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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다니는 교회...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해보는 함께 잘 다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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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해당되는 글 2

  1. 2011.05.01 (4) 강남 복음주의자1
  2. 2010.07.22 (11) 내가 왕년에는...

다시함께 잘 다니는 교회 (4) 강남 복음주의자


                                                                                                                                                                                                                                                  April 30, 2011 남상곤

 

 

 

 

 

들어가며

 

지난번 꼭지인 막장의 사람들에 대한 호응이 예상외로 뜨거워서 놀랐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염려와 걱정을 해주셨고,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 라는 질문도 많이 해주셨던 것 같습니다.  본문보다 별책부록이 더 주목을 받았나 봅니다.  결론적으로 그 글의 주제는 특정 막장의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막장의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어야 할까? 하는 저의 개인적인 고민을 나누었었습니다.  나중에 특정 막장의 사람에 대한 일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눌 기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중이고, 제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최선의 해답이 아닐 수도 있기에 많은 주변의 분들의 생각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많은 위로와 격려해주신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강남 좌파


최근 강남 좌파라는 말이 세간에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하게 언급하기에 아직 무엇이다 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제가 이해한 바로는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남에 살고있는 (현재에 어느정도 경제적인 기반을 가지고 성공한) 지식인들을 일컫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 ‘강남좌파라는 단어가 전통적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데, 이 단어가 명칭되는 사회적 실체가 분명한 상황이기에 더욱 주목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이 조어는 세분화 되어, ‘분당 우파등으로 파생되기도 하고 아직 완성된 조어는 아닙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두 단어가 전통적으로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데, 요즘 같이 붙어서 쓰이는 새로운 용어 라고는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남 복음주의자

 

이 신조어가 만들어져서 유통되기 전부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강남의 대형교회들을 다니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강남 복음주의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서투른 조어같지만, 과연 강남의 성공한몇몇 대형교회에 다니는 복음주의자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하여, 강남 복음주의자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 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으로 조금씩 확장되었었습니다.   물론 복음주의자에 대한 정의도 쉽지 않은 데, ‘강남 복음주의자라는 말은 강남 좌파의 조어와 마찬가지로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인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반드시지역적으로 강남을 호칭하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이른바 중산층 이상 교양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대형교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러한 대형교회들이 주로 강남에 많이 있기는 합니다.  

 

 

 

 

요즘 우리 강남에서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처음 사람을 만나게 되면, 조금씩 서로를 소개하는 대화로, “한국서 어디에서 사셨어요?”  혹은 한국에서 어느 교회에 다니다가 오셨어요?” 하는 질문을 흔히 들었습니다.  저는 저의 아버님이 개척목회를 하시는 조그마한 교회를 다니다 왔다고 말하고, 제가 결혼하고 신혼생활을 하던 진짜 강남(? 금천구) 혹은 용인(본가)에서 왔다고 답하곤 했습니다.  그러면 그 질문을 했던 분들이 저에게 경계감을 쉽게 푸시곤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지방에 있는 대학을 나온 것 까지 아시면, 갑자기 말투까지 놓으시는 경우까지 있어 좀 당황스러웠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에피소드는 2년전 즈음에 있었습니다.  미주의 한 한인교회에서 만났던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그 목사님께서 자신이 강남에서 부목회를 하다가 왔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셨던 것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강남의 한 건실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재직을 했지만 그것을 내려놓고 지금 이곳에서 목회하시는 것을 내려놓음처럼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은근히 다시 강남에 가서 목회하시는 비전을 비추시기도 하셨습니다.  대화가 조금 진행되다가 그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우리 강남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에 눈치가 없던 저는 ! 강남이라는 곳에서 살고, 교회를 다니고, 목회를 하는 것이 이 정도로 자랑 할 만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모님께서는 강남에서는 지금 무엇이 유행이고, 어떠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자세한 나눔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 목사님과 사모님이 강남에서 사시면서 부목회를 하셨던 기간이 2-3년정도라고 들었습니다.  도대체 강남이 무엇이기에 2-3년의 거주기간이 우리 강남이 되는지 참 신기했습니다.    

 

 

강남 대형교회에서는?

