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paulusnam
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다윗의 후손'에 해당되는 글 1

  1. 2010.07.22 (12) 예수님도 후레자식이었습니다
2010. 7. 22. 16:23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두번째 04/30/2010

 

 

  함께 잘 다니는 교회 (12)


“예수님도 후레자식이었습니다”
 


  
들어가며
 
후레자식이라는 뜻은 사전에서 살펴보면, "배운 데 없이 제풀로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입니다.
 
후레자식이란 뜻은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홀의 자식'에서 왔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엄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버릇이 없는 아이라고 상스럽게 낮추어 부르던 말이라고 합니다. 두번째 설은, ‘호로자식’ 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때의 호로는 중국 북방의 이민족의 흉노(凶奴)를 일컫는 '호로(胡虜)'를 가리킨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오랑캐의 자식이라는 뜻으로 볼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로 싸울때 이 ‘후레자식’ 이라는 말을 쓸때는 전자의 뜻인, ‘아비없이 자라서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는 뜻으로 주로 받아들여 집니다. 일반적으로 아비가 없이 자라면, 엄한 아비가 없기에 예의와 버릇이 없는 사람으로 흔히 간주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후례자식?
 
이렇게 ‘아비없이 자라서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는 뜻으로 후레자식이라는 욕이 쓰인다면, 예수님도 후레자식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서, ‘어라, 예수님에게 욕을 하는 바로 니가 후레자식이구나!’ 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예수님에게 욕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예수님은 본래 아비가 없었습니다. 물론 요셉이라는 아버지가 예수님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의 핏줄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잘 알고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아비없이 나온 후레자식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이들과 예수님과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씨가 다른 형제인 것이죠.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낳아준 아비가 없었습니다. 길러준 아버지 요셉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낳아준 핏줄의 아버지는 없습니다. 물론 좀 융통성있게 하나님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말할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니기에 혈족의 아버지 (인간으로서의)라고는 말하기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은 저에게 오히려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보통 거룩한 핏줄에서 태어나 여렵고 힘든 성장시절을 거쳐 다시 그 거룩한 핏줄이 확인되는 세상에서의 성공이 확인되는 영웅신화와 달리, 예수님은 별 볼일 없이 태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저에게는 그래서 위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통계적’ 으로
 
그런데 이런 아비없는 우리에게 ‘후레자식’이라는 욕이 생기게 된 것은 보통 아비없이 자란 아이들이 정말로 예의없고 버릇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버지가 없어서 ‘후레자식’이라는 욕을 그 아이들이게 함부로 하는 경우이기도 하지만, 보통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비뚤어진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사는 우리가 흑인들에게 하는 욕인 “깜뚱이 새끼들” 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보통 흑인출신으로 편모하에서 자라 교육을 받지못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결국에는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는 그러한 흑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흑인들에게 무슨 일을 당하면 ‘깜뚱이 새끼들!’ 이라고 하면서 ‘그 놈들은 본래 그래’, ‘그냥 피하는 게 낫다’ 라고 합니다. 그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보통 그러한 경우가 많고, 저 또한 그러한 흑인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후레자식’ 혹은 ‘깜뚱이 새끼들’ 하는 말은 근거없는 말이 아닙니다. 통계적으로 열에 아홉은 그런 경우가 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가 쌓이고 쌓여서 이제는 아비없이 자란 사람들이나 고아를 보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을거라 생각하는 선입견이 있게 되고, 조금만 옷차림이 거친(?) 흑인들을 보면 우리는 웬지 무섭고 피하려고 합니다. 통계적으로 어느정도, 아니 거의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결손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범죄자가 되는 확률이 많은 것은 학문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기도 하며, 흑인들이 가장 교육을 덜 받고, 각종 범죄에 연루된 것이 인구대비로 가장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단 한 사람 때문이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비없이 자랗거나 옷차림이 거친 흑인들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선입견을 대하면 안됩니다. 왜 그럴까요? 통계적으로 열에 아홉, 혹은 백에 아흔아옵은 그러한데 왜 그러한 통계를 무시하고 그러면 안될까요? 그것은 열에 하나, 혹은 백에 하나로 통계에 잡히지 않는 한 사람 때문에 그렇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좋은 학교를 좋은 선생님밑에서 좋은 사람들과 지낸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될 확률이 월등할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거의 진리에 가깝습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래도 최소한 예일, 하버드, 조지타운… 뭐 이런 학교들 출신이며, 다들 뼈대있는 정치가 집안 출신입니다. 성공한 기업가나 존경받는 사회인사들도 보통 보면 다 좋은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좋은 가정에서 잘 자란 사람들이 대다수 입니다. ‘통계적’ 으로 거의 그렇습니다. 반대로 나쁜 가문에서 나쁜 학교를 다니고 (혹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 자란 사람은 보통 나쁜 사람이 됩니다. 열에 아홉이 아니라 백에 아흔아홉은 될것입니다. 이러한 통계는 세월을 통해서 거의 사실에 근접한 진리가 됩니다. 
 
