충만해서 예배를 드릴때는 2-3시간의 예배도 한순간 같이 지나간다고 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비단 예배 뿐만 아니라 뭐든지 길면 졸립니다길면 짤리고, 길면 지루합니다.

길게 이야기 하는 경우일수록 그 요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주제가 분명할수록 그 주제를 부가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제가 흐릿하거나 확실하지 않을 경우 부가적으로 설명할 필요성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길이가 길어지고... 더욱 그 논지가 흐려지지요.

정확히 무엇을 안다라는 것은 그것을 한두문장으로 이야기하거나 쓸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도 정말 단순합니다그래서 힘있고 어디에서나 영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너무 복잡해서 설명하는데 10-20분이 걸린다면 (물론 그렇게 설명할수도 있겠지만)

지금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있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양이 미덕인 사회에서는 그 질이나 주제에 상관없이

어느정도의 길이가 되지 않으면 깊이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는합니다.

 

예전 제 대학은사님 한분은 숙제를 걷은 후에 그것을 선풍기앞에서 날리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에 떨어진 것 (무거운것) A, 그리고 멀리날라간 것을 차례로 B,C,D를 주시고

아주 멀리 날라가면 F를 주셨다고 하더군요.   양으로 학점을 매기셨지요.  ^^

 

저도 그때의 영향으로 꼭 글은 길게 써야 어느정도 같추어진 글이라는 생각을 지금도 잘 지우지 못합니다만, 길게쓰면 결정적으로 안읽습니다안읽히는 긴 글을 쓰느니 짧아도 임팩트있는 글이 좋습니다.

 

 

 

나가면서

 

다음주는 제가 정말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회중예배시의 대표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정말 잘 졸고 지루해하는 것이 바로 대표기도인데요...

왜 내가 이렇게 대표기도에 대해서 지루해하고 졸려할까에 대한 나름 심각한 고민을

가졌던 부분입니다.

짧게 써보려고 저도 많이 노력하는데도.... 역시 짦은 것은 쉽지않은 것 같습니다.




"예배가 너무 졸려요"

'함께잘다니는교회' (1) 예배, 저만 졸린가요?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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