 

강남의 대형교회들의 특징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은 쉽지않는 일일 것입니다 어리석지만 거칠게 묶어보면,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보통 교회의 설교나 행사 등이 강남의 중산층 들에게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강남에서 산다는 것은, 어느정도 경제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하기에, 교회에서는 삶을 살아가면서의 성공적인 처세술 등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주로 제시하고, 현재의 삶을 어떻게 잘 유지하면서 균형된 크리스챤으로의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설교를 통해서 강조한다고 합니다.   

 

교회내의 구성원들에게 설교나 교회의 관심이 당연히 집중될 수 밖에 없기에, 강남의 대형교회들은 그 강남 중산층의 현재의 삶을 대변해주고, 또 유지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중산층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좁은 길을, 나눔의 길을, 그리고 낮아지는 길과는 반대의 길을 가야한다는 복음과는 양립하기 쉽지 않은 것 처럼 보입니다. 강남의 대형교회에서 가난한 사람, 장애우, 소외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어느정도 비슷한 평수에, 비슷한 규모의 연봉과 자가용이 맞추어져야  구역모임에서도 말이 통할 수 있고, 증권과 파생상품등의 관심사도 어느정도 비슷해야, 비슷한 모양의 신앙생활을 유지할수 있다고 합니다.  강남에 살지만, 주변과 비슷하지 않은 배경의 친구가 강남의 대형교회생활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도 생활수준과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만이 다닐 수 있는 곳인가 하는 의문이 계속 들게 되었었습니다. 

 

교회안은 흡사 잘 꾸며진 대기업 건물을 들어온 것 같습니다.  목사님들은 하나같이 깔끔하고 잘 생기셨으며 다들 박사에 교수들 이십니다.  설교는 세련된 어조와 적절한 비유,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감동까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카페와 서점, 카페테리아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고, 점심은 쿠폰을 사서 먹습니다.  화장실 남자 소변기 바닥에는 얼음덩어리들이 있습니다.  (이거 왜 두는 건가요?  --;; ) 들리는 말로는 이 화장실을 꾸미는 비용이면 시골의 개척교회 10곳을 후원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모든 공간은 사전 일주일전에 예약을 해야하고, 자신이 봉사하는 영역을 제외하고는 같은 교회의 사람들이지만 서로 모릅니다.  예배를 마치면 빨리 차를 빼러 나가야 합니다.  조금 지체했다가는 주차난 때문에 나가는 데만 한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모두들 깔끔한 옷차림에 웃는 얼굴에 다들 세련되고 멌있습니다.  매주 새로운 사람이 몇십명도 넘지만 매주 안나오는 사람도 그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강남 중산층이면 문제가 있나요?

 

아니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강남에서 살고, 강남에 있는 대형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복음주의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강남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문제가 있습니까?  세련되고 갈끔한 신앙생활, 교회생활 하는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강남에 살면 안되나요?  일부로 이사라도 가야하는 건가요?  아니면 교회를 일부러 강북으로 다녀야 하나요?  대형교회를 다니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겁니까?”

 

제 대답은 아닙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입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합니다.  교회다니는 사람이 돈 많이 버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되면 신앙생활 하는데 문제가 생깁니까?  내가 내 능력껏 열심히 일해서 받는 월급의 액수가 많다고 문제가 되나요?  일부러 회사에 이야기해서 월급을 적게 달라고 해야 합니까?  어떤 목사님도 이야기 합니다. “내가 설교를 잘하고 책을 잘 써서 교회로부터 많은 월급과 인세를 받습니다.  그만큼 노력하고 기도하고 준비해서 설교하고 목회하는데, 성도가 3천명, 3만명인데그 정도 액수 받는 것이 문제라도 됩니까?”

 

제 대답은 아닙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입니다.