그런데 그 열에 하나, 혹은 백에 하나에 해당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어진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애를 쓰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출발선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선입견과 이러한 열에 아홉에 의한 통계입니다. ‘너는 배경이 이러니 천하고 나쁜 사람이 될것이다’ ‘너 같이 배경도 없이 비천한 놈이 어딜 감히’ 라는 바로 시작하기도 전에 좌절하게 되는 그 사람들입니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정말 하나님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하나님을 찾고 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통계로 잡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아무런 빽도 절도 없이 오직 하나님으로만 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잘 알려지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역할들을 해왔고 하고있습니다. 자신들이 받았던 불공평과 학대를 조금이나마 없애고자 노력하고 그러한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소설 [장발장]에서 미리엘신부는 자신을 배신하고 은그릇과 은촛대를 훔쳤던 장발장을 사랑으로 덮고 용서합니다. 만약 그때 미리엘 신부가 장발장을 그래도 경찰에 넘겼더라면, 아마도 장발장은 그 통계대로 열에 아홉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리엘신부의 사랑과 선입견없는 시선으로 그는 열에 하나, 통계에서는 outlier (아웃라이어: 정상이 아닌 극단치의 통계값)가 된 것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제 주변에는 다들 좋은 백그라운드와 돈많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가문출신의 성공한 분들이 참 많이들 계십니다. 아마도 그분들의 자녀들은 그 부모처럼 또 그렇게 좋은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성공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에게 위로를 받거나, 닮고 싶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런데 그 열에 하나, 어쩌면 백에 하나의 그 한 사람이 그 백그라운드가 없다고 혹은 좋은 가문 출신이 아니라고 받게되는 편견과 불이익을 받는 그 한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후레자식’으로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한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 바로 그 이유 한가지만 으로도 예수님이라면 기꺼이 ‘후레자식’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통계에 따라 백에 아흔아옵, 혹은 천에 구백구십구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뭐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백에 하나는 무시할 만한 수치이고, 실제로 거의 그러하니까요. 그러나 그 만에 하나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시선을 한번 가져보는 연습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을 평가하고 논하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배경과 집안, 재물과 학력으로 미리 제단하고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바로 보는 그 시선, 바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바라봐주는 사랑과 격려의 시선을… 우리도 한번 가져보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받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닮아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예수님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자체를 보기보다는 늘 그 사람의 배경을 보기 좋아합니다. 누구의 자식이며, 어느 학교를 나왔으며, 고향은 어디며, 집안에 재산이 어느정도 있으며 를 늘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대강을 알고나면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끝납니다. ‘그 사람은 그 집안과 학력과 재산과 부모를 토대로 계산하건대 이 정도의 사람이다’ 라고 제단하고 끝냅니다. 세상은 늘 이렇습니다. 그 사람 자체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디살고, 무엇을 타고 다니고, 누구의 자식이고, 몇평짜리 집에살며, 어디에서 배우고… 이런 것으로 늘 평가합니다. 그래서 빽도 절도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절망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말씀을 나누실때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 문제 삼은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3장 54-57절)
 
사람들은 예수님이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고 특별히 내세울것 없는 백그라운드가 없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을 배쳑합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괘씸합니다. 배운 것도 없고, 재산도 없고, 직분도 없고, 뭐 신학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나이도 서른밖에 안되고, 뭐 내세울것도 없는 목수 주제에… 감히 어디서 나대는 것인지 괘씸할 나름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후레자식’ 인것을 알고나면 아마도 그 배척은 절정에 이르렀겠지요. ‘어디서 근본도 없는 놈이 와서 감히 설쳐’ 하고 말입니다. 사람들의 분노는 바로 이것입니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아무런 빽도없이 어디서 감히…’ 그런데… 성령으로 난 사람, 통계를 넘어 나타난 사람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한복음 3장 8절)
 
 
 
예수님도 빽도 절도 없으셨습니다.
 
배운것도 없고, 나이도 어리고, 재산도 없고, 집안도 별로고, 사회적 지위도 없고.. 다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으로 제자 삼으신 적 없고,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사람 평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열에 하나, 아니 백에 하나라도… 그 중심만을 봐주시는 분이십니다.   ‘후레자식’도 좋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따르면 됩니다. 다만 그 한 사람을 가로막는 바리새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만은 안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장발장에 나왔던 미리엘 신부처럼, 사람을 믿어주고, 속임을 당해도 또 믿어주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바라보기를 소원합니다. 그 한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심어주시기 위해서 바로 예수님이 ‘후레자식’으로 오셨습니다.  
 
안그래도 아비없이 자라 서럽고 힘들고 원통한 그 한 사람의 눈물 씻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기꺼이 ‘후레자식’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 한사람… 통계적으로 비뚤고 나쁘게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후레자식이 되었습니다. 그 후레자식이 바로 세상을 구원한 메시야,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 하나님이 되신 예수입니다. 누구 후레자식을 감히 욕할 것입니까? 누가 감히 후레자식이라고 함부로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할 것입니까? 빽도 없고, 재산도 없고, 집안도 별로고, 나이도 어리다고 무시한다면, 먼저 예수님께 손가락질 하시고 다시 오십시오. 예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셨으니까요.
 
 
 
나가면서
 
이글을 통해, 저는 다니고 있던 교회에서 예수님께 욕을 하고 성경을 거스렀다고 이단취급을 받았습니다. 제가 과연 예수님께 욕을 하려는 생각과 의도였는지는 글을 읽고 다시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하는 바램이었지만 그분들께는 빽도 절도 없는 저 역시 후레자식 이었던 것 같습니다. 


posted by paulusnam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