 

 

나는 강남에 살고, 강남의 대형교회에 다닙니다.  아이패드도 있고, 아이폰도 씁니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교외에 나들이도 가기도 하고, 차도 두대나 굴리고 있습니다.  교양있는 지식을 가지려고 최근에는 샌델의 정의도 읽고 보았고,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꾸준히 시사와 경제지식을 챙깁니다.  하고싶은 것, 갖고 싶은것을 마음대로 할수는 없지만 저축하면서 가끔은 지르기도 합니다.  노후를 위한 재테크에도 관심이 많고 워렌버핏 처럼 가치주에 장기투자하는 것에 관심도 있습니다.  현재 제일 잘 나가는 신앙서적도 놓치지않고 읽고 있으며, 컴패션과 월드비전 후원도 매달 하고 있고, 석달에 한번씩 고아원과 양로원에 봉사도 갑니다.  제가 문제가 있나요?

 

 

제 대답은 아닙니다.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입니다.

 

 

 


저도 한때

 

저는 강남에서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강남 재건축의 상징인 은마아파트에서 유치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 20년 가까이 살았었고, 그곳에서 초중고를 졸업했습니다.  강남에서 계속 교회생활을 했으며, 아버님이 뒤늦게 목회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지역적으로는 강남이 아니지만 심정적으로는 강남의 대형교회에 나름 열심히 다니기도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때의 대치동은 지금의 대치동과는 많이 다릅니다.  저는 양재천으로 친구들과 올챙이와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있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은마아파트 놀이터에서 형들을 쫓아다니며 박쥐를 보고 도망쳤던 기억, 야구하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님이 조기정년을 하시고 강남을 떠나 용인 양지로 이사가게 된 뒤로, 강남은 더 이상 제 삶의 터전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우연히 가보게 된 대치동은 학원간판이 즐비하고, 초고층 아파트들이 새로 들어선 조금은 낯선 동네가 되어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유난히 ‘8학군이라 하여 교육열이 높은 동네이기는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삼수와 사수 생활을 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강남을 벗어나 노량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노량진은 한강 이남에 있는 지역이지만 당시 강남구를 제외하고는 강남이라고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강남구를 제외하고는 다 강북이라고 여겨지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새로 접하게 된 노량진에서의 생활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저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는 동네이기도 했고, 그곳은 언제나 흥미진진했습니다.  물론 각종 고시와 입시로 인한 수험생들의 어두음이 짙게 내리깔린 동네이기도 했지만 저는 그 수많은 노점상들과 만화방과 오락실, 활기찬 육교가 너무나 좋았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한때 속상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노량진에 와서 수많은 입시생, 고시생들을 바라보면서 힘을 얻어가기도 했었습니다. ^^

 

하지만 그 이후, 저는 직감적으로 제 평생 다시는 강남에 들어와 살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이유는 별것 없습니다.  강남에서 살수있는 아파트 전세값을 마련할 경제적 능력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

 

 

 

 

아닙니다 그런데 미안합니다

 

 

서론만 길었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강남 좌파의 아이콘으로 많이 언급되는 서울대학교 법대의 조국교수의 페이스북의 한 글귀가 기억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강남 좌파라는 딱지를 굳이 피하지 않겠다라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강남 좌파가 그리 뭐 자랑스럽거나 부끄러운 것도 아닌 것이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저도 조국 교수의 말에 동의합니다.  강남 좌파라고 해서 좌파가 아닌 것도 아니고, 좌파면서 강남에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때 강남에 살았기에 강남 복음주의자였던 저는 제가 강남에서 살면서 복음주의자로 자처했던 것이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그래서 요새는 제가 강남에 살았다고 하거나 고등학교를 어디 나왔다고 잘 말하지 않는 편입니다.   "누구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것이냐?" 라고 물으신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냥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저도 이성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제 과거를 부끄러워 하거나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처럼 감추고 싶습니다.  (경제적으로 다시 강남에 살수도 없겠지만,) 경제적으로 강남에 살 수 있게 되더라도 강남에는 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가지 드는 분명한 생각은

저를 통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아직 정리되지 못한 일개 개인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 때문에 혹시라도 강남에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것이 있다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 개인의 적용과 고민이었습니다.

 

 

 

 

 

읽어볼만한 강남 좌파에 대한 글

 

강남 좌파, 그들은 누구인가? (김호기)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10414144447

 

다가오는 자유주의의 시대  (안병진)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1896.html

 

강남 좌파가 밀려온다 (신기주)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9447

 

강남 좌파 감별법 (최희진 모음)

http://media.khan.kr/789

 

강남 좌파세상 밖으로 걸어나오다 (김은남·고재)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951

 

 

posted by paulusnam
2010. 7. 22. 16:22 함께 잘다니는 교회

함께잘다니는 교회 - 열한번째 04/24/2010


                                           남상곤



내가 왕년에는…”





들어가며

 

최근에 많은 분들에게 분이 넘친 격려와 칭찬을 받으면서, 처음에 기도하고 고민하였던 초심에 대한 생각을 더욱 많이 하게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외침과 논의가 무엇을 바꾸거나 이룰려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더욱 확인시켜주시며, 더욱 우리 교회 성도분들과 다양한 소재를 하나님안에서 고민하고 논의하고 기도해야 겠다는 생각을 굳건게하시는 것 같습니다. 

 

"Quo Vadis Domine"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너는 나를 따르라! (Follow me!)

 

 

 

 

 

초등학교때 반장안해본 사람이 어딨어?

 

사람들과 모여서 어린시절을 이야기 하게되면 언제나 듣게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소싯적에 반장 안 해본 사람이 어딨어?’ 혹은초등학교때 공부 못한 사람이 어딨어?’ 입니다.  그러한 이야기가 깊어가다 보면, 이제내가 왕년에…’ 의 레파토리가 시작됩니다.  정말 왕년에는 다들 대단하십니다.  행군나가서 호랑이를 만났다는 둥, 철책선에서 근무할때 북한군 초병과 말뚝박기하고 놀았다는 둥, 수많은 여자(혹은 남자)가 나를 뒤쫓아 다녔다는 둥, 한 공부했다는 둥, 엄청난 사업으로 어마어마하게 잘 나갔다는 둥  그러한 이야기 듣고 있으면참 대단한 사람들이 모여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왕년에 특별한 게 없었던 저로서는과연  정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초등학교때 반장 안해본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도 한때, 젊었을 적에 그러했었다!

 

 

재미있게도 이야기가 깊어질 수록내가 왕년에는…’ 을 강조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왕년에는 잘 나갔는데, 결국 지금은 잘 안나간다입니다.  제가 아는 한 형님은 서울대를 나오셨습니다. 그것도 전국에서 손꼽는 등수로 입학하셨습니다.  그 형님은 그 때가 그분의 전성기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왕년에는이란 말은 그 형님에게는 서울대 입학하실 때 인가 봅니다.  그때가 정확히 기억은 못하겠는데 아마도 1989년인가 그런데 그 형님의 인생은 그 1989년에 정확히 멈춰 있습니다.  비록 아직도 직장도 못 가져 보시고 집에서 눈치 보며 대박을 여전히 꿈꾸시지만 서울대를 나오신 형님이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지금 잘 나가시는 분들은 굳이왕년을 들먹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그 빛나는 순간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좀 잘 안되는 분들이 늘 강조하시는 것이 바로내가 왕년에는…’ 레파토리 입니다.  그래서 그 레파토리가 시작될때는 조금 서글퍼 집니다.  그렇게 왕년에 화려하셨던 분들이 왜 지금은 저렇게 초라해지셨는지 궁금도 하고, 그 반복되는 레파토리에 조금씩 싫증이 나기도 하면서과연 정말일까?’ 하는 의심까지 들기도 합니다.  더 심해지면, 그분들은 무슨 이야기만 나오면 자신이 젊었을때 겪어보고 고민해본 문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모른다는 둥, 결론은 버킹검 이라는 둥 의 이야기를 늘어놓으십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만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새벽기도, 금식기도 안해본 사람이 어딨어?

 

이 이야기가 교회안에서 시작하게 되면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40일 새벽기도, 40일 금식기도  (혹은 20, 10) 안해 본 사람이 없고, 다들 신앙적으로 잘 나가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날마다 새벽을 깨우고, 24시간을 성령에 충만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보며 그렇게 하나님과 가깝게 지냈다는 고백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작정기도 끝에 응답을 얻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니님께서 도와주셨고, 역사해주셨고, 지켜주시고 함께해 주셨다고 합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저도 신앙적으로 잘 나간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몸매(?)에 물만 마시며 일주일 금식기도를 해본 적도 있는 것 같고, 성경말씀이 꿀송이 처럼 달다라는 말을 경험하고 성경읽기에 온통 시간을 뺏겨본 적도 있는 것도 같고,  기도한답시고 산에 올라가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도 외쳐도 보았고, 40일 새벽기도에 개근해서 공로패(?) 같은 것도 받아 본 것 같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그때의 훈장인 너덜너덜 해진 성경과 공로패를 보면 저도 모르게 뿌듯해 졌던 것 같습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나도 왕년에는 정말 성령충만했었지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단 저 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왕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십니까?

 

이러한 신앙의왕년이 있는 우리는, 우리안에 지체가 하니님께 받은 은혜나 말씀을 나눌때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마음 잘 알지,’ ‘그때가 좋을 때지,’ ‘나도 겪어봤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한바탕 나도왕년에는레파토리가 시작됩니다.  그러면서나도 한때, 젊었을 적에 그러했었다라는 분에넘은 훈수를 두기 시작하면서 무리수가 시작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들의왕년에는 지금의 초라함이 묻어나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현실과 타협하고, 바리새인같은 율법주의자가 되어 섵불리 남을 판단하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왕년을 회복하지 못하고 무리수를 두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를 속이는 심각한 상황이 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나누는 지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현재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겸손히 기도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치유가 어려운 거짓은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 어떠한 사람인지를 모르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현재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현실에 안주하고 타협해도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는지 모르는 위선적인 바리새인의 모습만 남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외치고 나누는 자가 눈에 가시같이 보이게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잊고있었던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 지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사도행전 7 54)

 

바로 신앙에서의왕년만 강조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지금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믿음생활에서의 경험은 지금 내가 혹은 우리 공동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이고 나침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그리고 모세나 다윗의 하나님을 강조했던 것은, 자신들의 선조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을때, 어떠한 일들을 경험했는지를 상기하고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선조들의 믿음의 경험은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할수 있는 바로미터이었던 것입니다.  ! 그 시절 모세의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셨었지.  그때 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나아가면 모세와 유대백성들에게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역사하시겠구나!’ 하고 나아가는 믿음의 선진들의 교훈인 것입니다. 

 

내가 왕년에는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도 그왕년에 때에 갖혀 한발자욱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내가 왕년에 겪었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때에 그렇게 역사하셨으니 지금 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공의를 외치고 나아가면 그때처럼 역사하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때 필요한 것이 바로왕년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왕년의 하나님이 바로지금의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되시고 그 모세의 하나님이 바로 나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서 남겨준 수많은 선진들의 이야기들은 바로이 왕년의 하나님을 왕년에 갇혀두지 말고 현재 나의,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라!’ 라는 것입니다. 

 

'내가 왕년에는'은 결코 지금 내가 하나님앞에 바로 서 있다라는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큰 일들을 감당했던 사람들이 지금 바로 서 있지 않은 모습들을 성경에서도, 역사에서도 그리고 지금 교회에서도 수없이 목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왕년에는'는 훈장처럼 고이고이 모셔두는 전가의 보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었던 그 '왕년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때의 마음과 기도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무릎을 끓고 그 하나님을 지금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수없이 나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면 그냥 역사의 교훈으로 끝나지만,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바로 나와 우리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나아갈때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지금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글을 맺으며

 

 

우리의 하나님은 옛날의 그왕년의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그 왕년에서 나오셔서 지금 여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그 왕년에서 하나님을 가두고 스스로 왕년에서 멈추어 사실겁니까아니면 바로 지금 여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것입니까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왕년에 젖어내가 소싯적에 젊었을 적에 그러했었지에 영원히 멈추어 사실겁니까선택은 우리의 몫이지만,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과거의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이를 거울삼아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때 요단강을 갈랐던 그 하나님은 바로 지금 나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할렐루야!

 

 

"나도 왕년에는…"
함께잘다니는 교회(9) 왕년의 하나님, 지금은?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507 


posted by paulus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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